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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화
조두진 지음 / 예담 / 2008년 1월
평점 :
조두진 작가와의 두번째 만남이다. 역사소설로서 <도모유키>를 만났었는데, 느낌은 평범했었다. 문체도 올곧이 본인의 것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조급하다는 기분도 들었다. 똑같이 사랑과 순애보, 사람의 도리 등을 이야기하지만 이번 작품이 훨씬 농익은 듯한 느낌이었다. 자연스럽고 애틋하고, 그리고 마음을 울리는 느낌도 더 컸다.
전쟁이란 너무 많은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개죽음 당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요, 전쟁을 방관해놓고 수습도 못하는 입만 살아있고 무능력한 임금에게도 그랬으며, 전쟁의 포화를 온 몸에 받아내며 살아남는 것만이 최후의 목표가 된 힘없는 민초에게도 그러했다.
철영은 대과를 준비하던 선비였다. 2차 진주성 싸움 때 그는 병든 아이보다도 나라와 사직과 임금의 안녕을 더 걱정했다. 열이 펄펄 끓는 아이를 위해 의원을 모시러 갔던 그는, 의원을 찾지 못하고 그 길로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성은 함락되었고 그는 포로가 되었다. 진주성에서 도망쳐 나온 양민 일가는 그 덕분에 가족을 잃었지만 오히려 원수를 은혜로 갚아준다. 나라를 위해서 목숨 쯤 가볍게 버려야 한다고 외치던 철영이었지만 막상 왜군 손에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는 제 앞가림 하느라 바빴다. 굶주린 뒤에 양반의 체모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러나 한학에 관심 많은 어느 사무라이 덕분에 철영은 일본에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되고, 앞서 일본으로 잡혀왔을 것이라 짐작된 아내 찾기에 목숨을 걸었다.
한편, 앞서 일본으로 잡혀와 농노가 되어버린 아내 유이화는 모진 시간을 견뎌야 했다. 이미 진주성에서부터 왜놈의 몸을 받아야 했던 그녀에게 미모따윈 오히려 저주에 가까웠다. 게으른 농꾼 덴카이의 집에서 사무라이 사에키에게 능욕을 당하기도 했지만, 이미 절망도 체념도 잊어버린 그녀에게선 감정을 읽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녀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된다. 도모유키- 일본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만난 그는 반듯한 이마를 가진 이화에게 반했고, 마음에 새겨두었다. 일 년여의 시간이 흘러 다시 이화를 만난 그는 전 재산을 털어 이화를 사들였고, 자신의 초가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하루 벌어 하루 쓰고 인생의 의미 따위 몰랐던 그가, 이화를 만난 뒤 부지런히 일하고 아끼고 열정을 다해 삶을 꾸려나갔다. 이화 역시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미 잃어버린 첫 아이가 눈에 밟혔지만 산 사람은 그렇게 살아진다.
작품의 중간중간에는 선조와 그의 신하들의 탁상공론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대화가 자못 재밌다.
-설령 죄가 없다고 해도 임금이 '네 죄를 아느냐?'라고 물으면 임금이 미처 생각하지도 않았던 죄를 줄줄줄 나열하는 것이 백성된 자,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닌가.
-합천의 깊은 산에서 새벽이슬과 여린 풀을 먹고 살았으니 그는 신선이나 다름없으며, 따라서 신선처럼 날아다니며 왜적을 쳐부술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신선에게는 군함도 병졸도 군량도 필요하지 않음을 고했다. 배도 병졸도 군량도 없는 조선수군에게는 가장 적임자라고 덧붙였다.
-군율을 어기는 자는 장졸을 막론하고 처단하여 군율이 시퍼렇게 살아있음을 알리라. 그대에게 함대와 병졸이 없음을 내 안다. 그대는 속히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라. 못대가리가 없음을 내 안다. 그대는 속히 대장간을 돌려 못대가리를 만들라. 쇠가 없음을 내 안다. 그대는 속히 솥과 괭이를 녹여 쇠를 만들라. 솥과 괭이가 없음을 내 안다. 그대는 속히 함대의 못을 빼고 녹여 솥과 괭이를 만들라. 전쟁으로 남도 산하에 큰 나무가 없음을 내 잘 안다. 그러나 그대는 이를 한탄하지 마라. 속히 작은 나무를 심어 부지런히 물을 주어라. 또한 나무가 자라기를 기다리지 말고 잡아당겨 바삐 자라게 하라.
이런 식이다. 그들의 말싸움과 그들의 행보에 대한 설명들은 거침없는 풍자로 읽히는데 너무 기막혀서 웃음이 나오고, 그래서 더 쓰라리다. 저렇게 형편없는 군주를 살리겠다고 개죽음 당한 조선 백성이 가엾고, 저런 나라를 떠받치느라 희생된 시간이 가여울 지경이었으니.
도모유키와 아시타(유이화의 새 이름. 내일이라는 뜻)의 행복한 삶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의 미모가 이번에도 문제된 것. 그러나 둘의 사랑은 지극했으니, 도모유키가 한 다리를 절룩이는 것으로 둘은 목숨을 부지한다. 철영은 병적인 집착을 보이면서 아내 찾기에 열을 올렸고, 결론을 얘기하자면 끝내 아내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들 세 사람의 행보는 독자들이 짐작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결말을 짐작했다고 해서 시시하게 끝나지는 않는다. 작가가 갈 수 있는 최선의 길로 곧장 걸어갔다고 보면 될 것이다.
책 속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사람의 도리와 염치, 체면 등의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철영은 목숨 빚이 있었던 박동구가 몸을 버린 까닭에 삶을 버리려 한 제 아내에게 야단을 쳐달라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을 해달라는 부탁을 져버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도 조금은 철이 들어, 일본 땅에서 만난 신이라는 여자에게 지킬 수 없는 약속임에도 돌아갈 길을 알아봐 주겠노라 허튼 약속을 해준다. 비록 그 여인의 신산한 삶이 바뀌어지진 않았지만 조금이나마 희망을 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철영은 또 한심한 작태를 보였으니, 사무라이 옷을 입고 사무라이 대접 받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으면서도 자신이 무도하다 욕한 사무라이의 행태를 어느덧 닮아가고 있었던 것.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지만, 제 아내와 아이를 사랑하고 제가 일한 대가에 대해 당당히 말할 줄 알았던 도모유키의 당당함이 오히려 더 선비다웠다.
아시타가 조선에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당당히 항변할 때, 죽은 아이 편윤이에 대한 얘기만 늘어놓았는데, 좀 더 따끔한 충고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바라봤기에 느껴지는 아쉬움일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 몹시 인상적이어서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전쟁 씬이 크게 나오지 않으니 대규모 물량공세를 펼 필요는 없을 듯하고 다만 일본 의상이라던가 일본에서의 촬영은 필요할 테지. 혼자 너무 멀리 가버렸다. 순애보 사랑과 치욕스러웠던 역사의 장면들이 떠올라 괜히 감상에 젖었나보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안철영의 실제 역사적 인물로 모델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실존 인물 이진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아들의 스승이었으며 그의 무덤이 해선사 입구에 있다 한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작품의 재미가 더 커진 느낌이다. 유이화라는 이름도 예쁘지만 아시타라는 일본 발음도 참 예쁘다. 아시타 아시타...
작가 조두진은 유독 임진왜란 시기, 혹은 그 무렵의 조선사에 관심이 많은 듯한데, 그의 역사소설에 대한 관심이 반갑다. 보다 진일보한 글쓰기를 보여주었으니 다음 작품도 기대가 된다. (참, 표지도 무지 이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