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기억을 걷다 - 유재현의 아시아 역사문화 리포트, 프놈펜에서 도쿄까지 유재현 온더로드 1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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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은 누구나 인정하듯이 고립된 섬이었다. 남한은 정신적으로 제3세계의 일원이 된 적이 없으며, 그 과정을 생략하고 경제발전으로 OECD의 일원이 되었다. 오늘 남한은 그 머리와 심장을 천박하기 짝이 없는 하위제국주의의 울타리 안에 두고 있다.

민족주의가 숨기고 있는 인종주의는 全 아시아인을 남한족의 하위에 두고 있다. 그 시선에는 북한족도 포함되어 있다. 동아시아의 허브라는 허황된 자의식은 일본의 파시스트들이 그렸던 대동아공영권의 제국주의 정신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인가? 그 모방의 꿈은 이미 일본이 완성시킨 경제적 대동아공영권이 떨군 나락을 구걸할 뿐임을 확인하는 순간에 파탄할 것이다.

남한은 뒤늦게나마 아시아에 손을 내밀기보다는, 하위제국주의의 칼을 들이밀어 스스로의 미래를 포박하고 있다. 그러나 정점에 섬으로써 쇠퇴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시대에 미래는 미국과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한이 뒤늦게 발 아래 두고자 하는 아시아에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세계와 미래를 건설할 힘은 아시아에 있다. 남한의 미래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주도하는 자본과 시장의 아시아가 아니라, 핍박받는 아시아 민중의 신음 소리에 담겨 있을 것이다. 이게 남한이 아시아에, 아시아를 통해 세계를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하는 이유이다.-5-6쪽

아시아는 지리가 아니며 역사이고 이념이다. 아시아는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는 아시아라는 길을 따라 세계로 걸어나가 그 손은ㄹ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짐대로 그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고 있다. 긴 여행이 될 테지만 결국 떠난 지점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구는 둥글다.-7쪽

당신의 천국과 그녕늬 지옥-섹스의 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입술을 붉게 칠한 소녀들은 한껏 고운 옷을 차려입고 당신의 선택을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당신의 15달러짜리 천국을 위해 소녀들은 기꺼이 오늘밤 그녀들의 연옥이 될 당신의 모텔이나 호텔, 또는 20촉짜리 전등을 희미하게 밝힌 음습한 뒷방을 찾을 것입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메피스토에게 영혼을 내밀었고 메피스토는 당신에게 5분 또는 10분의 쾌락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메피스토가 파우스트에게 약속했던 대가의 억만 분의 일이로군요. -16쪽

도쿄로 몰려간 미군 병사들은 아낌없이 군표와 달러(모두 미군의 국방예산이었다)를 거리의 창녀들에게 뿌려댔다. 전선으로 돌아가야 할 병사들에게는 휴지처럼 여겨지곤 했던 군표와 달러는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던 패전 일본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울지언정 생존의 조건이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미군은 유럽에서 결코 이따위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패전국인 독일에서도 분명 미군을 상대하는 독일 창녀들이 존재했지만 소수였다. 미국은 정책적 차원에서 이를 지원하거나 고무하지도 않았다. 상황은 무대가 아시아로 바뀌자 돌변했던 것이다.

전쟁터인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선이 고착하면서 남한 후방의 도시 주변에서는 굶주림 끝에 미군을 상대로 하는 창녀들이 등장했고, 전쟁 후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에 따른 미군의 항구적 주둔은 기지 주변에 기지촌이라는 이름의 크고 작은 알앤알(휴식-오락/회복)은 수빅 만에서 오키나와, 마닐라에서 도쿄와 서울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군사적 매춘 벨트를 완성시켰다. 10년 뒤 미국은 아시아에서 또 한 번의 전쟁을 일으켰고, 이 벨트의 다음 마디는 방콕이었다.-21-22쪽

미군이 사라진 방콕 매춘가에는 유럽인들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했고, 곧 들끓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에게 방콕만큼 안전하고 편안하고 값싸게 매춘을 즐길 수 있는 도시는 아시아에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때를 맞추어 고도경제성장을 구가하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엔을 앞세워 일장기를 휘날리며 방콕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에게는 불쾌한 풍경이었다. 미군이 그랬듯이 그들에게도 아시아인인 일본인은 서비스를 제공할 뿐이지 향유할 수 있는 인종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뒤이어 난데없는 섹스관광 소동이 벌어졌다. 유럽인들은 공공연하게 깃발을 들고 방콕과 마닐라에서 섹스관광에 나선 일본인들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한다면 방콕에서 유럽과 일본의 차이는 단지 깃발 하나의 차이일 뿐이었다.-23-25쪽

