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품절


엄마가 그랬잖아. 위녕, 세상에 좋은 결정인지 아닌지, 미리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어떤 결정을 했으면 그게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노력하는 일뿐이야,하구.-17쪽

공부도 행복하게 해야 하는 거야. 어떤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오늘을 불행하게 사는 거 그거 좋은 거 아니야. 네가 그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오늘을 견딘다면, 그 희망 때문에 견디는 게 행복해야 행복한 거야. 오늘도 너의 인생이거든.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영영 행복은 없어. -48쪽

있잖아. 그런 말 아니? 마귀의 달력에는 어제와 내일만 있고 하느님의 달력에는 오늘만 있다는 거?-49쪽

엄마를 다시 만난 후 내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어버렸다. 아마 태양계의 행성에서 난데없는 왜소 행성으로 변한 명왕성 같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명왕성이 생각을 할 수 있는 유기체라면 그는 인간들이 '명왕성은 행성 아님' 선언을 하고 영어로는 난쟁이 행성이라는 보통명사를 붙여준 것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질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아빠식으로 말하자면 그건 탈락이고 엄마식으로 말하자면 그건 명왕성의 자유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이제 사람들이 붙여놓은 딱지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그냥 별로 존재할 수 있으니까. 거꾸로 말하면 그는 그냥 자신이 꿈꾸는 그 별이 되어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51쪽

난 춥고 흐린 날이 좋아.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데 맑은 날을 좋은 날씨라고 판단해버리는 건 횡포잖아.-53쪽

이상하게도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이 왜 불행한지. 그건 대개 엄마가 불행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부가 불화하는 집 아이들이 왜 불행한지도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그건 엄마가 불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아, 이 세상에서 엄마라는 종족의 힘은 얼마나 센지. 그리고 그렇게 힘이 센 종족이 얼마나 오래도록 제 힘이 얼마나 센지도 모른 채로 슬펐는지. -56쪽

가끔은 네가 너무 조숙한 게 겁이 나.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으면 그랬을까 싶어서...... 엄마도 어렸을 때 아주 조숙했었는데, 그만 그것만 믿고 있다가 평생을 성숙은 못 하고 그냥 미숙하게 살았거든. 혹시 네가 그러지 않을까 겁도 나고. ......너무 이해하려고 하지 마. 가끔은 네가 엄마를 너무 이해하는 것 같아 겁이 나. 엄마를...... 쉽게 용서하려고 하지 마. 새엄마도...... 아빠도...... 쉽게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구. 그건 미움보다 더 나빠. 진실이 스스로를 드러낼 시간을 자꾸만 뒤로 미루어서 우리에게 진정한 용서를 빼앗아갈 수 있으니까.-57쪽

괜찮아, 울어. ......우는 건 좋은 거야. 좀 정리가 된다는 거거든. 맘속에 나쁜 열기가 가득하면 온몸의 물기가 다 말라버려서 울지도 못해. -81쪽

어떤 부모든 최선을 다해. 하지만 자식에게 상처를 줘. 그건 어쩌면 인간의 운명 같은 걸 거야. 그래서 그 많은 심리학자들이 어린 시절을 연구하는 거고.

어른들도 완전하지 않아. 더구나 처음 낳은 자식에게는 언제나 실수투성이야. 부모 연습을 해본 적이 없어서......-82쪽

어떤 순간에도 너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돼. 너도 모자라고 엄마도 모자라고 아빠도 모자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자람 때문에 누구를 멸시하거나 미워할 권리는 없어. 괜찮은 거야. 그담에 또 잘하면 되는 거야. 잘못하면 또 고치면 되는 거야. 그담에 잘못하면 또 고치고, 고치려고 노력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가 있는 거야. 엄마는...... 엄마 자신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냈어.-85쪽

가족이라는 것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한 울타리 같은 거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적으로 사적인 영역이니까. 당연히 보호받아야 하고 침범당해서는 안 돼. 그런데 그런 폐쇄된 영역에서 힘이 센 한 사람이 힘이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쓰자고 들면 힘이 약한 사람은 당하게 마련인 거야. 타인들이 볼 수 없는 장막 저쪽의 세계니까. 그게 부인이든 남편이든 혹은 아이든 노인이든...... 그 사람이 페미니스트든 사회정의의 화신이든 힘이 센 사람이 폭력을 쓰면 약한 사람은 당하는 거...... 그게 가족의 딜레마일 거야. 낯선 사람이 가하는 폭력을 피하면 되지. 친구가 그러면 안 만나면 되지. 그러나 사랑해야만 한다고 믿는 가족이 그런 일을 저지를 때 거기서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거야. -89쪽

