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품절


"나가자"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꺼냈다. "내가 낼게."
가난한 사람은 이렇게 해서 좀더 가난해진다. 그들은 가난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결국 더 가난해진다. 가난을 숨기기 위해 '남들 다 하는 것'을 하고 그 '남들 다 하는 것' 때문에 빚을 지고 그 빚을 갚느라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163쪽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야. 안 그래?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고 토익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영화 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맞아, 너도 피아노 치지 않아? 독서량도 우리 윗세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아. 우리 부모 세대는 그중에서 단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평생을 먹고살 수 있었어.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193쪽

우리는 80년대에 태어나 컬러 TV와 프로야구를 벗삼아 자랐고 풍요의 90년대에 학교를 다녔다. 대학생 때는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2002년 월드컵에 우리나라가 4강까지 올라가는 걸 목격했다. 우리는 외국인에게 주눅들어보지 않은, 다른 나라 광고판에서 우리나라 배우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첫 세대다. 역사상 그 어느 세대보다도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문화적으로 세련되었고 타고난 코스모폴리탄으로 자라났다. -193쪽

우리는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랐고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직업이 없다. 이게 말이 돼?-194쪽

나는 연필을 들고 백지 위에 적었다.
돈이 필요해.
그랬다가, 누가 볼 것도 아닌데, '돈'이라는 글자가 상스러워 보여 그것을 지우고 그 아래에 '직장'이라고 써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적절치 않은 것 같아 다시 지우고 '직업'이라고 썼다. 직장은 없어도 되지만 직업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195쪽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식의 고통에 대처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부자에게도 부자의 고통이 있을 것이고, 가진 자라고 덜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진 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법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치 고통이라고는 없는, 퇴폐와 환멸, 끽해야 허무 속에서 허우적대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 고통에 공감하려고 해도 그 공감이 받아들여질지를 알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들이 정색을 하고 "네가 어떻게 그 고통을 알아? 그걸 가져본 적도 없으면서"라고 물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런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를 것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는 애초부터 넘을 수 없는 정서적 갭이 있다. 남들 다 가진 부모도 못 가져본 나는 사춘기 이후로 언제나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207쪽

"나는 그게 우리 세대의 특징이라고 생각해. 자기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굳게들 믿고 있어."
"그렇게 생각해?"
"너무 지나친 기대에 대한 일종의 피로가 있는 것 같아. 어려서부터 너무 많은 기대를 받아왔잖아. 부모, 선생, 광고, 정치인 심지어 서태지까지 우리한테 '네 멋대로 하라'고, 원하는 걸 가지라고, 그렇게 부추겼잖아. 피아노 조금만 잘 치면 음악하라고 하고, 글 좀 잘 쓰면 작가 되라고 하고, 영어 좀 잘하면 외교관 되라고 하고...... 언제나 온 세상이 회전목마처럼 돌아가면서 끊임없이 물었던 것 같아. 네가 원하는 게 뭐냐고. 뭐든 하나만 잘하면 된다고. 그런데 그 '하나'를 잘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결국 사람들을 자꾸 실망시키고, 그러다보니 언젠가부터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돼버린 것 같아. 그리구......"-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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