태국의 친미 군부독재정권은 자신들의 수도가 거대한 창녀촌으로 변모하는 것에 대해 확고한 공범자였다. 미군의 공공연한 군사적 매춘이 참혹하고 비인간적인 전쟁범죄였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독재정권은 미군의 알앤알 정책을 옹호했고 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들은 자국의 빈곤층 여성들을 무제한적으로 외국군의 성적 노리개로 상납함으로써, 점령지가 아니고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을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정치군인들은 직접 매춘산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달러를 챙기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방콕의 매춘산업의 배후에 태국군부의 실력자들이 버티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에 불과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25-26쪽

유럽가 미국의 여성단체들과 지식인들이 아시아 저개발국에서 만연한 일본인들의 섹스관광을 비난하고자 했다면, 먼저 앞서 자신들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보아야 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수도 도쿄가 미군의 정액단지로 헌납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일본인들이 방콕과 마닐라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벌였던 섹스관광은 결코 용서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서울 또한 마찬가지이다. 서울은 방콕, 마닐라와 더불어 일본인들의 3대 섹스관광지 중의 하나였던 곳이다. 한국은 전쟁의 참화를 몸으로 겪었고 기지촌의 가슴 아픈 역사를 지금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 주인공인 한국인들이 오늘 태극기를 휘날리며 매춘관광에 나서고 있다. 바로 그 한국인들에게 방콕의 그 수많은 매춘 여성들을 모두 전쟁과 식민지의 고통에 신음했던 아시아의 딸, 우리의 딸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면 온전히 나의 과대망상일 뿐일까?-26-27쪽

1957년 부정 선거 의혹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에서의 피분과 사릿-군주제와 야합한 태국의 군부독재는 남한의 정치군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태국의 군부쿠데타를 교본으로 삼아 불철주야로 학습했고 마침내 그들의 꿈을 이루었따.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한강을 넘을 때 군주제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군주제보다는 좀더 근대적인 이념을 개발해야 했는데, 그게 새마을운동이라거나 조국 근대화라거나 개발지상주의라거나 하는 것들이다.-40쪽

그러나 영국과 태국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근대적 국민이었다. 1689년 영국이 입헌군주제를 성사시켰을 때에는 부르주아의 등장, 시민민주주의의 경험 등 왕정을 넘어 근대로 발전하기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태국에는 그 모든 것들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42쪽

한국전쟁의 발발 이래 태국은 미국의 막대한 군사원조가 퍼부어지는 나라였고, 그것은 태국의 전략적 가치가 그만큼 높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욱이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가 패퇴하고 미국이 직접 개입하면서 태국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미국의 목표는 동남아에서 태국이 친미 반공의 군사적/정치적 전략기지 역할을 하는 것이었으므로, 강력한 친미 반공정권을 열망했다. 미국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정권은 당연히 군부독재정권이었지만, 동시에 미국은 채제의 안정도 희구했으므로, 군부독재정권이 피할 수 없는 정치적 불안정을 해소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 장치 또한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코앞, 방콕의 왕궁 안에 있었다. -49-51쪽

베트남의 선전이 효과를 거둔 동력은 서방의 반공주의였다. 서방의 우파들에게 있어서 캄보디아는 공산주의의 야만성과 폭력성, 비인간성을 만천하에 입증하는 생생한 사례였다. 말하자면 '킬링필드'는 더없이 훌륭한 반공영화였다. 베트남은 세계사에 족적을 남길만한 반공선전 하나를 몸소 남길 수 있었다.-69-70쪽

