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 우리 역사 바로잡기 1
이덕일, 김병기, 신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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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사관이 단군조선을 부인하고 고조선의 강역을 평안남도 일대라고 주장했던 것은 한강 이북이 중국사의 영역이었다고 주장하는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와 완전히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두 사관은 일란성 쌍둥이이다. 일제 식민사관은 한국의 영토를 영구히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동북공정은 현재의 한강 이북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고조선사에서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5쪽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기자가 동쪽으로 가서 조선을 건국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쪽 조선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동쪽에 이미 조선이란 나라가 있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사 교과서는 이런 기술을 외면한 채 단군조선도, 기자조선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국사 교과서는 위만조선이 사실상 고조선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22쪽

국사 교과서는 위만이 집권한 후 비로소 철기 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결국 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경에야 철기 문화를 받아들였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실증사학을 표방하지만 위만에 대해 전하는 그 어떤 사료에도 그가 철기 문화를 갖고 왔음을 추측하게 해주는 내용은 없다. 마찬가지로 고조선이 위만에 오기 전까지 철기 문화가 아니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고조선의 철기 문화는 당연히 위만이 중국에서 가져왔을 것이다’라는 사대주의적 고정관념 속에서 나온 기술일 뿐이다. 국사 교과서의 논리대로라면 위만은 고조선의 왕위 찬탈자가 아니라 철기 문명의 전달자가 된다. 일제 식민지 치하를 찬양했던 식민사학의 논리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가치전도인 것이다.
-23쪽

진개가 "조선의 서쪽 영토 2천여 리를 빼앗았다"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고조선이 평안남도 일대에 걸친 작은 소국이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좋은 자료이기 때문이다. 평안남도는 2백여 리에 불과하다. 2천여 리를 빼앗기고도 만번한을 경계로 연과 대치했다면 고조선은 매우 광대한 강역을 지닌 제국일 수밖에 없다. 이때는 부왕과 준왕이 등장하기 이전이다. 그러나 국사 교과서는 이런 내용은 모두 사장시킨 채 위만이 정권을 빼앗은 다음에 고조선이 강성해졌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30쪽

흔히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는 명칭을 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고조선이라는 표현이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처음 나온다는 사실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고려 사람인 일연은 훗날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리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그럼 일연은 무슨 의미로 고조선이란 표현을 썼을까? 일연은 위만조선과 구별하는 의미로 고조선을 썼던 것이다. 일연은 단군조선, 기자조선을 고조선으로 인식하고 위만조선을 따로 인식했다.
-38쪽

서거정은 자신이 본 고기(古紀)에 "무진년(기원전 2333)에 건국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단군조선의 개국년으로 삼은 것이고, 이것이 현재의 단기이다.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일연이 본 고기(古記)가 아니라 서거정이 본 고기(古紀)가 단군조선의 건국년으로 통용된 것이다. 이처럼 조선 초만 해도 단군이 기원전 24세기에 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은 국가의 공식 역사관이었다. 조선 초만 해도 개국 시조였던 단군은 조선 후기 사대주의가 심화되면서 부인되기 시작해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하면서 말살되어갔다. -45쪽

기원전 2000여 년까지로 추정할 수 있는 현재까지의 청동기 발굴 성과만 가지고도 기원전 2300여 년이라는 <삼국유사>의 단군조선 건국 연대와 큰 차이가 없게 된다. 따라서 기원전 2300여 년이라는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삼국지><<위서동이전>> 등의 문헌사료는 물론 고고학적 발굴 성과로도 뒷받침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이는 또한 단군조선의 실재를 부정하고 위만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보고 있는 남한 학계의 이른바 ‘통설’에 중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은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개시에 대해 최초의 국가이자 노예소유주 국가인 고조선을 중심으로 기원전 30세기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55쪽

