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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평점 :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서경식씨가 우리 말을 못하는 줄 몰랐다. 그러니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온 책이라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저자의 할아버지는 일제의 식민 지배 시절 일본에 건너가 철도 노동자로 일을 했다. 할아버지는 해방 이후 조국으로 돌아가셨지만, 그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생활비를 부담해야 했던 아버지는 귀국을 하지 못하셨고, 한국전쟁으로 그 길도 끊어져 버렸다. 그리하여 1951년생인 저자는 일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아이로 자라게 되었고, 조국어에 대한 일종의 부채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친구들과 뛰노는 것보다 집안에서 책 읽는 것을 더 횡재로 여겼던 소년 서경식. 그러나 문맹인 어머니는 아이 경식에게 책을 읽어줄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어머니에게 책을 읽어주어야 하는 입장이곤 했다. 그런 소년 서경식의 평범한 바람은 잘 사는 부유한 부모를 갖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본인 부모를 가졌으면 했던 것.... 그것이 소년의 솔직한 소망이었고, 재일조선인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가장 일상적인 일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책읽기를 좋아했던 소년은 자신이 읽은 문구를 인용하여 수업 시간에 칭찬도 받아보았지만, 그 인용문의 내포된 의미라는 것이 제국주의 일본이 중국을 깔보는 입장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는 자신의 얕은 지식과 들뜬 허영을 반성하기도 한다.
아이의 치기어린 마음들은 변명하는 법 없이 솔직하게 구술되고는 했다. 명문고에 입학하고 탄탄대로의 길을 걷고자 했던 것에 '대의'보다 '엘리트 사회'에 진입하고픈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국적을 영어로 소개하던 시간, "I am a Japanese."라는 문장을 말하지 못했을 때, Korean이란 자각 위로 주위 사람들에게 동정 받고 싶고 주목 받고 싶은 욕망도 있었음을, 동시에 '조선인'이라는 것이 들통나고 싶지 않았던 순간들까지 가감 없이 밝히고 있다. 그건 지탄 받을 일도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은 충동이 독서 중에 일어나 버렸다. 경우와 범위는 다르지만, 우리의 성장기에, 또 이미 자란 뒤에도 그런 일들은 너무나 많으니까. 그 마음들을 위선으로 혹은 위악으로 가장하고 꾸미지 않았으니 그걸로 된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작가의 독서 편력기는 10여 년에 걸친 이야기로 데라다 도라히코에서 프란츠 파농에 이르기까지 전후 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소년 서경식에서 청소년 서경식으로, 다시 청년 서경식에 이르기까지. 그저 순수한 열정과 호기심으로 독서를 하던 이야기와, 재일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이 생긴 이후 고민하던 그의 모습이, 앞으로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잡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까지도 책과 함께 나누고 있다. 그 안에 평탄치 않은 가정 소사와 평범치 않았던 학창시절의 동아리 활동 등등이 얼기설기 이어져 있다.
소년이 아닌 어엿한 성인의 문을 통과하는 성인으로서의 독서 이야기가 실린 마지막 그의 깨달음은 독자에게도 깊은 여운을 주는데, 그가 프란츠 파농으로부터 충격을 받은 글귀를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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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만일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 양이면, 차라리 그 다리는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시민들은 예전처럼 헤엄을 쳐서 건너든가 아니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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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꿈이든, 비전이든, 목표든, 아니 그저 독서라고 할지라도, 하나의 '다리'가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의 땀이라면,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그 가치가 또 다른 아름다운 가치를 피워내지 않을까. 저자 서경식의 소소한 독서 이야기가 그저 흔한 책읽기에 그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저자 서경식의 독서 편력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책 읽기 좋아하는 한 소년의 성장 에세이이기도 하며, 재일조선인으로 성장한 그에게 덧씌어진 시대적 아픔과 모순의 일기장이기도 하다.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본인 작가의 이름들은 한국 독자인 내게 낯설며, 그의 관심 독서 목록이 나의 관심사로 옮겨오진 않았지만, 책 제목처럼 영혼을 적셨던 소년의 눈물은 내 마음을 적시기에 충분했다. 이후로 읽을 그의 책들에 좀 더 귀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이 이전보다 더 충분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