폴포트의 민주캄푸치아에 대한 평가의 일반은 혁명 후 급진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꿈꾸었다는 것이고, 그 결과 급진적 공산화 정책이 킬링필드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그 모델은 중국의 대약진운동이었다고 평가된다. 1958-1960년까지 중국 대륙을 뒤흔들었던 대약진운동은 그 결과 2천만 명에서 3천만 명을 헤아리는 아사자가 발생했던 처참한 실패였다. 이 운동을 주도했던 마오쩌둥은 실권의 위기에 처했다가 문화대혁명으로 간신히 살아나기도 했다. 이처럼 이미 1960년에 과오가 드러났던 대약진운동을 1975년의 폴포트가 모델로 삼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71쪽

캄푸치아 공산당의 급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놈펜을 함락하기 이전부터 엄연한 현실이었던 대규모의 식량난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주 게릴라들이 마침내 프놈펜을 함락했을 때, 이 도시에는 전인구의 5분의 1에 달하는 150만 명이 북적이고 있었지만 그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저주받은 도시일 뿐이었다.
해방 후 미군으로부터 식량 공급이 끊긴다면 이 인구에 대한 식량 조달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함락 전부터 명확했다. 미군의 폭격과 오랜 전쟁으로 캄보디아의 농업은 완전히 붕괴된 이후였다. 식량자급률은 20%에 불과했다. 외부로부터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73-74쪽

혁명 후 민주캄푸치아는 경제난과 군사적 위협이라는 두 마리의 괴물과 싸워야 했다. 특히 군사적 위협은 전후 재건에 나서야 했던 민주캄푸치아로서는 두 겹의 고통이었다. 혁명 직후 민주캄푸치아는 미국의 재도발과 베트남의 위협에 대비해 태국 국경인 서부 전선과 베트남 국경인 동부 전선에 군사력을 집중해야 했다. -74-75쪽

서구학자들의 캄보디아 관련 연구의 헌신적인 조사 작업과 분석은 이 학살이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자행된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데에 바쳐졌다. 물론 그들이 보기에도 죽음의 대부분은 식량난에 따른 굶주림에 의한 것이었다. 누가 그 죽음에 대해서 책임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들은 예외 없이 민주캄푸치아를 통치했던 잔인하고 야만적인 극단적 공산주의자들을 희생양으로 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조사와 연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전제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신과 주술'은 이들의 다양하고 방대한 연구의 기저를 관통하는 맹목적인 사상적 편향의 실체로, 그 정체는 반공주의였다.-79-81쪽

캄보디아가 감내해야 했던 처참한 비극은 캄보디아 인민, 캄푸치아공산당 그 어느 편도 아닌 미 제국주의에 의해 배태된 것이었다. 1970년 이전까지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에서 부유한 편에 속하는 쌀 수출국의 하나였다. 동남아시아의 인구가 평균 1일 400그램의 쌀을 소비할 때에 캄보디아는 600그램의 쌀을 소비할 수 있었다. 1970년 CIA의 공작에 의한 론놀의 쿠데타와 미국의 야만적인 맹폭은 혁명 후 캄보디아가 감당해야 했던 참극의 근원이었다. 특히 1969년에서 1973년까지 미군의 대대적인 캄보디아 영토에 대한 폭격은 사망자 수만 최소 15만 명에서 80만 명까지로 추산될 만큼 대규모의 인명살상을 야기했고 이는 농업 노동력의 급격한 소실로 귀결되었다. 이 기간 동안의 사망자 수는 킬링필드에 대한 다양한 연구에서 부주의하게 취급되거나 때로는 무시되기도 했다.-82쪽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캄보디아에서의 학살'이라는 주제에 매달린 대부분의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던 이념적 편향성 즉, 반공주의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서구 학자들의 연구는 언제나 공산주의에 대한 일방적이고 부당한 선입견과 예단에 의해 좌우되는 성향을 띠어왔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언제나 부도덕하며 야만적이고 야수적인 동시에 침략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태도를 고수하는 한 캄보디아의 민주캄푸치아 통치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미국의 침략적이고 폭력적인 태도와 정책, 전쟁의 수행이 초래한 결과는 실제보다 언제나 축소되게 마련이고, 설령 언급되는 경우에도 전개되는 논리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치부된다. -83-84쪽

44개월 동안의 민주캄푸치아 시대는 이 밖에도 2백만 명의 크메르인들이 목숨을 잃은 킬링필드라는 오욕의 시대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이 수치는 오로지 반공주의의 산물이며, 실제로는 70~80만 명이었고 대부분의 사망자가 미군의 폭격과 전쟁으로 인한 농토의 황폐화, 농업 노동력의 극적인 감소에 따른 아사자였다. -87쪽

