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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안녕하려면 - 하이타니 겐지로 단편집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츠보야 레이코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7년 12월
평점 :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 작품은 세번째다. 가장 유명한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를 작년에 인상 깊게 보았고, <로쿠베 조금만 기다려>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방금 막 읽기를 마친 <우리와 안녕하려면>은 선물로 받은 책이다. 내게 선물로 준 이도 선물로 받았다고 했는데 내게 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나 역시 읽기를 마치고 다른 분께 선물로 안겨드렸다. 나보다 더 크게 이 책이 필요한 즐거운 이유가 그분께 생겼기 때문이다. ^^
이 책은 짤막한 다섯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통점이라면 학교나 선생님이 등장하거나 혹은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소외받는, 비주류에 속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첫번째 단편 <물 이야기>에서는 재일 조선인이 등장하고, <손>에서는 2차 세계대전 때 오키나와 전투로 한 손을 잃어버린 선생님이 나온다. <눈>에서는 인도네시아의 가난한 소년이 나오고, <소리> 편에서는 지체 장애아가 나오며, 마지막 단편 <친구>에서는 교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어리고 약한 학생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다섯 작품은 모두 작가의 경험과 추억, 인연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취하고 있다. 첫번째 이야기는 한국의 경주를 여행할 때 만난 사람이 모티브가 되었는데, 그는 일본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30년 동안 일본 말로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 작품 속에서 재일조선인 아버지가 수영을 그만두는 이야기로 나온다. 아이들은 수영부가 해체되는 것에 저항하는 의미로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딱 한명 이소선을 빼고. 이소선은 재일조선인 아버지를 둔 아이다. 그 아버지가 수영부에 찾아와 수영 대결을 벌이는데, 그분이 해준 이야기가 싸아하다.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서 3등 상을 받았을 때 올라간 국기는 태극기가 아니라 일본 국기였다는 것.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손기정 선수의 슬픔으로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가 경주에서 만났던 그 사람을 떠올려 본다. 우리 말을 강제로 빼앗겼던 수난의 시대를 아파하며, 자신 혼자서 할 수 있는 저항의 모습으로 일본말을 30년 씩이나 삼갔던 모습. 그의 저항은 작지만 크다. 그래서 더 아프고 눈물이 난다. 작품 속 아버지와 달리 이소순은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자신이 맛보았던 그 세계를 잃고 싶지 않아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그 작은 세계를 마찬가지로 지켜주고 싶었다. 이들이 수영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또 선생님들과 학교에 저항을 해도 수영부 폐지라는 결정을 바꾸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자신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고, 자기들이 살고 있는 그 세계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저항'의 의미도 다시 새겨보면서.
개인적으로는 두번째 이야기 <손>이 가장 울컥하는 느낌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땅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졌던 오키나와. 그때의 폭격으로 손을 잃어버린 선생님 이야기. 그 손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던 당당한 선생님의 모습이 감동스럽다. 철없는 아이들은 그 손을 보고자 했지만 '구경거리'가 아니니 지금은 보여줄 수 없고, 나중에 자연스럽게 볼 거라는 선생님의 말이 짠하게 들린다. 그 선생님의 제자인 학생이 오키나와를 배로 여행하면서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작품은 전개되는데, '선생님'하고 부를 때마다 찰랑거리는 파도 소리와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함께 들린다. 학생은 오키나와에서 갑작스런 비를 맞게 된 할머니를 집까지 모셔다 드리는데, 이 할머니는 전쟁으로 두 아들을 잃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원망과 분노의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니라 천황폐하가 아직도 감사의 말씀을 해주시지 않는다고 섭섭한 마음을 비춘다. 할아버지는 말라리아로 사망했는데, 그 역시 전쟁의 희생자인 것은 동일했다.
뭐랄까. 안타까운 한숨이 새어나온다. 나랏님이 말씀하시면 그저 읍하고 순종해 왔던 '백성'으로서의 할머니. 설령 못 배우고 가난할지라도 나라 일에 휘말려 큰일을 당했던 중요 구성원인데, 사회는 그 아픔을 헤아려 주지 않고 보상해 주질 않는다. 높은 곳에 계시는 천황 폐하, '고마웠다'고 혹은 '미안했다'고 한마디만 해주어도 달라질 그분들의 마음인데, 그 마음 보듬어 주지 않는 그이들의 오만함에 참으로 화가 난다. 전범 국가로서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 그들이니 말해 무엇하겠냐마는, 우리처럼 식민지배를 받아서 원한이 사무친 사람뿐 아니라, 일본 내부에서도 얼마든지 희생자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슬픔의 공감대가 형성된다. 작품 속 선생님은 자신을 위해서 뭔가 해줄 생각이 있다면 '오키나와에 대해 공부해다오'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우리의 고통을 위로받는 지극히 평화로운 방법이 아닐까 생각했다. 미워하고 증오하라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반성하고 성찰할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복수가 아닐까......
