몽골 CURIOUS 48
신현덕 지음 / 휘슬러 / 2005년 11월
절판


몽골은 '세상의 중심'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4쪽

몽골인은 광활한 대지를 발판으로 굳세게 살아간다. 몽골은 유라시아 대륙 중앙에 위치한 육지 속에 고립된 국가이다. 156만 제곱 킬로미터의 면적으로 한반도보다 7배 이상 넓은 국토를 자랑하지만, 인구는 270만 명(2005년 유엔 통계)으로 고작 대한민국의 20분의 1정도이다. 수도 울란바토르의 역사는 2005년 현재 366주년을 넘었으나 아직도 반 이상의 사람들이 13세기 생활양식을 고집하며 천막집인 게르에서 살고 있다.-12쪽

희귀한 식물이 많아 고비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해발 2000미터에 가까운 이곳은 국제기관들이 보호하는 야생동물의 보고이기도 하다.

고비는 중국과의 자연적인 국경선이다. 중국 한무제는 후손들에게 몽골을 침략하려면 군량조달이 어려우니 득이 없는 전쟁보다는 화해를 택하라고 지시했다. 고비를 지나 몽골까지 군량을 운반하려면 1석의 운반비가 18석이나 되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ㅣ-16쪽

연교차가 70도가 넘는 몽골 전역은 그만큼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이다. 그나마 연교차가 적은 지역이 울란바토르였다.-18쪽

우리에게 생각하기도 싫은 1960년대의 보릿고개가 있었던 것처럼 몽골의 시골에는 지금도 넘기 힘든 젖고개가 남아있다. 젖고개는 짐승들이 풀을 뜯어먹고 젖을 내는 5월말부터 6월초까지 계속된다. 양을 잡아봐야 겨울을 넘기느라 뼈만 앙상하게 남아 고기를 얻기도 어렵다. 더구나 갈무리 해둔 감자, 양배추 등의 야채는 벌써 바닥이 났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절박한 상황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이때가 되면 징기스칸 군대가 세계를 제패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전통 비상식량 보르츠(고깃가루) 주머니가 열린다. 보르츠가 구황을 한다고는 하지만 많은 가정에서는 굶기를 밥먹듯 한다. -22쪽

몽골의 여름은 노루꼬리처럼 짧지만 알찬 수확의 계절이다. 우리나라는 가을에 수확하는 전형적인 농업경제이지만 몽골은 여름 한철 가축을 이용해 수확하는 유목경제다.

농업이 태양의 에너지를 식물의 형태로 저장한다면, 유목은 동물의 형태로 저장하는 셈이다.-23쪽

겨울대비용 연료로 소나 말 등 가축의 똥을 가능한 한 많이 모아 놓는다. 여름내 주워 말린 똥을 높은 둑처럼 쌓아 바람막이 벽으로도 사용한다. 우리가 가을철 나뭇짐으로 겨울 땔감을 비축했다면, 몽골에서는 가축 똥이 이를 대신하는 셈이다. 마른 똥을 주워오는 것은 여성들이 할 일이다.-29쪽

양이 잠자는 바닥이 어는 추위(12월 31일부터 시작되어 다음해 1월 8일까지 계속된다.) 몽골인은 양을 우리에 넣어 재우지 않는다. 그만큼 양은 추위를 타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의 체온으로도 녹이지 못할 추위라 양이 잠자는 바닥이 얼 정도라는 것이다. -32쪽

유럽에서는 지금도 아이들이 울면 호랑이가 아니라 '훈이 온다'고 겁을 주어 울음을 그치게 한다.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훈이라는데 도대체 훈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훈족이라는 말을 쓰지만, 나는 몽골에 가서야 그 말이 '사람'이라는 뜻의 몽골어임을 알았다. 또한 영어의 인간(human)이란 단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즉 이 세상의 인간은 몽골에서 시작된 셈이다.
사람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고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정말 몽골인보다 무서운 사람들은 없었다. 한때는 유럽에 코란이냐 칼이냐를 선택하게 했던 페르시아인이 가장 두려운 존재였지만, 그를 뛰어 넘는 것이 몽골인이라는 것이다. 몽골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아시아인의 긍지를 세계에 떨쳤다. -35쪽

몽골 국민 270만, 내몽고의 300만, 브리야트의 300만, 중국 신장 지방의 24만 등 전 세계 약 1000만 명 이상의 몽골족들은 칭기즈칸의 묘가 발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위대한 신 이상으로 추앙받는 칭기즈칸의 실체가 외국인들 손으로 까발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37쪽

