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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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손으로 자주적인 근대화에 실패하고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휘둘리며 살아왔다는 것을 새삼 지적하는 것은 우리 역사가 피동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단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 해방과 근대적 민족국가의 건설을 위해 우리는 참으로 끈질기게 주체적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불행히 승리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숨가쁘게 근대로 끌려들어오는 와중에 우리는 중요한 통과의례를 치르지 못했다. 왕의 목을 치지 못하고, 다시 말해서 시민혁명을 이루지 못하고 제국주의적 근대에 편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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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하고 제국주의적 근대에 편입되었다는 것은 전근대의 부정적 요소들이 고스란히 다음 시대에 살아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8-19쪽

자유총연맹은 있어도 제대로 된 자유주의를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우리 사회에 신자유주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한 발은 군사독재의 시대에 딛고, 다른 한 발은 엉거주춤 민주화의 시대에 걸치고 있는 오늘도 우리는 바쁘게 살고 있다. 한 시대를 제대로 장송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새 시대로 들어가다보면, 우리는 항생제의 남용이 병균의 내성만 키워주듯 전시대의 잔재가 새 시대의 화려한 옷 속에 반민주성을 감추고 도사리고 앉아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게 되는 악순환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이 악순환을 벗어나려면 시대를 거슬러올라가 미해결의 과제를 모조리 해결할 수는 없지만, 독재잔재만큼은 확실히 청산하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26쪽

'황제'가 다스린 중국에서 왕조의 교체 주기는 200~300년이었던 반면, 국왕이 다스린 한국에서 왕조의 교체 주기는 500년이었고, '천황'이 다스린 일본에서는 '천황'가의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만약 일본의 '천황'이 중국 '황제'에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조선 '국왕'에 버금가는 권한을 행사하였다면 만세일계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32쪽

임시정부는 중국 땅에서 거의 전적으로 중국 정부의 재정지원 아래 광복군을 조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군대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중국 쪽에 넘어간 것을 치욕으로 알았으며, 끈질긴 노력의 결과 마침내 이를 되찾았다.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객군'인 미군이 안방을 차지한 채 새로운 천년을 맞았다. 1980년대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문제가 집중적인 성토의 대상이 될 때까지 대한민국은 주한미군으로부터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회수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기울인 바가 없다. 반미감정이 고조되자 미국은 마지못해 한국군에 대한 평시작전지휘권을 한국 정부에 되돌려주었지만, 실제로 군대의 작전이 실행되는 시기인 전시의 작전지휘권은 여전히 '객군'인 미군이 거머쥐고 있다.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에서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 생명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각한 도배들은 국가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없이 통일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피를 토하며 반통일세력을 질타했다. 백범이 간 지 50여 년, 불행히도 이 비판은 지금도 유효하다.-45-47쪽

1948년에 수립된 단독정부로서의 대한민국 정부가 실제로 계승한 것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임시정부를 철저히 부정했던 미군정이었다. 그리고 미군정은 일제의 조선총독부의 모든 법령과 인원을 접수하여 그대로 활용했다. 한번도 제대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조선총독부-미군정-대한민국 정부로 이어지는 불행한 계승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이어져왔다.-48쪽

태극기는 중국인의 기본 도안에 일본에 사죄하러 가는 일본 국적의 배 안에서 영국인 선장을 산파로 해서 태어나 조선 사람들에게 선보이기도 전에 일본에 나부끼는 기구한 운명을 갖게 된 것이다.-53쪽

한국 현대사에서 온갖 영욕을 함께한 태극기가 감정을 갖고 있다면 가장 민망했던 때는 1980년대 학생들의 성조기 소각 사건 때가 아니었을까? 광주 이후 반미의 무풍지대였던 한국은 갑자기 세계에서 반미운동이 가장 치열한 곳이 되었고, 학생들은 광주학살의 배후로 미국을 지목하고, 성조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부는 성조기를 불태운 학생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학생들이 태극기를 태운 것도 아니고, 또 정작 미국에서는 성조기를 불태우는 행위가 헌법상의 표현의 자유로 인정받는데 말이다.-59-60쪽

