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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화와 함께 자라고 만화에 싸여 지내는 박지수씨. 그에게 ‘만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당신의 삶은 무엇인가’로 바꿔야 한다. 그가 답변을 찾지 못하고 헤맨 것은 ‘만화’를 ‘삶’으로 코드변환하지 못했거나, 정리된 삶을 이야기하기에는 젊기 때문일 터이다. 만화처럼 젊은 박씨는 또다른 스물여덟 해 뒤 고집 센 책쟁이가 되어있을지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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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책쟁이들/(20) 만화 마니아 박지수씨
촉촉한 눈망울, 발그레한 입술, 오똑한 콧날. 캔디를 사로잡은 테리우스(캔디 캔디)? 파리의 남장무사 오스카(베르사유의 장미)?. 순정만화 네모 칸에서 걸어나온 듯한 그는 부품이 기~일다. 머리~발끝이 그렇고, 손가락이 그렇고, 머리카락이 그렇다.
사회성 짙은 만화를 펴내는 ‘길찾기’의 신입사원 박지수(28)씨. 처음 그의 손을 거쳐 나온 작품은 <나는 미치고 있다>. 그의 순정만화 외양과 달리 인혁당, 광주항쟁 등 음울한 내용이다. 그는 수요일(21일) 오후 <십자군 이야기> 세쨋권의 말풍선 글자를 쳐넣고 있었다. 컴퓨터 앞에서 어울리지 않던 그가 작은 배낭을 메고 거리로 나서자 홀연 만화 속 자리를 찾았다.
집안에 만화책 5500여권 군복무때, 대학 휴학때 모은 보물들 어린애나 보는 거? 만화의 새 문화, 새 시장을 꿈꾼다 “공공도서관에 만화가 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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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명:박지수(혹은 iamX). 종류:인간(일지도 모름. 인간은 모두 외계인의 비상식량일 뿐임). 용도:논쟁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논제를 제안하면 시키지 않아도 졸라 열심히 땀 뻘뻘 흘려대며 소리 높임. 주의사항:ㅈ일보를 좋아하고, 정치인을 존경하며, 돈을 숭상하고, 한국도 핵을 가져야 한다며 전·노통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털끝만치도 없거나,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든가, ‘야한 영화는 싫어요’ ‘엽기 영화도 싫어요’라고 이쁜 척 하는 이는 접근하지 말 것. 제조일:1979년 7월 10일. 유효기한:뒈질 때까지.”
자신의 블로그(http://iamx.net/blog)에 올린 자기소개. 만화스런 구성과 도발적인 내용이 충돌해 사뭇 괴기스럽다. 아파트 경비실에서 찾아 든 소포. 만화 <루크루크> 전질. 인터넷 중고책 사이트에서 주문한 것. 지옥이 만원이라 저승사자들이 이승에 와 ‘좋은 사람 되기 운동’을 한다나 어쩐다나. 엘리베이터 거울 속 자기 모습에 한차례 반한 다음, 여느 때처럼 문간방 자신의 공간으로 스며들어 고치 속 애벌레로 자폐한다. 손에 들고온 책을 풀어 이미 겹으로 두른 만화책 차단벽을 덧기우면 정적은 더욱 깊어진다.
자기 방, 현관 벽 그리고 동생 방에까지. 5500여권의 책이 그렇게 번호를 맞춰 빼곡하게 꽂혀있다. 일반 단행본 책과 달리 깡똥한 만화책들은 더불어 알록달록 무지개 사탕빛이다. 간간이 눈에 띄는, 비닐포장 그대로인 책들. 역시 사들이는 속도가 읽기를 앞지르는 모양이다. 행여 허술하게 제본된 책등이 꺾일까 파운데이션 콤팩트처럼 조심스레 반만 펼쳐 읽는다. 행여 이가 빠질까 친구들을 불러들여 읽힐지 언정 옥외대출은 절대 없다.
밤이면 사이버 논객X로 변신
밤 깊으면 그는 이름을 엑스(X)로 바꾸고 또 다른 턱을 넘어 사이버 공간으로 이동한다. 민노당 지역구 모임에서도 구석자리를 지키는 그가 거기에서는 가면을 쓴 동료들에 둘러싸인 주인공이다. 우수에 젖은 테리우스가 되고 시공을 넘나드는 마법사가 된다. 잇새로 침을 찍찍. 툭하면 절라, 쓰벌. 로마 검투사가 되어 우경화 했다며 <한겨레>를 난도질하기도 한다. 사들인 만화와 만화동네 이야기에서 시작해 뻗은 가지는 무방향성이다. 또 거기에는 무림지존 ‘그분’이 있어 한마디 은혜에 감읍하고 추천한 비기를 봉창한다. 가상공간에만 존재하는, 또래들의 무협지스런 풍경이다.
그가 만화를 미친 듯 사들인 때는 군 복무 때와 대학 휴학 때. 계룡대 시절(2004~2006) 스물네 차례 외박·휴가 때마다 사들인 게 500여권. 아버지가 취직하면 천천히 갚으라면서 빌려준 돈이다. “만화는 때 놓치면 구하기 힘들다”고 말하지만 아무래도 부대 안에서의 만화 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씨는 그때를 암흑기라고 했다. 1억원이 생긴다면 제일 먼저 복간하고 싶었던 박흥용 작가의 초기 단편집. (낯익은 생각이다.) 한 출판사에서 대행해 줘 엄청난 헐값에 목표를 이룬 것도 그 무렵이다.
