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 선조실록 - 조선엔 이순신이 있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7월
구판절판


퇴락해가는 조선은 시대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낸 한 인물을 준비했다.
시대는 또한 박순, 성혼, 유성룡, 이산해, 정인홍, 이발 등 뛰어난 인물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러나 시대의 병은 치유되지 못했다.
율곡은 냉철함과 뜨거움이 잘 조화된 인물.
젊은 나이에 이미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애정 또한 뜨거워 평생 경장을 외친 경세가였다.
그런데 이황과 조광조를 한 몸에 모아놓은 듯한 그였지만, 유종(儒宗)은 되지 못했다. ......애초부터 조정의 신진 사림 중에 이이의 학문적 동료는 없었다.
"율곡은 누구 밑에서 배웠지?"
"독학했잖아."-39-40쪽

선조 20년 3월, 조광현 등이 올린 상소는 '서인'의 범주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처음엔 심의겸의 친구와 그 무리(윤두수, 김계휘 등)를 칭하더니 다음엔 서인을 구언하는 자(정철 등)를 일러 서인이라 하였고 그 뒤엔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은 자(이이, 성혼)를, 마침내는 이이와 성혼을 높이는 자(조헌 등 제자들)들을 서인이라 부릅니다.

동서 화합을 위해 뛰었던 이이가 어느덧 서인의 종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67쪽

그러나 문 중심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무에 대한 경시를 가져오게 마련. 건국 초기에는 그래도 무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진법훈련이나 무기 개량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평화가 지속되면서 무는 점차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이런 경향은 사림이 집권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병법도 모르는 문신들이 비변사 재상, 병조판서, 도원수까지 차지했다. 더욱이 그들은 좋은 장수를 육성하기 위한 제도도, 좋은 장수를 보는 안목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진족이나 왜구의 소규모 침공에 맞서 전공이라도 세우게 되면 바로 명장으로 받아들였다.
장수들도 해이해지기는 마찬가지. 과거에 급제하면 그뿐, 스스로를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변방에 배속되면 다른 무엇보다도 축재에 열성인 그들이었다.
일선 병사들은 양민들 중에서도 가장 약한 처지의 사람들.
이 위험한 삼위일체 체제에 전쟁은 없다는 동인 권력의 상황판단이 더해졌으니......-116-117쪽

반면 일본 군대는 어떤가?
사령관들은 각 지방의 영주이고, 휘하 군대는 그 지방 출신으로 편성되어 있어 단결력이 강했다. "그리고 이미 여러 전투에서 손발을 맞췄기 때문에 조직력이 환상이지." "전군이 정예부대란 말씀"
최신식 조총으로 무장한 그들은 조선 사정에 대해 매우 정통했다. 진작부터 스파이를 풀어 조선 전역을 샅샅이 살피고는 정밀한 지도를 만들어 보유하고 있었다. 납치하여 앞잡이로 삼은 조선인들과 왜관에 거주하여 조선말을 익힌 일본인들까지 다수 확보한 상태.
싸움에 임해서는 먼저 최후를 보내 충분히 정보를 취득하고 그에 기초해 전술을 짜고 움직였다. 지피지기한 최정예 일본군과 적도 아도 모르는 오합지졸 조선군의 싸움이었다.-122-123쪽

"나는 요동으로 가겠노라"
"정 뭐하면 세자를 함경도로 보내면 되지 않겠느냐?"
선조의 상황판단과 대책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비록 그 자신의 안전이 제일의 관심사이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요동 망명이 현실적 대안이라는 선조의 판단에 호응한 이는 이항복과 이덕형이다.-143쪽

명나라를 정벌하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을 그의 과대망상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오랜 실전으로 단련된 수십만의 정예부대, 최신식 조총으로 무 장하고 그에 적합한 전법까지 갖추었으며 싸움에 임하는 완강한 기질은 이미 정평이 난 그들 아닌가? 이후 명나라 군대와의 싸움을 봐도 알 수 있듯, 당시 일본군은 막강했다. 몽고군의 말발굽 아래 항복했고, 뒷날 팔기군의 깃발에 두 손 든 중국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볼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나라 정벌 야망은 허황된 꿈만은 아니었다 하겠다. -148-149쪽