이제 우리는 좀 다른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유감스럽게도 다른 민족이라면 차별해도 괜찮다라는 길을 열어두고 있다.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보다 더 강하게 하나의 민족, 하나의 조국, 하나의 언어를 내세운 나치 독일은 600여만 명의 유대한 학살과 주변 국가에 대한 침략으로 나아갔다. 물론 이런 가능성들이 늘 현재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단일민족의식 속에는 분명 억압과 차별과 불관용이 숨어 있다.-65쪽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만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미개'한 조선인들에 대해 '동조동근'(일본인과 조선인은 조성과 뿌리가 같다는 뜻)을 이야기하고, 일본식 이름을 갖는 것을 '허락'하고, '황군'에 참가하는 '은전'을 베푼 것도 다 '2등신민'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쓰라린 상처의 하나인 일본군 성노예 문제 역시 일제가 우리에게 자기 마음대로 부여한 '2등신민'의 지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군에 의해 성적인 노리개로 농락당한 여성들은 적게는 수만 명, 많으면 20만 명으로 추산되는ㄷ, 그중 80% 이상이 조선 여성들이었다. 파렴치한 일제는 '차마' 일등신민인 일본 여성들을 잡아다가 그 짓을 시킬 수 없고, 그렇다고 '황군' 병사들한테 '열등'한 인종 출신의 '질 나쁜 성적 노예'를 공급할 수도 없었기에 '2등신민'인 우리의 누이들을 마구 끌고 간 것이다. -67쪽

쓰라린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우리는 우리보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나 처지가 못한 자에게는 턱없는 우월감을 갖고 인종차별을 전가해왔다. 노근리 사건을 비롯한 한국전쟁 동안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깔려 있는 인종멸시의 태도는 베트남의 정글에서 재현되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재일 한국/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이 땅의 이주노동자 등 피부색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비껴가지 않는다. 동남아나 중남미로 진출한 한국 기업에서는 일제시대 일본인 공장주들이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가한 민족적 멸시와 학대를 다시 볼 수 있다. 우리의 내면에 터를 잡은 백인우월주의는 어김 없이 이민보따리에 묻어 태평양을 건너 본고장으로 역수출되어 한흑 갈등의 주요인이 되고 있다.-68쪽

일제의 만주강점은 '만주 붐' 또는 '만주열'이라 불린 호황을 가져왔다. 실제로 일본은 1929년의 세계대공황의 충격에서 가장 먼저 벗어난 나라였고, 그 이유는 바로 만주의 점령으로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투자수요가 활짝 열렸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자본가 계급에 이제 일제는 타도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일제는 모반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일 뿐 아니라, 새로운 이윤추구의 기회를 제공한 '은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93쪽

1930년대의 만주는 '동양의 서부'였다. 1920년대까지 파산당한 우리 동포들이 마지못해 짐을 싸 만주로 발걸음을 뗐다면, 1930년대 일본과 조선의 청년들 중에는 출세나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만주로 향한 사람들도 많았다.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긴 칼 차고 싶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한 박정희도 그런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93쪽

분명 친일파 청산의 좌절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잘못 끼운 첫 단추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를 친일파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 친일파만 제대로 청산하였으면 모든 문제가 다 풀렸을 것인가? 그렇다면 친일파 청산에서 남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했던 이북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할 것 아닌가?-104쪽

친일파에 대한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게 설정된 것도 또 하나의 문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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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형식상 지원제인 학병에 나간 것을 친일 행위로 본 것인데, 이는 해방 당시의 정서와는 큰 거리가 있다. 물론 학병에 지원한 사람들 중에 황국신민 의식이 골수에 박혀 스스로 자원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끌려간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학병 출신들은 일제 통치의 희생자로 간주되었고, 해방 정국 초기에 학병동맹을 결성하여 미군정의 탄압으로 해산될 때까지 진보진영 내에서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4-105쪽

일제잔재 청산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편향은 나치 점령을 벗어난 프랑스에서의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단죄와 친일파 청산이 동일선상에서 비교된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4년여의 나치 점령을 벗어난 뒤 괴뢰 비시 정권하에서 독일에 협력했던 7천여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많은 사람들은 불과 4년여의 점령지였던 프랑스가 수천 명을 처형한 데 반해 35년이나 강제 점령을 당한 우리의 경우는 단 한 명의 민족반역자도 처형하지 못한 것에 대해 통분해 한다. 친일파 청산이 꼭 가혹한 처벌을 의미하느냐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문제다.

