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장바구니담기


1930년대에 스탈린의 심복들은 여러 차례 몽골의 문화와 종교를 공격하여 파괴했고 그 과정에서 약 3만 명의 몽골인을 처형했다. -11쪽

칭기스 칸의 혁신적인 전투 기술로 인해 중세 유럽의 중무장한 기사는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나고, 전체에 통합된 단위를 이루어 움직이는 규율 잡힌 기병이 전면에 나섰다. 칭기스 칸이 방어용 요새에 의존하는 대신 기습을 기발하게 활용하고 공성전을 완벽하게 다듬어 운용하자, 성벽을 두른 도시의 시대도 끝이 났다. -14쪽

몽골군은 2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로마군이 40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 많은 땅과 사람을 정복했다. 칭기스 칸은 아들, 손자 들과 함께 13세기에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문명들을 정복했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다수가 한때 몽골이 점령했던 나라에 살고 있다. 현대 지도에서 칭기스 칸이 정복한 땅은 30개국이며 인구로는 30억이 훨씬 넘는다. 이런 성취에서 가장 놀라운 측면은 그의 휘하에 있던 몽골 부족 전체가 약 100만 명으로, 현대 일부 기업의 직원들보다 적은 수였다는 점이다. 칭기스 칸은 이 100만 명에서 군대를 징집했는데, 그 수는 10만 명에 불과했다. 현대의 대형 경기장도 꽉 채우지 못할 숫자였던 것이다. -15쪽

칭기스 칸은 돌이 아니라 나라로 건축을 했다. 몽골군은 동유럽에서 슬라브족의 공국과 도시 여남은 개를 묶어 하나의 커다란 러시아 국가를 만들었다. 동아시아에서는 3대에 걸쳐 남쪽의 송나라에 만주의 주르첸(여진), 서쪽의 티베트, 고비 사막 옆의 탕구트, 투르키스탄 동부의 위구르의 땅을 결합하여 커다란 중국을 만들었다. 몽골은 통치 영역을 확대하면서 인도도 통치했다. 인도는 대체로 몽골 정복자들이 세운 경계 안에서 현대까지 생존해왔다.
칭기스 칸의 제국은 주위의 많은 문명을 연결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가 태어난 1162년, 구세계는 여러 지역문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각각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 외에는 다른 문명을 거의 알지 못했다. 중국은 유럽을 몰랐고, 유럽은 중국을 알지 못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중국과 유럽 사이를 여행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칭기스 칸이 사망한 1227년에 중국와 유럽은 외교나 상업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연결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16쪽

몽골은 부와 보물을 축적하는 제국이 아니었다. 대신 칭기스 칸은 전투에서 얻은 물자를 널리 분배하여 다시 상업적 유통망으로 들어가게 했다. 대부분의 통치자가 스스로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 칭기스 칸은 통치자도 미천한 목자와 똑같이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복당한 모든 신민에게 종교와 관계없이 완전한 충성을 요구했지만, 영토 내에서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다.
-17쪽

역사는 대부분의 정복자들에게 비참하고 때 이른 죽음을 선고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33세의 나이에 바빌론에서 의문을 남기고 죽었다. 부하들은 그의 가족을 죽이고 땅을 나누어 가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동료 귀족과 이전 동맹자들에게 로마 원로원에서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모든 정복지가 파괴되거나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과정을 지켜본 뒤 지구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외딴 섬에서 외로운 수인으로 고독하고도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그러나 거의 70세에 이른 칭기스 칸은 자신의 야영지 침대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의리 있는 친구, 명령만 내리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충성스러운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숨을 거두었다.
-18쪽

그를 묻은 자리에는 능도 없고 사원이나 피라미드는커녕 그가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작은 묘비조차 세우지 않았다. 몽골인의 믿음에 따르면 죽은 자의 몸은 평화롭게 놓아두면 그만이었으며 굳이 기념비를 세울 필요가 없었다. 영혼이 이미 몸을 떠났기 때문이다. 영혼은 영기에 머물며 살게 된다.
-19쪽

몽골인은 과학 기술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열지도 않았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지도 않았고, 책이나 연극도 거의 쓰지 않았으며, 세상에 새로운 작물이나 영농기술을 내놓지도 않았다. 몽골의 장인은 직물을 짜지도 못하고, 금속을 주조하지도 못하고, 도기를 만들지도 못하고, 심지어 빵을 굽지도 못했다. 그들은 자기나 도기를 제작하지도 않았고,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고, 건물을 짓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군대는 여러 문화를 차례차례 정복하면서 이 모든 기술을 모아 이 문명에서 저 문명으로 전해주었다.
-20쪽

몽골의 영향을 받은 결과인 르네상스 기간에 유럽 생활의 모든 측면-과학기술, 전쟁, 의복, 상업, 음식, 예술, 문화, 음악-이 바뀌었다.


역사의 다른 정복자와는 달리 칭기스 칸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자신의 상을 조각하거나, 동전에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을 새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3쪽

19세기 과학자들은 아시아 사람들과 아메리카 인디언이 열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때 그들을 몽골 인종으로 분류했다. 의사들은 우월한 백인종 어머니가 지진아를 낳는 이유를 설명하고 싶을 때, 지진아의 얼굴 특징을 보면 아이의 조상 가운데 누군가가 몽골 전사에게 강간을 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불행한 아이는 백인이 아니라 몽골 인종이었다. 매우 부유한 자본가들이 부를 과시하면서 민주주의나 평등이라는 가치에 반대되는 태도를 보일 때 이들은 무굴 사람이라고 조롱을 당했다. 무굴은 몽골을 가리키는 페르시아 말이다.
-26쪽

19세기에 베이징에서 한자로 적힌 문서 사본이 한 부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한자 자체는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한자들은 13세기의 몽골어 발음을 옮겨놓은 일종의 암호였기 때문이다.
-27쪽

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기스 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없었다.
-제프리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1395년 경)

민족! 민족이 무엇인가?
타타르족! 훈족! 중국인! 그들은 벌레처럼 몰려다닌다.
역사가는 그들을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려 애쓰지만 헛수고일 뿐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니면 한 사람 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개인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일기>(1851년 5월1일)

칭기스 칸과 그의 후손들이 지구를 흔들자
술탄들이 쓰러졌다.
칼리파들이 넘어졌고, 카이사르들은 왕좌에서 떨었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

아시아가 우리를 삼키고 있다. 어디를 보든 타타르와 마주친다.
-토마스 만, <마의 산>-각장 서문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