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미따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 지음, 부희령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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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문학은 처음 접해 본다.  더군다나 우리와 비슷한 근현대사를 겪었던 그들의 이야기라고 하니 더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받아본 책은 생각보다 두꺼워서 놀랐교, 이중표지의 기름종이같은 오로지를 걷어내면 너무나 유혹적인 핫핑크의 강렬한 표지가 드러나서 또 놀랐다.  작은 부제목으로 '전설적 창녀'라는 글씨가 강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과 비슷한 아픔을 가진 필리핀이 서로 연대하여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비슷한 아픔, 비슷한 굴곡.... 어쩐지 목이 메이는 부분이었다.

작품의 주인공 에르미따는 평범치 못한 출생과정으로 평범치 못한 인생 여정을 갖게 되는 인물이다.  스페인의 식민 지배 300년의 세월을 걷어냈던 필리핀인들은 이어서 미국의 지배를 받았고, 태평양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모진 고통을 받았다.  작품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 일본인 병사에 의해서 강간으로 인한 사생아를 낳는 로호 가문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연다.   명문 가문으로 이름높은 로호 집안은 스페인 메소티소로 사회의 기득권을 모두 누려온 부호 집안이었다.  부족함을 모르고 살아온 인생길에서 일본인 병사와의 맞닥뜨림은 일생 최대의 수치였으며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고, 부정하고픈 과거였다.

불필요한 가정이지만, 만약 사생아를 낳게 된 그녀가 그 '대단한' 집안의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과연 그렇게 아이를 냉정하게 버릴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보육원에서 자라는 아이를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집안으로 데리고 오지만 20년 동안 한 번도 만나주지 않은 엄마, 10년 동안 아이를 맡았지만 가족은커녕 일꾼 취급을 해버린 이모와 외삼촌이라니...  에르미따의 비극은 누구도 원치 않는 생명을 잉태시킨 일본군 아버지뿐 아니라, 차가운 피를 자랑한 어머니와 그녀의 식구들에게도 있었다.

에르미따가 스무 살이 되면서 로호 가문을 나오게 되는 과정은 조금 싱거웠다.  그녀는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마침내 폭발시켰고, 그 대가는 가족처럼 지내온 맥의 가족들과 함께 거리로 내몰리는 것이었다.  나름의 책임의식을 가진 에르미따는 큰돈을 벌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있다고 믿은 유일한) 일을 하기로 한다.  그것은 '창녀'가 되는 것이었다.

'쩐의 전쟁'에서 주인공 금나라가 사채업자가 되는 과정의 그 잔인한 운명과 비교한다면, 그녀의 선택의 최선이 꼭 '창녀' 밖에는 없었을까 안타까움이 앞선다.  또 맥의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당장에 먹고 살 일이 걱정이라고는 하지만,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던져 '희생'을 한 대가로 그들의 삶이 이어진다고 한다면, 그렇게 해서 받은 '교육'이 무슨 의미일까 싶으며 그들의 안락함이 얼마나 편안할 지 의심스럽다.  (맥 혼자만이 거부했었다.)

그렇지만 다 제껴두고....;;;
에르미따는 철저하게 달라진 삶을 살아간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재능을 이용하여 큰돈을 벌었고,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고, 자신을 망가뜨린 로호 가문에 철저하게 복수한다.  그녀는 많은 친구들을 만들었고, 많은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도 되었고, 원하던 미국 시민권에 미국인과의 결혼까지 손에 넣었지만,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

복수하는 순간 행복했다고 말하지만, 그 말의 공허함은 그녀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남자들을 그 몸으로 받았지만, 최고의 절정의 순간은 맛보지 못한 것처럼, 그녀의 몸과 마음은 늘 또 다른 '갈급함'에 허덕였다.  그리고 늘 외로웠다.

그녀를 통해서 보여지는 이야기들은 필리핀의 현대사를 그대로 재현시킨다.  땅을 매개로 한  타락한 지주계층과 그들의 비윤리성, 군을 이용하여 권력을 쟁취한 사람들, 그들의 독재 권력, 부패한 사회에 대한 반성과 자기 연민으로 가득하지만 현실에 타협하는 지식인, 사회의 부조리함에 항거하기 위해서 젊은 혈기를 모아 덤비지만 허무하게 스러져버리는 가엾은 젊은 목숨들까지...

그리고 독자의 입장에서 그 이야기에 절로 탄식이 나오는 것은, 오버랩되어 비쳐지는 우리의 현대사 때문이다.  에르미따의 삶과 그 주변의 이야기들은 지명과 등장인물만 바꾸면 그대로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우리 역사 속의 수많은 에르미따, 그들은 여전히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정체성에 허덕이고 있다.

나는, 작품이 마지막에는 '희망'을 노래하며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맥은 진심을 알아주고 그녀를 다시 안아줄 것이며, 보장된 안락함을 버리고 미국에서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온 에르미따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안이 조금은 주어질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다.  하지만 맥은 떠났고, 보육원에서 길러준 수녀님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에르미따의 '오래 전 죽음'에 대해서 구슬프게 이야기 한다.  그녀는 여전히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녀의 삶은 이미 오래 전에 끝마쳐진 것이라고 수녀님은 얘기한다.  에르미따가 충격을 받은 만큼 독자도 아찔함을 느꼈다.

애써 부정하고 싶은 과거를 덮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애써 행복해지려고 애쓰지만 그것이 얼마나 먼 이야기인지, 애써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이 얼마나 막연하고 막막한 것인지, 독자는 먹먹함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스페인에게 착취당하고 미국에게 이용당하고, 일본에게 크게 얻어맞았던 필리핀.  일본에게 밟히고 미국에게 찢긴 우리나라...  억압받고 무시당하고 왜곡된 길을 걸은 것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은, 그 수모와 아픔을 고스란히 잊어버린 채, 또 다른 억압 세력으로 바뀌어가는 사회의 부조리성을 발견할 때이다.  먼 훗날, '그때에 이미 죽었다'라는 무서운 선고를 듣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달라진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필리핀도,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의 비참한 에르미따를 만나지 않기 위해서, 또 되지 않기 위해서...

여담인데, 작품을 읽으면서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이 자꾸 떠올랐다.  똑같이 '창녀'를 앞세웠고, 그녀 역시 원래 이름은 '마리아'였으며,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그 생활을 청산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엔딩은 너무나 다르다.  단순 재미를 따진다면 11분이 매력적이었지만, 작품의 무게감은 에르미따와 비교하기 어렵다.  별점과 무관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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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7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7-06-07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닥님, 님이 에르미따를 만날 날이 기다려져요. 좀 오래 걸린다 해도 뭐 어때요^^;;;

네꼬 2007-06-08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지런함. 성실함. 마노아님이 읽고 쓰는 걸 옆에서 보면 떠오르는 말들. ♡

마노아 2007-06-08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 서평도서 하루 늦게 올린 게으름뱅이인 걸요,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