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송이 붉은 연꽃 샘깊은 오늘고전 3
허난설헌 지음, 이경혜 엮음, 윤석남.윤기언 그림 / 알마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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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여자의 노래

얼굴이며 자태며 어디 빠지랴
바느질도 길쌈도 척척이지만

가난한 집안에 파묻혀 자라니
중매쟁이라곤 얼씬도 안 하네.

추워도 배고파도 아무 티도 안 내고
온종일 창가에서 베만 짜고 있네.

어버이만은 나를 가련케 여기시지만
남들이야 어찌 내 신세를 알아주랴.

밤 깊도록 쉴 틈 없이 베를 짜느라
덜그럭덜그럭 차가운 베틀이 울고 있네.

베틀에 걸려 있는 명주 한 필은
누구의 옷이 될까.

한 손에 가위 들고
삭둑삭둑 가위질을 하고 있으니

차가운 밤 기운에
열 손가락이 시려 오네.

남 시집갈 때 입을 옷은
잘도 짓는데

정작 나는 해마다
홀로 잠들 뿐.-136-137쪽

다시 시집가는 선녀(조선의 재혼 금지 풍습을 비웃고 있는 시)

선녀 동비에게
서왕모가 분부를 내리셨네.
"술랑한테 시집가거라!"

동비는
자줏빛 난새에 올라타고
아지랑이 아물아물
신랑 집으로 날아간다네.

꽃 앞에서
한 번 이별하면
삼천 년

예전에야
신선 세상 큰 세월이
그저 못마땅하기만 했지.

(이 시는 '신선 세상에서는 이렇게 혼자 사는 여인을 챙겨서 재혼까지 시켜 준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신선 세상도 그렇게 하는데 하물며 사람 세상에서야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146-147쪽

이 세상에 마음 붙이지 못하고 산 허난설헌이 자신을 귀양 온 여자 신선이라 생각하며 가까스로 살아온 끝에 마침내 자신이 돌아갈 곳의 집을 짓는 그 마음이 나는 참으로 안쓰러우면서도 감동적이었습니다.
허난설헌은 이렇게 자기가 돌아가 쉴 집까지 하늘나라에 지어 놓았습니다. 어쩌면 난설헌은 정말로 이 세상에 잠시 귀양 왔다 떠나간 여자 신선이 아니었을까요?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겠지요.
허난설헌이 잠시 귀양을 왔다 떠나간 여자 신선이든, 아니면 우리와 똑같은 보통 사람이든 상관없이 나는 허난설헌에게 진심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이 땅에 들러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184-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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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05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베를 짜는 '은혜 갚은 학'이 생각나는군요.

마노아 2007-04-05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하희라씨가 그 은혜 갚는 학으로 나온 적이 있어요. 어린 마음에 어찌나 슬피 울었던지요. 그 조잡한 분장에도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