툴슬렝은 무엇인가? 박물관인가, 기념관인가, 유물관인가, 또는 미술관인가? 유감스럽게도 툴슬렝은 이것들 중 아무것도 아니다. 툴슬렝은 단지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충실한 선전관이다.
......
현재의 군부독재정권의 수장인 훈센은 베트남 괴뢰정권의 외상과 수상 출신이며, 그의 정권은 무력과 쿠데타, 공포, 탄압, 정치 테러 그리고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권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이 그랬듯이 훈센 정권 역시 그 어디에서도 정통성을 찾을 수 없는 정권이다. 그런 훈센 정권이 기대고 있는 버팀대가 무력과 함께 툴슬렝으로 상징되는 민주캄푸치아의 혹정이다. 이런 점에서 캄보디아를 침략한 베트남과 훈센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베트남공산당은 형제국을 침략한 원죄를 호도하기 위해 툴슬렝과 킬링필드를 만들었고, 훈센은 그것을 반공주의의 제물로 바쳤다. 그들은 모두 툴슬렝의 자식들이다.-92-93쪽

툴슬렝은 사실인가? 사실이다. 그 어느 전시물도 조작되거나 허위인 것이 없다. 고문 기구들과 수많은 사진들, 심지어는 그림과 해골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품이고 현장을 기록한 것들이다. 게다가 전시물이 놓여 있고 걸려 있는 그곳은 그것들이 탄생했던 바로 그 현장이다.

툴슬렝은 진실인가? 유감스럽게도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1980년대 세계인을 경악시켰던 이 위대한 박물관은 위조품이 아닌 진품들을 전시하고 있지만, 진실을 찾아가는 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툴슬렝은 28년 동안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존재해왔다. 툴슬렝은 '폴포트는 악마였고 캄푸치아공산당과 민주캄푸치아는 살인마'라는 것을 입증(사실은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또 운영되어 왔다. -93쪽

방문객들은 무너져가는 낡은 건물에 전시된 조악한 물품들을 보면서 은연중에 이 박물관의 가치를 절하할지도 모르겠지만, 기실 툴슬렝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도로 조직화된 박물관이다. 예를 들어 모든 전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주얼에만 호소한다. 고문기구, 사진, 그림, 재현된 감방, 심지어는 해골에 이르기까지, 이 놀라운 박물관은 결코 텍스트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방문객의 사고를 극도로 단순화시키는 한편, 이성적 무장을 무의식적으로 해제한다.

그런데 툴슬렝의 이 기괴한 힘은 뭔가를 떠올리게 한다.
"설득하지 않는다. 도취시킨다. 그리고 박멸한다."
히틀러의 제3제국에서 위용을 떨쳤던 선전장관 괴벨스의 말이다.
툴슬렝은 이 원칙을 가장 훌륭하게 구현한 박물관 중 하나이다.
물론 괴벨스를 툴슬렝에까지 인도한 것은 스탈린과 베트남이었다.-93-94쪽

어느 나라에서나 역사는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나아가 이념적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프로파간다는 역사를 해석하지 않고 단지 이용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필요에 따라 거두절미한다(사실 전체주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념 그 자체가 아니라, 이념을 말살시키고 들어서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이다.)-94-95쪽

말하자면 해골 지도는 전적으로 '메이드 바이 베트남'으로 베트남의 캄보디아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프놈펜 외곽의 킬링필드인 쯔응아익의 해골 탑도 마찬가지로, 그 중의 하나에 손을 댄 것은 여하튼 변화를 의미한다. -95쪽

태평양전쟁 전개 상황도
-대동아공영권은 제국주의가 품은 원대한 꿈이자 이상이었다.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유럽 제국주의에 맞선 '아시아의 자부심'이라 일컬었다. 그들은 하나의 제국주의가 다른 제국주의로부터 식민지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말했는데, 물론 식민지로서는 주인이 바뀌는 것에 불과했다. 일본의 패전으로 대동아공영권이 물거품이 되자 유럽 제국주의는 자신들의 식민지로 다시 돌아왔다. 식민지에는 옛 주인들이 다시 찾아왔지만 아시아의 식민지들에는 하나 같이 해방의 기운이 움트고 있었다.-98쪽