조선은 국호 자체가 기자 존숭을 의미했는데,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에서 기자조선의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다고 말한 점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정도전은 단군조선의 실재도 부정하지 않았다. 태종 3년(1403) 편찬된 <동국사략>이후 국가에서 편찬한 역사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상고사 체계가 확립되었다. 16세기 이후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기자 존숭은 한층 강화되었다.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면서 조선에서는 소중화 사상이 확산되면서 기자조선은 더욱 존숭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실재를 부정하는 ‘기자부정론’이 통설을 이루고 있다. 이는 기자조선에 대한 엄밀한 학문적 연구 성과의 결과이기보다는 이민족인 중국인이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감정적 차원이기도 했다. 또한 기자조선을 부정하는 것이 식민사학 잔재의 청산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 때문인데, 역사가 실재가 아닌 후대의 감정에 의해 부정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61-62쪽

이병도가 위만을 조선인 계통의 유민으로 보는 근거는, 그가 망명할 때 "북상투(추결)"에 "오랑캐 옷(만이복)"을 입었고, 준왕이 요지인 국경수비대장은 맡길 정도로 신임했다는 점, 그리고 나라를 차지한 후에도 조선이란 국호를 유지했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사기>나 <삼국지>에서 분명히 "연나라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위만이 ‘북상투’와 ‘오랑캐 옷’이라는 것만으로 조선인으로 볼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사기><<역생육가열전>>에는 남월왕 위타가 육가를 만날 때 역시 북상투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한서> <<식화전>> ‘정정조’에도 북상투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최근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도용은 대부분 상투머리를 하고 있다. 따라서 상투가 그때부터 조선인만의 것이었다고 볼 근거는 없는 것이다. -72쪽

준왕의 도주로가 중요한 것은 고조선 멸망 당시의 도읍지, 곧 최후의 도읍지가 어디인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현재 사학계의 이른바 ‘정설’은 준왕의 도주 당시의 도읍지, 곧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는 오늘의 평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멸망 당시의 도읍지가 평양인지에 대해서는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은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이른바 한사군의 위치와 연계되기 때문이다. 과연 통설대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는지, 아니면 만주 서쪽에 있었는지를 결정짓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후한서>나 <삼국지>의 기록은 모두 준왕이 ‘바다를 경유해’ 도주했음을 전하고 있다.-73쪽

한사군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군현은 낙랑군이다. 바로 한사군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한국인 제자들은 낙랑군이 오늘날 평양 지역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기> <<하본기>>에는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곧 갈석산이 있는 곳이 낙랑군이며, 바로 만리자성의 기점이라는 것이다.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창려현 북쪽에 있는데, 창려현은 만리장성의 동쪽 끄트머리인 진황도와 난하 사이에 있는 현이다.-105-107쪽

낙랑군이 고구려에게 멸망하는 것은 미천왕 14년(313) 때이다. 대무신왕 15년(서기 32)에 망한 낙랑이 어떻게 미천왕 14년에 다시 멸망할 수 있을까? 이는 한국 고대사에 낙랑이란 이름의 정치세력이 둘이 있었음을 뜻한다. 하나는 최리가 국왕으로 있던 낙랑국이고, 다른 하나는 한사군의 낙랑군이다. 그렇다면 낙랑국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대무신왕조’에서는 고구려를 ‘북국’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낙랑이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유리이사금 13년의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는 기록은 낙랑국이 신라의 북쪽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낙랑국은 고구려의 남쪽이자 신라의 북쪽에 있던 나라였다.-114쪽

기나긴 기간 동안 존속했던 고조선이 자국의 화폐를 만들지 않고 연나라의 화폐를 그냥 사용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도 연나라는 존속 기간이 기껏해야 100여 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고조선은 연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망한 이후에도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명도전을 무작정 연나라 화폐로 보는 현재까지의 시각은 수정되어야 한다.
-165쪽

현재 우리나라의 학교에서 고조선은 청동기 시대 때 개국했다고 가르친다. 이는 신석기 시대에는 국가의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나온 이론이다.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묘제인 고인돌의 등장을 지배계급의 성립과 국가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에도 국가가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현재 세계 학계의 흐름이다. 대표적인 예가 중남미의 잉카, 마야, 아스텍 문명 등인데, 이들 문명은 청동기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대국가라고 인정하고 있다.
-187쪽

세형 동검은 기원전 300년경부터 주로 등장한다. 세형 동검은 한반도 전역에서 많이 출토되었다는 이유로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한반도뿐만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 지역과 중국 요하 유역의 정가와자에서도 출토되었고, 일본 규슈 지역 야오이 시대의 독무덤에서도 출토되었으므로, 한국식 동검이라기보다는 그 형태를 따서 세형 동검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196쪽

