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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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에 산소가 부족하고 살갗 밑에 피가 말라붙기 때문에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시커멓게 변해갔다. 이 극적인 변화 때문에 이 병은 ‘흑사병’이라고 알려졌다. 환자는 보통 며칠 동안 몹시 괴로워하다가 죽었다.
상당히 그럴듯한, 그러나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병은 중국 남부에서 발생했고 몽골 병사들이 북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병의 세균은 벼룩 속에 살며, 벼룩은 쥐의 몸을 타고 남쪽에서 오는 식량이나 다른 공물과 함께 옮겨다녔다. -343쪽

중국의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지역, 그리고 훗날 다른 도시의 수많은 쥐는 이 세균에게 완벽한 거주환경을 제공했다. 사람들은 쥐가 오랫동안 인간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아온 동물이라 이 병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1331년 연대기 기록자는 허베이성(하북성) 주민의 90%가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중국은 이 병 때문에 인구가 1/2 내지 1/3로 줄어든 것으로 전해진다. 13세기 초에 이 나라에는 1억 2300만 명 정도가 살았는데, 14세기 말에는 인구가 6,500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중국은 몽골 세계체제에서 제조업의 중심 역할을 했다. 따라서 중국에서 물자가 쏟아져 나가면서 병도 따라갔다. 이런 식으로 페스트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진 것으로 보인다.
페스트는 교역으로 옮겨지는 전염병이었다. 몽골이 상인을 위해 건설한 도로와 역참 또한 의도와 관계 없이 벼룩, 따라서 병 자체가 이동하다 머무는 지점으로 이용되었다. -344쪽

1348년 페스트는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파괴했으며, 그해 6월이 되자 잉글랜드에 진입했다. 1350년 겨울에는 페로 제도에서 북대서양을 건너 아이슬란드를 통과하더니 그린란드에까지 이르렀다. 페스트는 아이슬란 정착민의 60%를 죽인 것으로 보이며, 그린란드에서도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바이킹 거주지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346쪽

페스트는 로마의 몰락 이후 유럽을 지배했던 사회질서를 거의 파괴해 버려, 대륙에는 위험한 무질서만 남았다. 이 병은 도시 거주자를 더 쉽게 공략했기 때문에 교육 받은 계급과 숙련된 장인들이 많이 죽었다. 도시 안이든 밖이든 수도원이나 수녀원 같은 폐쇄된 공간은 병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몰살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유럽의 수도원 제도, 나아가서 로마 가톨릭 교회 전체는 이 비극의 충격으로부터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347쪽

사람들은 이 병의 진짜 원인이나 전염 경로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곧 도시 안팎의 교역이나 사람의 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인식하게 되었다.
즉시 교역, 통신, 운송이 중단되었다. 유럽 전역의 지방당국은 페스트의 전파를 막고 대중의 반응을 통제하기 위해 페스트 법을 만들었다.

외교사절단과 편지도 오가지 않았다. 몽골 운송체계의 가동이 중단되자 가톨릭 교회와 중국 선교단의 연락이 끊겼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외국인이 병을 가져온다고 비난했고, 이로써 국제교역은 더 위축되었다. 유럽에서 기독교도는 다시 유대인을 공격했다. 유대인은 교역이나 동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이 두가지는 또 페스트하고도 관계가 깊었기 때문이다. 유럽 사람들은 유대인을 집에 가두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 끌어내어 죄를 자백할 때까지 형틀에 묶고 고문하기도 했다. 1348년 7월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유대인을 보호하고 유대인 박해를 중단하라는 교서를 내렸음에도 유대인 탄압은 오히려 증가했다. -348쪽

페스트는 유럽을 고립시켰을 뿐 아니라 페르시아와 러시아에 사는 몽골인을 중국이나 몽골과 차단했다. 중국의 황금 가족은 러시아와 페르시아로부터 물자를 얻을 수 없었다. 각 지파 사이에 연결이 끊어지자 서로 맞물리는 소유제도도 붕괴했다. 페스트는 국토를 유린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타락시켰고, 교역과 공물을 차단하여 몽골의 황금 가족으로부터 일차적인 소득원을 빼앗았다. 몽골인은 거의 100년 동안 서로간의 물질적 이해관계 덕분에 그들을 가르는 정치적 단층선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통일ㅇ성이 흔들릴 때에도 문화적, 상업적으로는 통일된 제국을 유지했다. 그러나 페스트의 살육이 시작되면서 중심이 버틸 수가 없었고, 그 결과 복잡한 체제는 붕괴했다. 몽골 제국은 사람, 물자, 정보가 제국 전체를 끊임 없이 빠르게 돌아다녀야 생존할 수 있었다. 이런 연결이 없으면 제국도 없었다. -349쪽