일본이 남방 침략에 있어 인도차이나를 가장 먼저 선택했던 것은 중일전쟁 때문이기도 했지만, 종주국인 프랑스가 독일의 침공과 굴욕적 휴전, 괴뢰 비시정부의 수립으로 일본의 침략을 수수방관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99쪽

1945년 9월 6일 남한에 미군이 진주하기 나흘 전인 9월 2일, 대영제국군의 그레이시 장군이 이끄는 20인디언 사단이 사이공에 입성했다. 같은 날 그레이시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의 공군기가 삐라를 살포했다. 삐라는 "영국군이 일본군과 함께 공공질서를 유지할 것이며 어떤 종류의 무기라도 소지한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라는 사실상의 경고문이었다.
(1945년 해방 후 남한에 주둔한 미군 역시 같은 종류의 삐라를 뿌렸다.)-102쪽

1945년 일본의 패망은 의심할 바 없이 베트남이 프랑스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기회였다. 일본 점령 전의 프랑스는 베트남을 코친차이나와 안남, 통킹으로 분할통치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연방에서 직접 통치령인 코친차이나는 식민지 통치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패망한 후 베트남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코친차이나를 해방시켜야 했다. 그러나 호치민은 북부의 하노이에서 독립을 선언했고, 코친차이나의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는 대신 적으로 돌렸다.-104쪽

프랑스군의 베트남 주둔을 명시한 이 협정은 호치민 자신이 선언한 독립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립을 모욕하는 것이자 굴욕적인 양보였으며,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얻어진 해방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이 예비협정은 전전의 프랑스 보호령 통치 하의 식민지 군주제를 식민지 공화국으로 바꾸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이 협정과 함께 영국군은 남부에서 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식민지 반군에 불과한 베트민과 대등하게 협정 따위를 맺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106쪽

1949년 6월 14일 프랑스는 일제가 버리고 간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를 망명지인 파리에서 데려와 코친차이나와 통킹, 안남을 묶어 베트남국을 수립했다. 1950년 1월 공산화된 중국과 소련은 베느남민주공화국을 승인했고, 미국은 프랑스의 베트남국을 승인했다. 특히 중국은 프랑스와의 일전을 벌이고 있던 베트남에게는 구세주와 다름없는 역할을 자임했다. 또한 미국은 이를 빌미로 바오다이의 베트남국을 승인하고 프랑스에 대한 원조를 시작한다고 선언했다.-106-107쪽

그러나 중국이 이처럼 베트민에 대한 지원에 나섰던 그 순간, 다른 한편에서는 중국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이 전쟁에 개입하고 있었다. 중국과 소련이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승인한 그 다음 달인 1950년 2월 미국은 "(공산화 된) 중국과 소련이 호치민 정부를 지원하고 있는 것은 호치민 정부가 공산 정부라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브리핑과 함께 프랑스에 대한 군사지원을 공공연하게 선언했다. 인도차이낭네 대한 미국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의미심장했다. 1차 인도차이나전쟁은 미국이 아시아에서 개입한 첫번째 전쟁이었으며, 1950년 2월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4개월 전이었고, 애치슨방위선이 발표되기 한 달 전이었다.-116쪽

애치슨라인은 미국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선 밖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애치슨라인은 다만 군사적 마지노선으로서(공세적 시기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방위선일 뿐이었다. 종전 후 미국은 유일의 초 강대국으로서 세계의 각 지역, 특히 유럽 제국주의의 유산이 되어버린 구식민지 지역에서 예외 없이 적극적으로 공세적인 국가였으며 침략적인 국가였다. 요컨대 국무장관 애치슨이 밝힌 미국의 방위선이란 정치적으로는 이미 자신의 것이 확실한 영토와 (아직) 자신의 것이 아닌 영토를 구분하는 '라인'일 뿐이었다. 방위선 안에 위치한 필리핀과 일본은 이미 미국의 점령지 또는 식민지와 마찬가지인 처지였다.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시혜적인 독립을 얻기는 했지만 미국의 지원 아래 친미 정권이 들어서고 공산주의 세력이 탄압당하는 전형적인 미국의 신식민지였다. 패전 일본은 미군정이 실시되고 있던 나라였다.-116-117쪽