재주와 공로가 있어도 10년 넘게 제자리걸음을 해야 했던 이유는 승진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력은커녕 찾아오는 기회도 차버리기 일쑤였다. 일찍이 이이가 이조 판서로 있을 때 만나보고 싶어했는데 "이순신이 덕수 이씨라 들었는데...." 거절했고, "대감께서 인사권을 갖고 계신 동안은 찾아뵐 수 없다고 여쭈어라."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파직되어 쉴 때 활터에 나가 활을 쏘고는 했는데...
"거 전통이 참 근사하구먼. 어떤가 자네. 그 전통을 이 늙은이에게 줄 순 없는가?"
정승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 그러나...
"죄송합니다, 대감. 이까짓 전통 하나로 대감과 저의 이름을 더렵혀서야 되겠습니까?"-153-154쪽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 의무는 적고 권리는 무한했다.
그 많은 걸 누리던 그들은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문만 듣고는 대거 도망했고, 방어의 책임을 맡은 이들도 적들의 모습만 보고는 도망했다.
벼슬에 있든 없든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제 한 몸만 생각하며 도망 다닐 때 사대부들의 명예를 지킨 이들이 있었다.
침략군이 상륙하고 열흘 뒤, 경상도 의령의 선비 곽재우가 처음으로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했다. 조식의 제자이자 사위로, 조식의 기질을 빼닮은 열혈남아.
그가 일어선 의령은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곳으로 적들의 보긃로 상의 중요 지점이었다. -174-175쪽

곽재우의 모범은 곳곳에 의병의 봉기를 촉발시켰다.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김면은 거창과 고령에서,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있었던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은 합천에서 창의의 깃발을 올렸다.
김성일은 이들에게도 적절한 권한과 병력을 더해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로 인해 초기에는 유격전을 주로 했던 이 일대의 의병부대들이 수천 명의 규모를 갖춤과 함께 정규군처럼 변해갔다.
성을 공격하여 탈환에 성공할 만큼 군세가 신장된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낙동강 서쪽 경상우도 일대는 완전히 수복되었다.
만석꾼인 김면은 가산을 남김없이 의병활동에 쏟아부어 처자들이 문전걸식을 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그러나 처자들을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채 막사에서만 생활하던 그는 이듬해 3월 막사에서 과로로 숨을 거두었다. 다음은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시다.
只知有國 다만 나라가 있는 줄만 알았지
不知有身 이 한 몸이 있음은 알지 못했노라.-179-180쪽

선조는 처음 서울을 뜨면서 왕자들을 곳곳에 파견해 백성들을 위무하고 은광병을 모집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서장자인 임해군은 함경도로 여섯째인 순화군은 강원도로 떠났는데, 강원도가 이미 적의 점령 아래 들어가면서 순화군은 임해군과 합류하여 함경도로 떠났다.
둘은 백성들을 위무하기는커녕 가는 곳마다 평소대로 각종 물품을 요구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함경도는 태조가 왕업의 기반을 닦은 이른바 흥왕지지.
그러나 조사의의 난, 이시애의 난을 겪으면서 왕실의 분노를 샀고, 특별대우는커녕 괄시받는 지역이 되었다. 때문에 이 지역 백성들의 분노는 이미 폭발 직전이었다.
가토군이 철령을 넘어 함경도로 들어섰다는 소식에 함경 감사 유영립을 비롯한 군현과 진의 수령들은 다투어 산 속으로 숨기에 바빴는데, 나라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던 이들은 다투어 그들을 붙잡아다 적들에게 넘기곤 했다. 유영립도 그렇게 넘겨졌다가 간신히 탈출했다. 철없는 왕자들인 임해군, 순화군도 그렇게 포로가 되었다. 평양 진격을 고니시에게 뺏긴 가토에게는 뜻밖의 선물.-193-196쪽

전쟁이 발발하고 피난길에 모르면서, 그리고 자신의 안전에만 급급해 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군왕으로서의 선조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선위를 촉구하는 상소가 여러 차례 있었을 정도였다.(왕조 시대에 하야 요구란 평시라면 반역으로 치부될 일이다.)
처음에 마냥 몰릴 때는 요동으로 갈 수 있다면 선위도 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던 선조였지만, 구원병이 오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선위 문제를 오히려 자신의 위신을 되세우는 방편으로 활용키로 했다. 신하들의 만류는 태종 시절 이래의 역사적 전통 며칠씩 밀고 당기기가 계속된다.
백성들은 적의 총칼과 굶주림으로 죽어나가는데, 며칠식 선위소동으로 소일하고는 했던 조정이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슬며시 뜻을 거둔다. 이후 조금만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여지없이 선위 카드를 들고 나왔다. 잦을 때는 한 달에도 몇 번씩 반복되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모두 마무리되자 선위 이야기는 사라지고, 오히려 세자를 싸늘하게 대했다. -228-229쪽

왕이 일관되게 원균을 추켜세우고 이순신을 폄하하는 태도를 보이자 신하들도 왕의 견해에 부화뇌동하는 경향을 띄어가는데, 그들의 발언에는 원균의 로비가 크게 작용한 흔적들도 보인다. 원균이 전력을 붕괴시키고 도망했던 장수라는 사실은 문제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가 원조를 청했으므로 공이 더 크다는 황당한 논리가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음을 보라.(선조는 끝까지 이 논리를 고수했다)
제대로 된 판단과 주장을 하고 있는 이는 이원익 하나였다.-254쪽

