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지 8 - 전란은 끝이 없어라 김정산 삼한지 8
김정산 지음 / 예담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요동정벌의 실패에 속이 쓰라린 당태종 이세민. 살아 돌아간 것에 감사할 마음이 아니었다.  호시탐탐 다시금 고구려를 치고자 했으나 역부족.

전란이 잦으니 죽어나는 건 언제나 백성들이다.  백제와의 싸움으로 지쳐가는 신라 백성들.  이럴 때에 지배층이 부패하고 제 몸을 사린다면 백성들로부터 충성을 끌어낼 수가 없다.  그런 면에 있어서 신라는 이미 훌륭한 미덕을 지니고 있다.  화랑 정신으로 무장한 그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비녕자와 거진, 함절이 대표적인 예였다.

법흥왕, 진흥왕 때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그 후 신라는 백여 년간 몸살을 앓았다.  백제와의 숱한 싸움이 그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쳤던 것은 단순히 영토를 늘리기 위한 욕심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보다는 살아남으려는 본능이지 않았을까.  당시 신라는 삼국 중 그 모양새가 가장 초라했었고, 가장 지쳐있었고, 또 떨고 있었다.  외세를 끌어들여 이후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를 잃어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책임을 묻자면 그 땅을 지키지 못한 고구려의 실책이 더 크다고 해야겠다.  김유신이 말하기를, 요동은 스스로 망하기 전엔 누구도 취할 수 없는 땅이라고 했는데, 그 땅이 적의 수중에 넘어갔을 때에 비난을 들어야 하는 것은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맞을 듯.

김유신과 그의 애마 백설총의 에피소드는 제법 코믹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묵직하고 우직한 내용들의 연속이었는데 모처럼 이렇게 피식 웃을 때도 있다니 의외였던지 더 재밌었었다.

김춘추는 실로 외교를 위해서 태어난 인물 같았다.  인물 모양새는 달려도 그의 세치혀가 나라에 갖다 준 힘은 어마어마했으니...

이세민의 요동행을 아우 나라 신라를 위한 대업이었노라고 추켜세워줄 때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고마움과 미안함을 함께 표시하니, 이세민은 민망함을 감출 수 있었고 또 김춘추는 내미는 자신의 손을 부끄럽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  실로 그의 언변이 국가에 막대함 힘을 실어준 케이스.

한마디로 신라가 당에게 내준 것은 그들이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이었다. 당에게 필요했고 신라에게 필요한 것이기도 한 것.

두두리 거사로도 통하는 비형은 적재적소에 달려나와 위기 때마다 김춘추에게 도움을 주었다.  다분히 소설적 요소이긴 하지만, 독자로서는 긴장을 풀어주는 감초 역할을 톡톡해 해주고 있다.

잦은 전쟁으로 죽어 돌아오는 이도 부지기수요, 내리 훈련에 지친 병사들의 불만이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유신은 그조차도 지혜롭게 넘길 줄 아는 장수였다.  그가 먼저 술을 가까이 하며 게으름을 피우자 오히려 불안함에 두리번거리는 병사들.  이러다가 전투에 돌입하면 그대로 죽겠구나 싶어 오히려 김유신을 닦달하여 훈련을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로마의 명장 카이사르.  자신을 따르던 충성 부대가 파업(?)을 하자, 제대를 허락하겠노라며 '시민들'이라고 불렀던 카이사르.  오히려 군에 남게 해달라고 사정했던 그의 병사들.  지금 유신의 병사들이 꼭 그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게다가 사로잡은 백제 8명의 장수들의 목숨과 이미 죽은지 오래인 대야성 성주 김품석과 고타소의 유골을 요구하는 장면은 꽤 인상깊었다.  그의 배포와 덕을 알릴 수 있고, 병사들의 사기까지 올려줄 수 있으며 동시에 백제군을 한심하게 깎아내리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주었으니 그의 배팅은 실로 남는 장사였다고 하겠다.  용장이면서 지장임을 두루두루 보여주는 멋진 김유신!