인도차이나에서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은 기꺼이 그 전쟁을 지원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지배 전략은 연합국의 일원이기도 했던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기득권을 노골적으로 침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결국은 독립, 친미 정권의 수립, 공산주의 세력의 섬멸로 대표되는 필리핀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었다. 인도차이나에서의 프랑스는 그런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었다.
......
미국은 그런 프랑스에게 막대한 달러를 솓아 부었다. ...... 이는 전쟁 기간을 통틀어 소요된 총 전비의 80%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
1차 인도차이나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프랑스가 수행한 미국의 대리전에 가까웠다.-118-119쪽

만약 호치민이 제네바협정이 정한 1956년 통일 선거를 통해 베트남을 통일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것은 한반도가 피로 증명한 사실을 외면한 것이었다. 또한 호치민이 북부를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협정에 서명한 건ㅅ이라면, 남부를 외면한 것이었다. 호치민은 명백하게 김일성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124쪽

1954년 이후 베트남노동당의 좌편향 실책으로 취약해진 기반을 다지고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전쟁만큼 적당한 방편이 없었다. 베트남노동당은 전시체제의 강화에 나섰다. 그건 미국 또한 원하는 바였다.-127쪽

미국은 제네바협정을 준수할 의도가 전혀 없었고 실제로 단독 선거를 지원함으로써 이를 증명했다. 미국은 남베트남(나아가 베트남)에 강력한 친미 반공정권을 세움으로써 동남아시아 본토에 친미 반공의 전초기지를 만들고자 했으며, 공산화된 중국의 잠재적인 위협으로부터 동남아시아를 지키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차이나는 미국의 진정한 방위선이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의 이런 이익에 절대적으로 복무했으며, 그럼으로써 지주/자본가계급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탄생은 마치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의 남한의 경험이 복제되는 것과 같았다.-128쪽

1966년 미 공군의 북베트남 폭격
-한국전쟁에서 증명된 융단폭격의 위력은 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미군은 인도차이나에서 1,899,688회의 폭격기 출격으로 6,727084톤의 폭탄을 퍼부었다. 2차대전에서 사용되었던 270만 톤의 2.5배에 달했다. 캄보디아에서의 불발 폭탄 제거를 위하여 미 공군이 제공한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의 분석결과에 따르면 캄보디아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미군의 비밀폭격은 23만 회 출격에 폭격지는 113,716곳에 이르고 있으며 투하된 폭탄의 총량은 2,756,941톤이었다.-134쪽

지난 한 세기를 고난과 실패로 점철한 사회주의에 대한 인류의 실험은, 혁명이 세계가 아닌 국가와 민족 앞에 무릎을 꿇을 때 봉착하게 될 거대한 장벽을 실증했다. 자본의 세계화 앞에 일국사회주의는 더더욱 무력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베트남의 자본주의화는 스스로 그것을 웅변하고 있는 참이다. 자본주의의 쓴맛을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었던 이 두 나라의 인민은 이제 자본주의 체제의 난민이 되어 그 결과를 온 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169쪽

오늘날 노벨상의 권위는 이 상의 태생과 어울리지 않게 하늘로 치솟아 있지만, 별로 개의하는 사람도 없다. 노벨이 이 상을 위해 내놓은 돈은 노벨재단이 관리하고 있지만, 상에 대해서는 스웨덴 한림원(왕립과학아카데이)이 전적으로 권한을 갖고 있다. 돈 낸 자의 영향력이 일소되어 있으므로, 상의 권위는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벨이 돈으로 사후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산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으로 비난받을 일유가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189쪽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일컬어지는 상이 있다. 막사이사이상이다. 필리핀의 3대 대통령이었던 라몬 막사이사이는 임기 마지막 해에 재선 운동을 벌이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인물이다. -189쪽

