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제목이 주는 느낌이 묵직하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니... 사라질 수 없는, 사라져서는 안 될 사람들을 힘주어 꼽아보는데, 애석하게도 이 책에 등장한 47인의 이름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졌거나 혹은 젼혀 알려진 바 없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20세기의 거대한 혼돈과 독재라는 재앙에 맞서 싸우거나 혹은 저항했던 이들인데,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들의 이름이 낯설거나 혹은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다.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언급하기 때문에 1인당 큰 지면을 할애하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의 마지막 장면, 그리고 그 사람이 태어날 때의 배경, 그리고 성장과정과 행적 등을 짧고 굵게 지나가면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혹여라도 그들의 생애에 더 관심이 간다면 참고도서로 올려준 책들이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내 경우 참고도서 다음에 실어준 보충 페이지가 더 인상 깊었는데, 본문 속에서 언급된 사람 혹은 사건 등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아마도 출판사에서 덧붙인 참고자료가 아닐까 싶은데 쉽고 간결하게, 압축적인 문장으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을 잡아주었다.
책에 등장한 사람들은 독재와 전체주의, 부당한 폭력과 차별에 항거하거나 혹은 거기에 저항하는 의미로 자살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자아와의 고된 싸움 끝에 분열된 모습을 보여주거나 비참한 종말을 맞기도 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위인'의 반열에 충분히 드는 사람들도 있지만 꼭 거기에 맞춰지는 느낌은 아니다. 누군가에게선 본받아 마땅한 교훈을 얻을 수 있겠지만, 또 누군가를 향해서는 아련한 동정과 긍휼의 마음을 느낄 수 있고 어떤 면에선 반성으로 조용한 사색의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도 느낀다.
개인적으로는 앞쪽에 등장한 스페인 내전에서 용감히 싸우고 또 희생되었던 사람들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독재자에 항거하다가 스러진 인물들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파블로 네루다나 파블로 카잘스보다 프랑코나 피노체트 같이 악명을 떨친 인물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모를 일이다. 독재자는 이곳이나 그곳이나 반성 없이 보상 없이 저 세상으로 갔는데, 남겨진 희생자들은 여전히 그 가난과 고통을 되물림하고 있고, 독재자들의 후예들은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 현실에는 답답한 한숨이 치민다.
나치 치하에서 수용소 생활을 겪고도 살아남은 시대의 증언자 프레모 레비. 그러나 남은 생애를 온전히 살아내기엔 그가 겪었던 치욕의 깊이가 너무도 어두웠다. 그의 마지막은 자살로 마감되어졌으나 그의 저작물들은 여전히 남아서 '증언'을 멈추지 않고 있다.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보다 더 내 기억에 오래 남아있는 이름인데, 사형에서 무기형으로 형이 감면되자 오히려 그 사법조치를 치욕으로 알고 자살을 택한 그녀. 그녀은 천황의 이름으로 '은총'처럼 부여된 삶을 온 몸으로 거부한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자들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들의 죽음'도 빼놓을 수 없다. 나치 독일의 만행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당당하게 선전물을 뿌렸던 숄남매. 그들은 자신들이 죽으면서 사람들을 자극시켜 분연히 일어날 것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유연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그들의 죽음에 환호하는 군중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단시간 내에 평가되지 않는다. 결국 독일은 전쟁에서 패배했고, 전쟁 발발과 학살에 대해 깊이 사과했으며, 그들의 과오는 역사책 바깥에서도 자연스럽게 회자되고 있다.
책의 맨 마지막에는 70년대 군부 독재에 의해 정치범으로 모진 옥살이를 해야 했던 두 아들을 둔 어머니. 바로 저자의 어머니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식민지배와 가난에 휩쓸려 이국땅 일본에서 터전을 잡고 열심히 살았던 그녀이지만, 해방 후 조국도 일본도 편안한 안식처가 될 수는 없었다. 재일 조선인으로서의 한계를 자각하며 조국에서 공부하기를 희망했던 두 아들은, 그러나 부르기도 버거운 조국 땅에서 죄인의 탈을 쓰고 말았다. 사상전향을 설득할 것을 강요당했지만, 배움이 없었던 어머니는 그것이 자신이 해서는 안될 몫이라고 판단하셨다. 결국 아들들이 풀려나기 전에 먼저 세상을 등진 어머니이지만, 자식 사랑에 눈이 어두울 법도 한 그녀에게도 세상의 부조리는 완연히 눈에 비친 모양이었다. 그렇게 '저항'은 혈기 왕성한 젊은 청년들에서부터 등굽은 어머니에게까지 모두의 몫이 되어 있었다.
인류의 역사는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었음에도 지난날의 폭력과 부조리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껏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그 땀과 피눈물을 아직도 요구하는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덜 순진해졌고 훨씬 더 약아졌으며 감동에 무뎌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투쟁하는 시대의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 기억을 올곧이 안고 가는 것 또한 작은 투쟁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명확한 감시와 전달, 그것이 우리에게 놓여진 가장 기본적인, 동시에 필수적인 사명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 또한 역사의 한 부분으로 남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