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6 - 예종.성종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6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8월
구판절판


"비록 일세대들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저들은 실권자들. 저들을 통하지 않고선 아무 일도 실행이 안 돼."

성종은 언론을 활성화시켜 그들의 힘을 제약하는 방법을 썼다.

"이신제신! 언관으로 대신을 제압하자!"

사간원, 사헌부의 비판 기능을 되살렸으며 장서 보관소에 불과하던 홍문관을 옛 집현전을 대신할 기관으로 변모시켰다. 경연을 담당하고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맡게 된 홍문관은 자연스럽게 언론 기능까지 담당하게 된다.

그래서 이후 사간원, 사헌부와 함께 홍문관을 묶어 언론삼사라 부르게 됐죠.-112쪽

군주수업의 결과는 애초의 의도대로 성종을 유교원리에 충실한 도학군주로 만들어냈다. 사실 기질적으로 보면 성종은 학문도 좋아하지만 풍류객의 기질도 강한 사람.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그림 애호가였다. 호시(나무활)를 잘 쏘았으며 매도 좋아했다. 정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조용히 앉아 시를 짓고 글씨도 쓰며 그날의 피로를 풀고 틈틈이 바깥에 나가 매도 날리며 스트레스를 풀면 좋겠지만 이 시대의 유학자들은 그런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니 되옵니다, 저언하!!!"-114-115쪽

타고난 성품 때문인지 오랜 군주수업으로 길들여진 때문인지 대간들의 이런 비판을 성종은 언제나 받아들였다. 마음으로 비판을 수용한 게 아니라 모범생이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인해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자신의 욕구까지 절제해가며 대간을 비롯한 신하들의 비판에 귀기울이고 친정을 시작한 이후에도 경연을 쉬지 않았다. 그날의 공부가 끝나며(혹은 공부 중에도) 현안문제가 제기되고 토론과 자문을 거쳐 결정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경연은 가장 중요한 의사 결정의 장으로 바뀌었다. 바야흐로 경연정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경연을 담당하는 젊은 신료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경연을 겸했던 홍문관의 위상도 강화되었다.-116-117쪽

여유가 없는 비판, 비현실적인 비판,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비판, 비판을 위한 비판이 갈수록 빈번해졌다.

문제는 성종의 태도, 도저히 아니다 싶으면 분명히 거절하면 될 것을 비판을 받아들이는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모범생 콤플렉스가 언제나 그를 양보하게 만들었다.-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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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27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박강념과 쌓여가는 스트레스. 자신을 사랑할 시간이 없는 사람에겐 처자식을 돌볼
여유따윈 없었겠지. 그래서 연산군은 시대의 불운아일까.
이 작가의 글은 참 매끄럽군요. 읽고 싶어졌습니다. 물론, 아주 나중에 - (웃음)

마노아 2007-03-27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느 정도 거칠 거라고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서술이 아주 매끄럽고 관점은 설득력이 있어요. 볼수록 감탄하고 있답니다^^

비로그인 2007-03-27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당히 어렵고, 적당히 매끄러운 글이 읽기가 좋습니다.
너무 어려운 글은 같은 줄을 몇번이나 읽어야 하고, 너무 가벼운 글은 금방 흥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언제나 '적절한'이 좋습니다. (웃음)

마노아 2007-03-27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든 '적당히'의 중용이 참 어렵습니다. 저도 지적해준 대로의 너무 어렵거나 너무 가벼운 글은 별로예요. 적당한 게 참 좋네요^^

비로그인 2007-03-28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적당히, 적절히'의 중용은 참 좋은 것입니다만, 이상하게 맛있는 것을 먹을때는
그런 단어가 뇌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웃음)

마노아 2007-03-28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핫, 머리 속에서 오리무중일 때가 많이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