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깊은 그림책 4
다비드 칼리 지음, 세르주 블로크 그림, 안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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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칼리의 전작 '나는 기다립니다'를 몹시 인상 깊게 읽었다.  최근에는 신간은 좀 자제하고 안 사는 편이었는데 이 책은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재밌게도, '나는 기다립니다'에 그림을 그렸던 작가와 다시 작업을 했고, 번역가도 안수연씨로 동일했으며 출판사도 문학동네로 여전하다. 궁합이 착착 들어맞은 듯하다.

비교적 안전한 울타리로 보여졌던 대한민국에서 자란터라, 어릴 적에 전쟁의 위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라면서, 공부하면서, 세계 곳곳의 뉴스들을 들으면서 '전쟁'이라는 게 참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리적인 전쟁 이외의 다른 전쟁은 제외하고라도 말이다. 정말 가깝게는 최근 그루지야와 러시아 사이의 전쟁이 있었고, 세계 곳곳에서는 여전히 테러가 진행되고 있다. 바로 그 전쟁, 그 속의 '적'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림을 담당한 세르주 블로크는 꼴라쥬 기법을 잘 사용하곤 하는데 도화지 위에 양쪽을 가르는 선을 그리고, 메마른 풍경을 표현할 앙상한 가시나무 하나를 주변에 배치했다.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뻥 뚫려버린 구멍 두개를 '참호'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 참호 속에 들어가 있는 병사들은 서로를 '적'이라 부른다.

그들은 지척에서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지만 사실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다. 아침이면 을 향해 총을 한 번 쏘고, 그러면 도 이쪽을 향해 총을 한 방 쏜다. 그리고는 하루종일 참호 안에 몸을 숨기고 상대가 머리를 내밀기를 기다린다.



이들은 배가 고파도 극한까지 참는다. 먼저 불을 피우면 그 틈에 이 다가와 나를 죽일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굶주림을 이기게 만드는 것이다. 때로 너무 배가 고파 먼저 불을 피우기라도 하면 도 반대편 참호에서 불을 피운다.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고, 살기 위해서 을 죽여야 하는 그들의 악순환.

병사는 외로움을 느낀다. 나와 마찬가지로 나의 도 외로움을 느낄 게 틀림 없다. 또 나와 마찬가지로 배도 고플 그 .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점은 어마어마하다. 아니, 어마어마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이니까.  그는 야수여야 하고 동정심이라는 것은 알 턱이 없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조차도 아무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때문에 이같은 전쟁이 벌어졌다고, 분명히 '전투 지침서'에 나와 있다. 병사는 철썩같이 그 지침을 믿는다. 믿지 않고 어찌 버틸 수 있을까. 그가 나의 이 아니라면, 나와 같은 사람이라면 나의 지금 이 시간을, 희생을 어찌 견딜 것인가.

빨치산 투쟁 때 국군은 '빨갱이'들을 처단하는 것을 역사적 사명으로 알았다. 설령 그렇게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알았다고 세뇌시키며 싸웠다. 80년 광주는 또 어땠을까. 멀쩡한 정신의 군인들을 동원시킬 수 없어 부러 취하게 만들고, 그들을 향하여 '폭도'라고 매도했던 그 사람들. 그들은 제압해야 할 상대를 '적'으로 규정했다. 그래야 자신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었으므로.

그렇게 전쟁에 있어서, 전투에 있어서 나의 은 인간이 아니어야 했다. 내가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은 의 인간 아님에서 찾아야 했던 전쟁의 추악함.

병사는 때로 고민한다. 우리를 전쟁터로 보낸 사람들이 우리를 영영 잊어 버린 게 아닌가 하고...

어쩌면 전쟁은 벌써 끝난 게 아닌가 하고...

때로, 어쩌면 이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게 사라진 것은 아닐까 혼돈이 밀려온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이 끔찍한 전투 와중에도 하늘에는 찬란한 별이 뜬다. 나와 마찬가지로 나의 도 저 별을 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도 생각할까?  아무 소용없는 이 전쟁을 어써 끝내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 먼저 전쟁을 끝내야 하는데, 내가 먼저 그만둘 수는 없다고 병사는 생각한다. 그가 먼저 전쟁을 끝낸다면 나는 총을 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인간이니까.

