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중종은 집권 내내 끝없는 옥사를 일으켰지만, 이홍윤의 옥사 이후 그녀가 죽는 날까지 이렇다 할 옥사는 없었다. 그만큼 문정왕후의 국정 장악능력이 뛰어났다는 의미다. 또한 그녀의 정치는 중종처럼 우왕좌왕하지도 않았다. 냉혹하다고만도 할 수 없는 것이 인종비를 끝까지 문제 삼지 않았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윤임의 아비인 윤여필을 풀어주기도 했다. 사치, 향락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궁중연회도 좀처럼 열지 않았다. -103쪽
그녀의 패착은 사림을 혐오하고 측근들의 정보와 판단에 의존한 정치를 한 데 있었다. 측근들의 비대화와 부패는 당연한 수순. 거듭되는 흉년으로 인한 민생대책과 수령들의 횡포를 방지하는 데도 꾸준한 관심을 기울였지만, 성과가 신통치 않았던 것은 그 측근들이 세상을 주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104쪽
그렇다 해도 그녀에 대한 사관들의 평가는 너무 박하다. 사관들은 심지어 조선 사회 자체의 모순에 의한 나라와 백성의 피폐함까지 모두 그녀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한마디로 그녀는 당대 유학자들의 '공공의 적'이었던 것. 왜 그랬을까? 을사사화 등 사림의 화가 한 원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겠고, 어질고 사림을 사랑했던 인종을 배척한 데 대한 분노도 작용했으리라.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도 중요한 원인.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모든 유학자들을 분노케 한 그녀의 정책, 즉 '불교 되살리기'가 아니었나 싶다.-105쪽
수령의 횡포를 억제할 수 있게 수령 고소 금지법을 폐지하는 문제도 제기되었지만, 초록은 동색이라 했던가? 이내 묻혀버린다. 병폐는 명종 말년에 가도 개선되지 않았다. 개국 이래 점점 자라온 고름이었고, 명종이나 문정왕후의 잘못으로 쉽게 돌릴 수만은 없는 조선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였다. -172쪽
수령의 수탈이나 공납, 군역의 고통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만큼 백성들의 유랑도 유랑민 일부의 도적화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태평성대로 일컬어지는 세종이나 성종 시절에도 그랬고, 연산 시절에는 뒷날 소설의 모티프가 된 홍길동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임꺽정이 있다.-173쪽
왜 임꺽정은 도적이 되었는가? 당시 사관의 논평을 보면 사태를 정확히 읽고 있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 후로도 달라지지 않았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지금의 재상들은 탐오가 풍습을 이루어 끝이 없기 때문에 수령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세가를 섬기느라 못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고는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랴?
진실로 조정이 청명하여 재물만을 탐하지 말고 어진 이를 수령으로 가려 뽑는다면 칼을 든 도적들이 송아지를 사서 고향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려 추적하여 붙잡으려고만 한다면 붙잡는 대로 또 뒤따라 일어나 장차엔 다 붙잡지 못할 것이다."-180쪽
당대의 대학자들답게 둘은 끝까지 서로에 대해 나름의 예를 지키며 표나게 대립하지 않았지만 뒷날 제자들은 상대의 스승을 비판하며 격렬히 대립하게 된다.
주자학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는 퇴계 철학은 이후 조선 철학의 방향을 결정지었을 뿐 아니라 일본 주자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유성룡, 김성일, 조목, 기대승, 이산해 등 그의 제자들은 퇴계학파를 형성하여 나중에 동인-남인의 중추를 이루게 된다.-202쪽
남명학파를 형성한 조식의 제자들로는 정인홍, 김우옹, 곽재우, 김천일 등이 있다.
실천을 중시하는 조식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그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적극 활약했다.
동인-북인의 중추를 이룬 그들은 광해군과 함께 집권에 성공했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면서 괴멸되다시피 했다.
게다가 조식도 이렇다 할 이론적 저술을 남겨놓지 않아서 남명학파는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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