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려낙원국 1 - 도적 포획기
김종광 지음 / 예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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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허생전은 효종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김종광의 허생 이야기는 영조 말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홍길동이 세웠다는 율도국의 지도를 어렵게 마련한 허생이 과일 장사와 말총 장사로 번 재화를 기반으로 변산의 도적떼를 모두 데리고 제도로 들어가 그곳에 낙원을 만들어 '율려국'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게 기본 설정이다.  그렇다면 그 율려낙원국에서 백성들은 진정한 유토피아를 맛보며 모두가 평등하게, 아름답게 잘 살았을까?  그랬다면 두권 분량의 책이 나왔을 것 같지 않다.  어쩌면 재미가 없었을 지도..;;;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를 미셸 투르니에가 비틀어 패러디 소설을 쓴 것처럼, 작가 김종광도 패러디 문학 허생전을 재차 패러디하여 파란만장한 낙원 건설기를 독자들에게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이것은 율려낙원국 300년 역사의 초창기 일년에 해당하는 내용일 뿐이란다.  작가가 평생에 걸쳐 구축할 그 세계의 초반 이야기 맛뵈기에 불과했다는 것.

1권은 조금 시쿤둥하게 읽은 편이다.  모순으로 점철된 인간 군상을 보여주는 데체 많은 지면을 할애했기에 등장인물들의 변화하는 심상이 거의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낙원을 건설하겠다 큰 소리를 친 허생은 '평등사회'를 말하지만 그 자신이 이미 양반 지상주의자였고, 변산의 도적떼들은 출신이 한미하고 살아온 과정이 험했다 하지만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자가 너무도 많았다.  변산의 4천 도적떼가 순순히 허생을 따라온 것이 아니기에 그 과정에서 피흘림이 있었고 알력도 오갔지만, 어쨌든 그들은 신기루가 등장하는 험한 뱃길을 뚫고 제주도만한 큰 섬과 울릉도만한 섬 네개와 그밖에 여러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제도에 무사히 도착한다.  그곳에는 풍랑을 만난 왜구의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도 모순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허생은 왜구를 죽이는 데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인간 대접해 주지 않았고, 그들을 노예 부리듯 하는 율려국 사람들의 처사를 방관했다.  그가 주장하는 평등과 자유는 매번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았고 공평하지가 않았다.

그래도 처음 몇달 간은 이 새로운 세상이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공동 조직 두레가 제 기능을 발휘했고, 사람들은 집을 짓고 땅을 일구고 열심히 노동에 종사했다.  기후 좋고 땅도 기름진 그곳은 오곡이 풍성한 땅이었다.  곧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했고, 조선에서 굶주리고 헐벗고 살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이들은 기름진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허생이 낙원을 건설하면서 반드시 금지해야 한다고 다짐한 것이 네 가지가 있는데, 술/도박/간음/종교였다.  이 네가지가 꿈틀 대면 제도가 무너지고 사회 기강이 흩어지고 힘들게 이룩한 모든 공이 다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방지하거나 처벌하는 데에 있어서 문제가 많았다.  걷잡을 수 없이 온 섬에 네 가지의 광풍이 휘몰아치자 '독재정치'로 둔갑을 해버렸던 것이다.

허생의 경고를 허투루 들은 자들은 한쪽 손목아지가 잘리거나 양쪽 손목이 잘렸고, 그 다음에는 모가지가 잘려나갔다.  공포정치는 무고한 희생자도 내었고 교묘히 피해 나가서 화를 면하는 자도 생겼으며 억울한 연좌제도 만들었다.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무수한 경찰이 탄생했고, 이들은 권력을 손에 쥐면서 조선에서 보았던 무수한 탐관오리들을 답습하였다.  오로지 허생만이 눈멀고 귀멀어서 자신의 충복들이 가장 썩은 무리들이라는 것을 모른다.

허생은 공동생산을 시켰지만 공동소유가 아닌 개인소유를 인정했다.  그리하지 않고는 열심히 일할 의욕을 잃어버릴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개인소유가 인정되자 그 소유물로 투기가 벌어지고 대부업이 발생하고 분쟁이 발생했다. 이건 단순이 공동소유냐 개인소유냐의 문제 이상의 갈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산주의 국가라고 해서 다툼이 없을 수 없고 자본주의 국가라고 해서 열심히 일한 대가 그대로를 모두 갖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허생이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것저것 다 해보는 그 율려낙원국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시대를 말하고 있지만, 오늘날 현대에서 볼 수 있는 '주의'와 '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몇 주전 이 책을 읽은 어떤 사람이 책이 슬펐다고 했던 이유를, 2편까지 다 읽으면서 나 역시 느낄 수 있었다.

그곳은 기존 조선과 달리 수탈하는 양반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환곡 곡식 갚느라 자식을 팔아야 하는 세상도 아니었는데, 노역에 시달리느라 제 양물을 잘라내어 눈물 흘려야 했던 곳도 아니었는데,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본시 그토록 욕심 많고 사나운 까닭일까.  사람들은 만족할 줄을 몰랐고, 반성할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무조건 억압하여서 술을 금지하고 도박을 막고 간음과 종교를 엄금한다고 해서 해결이 될 일도 아니었다.  허생 자신도 술 좋아하고 계집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섬에서 빠져나가고자 하는 무리들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그 소동이 가라앉고, 제일 먼저, 또 그들 중에서 가장 뭍으로 돌아가고 싶어 병이 난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허생이었다.  그는 결국 후임을 결정하고 섬을 떠나기로 하는데 후임을 결정하는 모습에서도 양반 지상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를 장군님이라 부르며 신처럼 떠받들던 섬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코웃음치고 비웃기도 했지만, 막상 그가 떠나겠다고 하자 어버이 수령님을 잃은 사람 마냥 어쩔 줄을 몰라하며 혼란에 빠진다.  물론, 그렇다고 아니 갈 허생은 당연히 아니지만.

작품은 허생이 그곳을 떠나는 대목에서 끝이 난다.  그의 뒤를 이은 2대 장군, 3대 장군의 이야기는 작가의 다음 책을 기다려야 볼 수 있다.

비록, 무수한 도륙이 있고 싸움이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조선에서보다 훨씬 나아진 삶의 꼴로 섬에 남았다.  굶어 죽던 조선의 삶을 그리워하지 않는 이가 더 많은 곳이 그곳 율려국이었다.  허생이 비록 나라를 세웠다고는 하지만 그의 경륜과 철학이 완전히 무르익지 않았고, 때문에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 시간이 흐르면서 율려국은 점차 낙원으로 성장해 갈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조선보다는 말이다.

하지만 또 인구가 너무 늘어버린 그 섬은 어느 순간 악다구니의 현장이 될 소지도 충분히 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낙원을 이룩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끝맺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이, 나로서는 도통 들지 않는다.  그만큼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욕심의 크기를 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 사실이, 몹시 슬퍼졌다.

작가는 좀 더 유쾌한 기분으로 유쾌한 필체로 작품을 써내려간 듯한데, 고흐의 그림을 표지로 쓴 예쁜 겉표지도 몹시 인상적이고, 제목도 예쁘기 그지 없는데 나만 홀로 심각한 듯하다.  작가의 길고도 긴 여정이 이제 시작되었으니, 다음 이야기를 진득하니 기다려야겠다.  다음 제목은 '홍장군 연대기'란다. 비록 마법은 아니 나오지만, 이 시리즈... 충분히 판타지스럽다.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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