몽골인은 1990년 자유화 당시 울란바토르 시에 있던 스탈린, 흐루시초프 등 옛 소련 지도자의 모든 동상을 파괴했다. 몽골의 것이 아닌 치욕의 러시아 역사라고 분노하면서 때려 부순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레닌동상만은 울란바토르 중심 정부 청사 앞 광장 오른쪽에 그대로 남아 있다. 레닌의 피 속에 몽골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몽골인의 동정을 받았던 것이다. -37쪽

몽골인은 최고라는 의미가 없는 곳에는 칭기즈칸의 이름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칭기즈칸 보드카, 칭기즈칸 호텔 등이 좋은 예다. 이처럼 몽골인 마음 속에는 칭기즈칸이 살아 있는 영웅처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돈을 벌거나 여업을 번창시키기 위한 허튼 수작으로 칭기즈칸이란 명칭을 사용하면 손가락질을 당하기 십상이며, 심할 경우 테러도 감수해야 한다.-39쪽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했을 당시 몽골에는 약 9만 5000가구가 살고 있었다. 대가족 제도임을 감안하더라도 몽골인구는 100만 명 정도였으며 병사는 10만 명을 넘지 않았다. 칭기즈칸의 전략은 현대전에도 적용될 만큼 기발했다. 그는 우선 한 집에서 병사 한 명씩만을 차출해 군대를 구성했다. 그래서 군대 조직 이름도 십호, 백호, 등의 집 개념을 사용해 전 국민이 병사라는 의식을 갖도록 유도했다. 병역의 의무보다 한발 앞선 국방의 의무를 전 국민에게 인식시키는 선진 방위 개념을 도입했던 것이었다.

칭기즈칸은 이 병사들에게 세계 최초로 근대적인 군 제도를 적용했다. 그는 군대를 10진법에 의한 단위로 조직하고 명령체계를 일원화했다. 10명을 1개 단위로 설정해 지휘자를 임명했던 것이다. 이 제도의 영향을 받은 청나라는 8기병 제도를 통해 원나라에 이어 또 다른 유목 국가를 세웠다. -39쪽

칭기즈칸은 진격하면서 300~400킬로미터 후방으로 가족들을 불러들였다. 정착 민족에게서 가족을 이동시키는 것은 삶의 터전 즉 병참기지를 포기하는 것이었지만, 유목민들에게는 평상시의 생활과 다름 없었다. 몽골군의 군량은 가족들이 후방에서 가축의 젖을 짜고 고기를 말려 보내는 것으로 완벽하게 해결됐다.
장기전에 대비한 비축식량도 양을 잡아 말린 고기가루 보르츠로 간단하게 해결했다. 보르츠는 가볍고 부피가 작아 군용식량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양 한 마리로 만든 보르츠는 3~4킬로그램에 불과했으며, 두 스푼 가량을 더운 물에 불려 마시면 요기하는 데 충분했다.

몽골 병사들은 1인당 8~9마리의 말을 몰고 진격했다. 병사가 100여 명이면 말이 800~900마리가 되어 적들은 몽골병사들에게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1시간쯤 달리다 말이 지치면 다른 말로 바꿔 탔다. 이렇게 해 진격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던 것이다. -40쪽

일반 병사들이 칭기즈칸에게도 '너'라고 부를 만큼 형제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상하관계는 엄격하되 친숙함을 유지했던 것이다. 또 병사들이 죽더라도 가족들의 생활은 걱정 없도록 준비해 주었다.

현대에도 이런 전통은 그대로 전해져 몽골에는 상류층이라는 개념이 전무하다. 다른 공산국가들에는 지배계층을 위한 비밀 오락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몽골에는 전혀 없었다. 1980년대부터 옛 소련과 루마니아 등 40여 개국이 자유화 과정에서 엄청난 피를 흘렸으나 몽골에서는 이처럼 전통적인 민족의 결집력 덕분에 유혈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또한 칭기즈칸은 항복한 군사들과 정복지의 국민을 자국민과 동일하게 대우했다. 적군도 항복하면 몽골군에 편입시켜 응분의 직책과 계급을 부여하는 동화정책을 사용했다. 그러나 지휘자로는 기용하지 않았다.-42쪽