하지만 반대편의 은 인간이 아닌 야수이므로, 먼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총을 버릴 마음을 과연 가질 지 자신이 없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다음 주에는 달이 뜨지 않을 것이고, 나는 어둠에 가린 채 참호를 벗어나 의 참호로 향할 수 있다.

전투 지침서에서 알려준 대로 위장을 한 채 의 참호를 향해 기어간다. 그는 여느 밤과 다름 없이 내가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고, 나는 을 죽이고 이 전쟁을 끝내고 말 것이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 다시 가족을 만날 수 있다. 그래도, 총을 쏘기 전 그의 얼굴을 한 번은 보겠다고 병사는 생각한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자이길래 이런 참혹한 전쟁을 일으켰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 참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기에는 그의 소지품만이 있을 뿐이었다. 사진을 하나 발견한다. 가족사진이다. 뜻밖이었다. 에게도 가족이라는 게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 전쟁을 진행시키는 지도자들은 그런 얘기를 해준 적이 없다. 가족이 기다리는 사람이 어떻게 여자와 아이들을 죽일 수 있는 괴물이라는 건지 병사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서 발견한 충격적인 책 하나!



맙소사. 전투지침서다! 내 것과 똑같은 지침서!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의 지침서에 나와 있는 의 얼굴은 바로 라는 것.

충격이 밀려온다. 나는 괴물이 아닌데... 나는 여자와 아이들을 죽이지 않는데...

억울함과 흥분이 밀려온다. 우리가 싸워온 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란 존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지금 나의 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분명 나의 참호에 가 있을 것이다. 나와 똑같이 나를 기습하려고 했을 것이고, 그곳에서 전투 지침서를 보면서 나와 같은 충격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알고 있다. 이 전쟁이 끝나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는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내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해 준다면, 나는 당장에 수락할 것이다. 그는 왜 메시지를 보내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그리고 또 기다렸다. 병사는 손수건에 메시지를 적어 플라스틱 병에 넣는다. 밀봉을 한 다음 온 마음을 다해 던졌다.



부디 나의 병이 그의 참호 안에 떨어지기를 바라면서......

마음이, 짠하고 짠하고 또 쓰라렸다. 물리적인 전쟁과 또 그 밖의 무수한 마음의 전쟁까지도, 작품 속 병사들과 같은 마음을 갖게 할 때가 얼마나 많던가. 그림 책처럼 단순하지 않지만, 무수히 희생되는 사람들이 상대를 바라보는 관점이란 이와 같은 양상일 듯하다. 알고 보면 모두가 똑같은 사람인데.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인데......

다이하드 4를 보면서 천재 악당이 고작 요구하는 것이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이라는 것에 김이 새버렸었다. 그 대단한 두뇌의 소유자가 그토록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르면서 기어이 갖겠다고 하는 것이, 제 힘으로도 충분히 벌 수 있는 그 흔한 돈이라는 게 내게는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게 정말로 설득력이 없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무수한 재벌들. 그리 많은 돈을 버는데 무수한 탈세로 뉴스를 장식하는 것은 결국 같은 마음이 아닌가? 멀리 갈 것도 없다. 대한민국의 대통령님이 바로 그 상징이 아니었던가.

인간의 욕심이 하 무섭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아등바등 살고자 부리는 그 생존형 욕심이 아닌, 더 많이 가진 자가 그보다 더 갖겠다고 뿌려대는 추잡한 마음이 진실로 무섭다. 총들고 싸우지 않아도 그 마음 속 욕심의 정체가 이미 인간을 파멸시키는 '적'일 것이다.

여백이 많은 그림과 단촐한 글귀로도 많은 것을 설명하고 느끼게 해주는 다비드 칼리의 새 작품 '적'.

마음이 무겁지만 잔잔한 감동과 만남의 기쁨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전쟁과 인권에 대해서 아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훌륭한 교재가 될 듯 싶다. 물론, 어른들이 만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이 책은 조카를 위한 책이 아닌 나를 위한 책으로 담아두련다. '나는 기다립니다'와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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