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 중종실록, 조광조 죽고... 개혁도 죽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명분'이라는 것은 겉치레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실상 어떤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에 있어서 몹시 중요할 때도 있다.  반정 공신들은 연산군을 끌어내리기 위한 명분으로 그의 패악무도한 짓거리들을 꼽았지만, 그들 자신이 연산군 때 총애를 받으며 누릴 것 다 누렸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명분이 부족했다.  부족한 명분으로 인해 또 다른 반정이 일어날까 두려워 했고, 그래서 "공신책봉"이라는 무기가 필요했다.  니나 나나 똑같재~라는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유부단했던 중종은 그 놈의 '명분'을 '선왕'이나 '공신'들에게서 찾았다.  선왕이 하지 않았으니 나도 할 수 없고, 선왕이 했으니 나도 해야 했다.  공신들이니 죄를 줄 수 없고, 공신들이니 해달라는 것을 내줘야 했다.   그의 핏줄은 왕위에 올릴 만한 자격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지만 준비된 왕이 전혀 아니었던 그는, 지금껏 살아온 모양새가 그렇듯 '제 몸 보신'에 너무 집착하였다.  그의 이상은 훌륭한 유교국가 조선도 아니었고, 백성을 배불리 먹이는 조선도 아니었고, 그저 '왕'으로서의 자리 지키기, 나아가 왕권강화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조광조'라는 앞뒤 안가리고 덤빌 줄 아는 무대포 이상주의자가 곁에 있었어도 중종은 그 카드를 제대로 쓸 줄 몰랐고, 오히려 판을 뒤엎기에 이른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행동이 모두 적당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들은 너무 서둘렀고, 임금을 지치게 했으며, 때로 윽박지르기도 했다.  임금의 뜻과 그들의 뜻이 서로 다르다는 것도 파악하지 못했던 그들은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을 성공시키기엔 역시 준비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급진적 조광조 말고 중도파에 속하는 정광필이란 카드는 어땠을까?  중용을 지킬 줄 알았고 평정심을 유지할 줄 알았으며, 어느 쪽으로든 아부하지 않고 올곧게 한 길을 갔던 그 카드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알았다면 중종의 시대는 재평가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종은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광조도 정광필도 제대로 손잡아 주지 못했고, 그의 시대는 연산군의 시대만큼 힘들면 힘들었지 결코 편안했던 시절이 아니었다.

임금이 아무리 기운 옷을 입는다 할지라도 백성의 주린 배를 채워줄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직무 유기라 할 것이다.  연산군처럼 대놓고 피를 흘리진 않았지만, 그의 뜻에 반한다 여긴 신하를 처벌하는 데에 만만치 않은 피를 흘리게 한 중종은, 그 수많은 피로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  그의 긴 치세는 그저 '제자리 뛰기'였던 것이다.

사극을 통해서 참 자주 접했던 중종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중종의 다른 면면을 살필 수 있어서 즐거웠고 또 그 차가운 심성에 섬뜩하기도 했다.  삼포왜란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우리 측의 실책도 살펴준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었다.  치우치지 않는 시각으로 책을 서술해 주어서 두고두고 고맙다.  어서 빨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보고 싶다.  광해군과 정조도 내가 서둘러 보고 싶은 임금들이다.  이제 출간된 책으로는 달랑 한 권 남았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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