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7일 미국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새로 쓰는 사건이 벌어졌다. 배리 본즈 선수가 행크 아론 선수가 세운 통산홈런기록 755개를 깨고 756번째 홈런을 친 것이다. 그런데 마땅히 떠들썩해야할 언론의 반응이 미지근했다. 오히려 스포츠전문채널 ESPN은 야구 전문가 7명의 반응을 내보내 “대기록은 인정하나 위대함은 없다”고 평가절하했다.
배리 본즈의 기록이 이처럼 냉대를 받는 이유는 그의 홈런이 스테로이드를 복용해 만든 ‘약물 홈런’이라는 의심 때문이다. 88서울올림픽에서 캐나다 육상선수 벤 존슨이 약물복용(도핑, Doping)으로 금메달을 박탈당한 사건 이후로 운동선수의 약물 복용 사건은 잊을 만하면 한번 씩 등장하는 이슈다. 홈런 기록의 가치에 대한 논쟁은 뒤로 하고 운동선수의 도핑에 대해 알아보자.
도핑이란 운동선수의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약물을 복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운동선수에게 도핑의 유혹은 늘 존재한다. 미국의 한 스포츠 잡지가 국가대표 육상선수를 대상으로 ‘이 약을 복용하면 확실히 금메달을 딸 수 있는 대신 부작용으로 7년 뒤 사망한다. 당신은 복용할 것인가?’라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80%의 선수들이 복용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오랜 시간 땀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만큼 약물의 유혹도 크다는 얘기다.
운동선수들이 가장 많이 쓰는 약물은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남성호르몬과 비슷한 유사체로 단백질 합성을 촉진하기 때문에 근육을 빨리 만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운동선수와 보디빌더들이 단기간 몸을 만들기 위해 복용한다. 근육을 늘리는 효과 외에도 에너지 대사 속도를 높여서 단시간에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게 해준다. 또 적혈구 숫자를 늘려서 산소를 더 많이 쓸 수 있게 해 결과적으로 운동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의 분자 구조를 조금 바꾼 ‘디자이너 스테로이드’도 있다. 배리 본즈가 복용한 약물은 ‘테트라 하이드로 게스트리논’(THG)이라는 디자이너 스테로이드로 알려져 있다. 간단히 말해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와 같은 효과를 내면서도 구조를 바꿔 도핑 검사에 잘 걸리지 않도록 한 것이다.
‘혈압강하제’도 특정 운동선수에게는 큰 도움을 준다. 말 그대로 혈압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저혈압이 운동 능력 향상과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하겠지만 손 떨림을 줄여주기 때문에 사격, 양궁 같은 경기에서 매우 유리해진다. 이 외에도 격투기 같은 체급별 운동에서 체중을 줄이기 위해 이뇨제를 쓰기도 하는데 역시 금지 약물이다.
최근 유행하는 약물은 ‘에리스로포이에틴’(EPO)과 ‘성장호르몬’이다. EPO는 신장에서 생산되는 당단백질 호르몬으로 적혈구 생성을 촉진한다. 적혈구가 늘어나면 산소를 더 많이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지구력이 좋아진다. 마라톤, 자전거 경주, 철인 3종 경기 같이 지구력을 요하는 선수들이 많이 복용한다.
성장호르몬은 원래 대뇌 밑에 위치한 뇌하수체 전엽에서 분비되는 단백질 호르몬이다. 뼈를 성장시키고 대사를 촉진한다. 근육을 자라게 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스테로이드의 대체 약물로 쓰인다. 성장호르몬은 도핑 검사로도 찾기 힘들다. 원래 인체에서 극소량 분비되는 호르몬인데다 1시간만 지나면 분해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유전자 조작’이 새로운 도핑이 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근육을 만드는 유전자를 세포에 주입하면 근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과학저널 ‘네이처’는 내년 열리는 베이징올림픽에서 육상과 사이클 종목에 유전자 조작 선수가 등장할지 모른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쯤 되면 ‘스포츠 정신’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현재 국제 스포츠 기구는 약 200종 이상의 금지 약물 목록을 정하고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도핑 검사 기술도 나날이 발전해 아무리 교묘하게 조작된 약물도 대부분 발각된다. 이렇게 약물 복용을 엄격히 금지하는 이유는 스포츠 공정성을 위해서기도 하지만 이에 앞서 선수 본인을 위해서다. 스테로이드는 장기간 복용할 경우 심혈관계에 무리를 줘 심할 경우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다. 또 도핑 검사를 피하기 위해 만든 최신 약물일수록 부작용이 알려져 있지 않아 더 위험하다.
88서울올림픽 MVP이자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여자 100m 세계기록 보유자인 미국 육상 선수 그리피스 조이너스는 금메달을 수상한지 10년 뒤인 1998년 사망했다. 그녀는 당시 도핑 검사에 걸리지 않는 최신 약물을 복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동유럽 국가들에는 현재 스포츠 코치, 감독직을 맡을 50대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약물 부작용으로 1960~1970년대 뛰었던 선수들이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물론 약물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순수한 노력만으로 뛰어난 성과를 내는 운동선수들이 더 많다는 건 분명하다. 운동선수가 만들어 낸 신기록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유는 그 숫자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오랜 땀방울 때문이 아닐까. 선수와 코치가 이 금단의 유혹을 떨치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해 오래도록 바래지 않는 감동을 선사해 주길 바란다. (글 : 김정훈 과학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