역사상 이라크를 침공한 외세는 몽골군와 미국뿐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몽골군은 단숨에 이라크 병사를 무력화시키고 점령에 성공했지만, 미국은 장기간에 걸쳐 전쟁을 해야만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는 점이다. -42쪽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도 이국적인 문화를 잘못 받아들여 쇠퇴하고 말았다. 대표적인 것으로 라마불교의 도입을 들 수 있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전성기에 몽골인은 한 집에서 한 명의 병사를 배출하는 대신 한 명 이상씩 라마승으로 출가시켰다. 몽골인이 라마승을 많이 배출했던 것은 지식인을 숭상하는 당대의 풍토와 그 당시 지식인이 모두 승려였던 점에 기인한다. 그 결과 병사가 모자라 몽골의 군대제도는 와해됐다. 이후 국방을 외국인 병사에게 맡겼으며, 이 때문에 대제국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한족에게 국가를 고스란히 바치고 만 것이다.
제국이 쇠퇴하기 전 몽골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의 세력을 밖으로 펼쳐나가려고 몸부림쳤다. 그 결과 몽골의 흔적은 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 현재 중국 수도인 북경은 몽골인이 처음 수도로 정했던 곳이다. 덕택에 중국영토가 북쪽으로 확장되는 부수효과를 얻기도 했다. 모스크바도 몽골인이 건설한 뒤 러시아인에게 물려준 것이다. 이란 북부의 이즈파한은 몽골족이 세운 일칸국의 수도였다. 당시 이주한 몽골인 후손들이 현재까지도 남아 몽골어를 사용하고 몽골 문자로 된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44쪽

1921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혁명에 성공한 몽골은 70년 동안 옛 소련의 지배를 받아왔다.

국내 총생산의 30% 이상을 러시아가 무상으로 지원했던 덕분에 몽골인은 자국 경제 상황보다 높은 수준의 경제생활을 해왔었다.

모든 학교는 거의 무상에 가까운 교육을 실시했고, 당에 대한 충성심과 어느 정도의 학습 능력만 있으면 대학 진학 자격이 주어졌다. 최우수 학생으로 선발되면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식 교육을 받을 수도 있었다. 곡물 생산량이 전 국민을 먹여 살리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음에도 배급표만 있으면 언제나 배고프지 않을 만큼의 음식을 확보할 수 있었다.-45쪽

몽골은 1990년 자유화 과정에서 한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아 동구 국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몽골은 민주화와 자본주의를 선택한 뒤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보장제도의 몰락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었다. -48쪽

정확한 수는 매번 바뀌지만, 대체로 몽골인구의 1%가 한국에 불법체류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49쪽

몽골인의 1인당 국민소득은 480달러(세계은행 2005년 통계 기준)에 불과하지만 심리적인 만족감은 여전히 상위국가군에 속한다. 몽골인에게서는 저개발국가에서 흔히 드러나는 지도자의 신격화나 그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식의 극단적인 사고방식은 찾아볼 수 없다.

몽골의 정치체제는 이원집정제로, 대통령은 국방에 관한 결정권과 법률안 거부권만을 지닌다. 실질적인 경제나 치안 등 국내 통치권은 의회에서 선출되는 총리가 가지고 있다.-51쪽

몽골은 21개 종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61쪽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력이 1.0~1.5 정도인데 반해 이들의 시력은 때에 따라 5.0까지도 측정된다고 한다. 푸른 초원에서 적을 발견하기에 적합한 눈이다. 늑대나 여우가 아무리 빨리 달려와도 양떼를 몰고 도망가기에 충분할 정도로 훌륭한 눈이기도 하다. -63쪽

몽골인은 자기 신분증에 종족과 집안을 밝힌다. 인구 대다수가 할흐족인 몽골에서 소수민족임을 밝힌다면 불리하지 않겠느냐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소수민족이라 정부의 보호가 필요하므로 종족을 밝힌다는 것이다.

카자흐족은 중국 신장성에 살다가 1870년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알타이 산맥을 넘어 몽골로 이주했다. 몽골 정부는 1917년 공산혁명 당시 노동력을 확보한다는 명분 아래 카자흐 사람들에게 국적을 주고 몽골국민으로 편입시켰다. 카자흐족은 이주 후에도 자신들의 종교인 이슬람교는 물론 방언 및 관습, 의복, 주거문화 등을 유지해왔다.-64쪽

오이라트는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 흡스골 호수의 타이가지대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알타이산맥 부근에 자리잡았다. 17세기 초에는 그 일부가 러시아의 볼가 강변에 새로이 정착했다. 이들이 세운 나라가 오늘날 러시아 연방 내의 칼무크자치공화국이다.