몽골인이 외국인 정복자이면서도 때로는 자기들보다 열 배나 더 많은 신민을 큰 탈 없이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이 약해진 뒤에도 교역물자가 계속 대규모로 흘러다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스트의 여파로 교역도 이루어지지 않고 다른 지파에서 지원병을 보내줄 가능성도 사라지자 칭기스칸의 황금 가족 각 지파는 신민이 언제라도 적대적으로 변할 수 있는 매우 가변적인 상황에서 스스로 꾸려나가야 했다. 군사적 힘과 상업적 이득이라는 두 가지 이점이 사라지자, 러시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중동의 몽골인은 자신의 신민과 결혼을 하고 의식적으로 그들의 언어, 종교, 문화를 따름으로써 권력과 정통성의 새로운 양식을 찾아나갔다.
-349쪽

조정의 관리들은 중국인에게 자유를 너무 많이 주었고, 몽골인이 지나칙 중국 생활에 동화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중국 문화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대신 자신들의 이질적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중국의 언어, 종교, 문화, 중국인과의 혼인 관계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극단적인 탄압을 하자 중국 신민은 불만이 늘었으며, 몽골 통치자들을 더 불신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몽골인은 가능한 한 중국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노력의 일환으로 다양한 종교를 공정하게 대접한다는 전통적 정책을 버리고 불교, 특히 티베트 불교를 우대하여 특혜를 주었다. 티베트 불교는 중국의 유교적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351쪽

중국의 몽골 칸들은 페스트의 확산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고 신민들로부터도 점차 고립되자 티베트 불교의 영적 세계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중국의 몽골 통치자들이 자신의 영성과 성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동안 수도의 ‘금단의 도시’의 담 너머 바깥 사회는 붕괴하고 있었다. 가장 뚜렷한 증상은 몽골 당국이 그렇게 힘겹게 또 꼼꼼하게 만들어낸 화폐제도를 통제할 힘을 잃었다는 점이었다. 몽골 행정부가 약해진다는 조짐만 보여도 지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가치가 폭락하는 대신 구리와 은의 가치는 상승했다. 인플레이션도 매우 심해져 1356년에 이르자 지폐는 가치를 거의 잃고 말았다. -352쪽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몽골 사회는 빠르게 붕괴했다. 각각 1335년과 1368년에 몽골인의 지배가 무너졌다. 페르시아 일 칸국의 몽골인들은 사라졌다. 죽음을 당하거나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신민에게 흡수된 것이다. 중국에서 대칸 토곤 테무르(순제)와 약 6만 명의 몽골인은 명의 반군을 피해 가까스로 달아났다. 그러나 뒤에 남은 약 40만 명은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중국인에게 흡수되었다. 간신히 몽골로 돌아온 사람들은 전과 다름없이 목가적인 유목민 생활을 계속했다. 1211년부터 1368년까지 중국을 다스렸음에도, 그저 남쪽 여름 숙영지에서 조금 오래 머물다 온 듯이 다시 옛날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러시아의 킵착칸국은 작은 무리로 나뉘어 이후 400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서서히 쇠퇴해갔다.
-353쪽

명의 통치자들은 몽골이 중국에 정착하도록 권유했던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인 상인들을 쫓아냈다. 또 그렇지 않아도 힘을 잃어가던 지폐를 완전히 없애고 금속화폐로 돌아감으로써 몽골이 세워놓았던 상업체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들은 몽골이 후원했던 티베트의 라마교 계열의 불교도 배격하여 그 자리에 전통적인 도교와 유교의 사상과 전통을 집어넣었다. 새로운 통치자들은 몽골의 교역체계를 소생시켜다 실패하자 대양을 다니던 배들을 태우고, 외국인의 중국 여행을 금지하고, 외국인은 못 들어오고 중국인은 못 나가게 할 목적으로 국민 총생산의 큰 부분을 투여하여 육중한 새 성벽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동남아시아 여러 항구에 살던 수천 명의 중국인이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354쪽

명은 새로운 몽골 침략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중국식 도시라 할 수 있는 남쪽의 난징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이미 통일중국의 통치는 북부의 수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주민 다수의 태도와 행동방식도 하루아침에 바꿀 수가 없었다. 명은 결국 옛 몽골의 수도 칸발릭으로 돌아갔다. 대신 명은 몽골의 외양을 제거하여 도시를 다시 만들기로 했다.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운 ‘금단의 도시’(자금성)를 세우려 한 것이다.
-354쪽