중국의 동북공정은 은나라 출신의 기자가 대동강 유역에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이 사실로 확인되려면 대동강 유역에 기자의 출신 지역인 은나라 유적들이 출토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은나라 유물들이 출토되는 지역은 산동성과 요령성이고 한반도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고 있다.
-198쪽

대동강 유역이 낙랑군 지역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된 것은 이 지역에서 출토된 기와와 벽돌 중에 ‘낙랑(樂浪)’이란 명문이 새겨진 유물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낙랑군이 고구려 미천왕 14년(313)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한 이후에도 낙랑에서 제작된 유물들이 다수 출토된다는 점이다. 특히 서기 407년에 만들어진 벽돌은 낙랑이 멸망한 지 무려 94년 뒤의 것이다. 멸망한 지 1세기 후에도 이 지역에 있던 낙랑군에서 유물을 제작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낙랑’이란 명문이 있다고 해서 이 지역이 낙랑군 지역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봉니(封泥)는 고대 중국에서 문서나 귀중한 물품을 봉함할 때 쓴 점토다. 봉니에는 관직 이름이나 지명이 도장으로 눌려 있어 그 당시의 관직 제도와 출토지를 알 수 있다. 봉니는 1918년 대동강 남쪽 대동군 토성리에서 발견된 이래 대략 200여개가 발견되었다. 이중에는 낙랑태수장, 낙랑대윤장, 낙랑장사 등 낙랑군과 여러 관직 이름이 눌려 있는 봉니가 출토되었다. 이를 근거로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대동강 유역을 낙랑군 지역이라고 못 박았지만, 이는 오히려 대동강 유역이 낙랑군 지역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봉니는 발신자가 도장을 눌러서 보내는 것이므로 수신자의 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하는데, 발신자의 지역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지역이 낙랑군이 아니라는 주장에서 더 나아가 누군가 의도적으로 봉니를 위조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까지 낳고 있다. 대동강 일대를 낙랑군 지역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조작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또한 앞으로의 연구 과제가 아닐 수 없다. -206-209쪽

문헌상 낙랑군의 존속 기간은 기원전 108~서기 313년으로 400년이 넘는다. 식민지 통치기관으로서는 장구한 세월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장구한 존속기간뿐만 아니라 모국인 한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존속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낙랑군이 고구려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던 만주 서쪽 끝에 존재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반도의 한복판인 평양부근에 있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한나라는 멸망하기 전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식민지는 긴장이 높은 지역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본국에서 즉각적인 정치, 군사적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한나라는 존속했을 때도 국내의 여러 문제 때문에 낙랑군을 제대로 지원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한나라가 멸망한 다음에는 말할 나위가 없다.
고구려의 미천왕은 재위 12년(311) 8월 요동으로 진격해 서안평을 차지하고, 2년 후(313)에는 낙랑군까지 멸망시킨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미천왕은 요동을 공격하기 전에 낙랑군을 먼조 공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미천왕이 요동을 공격할 때 남쪽의 낙랑 군에서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중국계 유적과 유구 그리고 유물들의 존재는 그 지역에 중국계 세력이 장기간 거주했던 사실만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대동강 유역의 중국계 주민들이 한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고구려와 공존할 수 있으려면 비정치적, 비군사적 성격의 집단이어야 한다. -210-212쪽

치우는 <환단고기>나 <규원사화>가 창작해낸 인물이 아니라 중국 고대의 사서인 <사기>와 <한서>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염제 신농씨와 황제 헌원씨는 한족(漢族)의 조상으로 추앙했으나 치우는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치우를 한족에게 도전한 이민족의 조상으로 여겼으나, 최근 치우도 중국인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231쪽

치우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주요한 대응책의 하나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치우천을 찾다가 우연히 만난 중국 치우학회 회원이라는 사람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왔는지 캐묻더니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함나디 덧붙였다. "치우는 한국, 일본, 만주족의 조상이다."
우리는 툭하면 위서(僞書)다 뭐다 해서 부인하려고 애쓰는 동안 중국인들은 치우의 진실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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