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절판


칸은 명의 변방을 어지럽히는 다른 부족장들의 목을 베어 명 황제에게 바쳤고, 명 황제가 상을 내리며 마음을 푼 사이에 발 빠른 군사를 휘몰아 명의 따뜻한 들판을 빼앗았다. 칸은 충성과 배반을 번갈아가며 늙어서 비틀거리는 명의 숨통을 조였다. 칸은 말뜻에 얽매이지 않았다. 본래 충성의 뜻이 없었으므로 명의 변방 요새들을 차례로 무너뜨려도 그것은 배반이 아니었다. 그에게 충성과 배반, 공손과 무례는 다르지 않았다. 칸은 그의 족속들과 더불어 죽이고 부수고 빼앗고 번식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22쪽

내가 이미 천자의 자리에 올랐으니, 땅 위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나를 황제로 여김은 천도에 속하는 일이지, 너에게 속하는 일이 아니다. 또 내가 칙으로 명하고 조로 가르치고 스스로 짐을 칭함은 내게 속하는 일이지, 너에게 속하는 일이 아니다.
네가 명을 황제라 칭하면서 너의 신하와 백성들이 나를 황제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까닭을 말하라. 또 너희가 나를 도적이며 오랑캐라고 부른다는데, 네가 한 고을의 임금으로서 비단옷을 걸치고 기와지붕 밑에 앉아서 도적을 잡지 않는 까닭을 듣고자 한다. -25쪽

너희의 두려움을 내 모르지 않거니와, 작은 두려움을 끝내 두려워하면 마침내 큰 두려움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임금이니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라. 너의 아들이 준수하고 총명하며, 대신들의 문장이 곱고 범절이 반듯해서 옥같이 맑다 하니 가까이 두려 한다.
내 어여삐 쓰다듬고 가르쳐서 너희의 충심이 무르익어 아름다운 날에 마땅히 좋은 옷을 입혀서 돌려보내겠다.
대저 천자의 법도는 무위를 가벼이 드러내지 않고, 말먼지와 눈보라는 내 본래 즐기는 바가 아니다. 내가 너희의 궁벽한 강토를 짓밟아 네 백성들의 시체와 울음 속에서 나의 위엄을 드러낸다 하여도 그것을 어찌 상서롭다 하겠느냐.
그러므로 너는 내가 먼 동쪽의 강들이 얼기를 기다려서 군마를 이끌고 건너가야 하는 수고를 끼치지 말라. 너의 좁은 골짜기의 아둔함을 나는 멀리서 근심한다.-26쪽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 있었고 토막 없이 길게 이어졌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눈 덮인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주린 노루들이 마을로 내려오다가 눈구덩이에 빠져서 얼어 죽었다. 새들은 돌멩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31-32쪽

밝음과 어둠이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날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남한산성에서 시간은 서두르지 않았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군량은 시간과 더불어 말라갔으나, 시간은 성과 사소한 관련도 없는 낯선 과객으로 분지 안에 흘러 들어왔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었다. 쌓인 눈이 낮에는 빛을 튕겨 냈고, 밤에는 어둠을 빨아들였다. 동장대 위로 해가 오르면 빛들은 눈 덮인 야산에 부딪쳤다. 빛이 고루 퍼져서 아침의 성 안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오목한 성 안에 낮에는 빛이 들끓었고 밤에는 어둠이 고였다. 짧은 겨울 해가 넘어가면 어둠은 먼 골짜기에서 퍼졌다. 빛이 사위어서 물러서는 저녁의 시간들은 느슨했으나, 어둠은 완강했다. 먼 산들이 먼저 어두워졌고 가까운 들과 민촌과 행궁 앞마당이 차례로 어두워졌다. 가까운 어둠은 기름져서 번들거렸고, 먼 어둠은 헐거워서 산 그림자를 품었다. 어둠 속에서는 가까운 것이 보이지 않았고, 멀어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이 가까워 보였다. 하늘이 팽팽해서 별들이 뚜렷했다. 행궁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치솟은 능선을 따라가는 성벽이 밤하늘에 닿아 있었고, 모든 별들이 성벽 안으로 모여서 오목한 성은 별을 담은 그릇처럼 보였다. 별들은 영롱했으나 땅위에 아무런 빛도 보태지 않아서, 별이 뚜렷한 날 성은 모든 별들을 모아 담고 캄캄했다. 어둠 저편 가장자리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자욱했다. 이십만이라고도 했고, 삼십만이라고도 했는데, 자욱해서 헤아릴 수 없었다. 적병은 눈보라나 안개와 같았다. 성을 포위한 적병보다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서 종적을 감추는 시간의 대열이 더 두렵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무도 아침과 저녁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 새벽과 저녁나절에 빛과 어둠은 서로 스미면서 갈라섰고, 모두들 그 푸르고 차가운 시간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179-180쪽

-다녀오겠느냐?
-조정의 막중대사를 대장장이에게 맡기시렵니까?
-민망한 일이다. 하지만 성이 위태로우니 충절에 귀천이 있겠느냐?
-먹고 살며 가두고 때리는 일에는 귀천이 있었소이다.
김상헌이 엉덩이를 밀어서 서날쇠에게 다가갔다.
-이러지 마라. 네 말을 내가 안다. 나중에 네가 사대부들의 죄를 묻더라도 지금은 내 뜻을 따라다오.-227쪽

최명길이 말했다.
-전하,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옵니다. 군병들이 기한을 견디듯이 전하께서도 견디고 계시니 종사의 힘이옵니다. 전하, 부디 더 큰 것들도 견디어주소서.-249쪽

임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칸이 오기는 왔다는 것인가?
김상헌이 말했다.
-칸이 여기까지 오기도 어렵거니와 칸이 왔다 한들 아니 온 것과 다르지 않사옵니다.
-다르지 않다니? 같을 리가 있겠는가?
-우리의 길은 매한가지라는 뜻이옵니다.
최명길이 말했다.
-제발 예판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김상헌이 목청을 높였다.
-내 말이 그 말이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오. -269쪽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조선이었다. 송파강은 날마다 부풀었다. 물비늘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칸은 답답했다. 저처럼 외지고 오목한 나라에 어여쁘고 단정한 삶의 길이 없지 않을 터인데, 기를 쓰고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됨으로써 멀리 있는 황제를 기어이 불러들이는 까닭을 칸은 알 수 없었고 물을 수도 없었다. 스스로 강자의 척이 되는 처연하고 강개한 자리에서 돌연 아무런 적대행위도 하지 않는 그 적막을 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서 송파강에 당도하기까지 행군대열 앞에 조선 군대는 단 한 번도 얼씬거리지 않았다.-280쪽

도성과 강토를 다 비워 놓고 군신이 언 강 위로 수레를 밀고 당기며 산성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내다보지 않으니, 맞겠다는 것인지 돌아서겠다는 것인지, 싸우겠다는 것인지 달아나겠다는 것인지 주저앉겠다는 것인지, 따르겠다는 것인지 거스르겠다는 것인지 칸은 알 수 없었다.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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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4-23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벌써 읽으셨군요. 전 받아두고 아직 못 읽었어요.
179쪽의 시간에 대한 긴 글,, 특유의 냄새가 나네요..

마노아 2007-04-23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 특유의 필체가 보이죠. 다시 읽다가 오타 수정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