반면 백제의 모양새는 나날이 나빠지고 있다.  굶주릴 때는 전쟁도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배부를 때의 전쟁이란 기피대상일 뿐.  군역을 빠져나가고자 뇌물이 오고가니 국가 기강이 해이해질 수밖에 없다.  신라가 보름달을 향해 차오르고 있는 중이라면, 백제는 보름달에서 막 기우는 입장에 비유할 수 있겠다.  훗날 통일 신라가 보름달에서 기울듯이.

도살성 전투의 접전은 꽤 치열했다.  함께 살지 못하니 함께 죽는다고 할까.  백제군이 죽은 만큼 신라군이 죽고, 신라군이 죽은 만큼 백제군이 피를 흘렸다.  천존과 은상의 싸움은 비장미가 느껴지기까지 했는데, 20년 만에 적진에서 다시 만난 장수들.  서로의 재주를 아끼는 그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함께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 비천무에서 오랜 친구 유진하와 남궁준광이 마지막 대결을 벌이던 그 장면처럼.(거기서도 한 명은 살고 한 명은 끝내 죽었다.)

백성들이란 국경 없이도 어디서든 살 수 있는데, 나라 싸움에 등떠밀려 목숨을 내맡겨야 하는 일이 고례로부터 비일비재했다.  그 사이에 충심이라는 게 있기도 하지만 또 없이도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그네들의 운명.  오늘날의 전선도 다를 바 없으며, 이라크에 파병되어 있는 우리 군인들 생각도 나서 내심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신라의 병사들이 충성스럽게 묘사된 것에 비해 백제 병사들은 극도의 개인주의로 몸을 사리는 존재들로 묘사되었는데, 사실이라 할지라도 위험한 시선이라 느껴진다. 

진덕여왕마저 죽고 그 뒤를 김춘추가 계승하게 되었다.  알천이 극구 자리를 마다한 덕분인데, 이 책에서는 알천이 충심으로 거절했지만 책에 따라서는 마지못해 사양했다고 나오기도 하여서 어느 쪽이 진짜인지 그 시대를 살지 않은 나로서는 장담할 수 없지만, 이 책에서 묘사된 분위기만 같더라면 김춘추는 실로 복받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진지왕이 폐위되지 않았더라면 자연스레 임금이 되었을 인물이 김춘추인 것도 사실이지만.

도살성 전투 이후 더 의기소침해진 백제.  고구려가 먼저 손을 내밀어 동맹을 강화했다.  왜 고구려는 백제를 향해 손을 뻗었을까?  동맹이 필요하다면 백제와 사이 나쁜 신라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신라가 백제를 치고 한강 지역을 고구려가 차지한다면 그도 나쁘지 않았을 법도 한데 말이다.  두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가 워낙에 견고하니까 당을 견제하기 위해서 백제를 선택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신라가 더 장수할(고구려에게 위험한) 나라라고 여겨서 먼저 꺾어버리려던 것이었을까. 

아무튼 동맹은 다시 강화되었고 전쟁의 막이 올랐다.  넋을 놓고 있던 백제를 먼저 치는 신라와 당.  어려서 해동증자라 불리며 총기가 남달랐던 의자왕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는 터라 전쟁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충성을 다하는 성충을 옥에서 죽게 만들고 흥수마저도 귀양살이를 시켰으니,  여기서 당태종 이세민과 의자왕의 그릇의 크기를 알 수 있겠다.  태종이라고 위징의 간언이 좋을 리 없었겠지만, 끝내 그의 말을 들으며 중용했었다.  그러나 의자왕은 옳은 말 하는 신하를 두고보지 못했으니 여기에서 이미 백제의 끝이 보인다.

3천 궁녀로 대변되는 의자왕의 진실.  작가는 십수명의 후궁에 300여 명의 궁녀들이 있을 정도라고 말해주면서 이 역시 김유신이 퍼트린 계책이라고 설명한다.  망국의 왕으로 기록된 것도 서글픈 일인데 삼천궁녀의 오명까지 써야한다면 불쌍하니, 그게 진짜는 아니라고 나 역시 꼭꼭 씹어 말해주고 싶다.

이제 9권에선 백제와 고구려가 무너질 차례다.  700년 사직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니 독자 입장에서도 허무하고 서글프다.

10권이나 되는 책을 언제 다 읽나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뒷심이 붙어 읽기가 수월해졌고 재미도 더 붙었다.

즐겁게 9권을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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