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 신영복 서화 에세이
신영복 글.그림, 이승혁.장지숙 엮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2월
구판절판


절반 [折半]과 동반 [同伴]

피아노의 건반은 우리에게 반음의 의미를 가르칩니다. 반은 절반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동반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半과 伴의 여백에 있습니다.
'절반의 비탄'은 '절반의 환희'와 같은 것이며,
'절반의 패배'는 '절반의 승리'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반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절제할 수만 있다면,
설령 그것이 환희와 비탄 승리와 패배라는 대적의 언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동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40쪽

가장 먼 여행

The longest journey for anyone lo us is from head to heart.
인생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냉철한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이
그만큼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있습니다.
Another longest one is from heart to feet.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실천입니다.
현장이며 숲입니다.-50쪽

태산일출을 기다리며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엽서를 끝내고
옆에다 태산일출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후에
그림 속의 해를 지웠습니다.
물론 일출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태산에 일출을 그려 넣는 일은
당신에게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곤경에서 배우고, 어둔 밤을 지키며,
새로운 태양을 띄워 올리는 일은
새로운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55쪽

콜럼부스의 달걀

콜럼부스의 달걀은 발상전환의 전형적 일화입니다.
발상의 전환 없이는 결코 경쟁에 이길 수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메시지로 오늘날도 변함없이 예찬되고 있습니다. 아무도 달걀을 세우지 못했지만 콜럼부스는 달걀의 모서리를 깨트림으로써 쉽게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상전환의 창조성이라고 하기보다는 생명 그 자체를 서슴치 않고 깨트릴 수 있는 비정한 폭력성이라 해야 합니다.
....................
이것은 콜럼부스 개인의 이야기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것을 천재적인 발상전환이라고 예찬하고 있는
우리들이 이야기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콜럼부스가 도착한 이후, 대륙에는 과연 무수한 생명이 깨트려지는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생명이 무참하게 파괴되는 소리는
콜럼부스의 달걀에서부터 오늘날의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음이 사실입니다.-69쪽

속도는 가속으로 가속은 질주로 이어집니다.

자동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1미터의 코스모스 길은 한 개의 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가을을 남김없이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꽃길이 됩니다.-77쪽

빈손

물건을 갖고 있는 손은 손이 아닙니다.
더구나 일손은 아닙니다.
갖고 있는 것을 내려 놓을 때
비로소 손이 자유로워집니다.
빈손이 일손입니다. 그리고 돕는 손입니다.-80쪽

No money No problem

갠지스 강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No money No problem."
나는 그가 던진 만트라에 화답하였습니다.
"No problem No spirit."-83쪽

나무야 나무야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생각하는 나무가 말했습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106쪽

진선진미

ㅁ고표의 올바름을 善이라 하고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가 바르지 않고 그 과정이 바를 수가 없으며,
반대로 그 과정이 바르지 않고 그 목표가 바르지 못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하나입니다.-107쪽

우리를 잠재우는 거대한 콜로세움

콜로세움은 맹수와 맹수, 사람과 맹수,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혈투를 벌이던 로마의 원형 경기장입니다.
이 경기장에서 혈투를 벌이다 죽어간 검투사들의 환영이 마음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우리의 마음을 암울하게 하는 것은 스탠드를 가득 메운 5만 관중의 환호 소리입니다.
인구 100만이던 로마에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콜로세움은 과연 그 영향력의 크기를 짐작케 합니다.
빵과 서커스와 혈투에 열광하던 이 거대한 공간을 우리는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더욱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은 로마 유적에 대한 관광객들의 그치지 않는 탄성입니다. 이러한 탄성이 바로 제국에 대한 예찬과 정복에 대한 동경을 재생산해내는 장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위용을 자랑하는 개선문은 어디엔가 만들어 놓은 초토焦土를 보여줍니다.
개선장군은 모름지기 상례(喪禮)로 맞이해야 한다는 "노자"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생각하게 됩니다.
로마제국은 다만 과거의
고대 제국일 뿐인가?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잠재우는
거대한 콜로세움은 없는가?-149쪽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합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174쪽

북한산의 사랑과 이성

북한산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빼곡히 들어찬 빌딩이 너무 무겁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사람의 경우에도 가슴과 이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랑이 없는 이성은 비정한 것이 되고
이성이 없는 사랑은 몽매와 탐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인가를 이야기하다가
가슴이 ㅁ너저라는 당신을 어리석다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는 말을 우스워하였습니다.
인간의 사고가 이루어지는 곳은 심장이 아니라 두뇌라는 사실을 들을 그것을 비웃기까지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성주의의 극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의 오만이 부끄럽습니다.
우리의 이성이란 한갓 땅 위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인 것을,
그 흙가슴을 떠나면 뿌리가 뽑힌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북한산에서 보는 서울은 거울입니다.
우리를 반성하게 하는 거울입니다.-183쪽

종이비행기

사상은 실천됨으로써 완성되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실천된 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지붕에서 날리는 종이비행기가
그의 사상이 도리 수는 없습니다. -190쪽

새해의 지혜와 용기

세모에 지난 한 해 동안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나는 이 겨울의 한복판에서
무엇을 자르고,
무엇을 잊으며,
무엇을 간직해야 할지
생각해봅니다.-194쪽

태양의 산물

인류의 문명은 태양의 산물입니다.
식량과 에너지는 물론 생명 그 자체가 바로 태양의 산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사의 과정은 태양을 잊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잉카 문명에서 오로지 황금만을 계승하였던 무지한 역사가
오늘날도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들의 부끄러움입니다.-198쪽

평화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평화가 길입니다.-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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