청나라는 1757년부터 1758년 사이 준가르제국을 정복하여 오이라트족 대부분을 중국 신장성으로 이주시켰으며, 이들이 지금까지도 신장성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다. - 65쪽

몽골리안이라 불리는 몽골 북부지역의 브리야트 몽골인과 중국 내몽고의 몽골인들은 본국의 몽골인보다 훨씬 숫자가 많다. 내몽고에 300만, 브리야트에 300만이 포진해 몽골을 감싸 보호하고 있는 형상이다. -66쪽

몽골반점을 지닌 종족을 언급한다면 에스키모와 아메리카 인디안까지도 몽골인의 범주에 포함된다. 반면 이들은 생활방식이 워낙 달라 모든 동질성을 상실한 상태다.-68쪽

초원의 작은 부족이었던 몽골인들은 종족의 번영과 지속을 위한 방어과정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넓은 국가를 성립할 수 있었다.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종족이 멸망한다는 강박감에서 공격을 최고의 방어책으로 삼아온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제국 건설 과정에서 점령지의 문화나 종교를 인정하는 유화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몽골족이 피해를 당하면 반드시 보복을 하는 강력한 자민족보호주의를 내세웠다.

인구가 많은 주변 국가들로부터 늘 위협을 받아온 몽골인은 아이를 많이 낳아 인구를 증가시켜야 한다고 배워왔다. 지금도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살지 않으면 언제 나라가 송두리째 없어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68쪽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지라 몽골에는 태아숭배사상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아이를 위한다. 덩달아 임산부도 그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는다.




태어난 아이들의 엉덩이에는 푸른 반점이 있다. 이것이 '흐흐 민지' 즉 몽골반점이다. 이 점은 3~4살이 되면 자연스레 없어진다. 몽골족만이 갖는 특징이므로 몽골인은 이 점을 가진 민족을 동계혈족으로 여긴다. 그런 연유로 몽골인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형제 같은 느낌을 갖는다고 말한다. 한국인에게는 특히 우호적이며 모든 면에서 편의를 베풀려고 노력한다.-69쪽

1921년 당시 40만이 채 되지 않았던 몽골 인구는 곧 300만 명에 다다를 전망이다.
현재 몽골인구의 65%가 30세 미만이며, 45.2%가 16세 이하의 어린이들로 구성되어 있다.-70쪽

몽골인은 개를 지저분한 가축으로 여겨 개고기는 먹지도 않는다.-70쪽

몽골인에게는 가문을 나타내는 성씨가 없고 이름만 있다. 물론 몽골인에게도 성이 있었으나 옛 소련의 배후 조종을 받던 당시의 몽골 정부가 공산혁명 이후 성 제도를 폐지했다. 성을 없앤 것은 소련이 몽골족의 기상을 꺾어 놓기 위해 취한 여러 수단 중 하나였다. 소련은 몽골영토의 일부인 브리야트 지방을 자국령에 귀속시키고, 중국이 몽골 남족지방(현재 내몽고)을 접수하는 것을 방치해 몽골인의 근거지를 가급적 척박한 지역으로 한정시켰다. 또한 몽골 가족의 단합을 분열시키기 위해 성 대신 아버지의 이름을 쓰도록 하는 편법을 가르쳤다.-71쪽

몽골에서 매장이 일반화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푸장 또는 조장이라고 불리는 장례법이 전승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후가 건조하여 부패가 되지 않으므로 시체를 들판에 벌려 새와 들짐승이 뜯어먹게 하는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흔히 말안장에 시체를 앉혀 놓고 말을 마을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게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시체가 말에서 덜어지면 그곳에서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잔인한 것 같지만 자연 조건에 실질적으로 순응하는 장례문화였다. -74쪽

몽골인의 가장 특징적인 성격으로는 독립심을 들 수 있다. 그들은 활과 칼, 말 한 마리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다. 자신의 힘과 지혜만으로 세상을 살아왔기에, 그들에게 협동이나 단결이란 말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75쪽