자치파가 집권한 인도는 영국에 식민지 지배를 200년 간 받았지만 친영파 처 ㅇ산은 독립 뒤의 핵심 과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사실 제국주의의 통치 기간이 오래될수록 제국주의에 협력한 자들에 대한 처벌문제는 어려운 법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세력이 집권했다 하더라도 인적 청산의 폭이 결코 프랑스에서처럼 광범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105-106쪽

이북은 인적 청산의 면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관대한 정책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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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의 지도부가 채택한 방식은 탄백이었다. 탄백이란 일제 통치 아래서 자신의 과거와 자신이 범한 잘못을 솔직하게 당과 인민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고 자신의 죄과를 감춘 것이 뒹 ㅔ드러날 경우에는 엄한 처벌을 받았지만, 솔직하게 고백한 경우는 독립운동가를 밀고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용서를 받았다. -106-107쪽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문제도 해방 당시의 기준에서 보면 조금 달리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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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에 폐간당했던 두 신문이 해방 직후 복간할 때 두 신문의 친일행위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지만 모두가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전 국민의 80% 가량이 창씨개명을 해야 했던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일제잔재의 철저한 청산을 원하면서도, 현재 우리의 감각에 비해 구체적인 친일행위의 범주에 대해 상대적으로 좀 더 관대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107쪽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조선일보>의 방응모 사장이 백범 선생이 이끌던 한국독립당이 환국한 뒤 이 당의 재정부장을 지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백범 선생 역시 해방 뒤의 현실정치에서 정치자금 문제 때문에라도 일정하게 친일파들과 손을 잡았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백범 선생 스스로 남북협상에 임하면서 자기비판을 했다. 다른 하나는 당시의 분위기에서 방응모가 한국독립당의 재정부장이라는 공식직함을 맡을 정도로 인적 청산의 기준이 엄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방응모나 <조선일보>의 친일이 그냥 넘어가도 좋은 문제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백 보를 양보하여 그들의 친일이 하루하루 신문을 내기 위해 부득이한 행위였다 하더라도 방응모와 <조선일보>는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최소한 그런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서 민족지라고 자랑하는 망발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108쪽

일본이 망할 줄 몰랐다는 말은 차라리 순진하기나 하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지배를 근대화의 길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친일이 반민족 행위가 아니라 민족을 살리기 위한 길이라고 굳게 믿은 확신범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의 근대화와 반공 논리는 그대로 대한민국에서 계승되었다. 일제의 밑에서 떡고물을 주워먹던 친일파들은 이제 해방된 조국에서 떡판을 송두리째 차지한 것이다. 친일파 청산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 아래 굳게 결속한 친일파들에 의해 오히려 청산된 대한민국에서 해방은 친일파들의 잔치판이 되고 말았다. -108-109쪽

일본도, 우리도 과거를 청산하지 않았다. 일본은 그래도 군과 경찰의 고위직에 있던 자들을 정부와 정계에서 배제하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우리는 그나마도 하지 않았다. 한-일 협정 체결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한-일 관계는 미국이 내세운 반공의 깃발 아래 이렇게 살아남은 군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의 야합의 역사였다. 친일파 박정희의 기념관을 짓지 못해 안달하는 나라, 제국주의의 베트남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민간인 학살의 과오를 범하고서도 사과하지 않는 나라, 친일파의 행위를 비롯하여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하나도 가르치지 않는 나라, 과연 우리가 일본의 교과서 왜곡과 우경화에 제대로 대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 일본의 우익들이 비웃을 일이다. -109쪽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과거청산을 모범적으로 행했다는 독일에서도 신나치가 생겨나는데, 단 한번도 과거청산을 하지 못하여 미청산된 과거의 만물상으로 불리는 우리 사회야 오죽하겠는가? 과거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해 현실로 이어진 과거사를 직시하고 그것과 싸우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친일잔재의 청산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 친일잔재는 군부독재권력에 의해 우리 사회에서 재생산되었다.-119쪽

민간인 학살만큼이나 끔찍스러운 일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100만 명 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한 이 학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모르는 척하거나 정말로 모른 채 반세기를 보냈다는 점이다. ..... 수십만 명의 죽음을 50년 간 외면해온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는 학살 그 자체는 아닐지라도 학살 은폐의 방조자가 됨으로써 사람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124쪽

