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적 가족윤리는 패륜이야
[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가족을 사설 자선단체인 줄 아는 생모와 동생에 관한 에피소드에 답한다
 
 
한겨레  
 








 

» 가족을 사설 자선단체인 줄 아는 생모와 동생에 관한 에피소드에 답한다
 
사람을 가장 힘들 게 하는 건 언제나 사람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가족이다. 보자.


1. 삼십대 직장인입니다. 다섯 살 때 아버지 여의고 생모가 개가하여 성인이 될 때까지 딱 두 번 봤고, 조부모 밑에서 내내 컸지만 불행하다 느껴본 적 없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성인이 된 후 시작됐습니다. 생모가 ‘다시 홀로’ 되어 여동생들과 함께 살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너무나도 맞지 않아 전 다시 조부모댁으로 갔고 3년 전 결혼까지 했는데, 그때부터 생모와 여동생들이 시집노릇을 하며 제 집사람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혼수 문제로 난리가 나 신혼여행 돌아오는 날부터 각서를 써야 했고, 아내를 너무나 구박해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하며 혼자 밤새 운 일도 있습니다. 게다가 생모는 하는 일 없이 카드를 계속 써 여동생과 매제까지 신불자가 된 상태고, 저 역시 몇 해 현금서비스 돌려막기로 그 빚 갚아주느라 돈 한 푼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전엔 거짓말까지 해 집사람 카드마저 가져다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정말 힘든 건 당장의 어려운 경제사정이 아니라 바로 이기적 친모로 말미암은 정신적 고통입니다. 이 고초를 묵묵히 견뎌 온 제 착한 아내에게도 너무나 미안할 뿐입니다. 어떻게 제 삶을 찾을 수 있을까요? 이민 가야 할까요?


생모, 사연, 있을 수 있다. 그녀 인생 역정, 만만찮게 기구했을 수 있다고. 그러니 그녀 삶에다 대고 섣불리 주석 달진 말자. ‘다시 홀로’ 된 후 재결합, 재결별 한 거, 거기까지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변이다. 문제는 생모라는 자격을 친자에게 사회경제적 무한결제 요구할 천부의 채권으로 여기는 대목, 바로 거기서부터 발생한다. 피치 못 할 의탁을 미안해하거나 최소한 남세스러워라도 해야 하는 게, 생모고 나발이고 떠나 한 인간으로 마땅한 염치다. 더구나 자기 살 길 찾아갔던 처지면, 친자에 대한 권리도 함께 두고 갔던 거다. 잘했다 못했다가 아니라, 이치가 그렇단 거다. 그런데 그런 친자의 법률혼 상대에게까지 일방적 권리행사라니. 그거 시집살이 아니다. 행패다.


물론 양육기간 불문하고 생모는 마땅한 감사 대상이다. 내 존재를 가능케 했으니까. 하지만 생모라는 이유만으로 친자 인생을 그녀 삶의 번제로 요구할 자격은, 결코 없는 법이다. 그러니 감당 가능한 액수 정해 정기적으로 원격 지원하되, 왕래는 끊으시라. 그거 패륜 아니다. 친자를 보험 취급하는 게 정말 패륜이지. 당신은 죄 없다.



2. 공부 못해 대학 못 간 저와 달리 명문대 3학년인 동생이 있습니다.부모님도 집안자랑으로 여기시고 저도 무척이나 대견해합니다. 그런 동생이 유학을 가겠다고 합니다. 문제는 집안 형편이 안 된다는 겁니다. 처음엔 안 된다 하시던 부모님이 동생이 매달리자 결국 동생 유학비 보조해 줄 수 있냐는 말을 제게 어렵게 꺼내시더군요. 전세 줄여 이사 가도 모자란다며. 전 그동안 직장생활하며 6년 동안 결혼비용을 저축했고 이제 석 달 후면 애인과 결혼하기로 날짜까지 잡혀 있었거든요. 곤란해하시는 부모님 면전에 차마 거절은 못하고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이후 부모님은 제 눈치만 봅니다. 동생은 제 앞에선 아무 말 않지만 이미 친구들한테 알리고 준비하느라 신이 났구요. 하지만 오늘도 몇 번이고 통장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망설이는 제가 이기적인 건가요.


결혼날짜 정해 졌다면 알고 있었겠네, 동생도. 그 돈, 형 결혼자금이란 거. 근데 신나한다고. 이런 씨바. 돈, 주지 마. 자기 위해 형의 삶이 통째로 지체되는 걸, 당연할 걸로 치부하는 정도의 싸가지 위해, 당신 인생 유보할 필요, 뭐 있나. 그래봐야 겨우 공부 좀 잘한다는 게 남 밟고 서도 좋단 허가증이라도 되는 줄 안다.


도저히 마음이 불편해 안 되겠다. 그럼 부모 빼고, 동생하고 직접 담판해 보시라. 현지 가서 스스로 벌며 공부할 수 있겠냐. 그 해법, 찾아지면, 그때 가라. 가서 노력 하다 하다 도저히 안 되겠으면 그때 연락해라. 그 부족분만큼은 빌려 줄 수 있다. 그리고 그때 역시 부모님이 아니라 내게 직접 연락해라.


 

»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그렇게 성인남자 대 성인남자로 결론 보시라. 다 큰 새끼가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어서 어리광인가. 계속 징징거리면 죽통을 날려 버려라.


3. 생모도 동생도, 가족이 자신을 위한 사설 자선단체인 줄 안다. 자신의 몰염치와 이기심을 오히려 가족의 권리인 줄 안다. 인간관계에 이만한 착각도 없다. 이 도착적 가족윤리, 자본주의 출현, 사생활의 탄생과 더불어 발명된 ‘신성한 가족’이란, 근대의 가족신화로부터 도출된 거다. 이 신성한 가족주의의 허구에 대해선 담에 폭로키로 하고. 오늘 여기서 결론 내자.


존재를 질식하게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관계에서 윤리는 잊어라. 지킬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


김어준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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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1-04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에 대한 '예의'란 말이 사무친다.T_T

2008-01-04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4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4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4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01-05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인간이 된 사람은 이런 막된 요구를 절대 할 수 없지요.
슬픈 현실이군요. 내 삶을 저당잡히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싶군요.

마노아 2008-01-05 02:05   좋아요 0 | URL
'가족'이라는 이름이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커다란 힘이 되어줄 때가 분명 있지만 도리어 굴레가 되어 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에선 그게 특히 심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