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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는 아파트가 없다 - 초록도깨비 ㅣ 낮은산 작은숲 15
김중미 지음, 유동훈 그림 / 도깨비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김중미의 전작 '괭이 부리말 아이들'에서도 인천을 배경으로 한 가난한 사람들의 따듯하고도 처절한 삶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 책도 비슷하다. 어쩌면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냥 짐작일 뿐이다.
진도가 고향인 아이들의 부모님은 빚때문에 인천으로 도망쳐 와 살고 계셨고, 아이들도 할머니와 함께 인천으로 따라온다. 첫째 상윤이, 둘째 상민이, 셋째, 상미, 그리고 막내 상희까지 네 남매.
오래오래 둥지를 튼 집을 고치면서 발견하게 된 일기장 상자. 네 아이들은 모두 저마다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첫째 상윤이는 오래된 짐들을 버리라고 했지만 셋째 상미는 그것들을 소중히 갈무리 한다. 이 책은 그 아이들의 서로 다른 시간대의 일기를 토대로 긴 흐름을 만들어 냈다.
상윤이의 일기에서는 처음 인천에 도착해서의 낯설음과 좁은 골목길의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에 대한 답답함이 묻어 있다. 우산조차 펼 수 없는 좁은 골목길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친구를 사귀고 놀이를 즐긴다. 이때가 1990년이었다. 아이는 첫째로서 지게 된 책임과 의무에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엄마 대신 아빠 대신 동생들을 잘 보살피고 할머니를 도와 집안 일을 한다.
둘째 상민이의 일기는 93년도 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녀석이 아직은 초등학교 고학년이거나 중학교 저학년일 무렵이었을 것이다. 남자들 사이의 우정에 껌벅 죽는, 그리하여 의리를 지키려고 무던히 애쓰는 그런 개구쟁이 사내아이로 자라 있었다. 아이들은 똥바다라 부르는 시커먼 바닷물에서 놀고 배를 만드는 순복이 할아버지를 구경하기도 한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아이들은 구김살 없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셋째 상미는 문학소녀의 감성을 지니고 있다. 남들이 아파트에 들어가 살고 빌라에 들어가 살 때도 그 삭막한 부유함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때는 1997년도였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시피 외환위기가 들이닥친 그 시기였다. 아버지는 실직하여 하루하루 노동의 대가로 생활을 이어가셨고, 연일 이어지는 부도로 삶이 막막해진 이웃들이 곳곳에 보인다. 함께 살게 되면 더 따스하게 대해줄 거라 믿었던 엄마는 점점 더 돈만 외치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그런 엄마를 견뎌내는 것이 식구들 모두에게 고역이 되어버렸다. 순복이 할아버지는 똥바다가 사라져 더 이상 배를 만들 수 없게 되어 폐휴지를 주워 생계를 여몄고, 아버지는 일자리에서 잘려 익숙치 않은 다른 일을 하다가 부상을 입는다. 그러나 사업주는 보상을 해줄 수 없다고 하고 가족 모두의 고민은 깊어간다.
공부가 신통치 않았던 오빠는 학비 면제를 조건으로 졸업 후 반드시 배를 타야 하는 선원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다.
"상미야, 너는 공부 잘 하니까 꼭 대학 가. 오빠가 배 타서 돈 벌면 너 대학에 보내 줄게."
일기의 주인공 상미는 이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고 썼는데, 읽던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못해도 너는 꼭 했으면 하는 마음, 그 마음을 보태어주는 애틋함이 고맙고, 아직 어린데도 불구하고 이런 사회적 책임과 고통에 내몰린 아이들이 가여웠다.
큰언니의 입장도 다르지 않다. 언니는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자격증도 모두 갖췄지만 생산직에서 일을 하게 된다. 아이들은 울고 싶은 마음을 이제 드러내지도 못하고 그렇게 마음이 죽어간다.
동네는 점차 아파트로 채워져 간다. 서민들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임대 아파트가 아니라 돈이 되는, 부자들만 와서 살 수 있는, 땅 투기의 대상이 되는, 그런 아파트들이 죽죽 들어선다. 모두가 고만고만 가난할 때는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도 들리고 서로의 부족한 살림을 이해해 가며 나누며 사는 삶이 가능했는데, 이제 경계는 확실히 그어지고 말았다. 비단 97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십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형으로 아파트는 사람들의 삶과 삶 사이의 금을 더 강화하고 있다.
길음뉴타운이 들어서면서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서민들은 강북구 쪽으로 더 내몰렸다. 정치인들이 약속하던, 투표를 부르던 그 듣기 좋은 말들이 사실이었다면 그들은 살았던 땅에서 더 편한 일상을 보내야 마땅했지만 변두리로 변두리로 더 내몰려야 했다. 강북구 쪽의 학교에서 일할 때 들었던 이야기들은, 지금 은평뉴타운으로 또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의 아이들이 자라는 학교에서 다시 또 듣고 있다.
2001년, 넷째 상희의 일기에서 순복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루 일가는 대신 그 집의 상 치르는 것을 도왔는데, 그 덕분에 아버지는 일자리에서 쫓겨난다. 일용직으로 일하시는 아버지의 처지란 그렇게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데에도 생계의 위협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야기의 끝은 비교적 밝고 훈훈하게 마쳐진다. 아버지가 취직에 성공하셨고, 좀 더 모양새 그럴싸한 빌라에 전세로 들어가느니 우리집을 고쳐서 살자는 합의 하에 집안 정리가 시작된다. 첫 이야기에 나왔던 일기장을 찾는 과정이 여기서 발생한다.
어린이들을 위한 책에서 이 이상 어떻게 밝고 명랑한 분위기로 마무리를 짓겠는가마는, 현실 속에서 이들 가족들의 이야기는 차라리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이내 마음이 무거워졌다. 과연, 이 책속의 셋째 상미처럼 가난해도 도란도란 이 마을에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소망할 아이들이 지금도 남아 있을까. 그 아이들이 그 마음 변치 않고, 그 기대를 품고 살아갈 수 있을까.
애써서 우울해할 필요는 없지만 힘주어 밝은 척하기 힘든 세상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들은 그저 순진, 천진, 낭만을 품어안고도 행복해질 수 있어야 하는 세상인데. 좋은 독서 끝에 마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