작가의 작은 아버지는 인도네시아의 왼딴 섬에서 전사하셨다고 한다. 작가는 작은아버지의 흔적을 더듬어 여행을 했는데, 그때의 감상과 느낌을 담아 세번째 단편 <눈>을 써냈다. 일본인 주인공이 인도네시아에서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여행객을 상대로 잠깐의 정차 시간 동안 부랴부랴 장사를 해내느라 바쁜 아이들과 마주치게 된다. 자신에게는 아주 작은 푼돈이었지만 소년에게는 큰돈이었을 100루피아. 70엔에 해당하는 그 돈으로 산 바나나. 가난하지만 맑고 투명한, 그리고 건강한 눈을 가진 아이들의 모습이 주인공에게도, 그리고 독자에게도 깊이 각인 된다. 유적지에서 만난 한 아이는 made in Japan이라고 쓰인 플라스틱 장난감 카메라를 갖고 있었다. 주인공이 사진을 찍자 자신도 찰칵! 사진을 찍는다. 소년은 자신의 카메라에 필름을 넣어달라는 시늉을 하는데, 그 카메라는 필름을 넣을 수 없는 장난감이었다. 주인공은 아이가 상처를 받지 않도록 배려하느라 자신의 카메라에서도 필름을 빼내어 찍히지 않는 사진을 찍는다. 비록 사진은 담아갈 수 없지만, 아이의 맑은 눈망울은 필름 대신 가슴에 깊이 새길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의 마음을 생각해 주고, 아이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어 간 인물의 마음씀에 독자인 내가 고마움을 느낀다.
네번째 이야기는 학교와 선생님이 곧 배경이다. 임신을 했다는 여선생님은 특수학급을 맡을 수 없다고 울어버렸고, 덕분에 나서서 아이들을 맡게 된 선생님. 반 아이들은 모두 7명이다.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음에도, 선생님은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부던히도 애썼다. 동물의 울음소리를 녹음해 와서 아이들에게 반복해서 들려주고 동물의 생김새와 움직임을 재현해 보인다. 따라와 주는 아이들도 있지만 여전히 반응 없는 아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체육 시간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 운동장 사용권을 쟁취(?)해내고, 모래굴을 함께 파본다.
한 번은 가슴 아픈 일이 있었는데 학생 하나가 절의 주지에게 맞고 넘어져서 오른발에 가벼운 상처를 입은 것이다. 주지는 국보로 지정된 불상이 안치된 본당에 아이가 기어들어갔다고 했는데, 어차피 말을 알아먹지 못할 터이니 주먹으로 강제력을 보인 것이다. 아이는 부처님과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인데, 그것을 부처님의 뜻을 전한다는 주지 스님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비단 그 절의 주지 스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우리들도 그렇게 나의 목소리와 귀만을 가지고 상대와의 소통에 힘쓰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던가.
가을 소풍 때 다케시는 물에 떠내려간 친구의 샌들을 주워주다가 자신의 샌들을 잃어버린다. 집 나간 어머니께서 주셨던 그 샌들을 찾고자 댐 아래까지 내려가려는 아이를 선생님이 붙잡는다. 엄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먀'라고 외치는 아이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내게도 들린다. 장애 때문에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다 표현하지 못해도, 아이도 엄마를 그리워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뿐이던가. 친구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쓰는 기특한 모습도 보여준다. 모두가 갖고 있는 '소리'를 갖지 못했음에도 제 안의 울림을 '소리'로 전하려고 한 아이의 아픈 마음이 글자를 통해 독자에게로 전달된다. 작품 <소리>였다.
마지막 단편도 학교와 선생님, 그리고 학생들의 이야기인데 역시 '소통'의 부재가 등장한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오기와 자존심만 살핀다. 상처입히는 말을 거침없이 하고 노골적으로 차별까지 한다. 그런 모습에 주인공은 부당함을 느끼지만 모범생으로 살아온 자아는 항변할 줄을 모른다. 사실,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상하관계로 나타나기 때문에 부당함에 대해서 학생들이 항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그 지각만으로도 다소 안심이 드는 기분이다. 아이들의 판단이 미숙하고 때로 옳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옳다고 믿은 생각을 밀고 나가려고 연대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작품 속 주인공의 아버지도 선생님인데, 그 아버지가 부득불 매로 다스렸지만 그 아버지가 깨우쳐주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주인공은 어렴풋하게 알아차린다. 그래서 자신을 때린 아버지가 몹시 미웠지만 동시에 그 이상으로 좋아한다.
작품을 보면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사용해야 할 '언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수업 시간에 나는 항상 존댓말을 쓰는데, 학생들도 존칭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말씨가 주는 '힘'도 믿기 때문이다. 말을 함부로 하게 될 때 상대도 함부로 보게 될 소지가 크다. 학교에서, 또 수업이 책임져야 할 많은 것들 중의 하나가 성적이고, 그것이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것이 또 전부는 아님을, 교사도 학생들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교육 현실에선 지켜지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 원칙을 잊어버린다면 학교의 존재 이유도 같이 사라진다.
아이들은 친구의 어려움을 돕고자 힘을 보탰지만, 그것이 그 친구가 어떻게 받아들일 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의도된 것이 아니라 경험의 미숙에서 온 실수였다. 그것을 집어준 아버지의 어른스러움이 멋졌다. 아이를 때린 것은 동의할 수 없지만!
작품 다섯 개는 모두 친근하게 읽히며 잔잔한 감동과 깨달음도 함께 선사해준다. 정해진 결말을 표방하지 않으며 '어, 끝났어?'란 느낌으로 마무리가 되는데 그같은 열린 결말도 나쁘지 않다. 독자로 하여금 좀 더 생각할 여지를 주니 말이다.
작가 하이타니 겐지로는 학교와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에 대해서 무한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신 분이었다. 그분의 이력을 보지 않더라도 글속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그런 선생님이, 또 그런 작가가 계셨다는 사실에 고마움과 자부심을 느낀다. 그분의 책을 꾸준히 펴내는 양철북 출판사도 아름답다. 독자는 엄마여도, 학생이어도, 혹은 그 무엇이라도 어려서 학생이었고 자라서 어른이 된 사람들일 터이니, 누구라도 이 이야기들에 깊은 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지만 큰 저항, 소통의 부재와 존재, 그리고 연민과 연대에 대해서 생각하며 독후감을 마친다. 서로가 웃는 모습으로 '안녕'을 말할 수 있는 세상을 그려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