티무르의 후손은 역사에서 인도 무굴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519년 무굴 왕조를 창건한 바부르는 칭기스 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13대손이다. 무굴 제국은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 치세(1556-1608)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는 칭기스 칸과 마찬가지로 행정의 천재였을 뿐 아니라 무역도 중시했다. 악바르는 원성의 대상이던 지즈야 세금, 즉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에게 물리는 인두세를 철폐했다. 그는 기병대를 전통적인 몽골의 십진법에 따라 편성했으며(5000명까지), 공무원 체계를 확립하여 공과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했다. 몽골이 중국을 당대에 가장 생산적인 제조와 교역의 중심으로 만들었듯이, 무굴은 인도를 세계 최대의 제조와 교역 국가로 만들었으며, 무슬림과 힌두 전통과는 반대로 여성의 지위를 높였다. 악바르는 종교에 대한 보편주의적 태도를 유지했으며, 모든 종교를 하늘에는 하나의 신이 있고 땅에는 하나의 황제가 있다는 내용의 하나의 ‘거룩한 신앙’, 즉 디니 일라로 융합하려 했다.
-356쪽

아주 많은 제국들이 정치에서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몽골 제국의 환상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여론 역시 몽골 제국이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완강하게 믿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몽골 제국에 대한 믿음이 그 어느 곳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또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던 곳은 유럽이다. 마지막 칸이 중국을 통치하고 나서도 100년 이상이 지난 뒤인 1492년 유럽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자신이 바다를 통해 대칸의 몽골 조정과 다시 접촉하여 허물어진 교역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이사벨과 페르난도를 설득했다. 몽골의 교통체계가 무너지면서 유럽인은 제국의 몰락과 대칸의 패배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유럽에서 몽골 조정으로 가는 육로는 무슬림이 막고 있지만 유럽에서 서쪽으로 항해를 하여 ‘세계의 바다’를 건너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땅으로 가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357쪽

콜럼버스에게 마르코 폴로는 영감이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안내자였다. 그는 몇 개의 작은 섬을 찾은 뒤에 쿠바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대칸의 영토 가장자리에 이르렀고 곧 몽골의 카타이 왕국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몽골인의 대칸의 땅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만난 사람들이 몽골인의 나라 남쪽에 자리잡은 인도 주민이라고 판단했으며, 그래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인도인)이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357쪽

황화의 공포는 필리핀인이나 한국인 등 어떤 집단에도 적용될 수 있었지만, 그 가운데도 중국과 일본이 가장 위험해 보였다. 일본은 산업화를 이루고 대군을 육성했다. 중국은 식민지화를 계속 거부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아시아인은 서구 대중의 눈에 적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19세기 내내 유럽에는 아시아인에 대한 공포가 쌓여갔다. -364쪽

르네상스와 몽골 제국의 시대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칭기스 칸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까지 격하되었다. 근대 유럽은 새로 발견한 식민지 정복의 힘과 스스로 내세운 세계 지배의 임무 때문에 아시아의 정복자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칭기스 칸과 몽골의 잔혹성은 문명화된 잉글랜드, 러시아, 프랑스의 식민주의자들이 아시아를 통치할 수밖에 없는 구실이 되었다.

유럽 과학자나 정치가들과는 정반대로 이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인 아시아의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칭기스 칸에게서 새로운 영웅을 발견했다. 이것은 유럽의 우월성이라는 교조를 반박하는 생생한 증거였다. -365쪽

20세기 전반에 점차 아시아의 지도자로 자처하던 일본은 유럽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면서 범몽골주의에 강하게 끌리기 시작했다. 일부 일본 학자들은 칭기스 칸이 사무라이 출신으로 권력투쟁에서 실패한 뒤 고향을 떠나 초원지대 유목민 사이에 살면서 힘을 길러 세계 정복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퍼뜨리기도 했다.
-367쪽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범상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몽골 민족의 어머니가 공격을 당하고, 납치를 당하고, 폭행을 당했다. 그녀를 빼앗기자 어린 테무진은 자신의 젊은 목숨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되찾으려 했다. 테무진은 결국 그녀를 구했으며, 이후 평생 동안 자신의 민족을 외침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싸웠다. 이를 위해 쉬지 않고 외부인들을 공격하며 돌아다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테무진은 세계를 바꾸었고 민족을 창조했다. -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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