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체는 너무 오래 울고 있다 - Pamphlet 1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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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강도 9의 지진이 일어났을 때 50명이 죽었다. 그와 비슷한 강도의 지진이 방글라데시를 강타했을 때 50만 명이 죽었다. 한번 지진으로 만 명 이상 죽는 것은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뿐이다. 재앙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불가항력의 자연 재앙이라는 쓰나미, 그 뒤에는 또 다른 사회경제적 진실이 도사리고 있었다.-31-32쪽

살아남은 행운에 감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난민 천막촌 사람들은 오히려 가족과 이웃을 구해내지 못하고 자신만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 희망 없는 생존의 고통은 몇 배의 무게로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희망이 있다면 더 이상 굴러 떨어질 곳 없는 맨 밑바닥 끝자리에 와 있다는 것. 위안이 있다면 자신과 같은 절망에 처한 사람들이 수십만 명에 달한다는 것. -32쪽

아체 아이들은 아무도 아이답게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엄청난 비극이 그들을 더 이상 어린 아이로 남아 있을 수 없게 했다.
그렇게 울음을 삼켜버린 아이들은 일하기 시작한다. 그래야 먹고살기 때문이다.-37쪽

까주 마을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 말도 없이 깊은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지상에 결코 이겨내지 못할 슬픔과 고통은 없다고. 그 어떤 슬픔도 절망도 그것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면 삶은 다시 피어난다고.-43쪽

교실이 없어도 칠판이 없어도 책상과 의자가 없어도, 아체 아이들은 강인한 풀싹처럼 풀마당에 엎드려 젖은 책장을 넘기며 낡은 공책에 또박또박 자신들의 미래를 새로 써 나가고 있었다. 침수되어 부서진 젖은 교실 바닥에서도 아체 아이들은 낮은 포복으로 어둠을 뚫어가는 전사들처럼 책과 공책 앞에 엎드려 의지의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47쪽

나중에 자카르타로 나와 대통령 수석 등 정부 고위층 인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내가 그런 실정을 아느냐 했더니 그들은 '복구에 50년 걸린다'는 둥의 말만 하고 있었다. 무슨 50년? 한국의 건설회사한테 물어본다면 5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49쪽

저는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슬픔의 힘'과 '가난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 힘은 우리를 하나로 이어 줍니다. 하느님도 그 속에 계시고, 먼저 가신 부모님도 여러분께 그 힘을 선물로 남겨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많이 울도록 해요. 눈물이 우리를 서로 이어줄 거예요. 그리고 많이 아파해요. 고통이 서로를 어루만져 줄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따뜻히 껴안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하느님도 몰래 우리 곁에 와서 우리를 꼭 안아 주실 거예요.-63쪽

뜨겁다고 다 사랑은 아닐 것이다. 그가 원하는 사랑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사랑만으로 뜨겁다면, 아무리 뜨거워도 그것은 결국 나를 위한 사랑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사랑에는 진정성은 물론 정치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도 함께 요구된다는 생각이 들었다.-69쪽

미래의 아체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여성들이 하늘의 절반이고 아체의 절반입니다. 앞으로 여자들도 회의에 참여하는 새로운 전통을 울렐르 마을에서부터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그들은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77쪽

무슨 말입니까?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면 낯선 환경에서 기가 꺾이고 외로움에 병들어 꿈이 없어집니다. 이 아이들은 우리 마을의 아이들입니다. 우리는 이 아이들을 잘 압니다. 내 자식 남의 자식 구분 없이 잘 키울 수 있습니다. 박 선생님, 한국에서는 이런 경우 고아원으로 보냅니까?-79쪽

무너진 벽돌 틈에서 눈을 끄는 유품 한 점을 집어들었다. 미완성 자수였다. 여성 정치범들이 한땀 한땀 정성들여 수놓아 가다 완성하지 못한 채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가 버렸다.