개개인의 독립심이 투철했기 때문에, 몽골인은 지도자가 백성들을 책임지지 못하면 지도자를 심판해 목을 쳤다. 그러므로 몽골의 지도자는 늘 국민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백성에게 보여주려 했다. 반면, 우리 지도자들은 언제나 말만 앞섰지 진정으로 국민과 함께 한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다. 국민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던 몽골 지도자 같은 사람을 고르는 혜안이 우리 국민들에게도 필요한 때이다.-76쪽

몽골인들은 그들만의 풍부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웬만한 사물을 詩로 묘사할 수 있으며, 그들 사이에서는 시를 아는 사람이 가장 환영받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모이면 노랫가락이 퍼지지만 몽골인이 모이면 시가 흘러나온다.-77쪽

모린호르는 말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 마두금으로도 불린다. 모습이나 소리가 우리나라의 해금과 매우 유사하다.

야타크라는 악기는 우리나라의 가야금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음색도 비슷한 편이다. 현을 튕겨서 소리를 내는데, 경쾌한 음률이 실내악으로서 손색없다.-79쪽

없는 사림에도 불구하고 몽골인의 손님 대접은 극진하다. -81쪽

손님과의 안면 유무에 관계 없이 장황한 인사말을 주고 받는데, 인사는 적어도 5분 이상 걸린다.


코담배를 상대방에게 줄 때는 반드시 오른손을 사용해야 한다. 왼손은 불결하다고 생각해 타인과의 접촉을 꺼리기 때문이다. -84쪽

몽골에서는 어른들이 물건을 주면 아랫사람들은 황급하게 소매를 풀어 내리고 두 손을 내밀어 받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맨살을 보이거나 팔뚝을 드러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몽골인이 겉으로는 험악해 보일지 몰라도 예의 면에서는 어느 민족에게도 빠지지 않는다.

몽골인은 또한 외국인들에게 호의적이다. 자연환경이 척박해 외부인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몽골인은 외국인을 외부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이자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선구자로 여겨 반긴다. 그러나 몽골인의 호의적인 태도는 사실 도시지역에 한정된 말이다. 지방을 여행할 때 전통과 예절을 잘 알지 못하면 봉변을 당하기 일쑤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배타적이며 관습을 중시한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잘 몰라서 그렇다는 것을 모든 몽골인은 잘 알고 있기에 크게 걱정할 것은 아니다.-85쪽

손님은 음식을 먹고 포식했다는 표시로 트림을 한다. 그리고는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 10분은 족히 넘을 시간을 할애하여 주인에게 감사와 고마움을 나타낸다.

예부터 잔칫날에 귀한 손님이 오면 몽골인은 말고기를 대접한다는 중국 사신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몽골 학자들은 이 말이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손님에게 새로 잡은 고기를 대접하는 관습에 따라야 했지만, 당시 사신이 방문한 전쟁터에서는 가축을 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가장 구하기 쉬운 말을 잡아 잔칫상을 차렸던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두고 몽골의 풍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중국 사신은 몽골인이 미개하고 무식해 말고기도 먹는다는 투의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말고기는 그저 운송수단으로 사용하다 수명ㄷ이 다하면 잡아 먹을 뿐이다.-86쪽

난로에 물을 붓거나 쓰레기를 넣어서는 안 되며, 불을 쑤시는 것과 난롯불에 발을 쪼이는 것은 금기시 된다. 난로를 타 넘는 것도 삼가야 한다. 난로를 모독하는 모든 행동은 죄악이며 주인을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우유를 땅바닥에 쏟아도 곤란하다. 게르 기둥에 몸을 기대면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인다. 게르 안에서 휘파람을 불면 게르 외부에 있던 불순 세력들이 침입해 온다는 옛말 때문에 몽골인은 이를 몹시 꺼린다.-86쪽

몽골인에게 풀은 생명과 직결된다. 초원의 풀을 이용하기에 따라 젖의 생산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조상대대로 비법이 전수되므로, 그들은 가축에게 포원의 풀을 효과적으로 뜯게 한다. 가능하면 풀을 짧게 듣어먹을 수 있게 가축을 순서대로 몰고 다니는 것이 그 방법이다. 소와 양을 같이 모는 목동은 소 다음 양이 풀을 뜯도록 하기 위해 소가 앞서 가게 몬다. 소는 풀뿌리 근처까지 뜯어먹지 못하므로, 어느 정도 남은 풀을 양은 샅샅이 헤쳐 먹는다. 마찬가지로 낙타와 양을 동시에 유목하는 고비 지방에서는 양을 먼저 뜯긴다. 양은 가시가 있는 거친 풀을 먹지 않기 때문에 거친 풀을 잘 먹는 낙타를 양 뒤에 세우는 것이다. -92쪽

