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 만화로 보는 한국현대인권사
이정익 지음 / 길찾기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사둔 지 조금 되었는데, 어차피 늦은 것 기어이 지금 꺼내어 읽은 것은 최근 뇌리 속에 계속 남아 있는 광주의 잔상 때문이었다.  사두기만 하고 목차도 들춰보지 않았던 나는 이 책이 광주 문제만 다룬 줄 알았는데, 좀 더 폭 넓은 인권에 대해서 다루고 있었다.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 광주 대단지 사건/2장 동일방직 분뇨사건,인혁당 재건위 사건/3장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4장 유신정권의 그림자-고문공화국/5장 광주 민주화 항쟁/에필로그로 이어진다.

70,80년대 군사독재정권이 판을 치고 있던 시절, '인권'이라는 말을 입에 담고 살기도 어려웠던 소시민들의 거칠고 비참했던 삶이 긴 화면 안에 가득 담겨 있다. 

얼마나 어둡고 처절한 느낌의 그림이던지, 글자를 읽지 않고 그림만 넘겨보더라도 금세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어버렸다.  이 책의 제목처럼, 이런 시대를 어찌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싶었다.

산업화도 민주화도 시민권 투쟁도, 모두 서구 사회에서 몇 백년에 걸쳐서 이뤄진 것들을 우리는 몇 십년 내에 모두 삼켜버렸다.  그래서, 소화불량이 되어버렸다.  절차도 의식도 제 단계를 밟지 못하고 숱한 오류와 시행착오를 겪고 말았다.  억지로 주입한 민주주의는 올곧이 자신의 것으로 체득되지 못해 21세기를 사는 오늘날도 버젓이 살아있는 국가보안법이나 금서 목록처럼 우리를 황당한 뉴스로 이동시킨다.

수십 년 전 시민들을 빨갱이 취급하고 벌레만도 못한 대접을 했던 무리들은, 자신들을 그같은 사고관으로 무장시킨 인물들을 신화처럼 떠받들며, 그들만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  정말로 틀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아님 알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어느 쪽도 면죄부를 줄 수가 없다.  그들이 뿌린 세뇌의 효과는 평범한 시민들의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있어 '전사모'같은 꽃팔리는 단체를 생산해 내고 있다.

이 책의 작가는 78년생이다.  민주화투쟁의 시기를 겪지 못했고, 그 시절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생생한 인과관계도 어쩌면 없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작가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직도 진행형이기 때문에....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작가는 멈추지 못했다. 에필로그에 보면 작가를 생각해준다는 선배가 일장연설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네가 왜 나서느냐고... 네가 뭘 아느냐고... 너랑 민주주의가 무슨 관계냐고...

아마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혹은 그런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은 그냥 과거의 흔적쯤으로 치부하고 혹은 역사 쯤으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기억이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그런 일이 정말 있었어? 라는 반응들도 요즘 젊은이들의 흔한 대답일 것이다.

작가는 책을 마치고 선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택시를 탄다.  택시 기사분은 무슨 일을 하냐며, 어떤 만화를 그리냐고 묻는다.  군사정권 시절에 쫓기고 고문당하고 불쌍하게 살았던.. 이유없이 당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그린다고 하자, 아저씨 대답이 압권이다.

거! 이유가 없긴 왜 없어!  어린 친구라 잘 모르겠지만 잡힌 사람들 대부분은 다아 빨갱이였고 간첩이었다고-

물론 어쩌다가 한 두 명은 억울한 사람도 있었겠지.

그렇다고 사정 다 봐줬으면 이렇게 먹고 살 만한 세상이 왔을 것 같애?  인권이네, 뭐네 해도 박통 없었으면 이렇게 못살지, 암-

작가는 더 이상 할말이 없다.  '신념'에 가득찬 아저씨의 대꾸에 반박이라도 할라치면 젊은 놈이 뭘 모른다고 욕설이나 들을 판이다.  내리려는 그에게 아저씨가 한마디 더 한다.

저기... 나도 끌려가고 막 고문당하고 그런 적은 없지만, 그 시절 힘들었다면 힘들었던 사람인데... 만화에 나 같은 사람도 넣어줄 수 있나?

이때, 작가의 표정이 참 인상 깊다.  처음엔 당황한 듯... 그러다가 어딘가 결의가 생긴 듯한 표정으로 꼭 실어주겠다고 대답한다.(작가의 약속대로 택시 아저씨 일화 실렸다..;;;;)



그저 순박하고, 열심히 살아온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른 순진한 아저씨를 보며, 이런 분들이 아직도 너무 많은 대한민국에서 작가처럼 진실을 말하고자 애쓰는 사람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나름의 복이라면 복이라고 해야겠다.  이런 책을 만들어서 출판하고 또 사주는 독자들도 있으니 그것도 약간의 희망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미치지 않고서는 맨 정신으로 살 수 없는 그런 살벌한 곳이 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작가는 힘써 얘기하고, 독자는 열심히 읽고 소문도 내며 널리 알리자.  고맙게도 만화라는 매체를 통해 아주 쉽게 전달하고 있다. (분량도 길지 않아 금방 읽는다.) 이정익 작가...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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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0 23: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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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1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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