1957년 3월에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은 막사이사이를 기념하여(바로 다음 달인) 4월에 제정된 이 상을 위해 돈을 댄 것은 태평양을 건너고 미 대륙을 횡단해야 만날 수 있는 뉴욕의 '록펠러형제기금'이었다. 부연한다면 다섯 개 부문으로 나뉘어 수상자를 찾는 막사이사이상은 2001년에 수상 부문 하나를 더 추가했는데, 이때 필요한 돈을 댄 것은 미국의 '포드재단'이다.
하지만 펀딩이 수상쩍다고 해서 막사이사이상을 비난할 수는 없다. 돈을 미국인들이 댄 것은 마뜩찮지만, 노벨상과 마찬가지로 막사이사이상 역시 록펠러형제기금이나 포드재단이 상을 관리하지는 않는다. -190쪽

1946년 7월 4일 미국은 자신의 독립기념일에 맞추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자신의 식민지인 필리핀의 독립을 승인했다. 필리핀의 독립을 7월 4일로 정한 것은 1935년 필리핀연방을 등장시킨 미국의 타이딩스-맥더피법이었지만, 1946년 미국은 그보다 더욱 중요한 법안을 독립 기념 선물로 준비하고 있었다.
독립 기념으로 미국이 필리핀에 선물한 것은 '필리핀무역법'이라고도 불리는 '벨무역법'이었다. -196쪽

벨무역법은 필리핀이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임을 강조했다. 미국인과 미국 기업은 원한다면 어떤 상품도 관세 없이 수입할 수 있었고 자본의 투자에도 제약이 없었다. 반면에 필리핀의 주요한 수출 품목은 미국 이외의 국가에는 수출할 수 없었다.
......
필리핀은 단지 미국 상품의 시장이었으며 천연자원의 공급지였다. 말하자면 명목상의 독립일 뿐 필리핀은 전쟁 전과 다를 바 없는 미국의 식민지였다.

군사적으로 필리핀은 미군의 대아시아 전진기지였다. 미국 외에는 어떤 외국군도 필리핀의 기지를 임대할 수 없으며, 두 개의 미군기지는 완전히 치외법권 지대였다. 독립 필리핀은 경제적으로는 물론 군사적으로 여전히 미국의 (신)식민지였다. -197쪽

빈한한 중산층 출신 막사이사이는 필리핀 역사상 지주계급 출신이 아닌 단 두 명의 대통령 중 하나이다. 막사이사이가 하원의 국방위원장, 국방장관을 거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그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패한 지주계급 출신의 정치인과 군인들은 결코 할 수 없었던 일, 공산주의 게릴라를 토벌하는 일에 발탁되었다. 막사이사이의 일이 끝났을 때 권력은 다시 지주 계급의 손으로 돌아갔다.-204쪽

같은 시기를 전후해 미국이 아시아에서 발탁했던 인물들, 예컨대 이승만과 응오딘지엠에 비교한다면 막사이사이는 윌리엄 콜비가 말했던 것처럼 그 중 최고의 인물로 손색이 없었다.-206쪽

1957년 막사이사이가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지 않았어도 1950년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한국전쟁과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이 결과한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비상한 경제적/군사적 원조와 경제적 양보(외환/수입 통제)는 1950년대 말이면 이미 시효가 끝나가고 있었다. -211쪽

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남미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선택은 민중의 투쟁을 폭력적으로 압살할 수 있는 자에게로 돌아갔다. 1965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고,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필리핀에는 1인 장기 독재체제가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973년은 남미의 칠레에서 아우구스트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통해 권좌에 오른 해였다. 미국의 눈으로 볼 때 필리핀의 마르코스와 칠레의 피노체트는 같은 필요에 의해 선택된 두 얼굴의 동일 인물이었다. -212쪽

그는 완고하고 강직한 친미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식민지 지주계급이 토지개혁에 저항하며 농민들을 살해하고 수탈했던 필리핀을 군사적으로, 정치/경제적으로 예속시킨 미국을 외면했다. 그는 공산주의가 농민들 속에 뿌리를 내린 이유를 무시하고 공산주의를 군사적으로 섬멸하는 데 앞장선 맹목적 파시스트였다. 그는 본질적으로 그의 전과 후에 존재했던 필리핀의 대통령들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

막사이사이의 밝은 이미지가 막사이사이상을 오늘까지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들고 그 수상자들에게 명예롭게 받아들여진다면 그로써 족한 일이다. 게다가 그는 현직을 포함한 필리핀의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는 그래도 좀 난은 대통령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상에 붙여진 이름, 막사이사이에 대해 무심할 수는 없다. 그 이름 속에는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시아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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