한국사회에 오랜 기간 군사독재가 유지되고, 군사독재가 물러난 뒤에도 반공주의 보신주의가 횡행하는 것은 다 학살의 무덤 위에 한국사회가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또 가족의 생존과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보는 신가족주의나 살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가치관의 전도 역시 학살이 남긴 상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125쪽

민간인 학살만은ㄹ 놓고 본다면 이민족 지배하의 학살에 비해 동족 내의 '빨갱이 사냥'이 규모나 강도에서 훨씬 더 잔혹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은 8.15해방이 우리 민족에게 온전한 축복이 되지 못하고, "뜨거운 프라이팬을 벗어나니 불구덩이 속이더라"는 식이 되게 만든 것이다.-135쪽

100만 명 가량의 무고한 민간인들을 무더기로 학살한 자들도 온전하게 살아남았는데, 물 좀 먹이고, 전기 좀 통하게 하고, 관절 좀 비틀고, 공중에 매달고, 그리고 좀 두들겨 팼기로서니 그게 무어 그리 대수겠는가? 당하는 사람이나 가하는 놈이나 할 것 없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인권불감증도 다 민간인 학살에서 연유한 것이다. 시민들의 인권을 지켜야 할 국가기구가 민간인 학살의 주체였을 때, 힘있는 자들의 손가락질 하나로 생과 사가 갈릴 때, 시민들은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다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극도의 몸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136쪽

더불어 사는 사회는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 어딘가 부족하고 힘없는 사람들, 소수자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왜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공자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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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주류'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지혜와 관용 대신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을 박멸하고 싹쓸이해버린 기억을 갖고 있다. 그래서 못마땅한 자들을 보면 다시 싹 쓸어버리고 싶어한다. 박멸의 기억을 스스로 벗어던지는 일은 우리 사회가 더불어 사는 사회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나를 편들지 않으면 모두가 적이라는 부시의 힘의 논리가 횡행하는 이 시대에 우리의 도덕과 상식은 다시 시험을 받고 있다.-140쪽

현재 한국에는 500년의 역사를 지닌 왕조가 쓰러진 자리에 건설된 나라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보수주의가 허약하다. 조선을 가리켜 당파싸움으로 날새우다가 나라를 빼앗겼다고 식민주의자들뿐 아니라 일제 초기의 민족주의 사학자들도 통탄했다. 그러나 조선이 5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입장에서 고루한 유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합리적 보수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전통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전통의 내용이 과연 어떤 것일까? 보수주의자들은 '뿌리없는 것'에 대한 깊은 혐오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 보수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뿌리 없음이며, 전통적 보수주의와의 단절이다.-145쪽

그들은 한번도 정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린 적도 없고, 희생한 적도 없다. 한국전쟁 때 마오쩌둥도, 미8군 사령관 벤플리트도 아들을 바쳤지만 그들은 한강 다리를 끊고 가장 먼저 도망갔다가 돌아와 남은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았다. -152쪽

그러나 해방 직후에는 분명히 좌익이 존재했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 세계사적인 기준에서 볼 때 좌파라 할 만한 세력이 형성돼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신자유주의조차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일삼는 극우파의 기준에서 볼 때 좌파가 있을 뿐이다. -159쪽

누군가가 좌우대립을 부추기고 있다. 해방 직후에 그런 역할을 한 자들은 친일파였다.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가 지속된다면 친일파들이 정치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파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를 이념이라는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좌우대립의 구도로 바꾸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일제의 고등계 형사였던 조선인들은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 아래서는일제의 앞잡이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살해한 민족반역자로 처단의 대상이었지만, 좌우대립의 구도 속에서는 공산당 때려잡는 데 풍부한 경험을 지닌 전문가들로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160쪽

우리는 흔히 3족을 멸한다는 말을 쓰며, 3족을 친가, 외가, 처가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원래 3족이란 3대에 걸친 친족으로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인 조족, 형제와 그 소생인 부족, 그리고 본인의 아들 및 손자를 가리키는 기족을 말하는 것이다.-177쪽

