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 중종실록, 조광조 죽고... 개혁도 죽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5월
구판절판


그동안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가까웠을 터인데 하루 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 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듯하다.
(조광조에 대한 사사 결정이 나온 날, 사관이 적은 논평이다.)-127쪽

어쨌든 기묘사화와 함께 조광조의 개혁은 끝났다. 중종은 소격서까지도 부활시켰을 만큼 조광조에 의해 이룩된 개혁조치들을 다 되돌려 놓았다. 정국공신은 살아남았다. 엄청난 재산과 현실적인 힘을 보유한 그들은 끝없이 재산 증식을 꾀했다. 공신, 대신, 왕자, 부마들은 궁궐 같은 집을 짓고 갖은 사치를 행했지만 백성들은 그만큼 땅에서 유리되었으며, 상당수는 도둑이 되어 세상을 불안케 했다. 단근법(아킬레스건을 끊는 형벌), 경면법(얼굴에 죄명을 문신해 넣는 형벌)을 부활하는 등 도둑들에 대한 강경 처방을 내렸으나 줄어들지 않았다. 세수가 줄어들고, 그에 따라 나라는 늘 가난에 허덕였다. 재정이 빈약하니 국방력도 자연히 약화된다. 군인 수가 줄어들고 무기는 녹슬어가는데도 손쓸 도리가 없다. 유생들은 공부하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조정에서 학교 진흥책을 내놓아도 효과가 없었다. 민심은 늘 흉흉하여 익명서가 달린 화살이 곳곳에 꽂혔다. 각종 고변사건도 잦았는데, 대개는 상을 노린 무고였다.

대간은 건강성을 잃었다. 견제가 약해지자 일부 대신들에게 힘이 쏠렸고 그들은 점차 권신화되어갔다. 결국 조광조의 죽음은 개혁의 실패였고, 중종의 실패였다.-131-133쪽

김안로의 복귀에서 숙청까지를 보면 조광조의 경우와 무척 유사하다. 무모할 정도의 힘 몰아주기, 그리고 갑작스런 뒤집기! 여기에 중종식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이 들어 있다. 이 시대 모든 임금들이 가졌던 최우선 목표는 왕조의 유지요, 왕좌의 유지였다.

"태평성대? 부국강병? 그딴 건 다 그 다음의 목표라고."

반정으로 임금이 쫓겨나는 것을 경험한 중종에게 있어 이 문제는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신하가 임금을 몰아내다니... 그것도 강력하기 그지 없었던 연산 형님을... 나라고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는가? 나는 형님처럼 힘도 없는 걸. 우선은 신하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아야 해. 성실한 모습, 말 잘 듣는 모습을 보이고 힘을 가진 자들을 억울한 상황으로 내몰지 말아야겠지. 욱하면 곤란하잖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를 지켜줄 보디가드가 필요해. 다른 신하들을 능히 제압할 수 있는 자, 그런 자와 동맹을 이룬다면...'

박원종은 바로 그런 존재였다. 반정 주도자로서의 압도적인 힘, 과연 즉위 초 여러 역모 사건이 잇달았지만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보호자 격인 동맹이 사라졌다. 권력의 공백상태, 곧 보호자의 공백상태가 온 것이다. 그때 조광조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래 봐야 아직은 신진일 뿐.
왕은 빠른 승진과 공고한 신임을 보여줌으로써 조광조를 일약 정승을 능가하는 실세로 만들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박원종과는 많이 다른 인물.
어찌 보면 박원종은 권세와 영화의 유지를 추구하는 평범한 신하였지만, 출발부터 왕의 스승으로 자리 잡은 조광조는 자신의 영화보다는 이상 실현에 모든 것을 건 사람. 시간이 흐를수록 조광조의 존재는 커져만 가고, 원칙과 이념이 조정을 지배한다. -181-185쪽

하여 중종은 잠시 밀쳐두었던 카드인 남곤을 이용해 조광조를 밀어냈다. 유학자지만 이상보다 현실을 중시하고 대신에서 말단까지 능숙하게 관리하는 남곤. 남곤이 죽자 왕은 본능적으로 새 동맹을 찾았다.
확실히 김안로는 조광조보다 남곤 쪽에 가까운 인물. 그러나 문제는 욕심이 훨씬 더 크고, 정치적 수완 또한 뛰어나다는 사실이었다. 복귀하자마자 갖가지 방법으로 반대파들을 숙청해나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김안로의 보복 정치는 왕조차 제어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렸다. 결국 김안로도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린 왕은 기회를 보다 기습적으로 제거해버린다.

늘 여론에 귀 기울이고, 온화하며, 우유부단하던 왕은, 권력을 교체할 때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했다. 독선적이고 냉혹하며 과감한 모습으로!