내가 왜 거기서 그 사람이 궁금해하지도 않는데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을까. 이게 바로 내가 입은 피해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하고 말이야...... 나중에 혼자 생각했지. 그래, 상처와 치유가 별개냐? 내가 내가 아닐 때, 그것은 상처이고 내가 다시 나를 찾을 때, 누구에게도 먼저 내 잘못이 아니라구요, 변명하지 않을 때 그게 바로 치유가 아니겠냐고......-128쪽

그 선생님은 언제나, 내게서 불행의 기미만을 찾아내고 싶어했다.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나는 힘이 든다. 생각해보시라, 준비물 하나 가져가지 않은 일로 상담실에 불려가 특별 상담을 받아야만 했던 나날을. 어른들은 아마도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신발주머니를 챙길 때나 교과서를 준비할 때나 부모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슬피 새기면서 사는 줄 아나 보다. -130쪽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 엄마는 그걸 운명이라고 불러...... 위녕, 그걸 극복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걸 받아들이는 거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거야. 큰 파도가 일 때 배가 그 파도를 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듯이. 마주 서서 가는 거야. 슬퍼해야지. 더 이상 슬퍼할 수 없을 때까지 슬퍼해야지.원망해야지, 하늘에다 대고,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요! 하고 소리 질러야지. 목이 쉬어 터질 때까지 소리 질러야지. 하지만 그러고 나서, 더 할 수 없을 때까지 실컷 그러고 나서...... 그러고는 스스로에게 말해야 해. 자, 이제 네 차례야, 하고.-178쪽

훗날 나는 엄마의 인터뷰 기사에서 엄마가 써달라는 묘비명을 읽었다.
"나 열렬히 사랑하고 열렬히 상처받았으며, 열렬히 슬퍼했으나 이 모든 것을 열렬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으니, 이제 좀 쉬고 싶을 뿐."-197-198쪽

위녕, 엄마는 네게 그런 방법이 좋은 게 아니라고 말했어. 하지만 너는 듣지 않았고...... 너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야. 그때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어. 너의 나쁜 결정에 동참해주는 것, 그래서 같이 후회하는 것...... 엄마도 너와 같이 나쁜 결정을 한 동지가 되는 것......-269쪽

공부? 네가 하는 거야. 네 인생? 네가 사는 거야. 엄마는 어차피 너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날 거야. 함께 있을 때까지는 엄마가 도와주지만 그 다음엔 너희의 몫이야. 더 길게는 잔소리하지 않겠다. 그리고 어쨌든 둥빈, 엄마가 온다고 힘든 반성문 써준 거 고마워. 내친 김에 한마디만 더 하면 인마, 반성은 조건 없이 하는 거야. 네가 이러면, 네가 저러면 이런 거 없어.-278쪽

세상의 모든 선생님들은 알까? 그들이 우리에게 실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주어왔는지. 그것이 상처든 감동이든 지식이든 말이야...... 엄마, 나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어. 그래서 엄마 없는 아이들을 돌보아주고 싶었어. 아빠 없는 아이들, 아니면 엄마 아빠 다 없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어. 학부모님께, 로 시작하는 통지서 대신 보호자 되는 분께, 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 수업 시간에 무심히 내일 엄마 오시라고 해요, 라는 말 대신 보호자분 오시라고 하세요, 라고 하고 싶었다구...... 엄마, 내 말을 이해해?-328쪽

우리가 함께 누군가를 증오하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였지만, 증오의 대상이 스스로 항복하고 나자, 그 증오는 이제 미숙한 서로를 향해 겨누어지게 된 것이지. -335쪽

성모마리아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구세주를 낳았기 때문이 아니란 걸 엄마는 그제야 깨달아버렸다. 달빛 아래서 엄마는 거실 바닥에 엎디었지. 그녀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그 아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그냥, 놔두었다는 거라는 걸, 알게 된 거야. 모성의 완성은 품었던 자식을 보내주는 데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거실에 엎디어서 엄마는 깨달았았다. 이 고통스러운 순간이 은총이라는 것을 말이야.
사랑하는 딸, 너의 길을 가거라. 엄마는 여기 남아 있을게. 너의 스물은 엄마의 스물과 다르고 달라야 하겠지. 엄마의 기도를 믿고 앞으로 가거라. 고통이 너의 스승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네 앞에 있는 많은 시간의 결들을 촘촘히 살아내라. 그리고 엄마의 사랑으로 너에게 금빛 열쇠를 줄게. 그것으로 세상을 열어라. 오직 너만의 세상을.-336-3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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