1894년 갑오경장 당시에 폐지된 연좌제가 되살아난 것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였다. ......이북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자 이승만 정권의 요인들은 점심은 대전에서 저녁은 부산에서 먹을 정도로 뺑소니를 쳤다. 대구까지 내려갔던 이승만은 "각하, 너무 많이 내려오셨습니다"라는 참모들의 건의를 받고 다시 대전으로 올라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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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은 의정부를 탈환했으며 국군이 북진중이니 서울 시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놓고 도망치면서 , 그것도 그냥 간 것이 아니라 한강 다리마저 끊어버리고 갔다.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부통령 이시영을 비롯하여 정부 요인들 중에서 이승만과 약간 거리가 있었던 사람들, 대다수의 국회의원들은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 핵심부의 도주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한강 다리를 폭파하는 과정에서 다리를 건너던 1,500여 명의 무고한 피난민이 폭살당했다. -179쪽

그리고 석 달 뒤 이승만 정권은 서울로 '개선'했다. 정부의 발표만 믿고 있다가 인민군 치하에서 석 달을 보낸 시민들에게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하는 위로도, "우리만 피난갔다 왔으니 정말 미안하다"라는 사과도 하지 않았다.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에게 사과 담화를 발표할 것을 건의했다가 되레 이승만에게 "내가 당나라 덕종마냥 '짐이 덕이 없어' 하고 사과하란 말이냐"는 핀잔만 받았을 뿐이었다. 위로와 사과 대신에 서울 시민에게 돌아온 것은 적 치하의 부역자를 가려서 엄선한다는 서슬 푸른 방침이었다. -180쪽

만주폭격 주장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원자폭탄의 사용을 전제로 한 맥아더의 만주폭격 구상이 실편되었다면 이는 한반도의 통일이 아니라 즉각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일이었다. 더구나 맥아더는 합동참모본부에 원자폭탄을 투하해야 할 목표지점으로 한두 곳이 아니라 무려 26곳을 선정하여 보고하면서 즉각적인 원자폭탄 투하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도 1차로-209쪽

맥아더가 이렇게 강력한 주장을 한 것은 전쟁 수행과정에서의 자신의 판단착오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는 끊임없는 정보보고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공격 가능성을 무시했으며, 중국군의 개입 가능성을 묵살하고 38도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단행했다. 더구나 그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중국군이 개입하자 미군은 미군 역사상 최대의 치욕으로 기억되는 장진호 패배를 당하는 등 중국군에 크게 밀렸다.-209쪽

38개월 간 지속된 한국전쟁에서 정전회담은 무려 25개월을 끌었다.-213쪽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을 미국에 예속된 존재로 보았으나, 이승만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일부에서는 박정희가 '반미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하지만, 박정희의 '반미'가 미국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투정'으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것이었다면, 이승만의 태도는 미국의 약점을 꿰뚫어본 상태에서 철저하게 계산된 '몽니'였다.-219쪽

이승만은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뒤엎는다는 위협을 가하여 미국한테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냈을 뿐 아니라, 한국군의 증강, 미국의 군사경제적 원조 등을 따냈다. 이남의 어느 대통령도 미국을 상대로 이런 외교적 '성과'를 얻어낸 사람이 없지만, 그 '성과'는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 대미 예속의 강화, 이남의 군사주의화 등등의 저주받은 유산을 남긴 것이기도 했다.-221쪽

이제까지 한번도 개정된 적이 없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군 주둔의 목적규정이 결여되어 있고, 무상주병권이 인정되어 있으며, 미군 철수에 관한 협의규정도 없고, 조약의 시효가 무기한이라는 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전면적 재검도 없이 그 부속협정에 지나지 않는 소파의 어떠한 개정도 근본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235쪽

효순이, 미선이 두 소녀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거세게 일자, 미국은 뒤늦게 부시가 사과했지만 소파의 개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1995년 오키나와에서 초등학생이 미군에 의해 성폭행당했을 때 10만 명이 모여 항의집회를 열어 클린턴 대통령의 사과외 일본 소파의 개정을 끌어냈다. 미국은 이렇게 일이 커져야만 소파를 바꿀 생각을 하는 정녕 그런 천박한 나라인가?-235쪽