2000년 한햇동안 휴학하면서 역시 만화를 무던히 사날랐다. 말이 1천여권이지, 인터넷 회사 두루넷에서 번 알바비와 영화잡지 <키노> 모니터 기자로 받은 고료를 쓸어넣었다. 때마침 종각 부근의 만화가게 ‘라퓨타’에서 쏟아내는 덤핑만화를 고스란히 자신의 방으로 옮겼다. 이때 알게 된 작가가 강경옥, 김진, 김혜린 등. 독특한 추리만화 <너버스 브레이크 다운>이 기억에 남는다.
그에게 만화는 창이었다. 그것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고 그것으로 인해 세상에서 격절되었다.
다섯 살 무렵 만화잡지 <보물섬>을 보면서 한글을 깨쳤다. 세상 암호와의 소통. 몸이 약해 한해 180일 이상 병원을 다녔는데 주사를 잘 맞으면 1천원짜리 ‘현대 코믹스’ 한권을 사주는 식으로 만화를 가까이했다. 몸과 만화의 일치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드래곤 볼>이 연재되는 <아이큐 점프>를 사모으고 <슬램덩크> 단행본이 나올 때마다 단골책방에 들렀다.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로봇콩콩 미니백과>. 이 책에서 철인28호, 마크로스, 건담 등 애니메이션 꿈을 키웠다. 중학교 때는 만화영화 <요술소녀>를 즐겨보았고 만화잡지 <터치>(후에 <이슈>로 바뀜)와 <월간 챔프> <인어공주를 위하여> <아기와 나>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도 이때 사봤다. <출동! 먹통 X> <개미맨>도 이때 처음 접했다.
다섯살 때부터 만화는 친구
고교 때 만화는 친구들와 그를 이어주었고 또한 격리시켰다. 비교적 풍부한 용돈으로 책을 사들이고 친구들은 그한테서 빌려갔다. 그럼으로써, 그들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성전> <카페 알파> <맛의 달인> <엔젤비트> <보이즈 비> <굿바이 미스터 블랙> <우리는 길잃은 작은새를 보았다> <하늘속 파람 그리고 별> 등이 친구 사이의 끈이었고, <윙크> <이슈> <챔프> <점프> <영챔프> <나인> <아디> 등 만화잡지가 친구 사이의 벽이었다. 만화영화 <에반게리온> <마법기사 레이어스> <사이버 포뮬러> <슬레이어즈>가 기억에 남는다. <에반게리온>은 친구들과 함께 돈을 모아 사고 주말 밤을 새워 함께 보았다. 고3 겨울. <겨울 이야기>는 재수를 고민하는 그의 처지와 아주 흡사했다. <나인>은 그를 한국만화에 눈뜨게 한 길라잡이였다. 이때 만난 작가가 이진경, 김경호, 한혜연, 이정애, 이강주, 이향우 등.
대학에서는 적성에 맞지 않는 과 공부 대신 만화동아리에서 놀았다. 학사경고를 맞아 휴학하는 동안 마음껏 만화에 빠졌다. 졸업 뒤 군 입대하기까지 일년동안 ‘길찾기’에서 알바를 하면서 <테르미도르>, <로보트킹>을 편집했다. 그것이 나중에 정식취업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그 무렵의 요상한 경험. 어릴 적 기억 속의 <출동! 먹통 X>를 찾아 헌책방을 헤매다 실패하고 엄청난 음모(?)를 꾸몄다. 400명을 모아오면 책을 내준다는 기획사의 말에 사이트를 만들고 사발통문을 돌려 사람들을 모아들였다. 정말 400여명을 채웠다. 그래서! 1만원짜리 만화를 한권 손에 넣었다! 말풍선 입력비 40만원은 덤.
글 깨칠 무렵 새끼오리의 각인효과처럼 틈입한 만화. 학교공부의 틈새에서 삶의 고명 구실을 하다가 출판사 입사와 더불어 삶의 중심이자 방편이 되었다. 이제 만화는 사회를 향한 그의 나팔이 되려는 순간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 비로소 어른의 길에 접어든 셈이다. 박씨는 어려운 때를 만나 고독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만화가들과 함께 새 문화, 새 시장을 일구고 싶다.
만화출판사 알바하다 사원으로
만화동네 월급은 빠듯해 학자금 상환, 교통비, 식비, 병원비를 제하고 거기에서 만화책 15만원을 포함해 책값 25만원을 떼어내면 빈털터리이다. 동선을 최소화하고 동전 샐 구멍까지 막을 수밖에. 돈많이 드는 연애는 아예 생각하지 못하고 아버지한테 빌린 돈 역시 언제 갚을지 난망이다. 다른 것은 다 버려도 이것만은 남기고 싶은 책은? “아무 것도 버리고 싶지 않다.” 사뭇 어긋나는 질문과 답변은 만화세대와 비만화세대의 거리다.
“도서관에는 왜 만화책이 없을까요. 제가 사는 광명시 중앙 도서관에는 ‘2004 우리만화’에 선정된 말리 작가의 <도깨비 신부>나, ‘2005 우리만화’에 선정된 변기현 작가의 <로또블루스> 같은 책이 없어요. 독자들이 도서관에 책 신청을 안 해서 그런 걸까요? 사서들이 만화 쪽에 소양을 갖춰서, 추천 들어오면 그 작품이 뭔지는 알 정도는 되어야죠.” 비껴가는 문답에서 가장 돋보이는 말이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