중종은 아마도 그 어떤 신하도 진심으로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박원종의 하나뿐인 아들을 싸늘하게 내쫓아버렸으며, 조광조에 대해서도 끝까지 마음을 풀지 않았다. 정광필도 믿지 못했다. 그가 유배에서 풀려나자 일각에서는 다시 그를 정승에 기용할 것을 주장했었다. 참 고독한 군주였다.-186-188쪽

중종의 39년은 참으로 일관된 39년이었다. 내내 부지런했고, 비판에 귀 기울였으며, 반성과 사과에 인색하지 않았다. 세종이나 성종도 재위 20년을 넘기면서는 사뭇 독선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중종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국정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았다. 국방, 민생, 인사, 교육, 출판, 의료 등등......
그런데도 이렇다 할 진전을 이뤄내지 못한 건 왜일까?

그는 단지 성실했을 뿐이었다. 왕좌의 유지라는 최우선 목표만 있었지, 장단기 구상도, 일의 선후도, 일관된 원칙도, 책임성도 없었다. 자신은 해어진 옷을 기워 입을 만큼 검소했지만, 자식들의 호화 사치에는 대간의 잦은 문제제기에도 간섭하지 않았다.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과 병력의 감소를 걱정하면서도 공신들은 끝까지 손대지 못했으며, 학교 교육의 낙후함과 선비들의 공부하지 않는 풍조를 염려하면서도 사화를 직접 주도한 왕이었다.

재위기간 동안 고변 사건, 익명서 사건은 수없이 많았다. 대형 옥사로 번진 것만 해도여러 번이어서 옥사에 희생된 이가 연산 때를 능가할 지경이었다. -189-191쪽

39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권좌를 지켰으면서도 제자리 뛰기만 하다 떠난 중종.
조광조라는 제대로 된 선택을 해놓고도 개혁보다 왕좌 유지에만 골몰했기에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조광조에게 몰아준 힘의 일부를 정광필에게 주었으면 어땠을까?
조광조와 그의 그룹을 개혁 엔진으로 삼고, 정광필로 적절히 제어하면서 운행했더라면...
조광조 이후의 정치는 특정인에게 힘 몰아주기와 그 특정인의 권신화에 특징이 있다.
남곤이 죽은 뒤 심정, 이행 등은 권간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김안로를 끌어들여 둘을 제거하고 나자 이번에는 김안로가 더 강력한 권간이 되고 말았다. 특정 권신에게 힘이 집중되는 양상이 계속되자 세상은 이를 어느 정도 당연시하게 되었으니, 이는 김안로 사후 또 다른 권신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종이 눈을 감기 전에 이미 조정에는 새로운 권신의 후보로 세자의 외숙인 윤임과 대군의 외숙인 윤원로, 윤원형 형제가 떠오르고 있었다. -193-194쪽

중종이 죽은 날짜에 실린 사관들의 평

사론1

왕은 인자하고 현명했다. 폐조 시에는 효도와 우애를 지극히 했고, 신하의 도리를 극진히 했다. 백성을 불쌍히 여겼으며 간언을 잘 따랐다. 39년 동안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를 폈으니 진실로 드문 현주다. 다만 인자하고 온화함에는 넉넉했으나 과단성이 부족했고, 진퇴, 용사에 현명함과 불초함이 뒤섞이는 실수가 많았따. 이로 인해 군자와 소인이 번갈아 진퇴했고, 권간이 왕명을 도둑질했으며, 변고가 자주 일어났다. 정치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210쪽

사론2

왕은 검소, 인자했고 성색이나 사냥에 빠지지도 않았다.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행을 즐기는 마음이 잠시 열렸다가 끝내 닫히고 말았으니 이는 조광조 등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광조 등이) 점차적 개선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배척만을 힘써 자신의 흉중에 품은 생각을 대폭적으로 실행하려 한 데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인후한 성덕으로 백성들의 크고 작은 고통을 어루만져 구휼하였으니 참으로 중흥의 성군이라 할 것이다.-211쪽

사론3

왕은 인자, 유순하나 결단성이 부족했다.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다. 호, 불호가 분명치 않고 어진 이와 간사한 이를 뒤섞어 등용함으로써 다스려진 때보다 혼란한 때가 더 많았다.-211쪽

사론4

인자, 겸허함은 천성에서 나왔으나 우유부단하여 아랫사람에게 이끌림으로써 진성군을 죽여 형제간의 우애가 이지러졌고, 단경왕후 신씨를 내치고 경빈 박씨를 죽여 부부 간의 정이 없었으며, 복성군을 죽여 부자 간의 은의가 훼손되었다. 또 대신을 많이 죽이고 주륙이 잇달아 군신의 의리가 야박해졌으니 애석하다.-21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