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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상자 ㅣ 베틀북 그림책 86
데이비드 위스너 지음 / 베틀북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이 적극 추천하는 책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한 책이다. 또 권위 있는 상을 받은 책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도 확실히 알겠다. 데이비드 위즈너, 와앗! 너무 반가운 만남이다.
이 책에는 글이 없다. 오로지 그림으로만 말을 한다. 그런데 그 그림에 무한한 언어가 숨어 있다. 그래서 속삭이는 소리가 너무 아름답고 달콤하다. 이런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낼 수 있는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
주인공 소년은 바닷가에서 우연히 수중카메라 하나를 얻게 된다. 수소문을 해봐도 주인이 없고, 그 안에 필름이 꽂혀 있길래 인화를 해보았다. 그리고 보게 된 사진 속에는 놀라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필시 바닷속 풍경을 찍었을 터인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바다가 아니었고, 바다 속 생물들이 아니었다. 이건 마치 차원의 문을 넘어 상상의 세계이거나 혹은 먼 우주의 외계 행성에서 볼 법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그림은 또 얼마나 정교하고 사실적이며 위트가 있는지, 마치 픽사의 애니메이션을 정지 상태로 멈춘 듯한 느낌은 전달한다. 화면 안의 그 어떤 소품이라 할지라도 모두 살아서 팔딱이는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니, 이건 정말 놀라운 그림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바다속 풍경들만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사진에는 사진을 들고 있는 사람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들고 있는 사진에는 또 다른 사람이 사진을 들고 있었고, 그 사진 안에는 또 다른 사람이 사진을 들고 있었다. 이제 소년은 운명적인 이끌림에 의지해서 사진을 확대해 본다. 돋보기로도 부족해서 현미경까지 동원하여!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이 사진들의 역사가 생각 이상으로 깊다는 것이다. 확대하고 또 확대해서 들여다 보니, 아마도 사진이 처음 발명되었을 적... 혹은 그 이상으로 오래 전 사진까지 나온다. 칼라사진이 흑백사진이 되고, 사람들의 복식이, 건물 양식이 달라진다.
소년은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는다. 이 신기하고 놀라운(어쩌면 대단한 돈벌이가 될 수도 있는!) 카메라는 자신이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은 카메라가 지나치는 하나의 역사로 자리매김해야 함을.
소년은 자신이 보았던 그대로 사진들을 손에 쥐고 찰칵! 셀카를 찍는다. 누군가는 자신을 포함하여 앞서 이 카메라를 손에 쥐었던 사람들을 또 다시 놀라운 눈으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소년은 밝게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고는 그대로 수중카메라를 바다로 던져버린다. 카메라가 망가지거나 사라질 걱정 따윈 필요 없다. 카메라의 운명이 또 다른 누군가를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바다 생물들, 하늘생물들에 의해서 카메라는 추운 극지방도 지나쳐서 열대 나무가 우거진 어느 바닷가에 도착한다. 또 다른 누군가의 손길과 만날 준비를 하면서. 수중카메라는 이후로도 무수히 많은 소년, 소녀들에게 놀라운 상상력의 세계를 선사하며 그렇게 시간을 담아 역사가 될 테지. 그 역사의 한 주인공이 내가 되기엔, 나는 좀 너무 늙은 걸까?(ㅡㅡ;;;) 상상력의 세계에 나이란 불필요 할 테지. 멋지다, 데이비드 위즈너. 고맙다, 시간상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