우리와 미국의 만남은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1871년의 신미양요. 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라지만, 한-미 관계의 첫 장을 전쟁으로 여는 것이 못마땅해서인지 교과서는 이를 전쟁이라 부르지 않는다. -237쪽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정부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태프트-카쓰라 밀약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일본이 묵인하는 대가로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는 것을 묵인했다. 루스벨트는 이런 밀약이 한 부분을 이루는 러일전쟁 종결을 위한 포츠머스 강화회의를 주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을사조약으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자 제일 먼저 미국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238-239쪽

후천성 반미결핍증... 이 병의 특징은 멀쩡한 두 발을 갖고서도 자신이 홀로 설 수 없다고-증세가 심해지면 홀로 서서는 안 된다고까지-생각하면서, 자신의 두 발로 대지에 굳건히 내려 서려는 건강한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두들겨패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이 병의 병원균은 뇌 속 깊이 침투하여 환자 스스로 병에 걸린 사실은 부인하게 만들기 때문에 환자들이 절대로 약을 복용하지 않고, 완강히 치료나 요양을 거부하게 한다. 모든 치료를 거부하면서, 건강한 사람들이나 이 병에 걸렸다가 건강을 되찾은 사람들에 대해 살의에 가까운 적개심을 품는 공격성 때문에 허준 같은 명의가 있다 해도 환자를 돌보기 어렵다.-242쪽

이승만의 저격미수범도 사형을 받지 않던 시절 조봉암은 처형되었다. 그리고 <민족일보>의 청년 사장 조용수, 통력당 사건, 인혁당 사건, 남민전 사건 등에서 사형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통일을 이야기하던-통일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히 미국 이야기가 나오게 되어 있다-사람들이었다. -244쪽

미국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기사를 찾아볼 수 없게 만든 박정희를 일부 인사들이 마치 반미와 자주국방의 기수인 양 떠받드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245쪽

미국이라면 끔뻑 죽던 이 땅에서 반미라는 불온한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1980년 5월 광주를 겪고 난 뒤의 일이다. 광주항쟁 당시 시민들은 미국이 7함대를 파견하자 민주국가인 미국이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7함대를 보낸 것이라고 좋아했다. 그러나 이는 오해도 엄청난 오해였다. 미국은 전두환 일당이 광주 시민들의 정당한 저항을 마음놓고 짓밟는 동안 이북을 견제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245쪽

국방의 의무를 지러 간 젊은이들을 전경으로 차출하여 치안유지에 돌리는 위헌을 일삼는 자들은 그것도 모자라 전경들을 미군기지 앞에 배치한다. 이 세상 어느 천지에 경찰이 군대를 지켜주는 꼴은 있어 본 적이 없다. 더구나 미군은 언필칭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와 있다는 존재가 아닌가? 후천성 반미결핍증이 맹위를 떨치는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꼴불견이다. -246쪽

온몸에 시너를 붓고 산화해간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후예들은 '민족의 허리가 두 동강난 아픔'을 외면하면서, 윤금이씨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길 없이 참혹하게 살해된 사실은 외면하면서, 그까짓 금메달 하나 빼앗겼다고 난리치는 '참을 수 없는 반미의 가벼움'을 견딜 수 없었다.-251-252쪽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어떤 국가도 자국민에 대한 치외법권을 순순히 포기한 적이 없는 사실을.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민간인에 대한 치외법권은 더이상 인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미국과 맺은 소파는 해당범위가 너무 넓어 미국뿐 아니라 그 가족, 친척, 그리고 미군과 계약을 맺은 미국인까지 포함하고 있다. 20세기 불평등 시대에 미군에 대한 사실상의 치외법권ㄴ이 인정됐다면, 이제 21세기에는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지 못한다는 법이 없고, 공무 중을 포함한 미군의 모든 범죄를 강력히 규제하는 새로운 협정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258쪽

이라크에도, 아프가니스탄에도 수많은 효순이와 미선이가 있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민족자주가, 우리가 되찾고야 말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어찌 한반도의 남녘에만 국한될 것인가? 미국의 오만은 국경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분노도 국경이 없다. 미국의 오만에 상처받은 사람들, 우리는 모두 하나다. 촛불의 힘으로, 아무도 감히 경험해보지 못한 평화의 힘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고 있다.-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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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8-13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날릴까 봐 4줄씩 무수한 수정을 거듭하여 작성. 그리고도 다 못했다. 50구절까지만 가능하구나...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