가뜩이나 이순신에 대한 근거 없는 불신으로 가득했던 조정은 이제 이순신 제거의 길에 저마다 경쟁하듯 뛰어든다.
이정형 홀로 바른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고, 이 순신의 추천자인 유성룡까지 모함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
사헌부가 적극 가세하면서 체포령이 떨어졌다............
다행히도 정탁이 나서서 간하면서 고문은 한 번으로 끝나고 삭탈관직되어 백의종군 길에 나선다.-259-262쪽

전쟁의 참화에 책임이 있는 왕과 조정 대신들은 전쟁의 와중에도,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나라를 지킨 이들의 은공을 모르고 후안무치하게 행동했다. 후안무치의 정점에는 물론 선조가 있다. 전쟁 중에 그는 자신을 호종한 신하들에게 가자는 물론, 뭔가 생기면 선물하기에 바빴지만, 일선장수들과 의병장들에게는 인색하기 그지없었다.

적을 물리친 것은 오직 명나라 군대의 힘이고, 자기 나라 군대는 한 일이 거의 없다는 것. 때문에 싸우다 죽은 일선 장수들보다 자신을 호종하고 명나라에 지원을 청한 이들의 공이 훨씬 크다는 것. 이것이 전쟁과 관련한 선조의 기본인식이었다.
선조의 원균사랑도 계속되었다.-288-290쪽

선조는 피난가는 수모를 겪고 수십 번의 선위 쇼도 선보였지만, 전쟁이 끝나고도 10년 넘게 왕좌를 지켰다. 이때까지의 임금 중 최장인 40년 8개월의 재위 기록을 자랑한다.(중종 38년 2개월, 세종 31년 6개월) 머리 회전이 빨랐고, 현실판단 능력도 뛰어났다. 신하들보다 더 현실적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는 했다. 신하들의 대책 없는 서울 사수 주장을 무시하고 피난을 강행했고, 윤두수 등이 독자작전을 주장할 때도 냉정한 판단력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재침 결정이 전해졌을 때도 선조의 판단력은 돋보였다. 문제는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태도였다. 자기 생각을 끝까지 주장하지 않고 꼬리를 뺐다가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게 주특기였다. 자기가 개입한 일도 은근슬쩍 빠진다. 원균에게 부산 출전을 명해놓고는 일이 잘못되자 남의 책임으로 돌린다. "원균은 안 된다고 했는데 도원수 권율이 억지로 내몰아서 그렇게 되었다."
끝없는 잔머리, 이 때문에 신하에 대한 신임이나 판단도 자주 바뀌었다. 그런 선조가 죽을 때까지 딱 한 사람에게만은 일관된 신의를 보여주었으니, 바로 원균이다. -292-294쪽

왜 그랬을까?(필자의 추리다)

원균에 대한 일관된 옹호는 이순신의 존재 때문으로 보인다. 왕은 끝까지 이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자신과는 무척이나 대비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리라. 전쟁 대비도 제대로 못했고, 전쟁이 나자 도망가기에 바빴던 왕이다.
반면 이순신은 일개 변장으로서 완벽하게 전쟁에 대비했고, 다른 장수들이 도망에 급급할 때 함대를 이끌고 나가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일구어냈다.
이후로도 나갔다 하면 최소의 희생으로 경이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육지에서는 국경선까지 몰렸으나 바다의 패자는 조선의 이순신이었다.
그토록 무섭고 강력한 일본군이 이순신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두려움에 떨었다. 거기다 부하들은 물론이고 백성들에게까지 진심으로 존경받았던 무장.
그가 죽자 온 남도 백성들이 곡을 했다. -294-296쪽

왕은 그 많은 승리의 원인도 이순신이 아닌 다른 데서 찾으려 애썼다. 반면 원균은 자기처럼 도망했던 인물 아닌가?
원균을 높여 이순신을 깎아내리고 싶었던 것이다. 왕은 곽재우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고 패배를 몰랐다. 처자를 다 잃었지만 끝까지 전장을 지킨 홍의장군 곽재우.
전쟁이 끝난 뒤에는 공을 내세우지 않았고, 벼슬에 나아가기를 싫어했다. 도무지 흠잡을 데 없는 인물 김덕령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마뜩치 않아했다.
다른 의병장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빈말이나마 뜨겁게 그들의 의기와 공훈을 고무하는 발언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호종한 이들에 대한 선조의 사랑은 물론 다들 도망가는데 떠나지 않고 자신을 지켜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리라.
그러나 단지 그뿐이라면 가산을 털어가며 의병을 일으키고 싸우다 죽은 의병장들에 대해서 못지 않은 고마움을 표해야 마땅할 것이다.

호종한 이들은 어찌됐든 함께 피난 다닌 이들 때문에 자신보다 도덕적으로 특별히 나을 게 없다는 동류의식이 작용한 것이 아닐까?
어쨌든 뻔뻔한 왕과 조정 대신들로 인해 구국영웅들은 죽은 뒤에도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296-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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