몽골여성들은 빨래에서 해방된다. 칭기즈칸은 그의 법전으로 불리는 <대야사>에서 천이 완전히 해어지기 전까지는 의복을 세탁하는 것을 금하였다. 날씨가 추워 빨래를 하다보면 사람이 다치는 것은 물론 의복이 상하기 쉬워 백성들의 노고를 덜기 위해서였다. 역으로 생각하면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땀의 분비가 적고 건조하여 생활에 별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발상이 가능했던 것이다.-93쪽

몽골인은 물 대신 눈으로 빨래한다. 눈이 날리기 시작하면 털옷과 양탄자 등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온다. 빨랫감을 눈밭에 던져두고 그 위에 눈이 2~3센티미터가량 쌓이기를 기다린다. 눈이 쌓이면 빨랫감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눈이 골고루 묻게 한 뒤 바위나 나무 등걸에 대고 패기 시작한다. 이렇게 2~3번하고 훌훌 털어 버리면 끝이다. 털옷을 세탁하는 모습은 한 마리 늑대가 눈밭에 굴렀다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94쪽

몽골에서는 기후가 민족의 생활환경이나 성격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인류학자들의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몽골인은 혹독한 추위를 이겨 생존하기 위해서 게르를 지었고, 가축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일 년이면 네다섯 차례 이사한다. 이사라는 것이 지어진 집 사이를 옮겨다니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집 자체를 뜯어 세간과 함께 옮기는 것이므로 우리의 이사 개념과는 판이하다. 이사는 일 년에 4~5번씩 하며 봄 이사가 그 시작이다. 겨우내 매서운 바람을 피했던 좁은 지역에서 벗어나 햇빛이 비치는 평지로 집을 옮긴다. 시골에서는 훈훈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4월말부터 봄맞이 이사를 서두른다. 겨우내 굶주렸던 가축에게 한시라도 빨리 새 풀을 뜯기려는 안타까운 심정에서다.-96쪽

우리가 농사를 지을 때 같은 땅에 연작을 하지 않듯 몽골인도 같은 장소에 터를 잡지 않는다. 같은 장소로 오는 데는 적어도 4~5년이 지나야 한다. 그 이전에 가면 지난해 뜯어 먹은 풀뿌리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 그 해 가축 농사는 실패한다고 한다. -97쪽

한여름에도 낮에는 27~29도의 뜨거운 햇볕이 대지를 달구지만 그늘에서는 서늘함을 느껴 별로 땀이 나지 않는다. 밤에는 기온이 4~5도까지 급격하게 내려가 곧바로 두꺼운 옷이 필요해진다. 그러니 유목민들은 두꺼운 옷 한벌이면 대충 사철을 견딜 수 있는 셈이다.



개방의 바람을 탄 집안에서는 최근 텔레비전과 냉장고 등의 가전제품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을 갖춘 집들은 유목에서 벗어나 반정착상태의 생활을 영위하는 경우에 국한된다.-98쪽

영하 40도 이하인 외부와 단절된 게르 내부에서 열기를 더하는 것은 오직 난로뿐이다. 아낙네들이 여름내 모아 말린 소똥을 연료로 사용하는데, 이는 나무가 희귀한 초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연료이기 때문이다. 소는 사료 대신 풀만 먹어 똥에는 섬유소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냄새나 분진이 거의 없는 편이라 생각보다는 위생적이다.


모든 것을 신에게 의존하는 몽골인은 난로 연통을 게르 안의 자신들과 신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로 여긴다. -99쪽

난로는 가문의 유일한 상속물로 여겨질 만큼 재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이 별로 없는 몽골인이지만, 전통적으로 난로에는 큰 의미를 두고 막내에게 상속해 왔다. 몽골인은 가장 최후까지 남아 가문을 지킬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장남이 아닌 막내아들을 상속자로 택한다. 칭기즈칸은 전쟁에 나설 때마다 막내 아들에게 집안의 모든 관할권을 위임하고 출정했다. 가족보호는 물론 城의 관할조차도 나이 어린 막내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는 "만약 이 애비와 너의 형들이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하면 가문과 나라를 일으켜 원수를 갚아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와 더불어 하는 말이 바로 "난로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몽골인이 난로를 특별히 여기는 것은 불을 곧 조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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