하롭빌 알라민 알 함두릴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차라리 그 문구가 '자유아체운동 만세!'라든지 '우리는 승리한다!'와 같은 것이었다면 나는 그렇게 통곡하지 않았으리라. 그들은 이미 절망을 보고 있었다. 자유와 독립을 얻으리라는 승리의 전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붙들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뿐이었다.-92쪽

압도적인 무력과 외교력을 가진 인도네시아는 아체를 결코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동티모르처럼 독립을 허락하기에는 아체에 자원이 너무 많다. 이슬람 최대 인구의 나라라는 인도네시아의 위상 때문에 이슬람권은 침묵하고, 기독교권인 미국과 서구는 종교적 분쟁을 피한다는 미명 아래 인도네시아 군부와 결탁하여 자원 수탈과 무기 수출이라는 '국익'을 노리며 또 외면하는 사이, 자유아체운동은 자꾸만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93쪽

젊음은 치욕이고, 사랑도 배신이 되고, 우정마저 밀고로 변하는 폭압의 세상. 감옥에 갇힌 그들이 마지막으로 붙들고 의지할 것은 오직 하느님밖에 없었다. 물방울로 바위를 치는 듯한 자유아체운동. 그들의 절망, 그들의 고독, 그들의 슬픈 의지가 그 미완성 자수 속에 사무쳐 있어 나는 통곡을 참을 수가 없었다.-93쪽

한 달 만에 다시 찾은 아체는 건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외국 구호기관과 언론의 물결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반다아체는 '짧은 열애가 끝난 후' 버림받은 자의 허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달 전만 해도 거리 사람 3분의 1이 외국인이었다. 지금은 외국인이 거의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언론 기자들부터 빠져나갔다. 곧바로 국제 구호단체 직원들이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조명이 꺼진 무대처럼 텅 비어 버렸다. 아체인들은 다시 고립무원의 폐허 더미에 버러졌다. 그 위로 엄습해 온 것은 감시와 위협의 고삐를 단단히 잡은 계엄군의 살벌한 얼굴들이었다. 아체는 다시 홀로 긴 눈물을 흘리고 있다. -110쪽

아체에서 아마 남자와 여자가 함께 회의하는 곳은 우리 마을뿐일 겁니다. 같이 회의를 하니까 여자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자들이 그렇게 섬세하고 지혜로운지 몰랐습니다. -137쪽

지난번에 전달한 성금이 모자라 옥스팜에서 지원해준 돈을 보태서 우물을 완성했단다. ..... 지하 120m까지 파 들어가서야 물을 만났다. 마침내 물이 쏟아져 나오던 날,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단다. 그리고는 모두 한국 쪽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기로 했다. 그런데 누구도 한국의 정확한 방향을 몰라, 북쪽이다 동쪽이다 논란 끝에 결국 동북쪽을 향해 긴 시간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139쪽

저 사람들도 뜨거운 천막에서 목이 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우리가 압니다. 어려울 때 함께 나눠 마시다가 고갈되는 게 차라리 낫지요. 우리만 마시려고 아낀다면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목탈 것입니다. -140쪽

다시 지진해일이 덮쳐 와도 방파제가 있어야 재앙을 피할 수 있는데 정부는 해줄 마음도 의지도 없다. 그래서 오래된 지혜를 모아 바닷물 속에자라는 바까오 나무를 심어 기르기로 했단다. ............이것이야말로 콘크리트 방파제보다 더 튼튼하고 생태적인 '대안의 미래'이고 오래된 지혜가 아닌가. -141쪽

아체의 고아는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가난이 만든 고아다. 오랜 식민상태에서 자원을 착취당해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아체 땅이다. 이 가난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고아들을 많이 만들어낸다. 두 번째는 정치적 고아들이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지금까지 자유아체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밤마다 학살해 왔다. ....이 아이들은 고아원에 가면 신분 위장을 하고 절대로 입을 열지 않는다. 서너 살밖에 안 되는 아이들도 본능으로 그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 아빠 어떻게 되었냐고 물으면 대개 병으로 죽었다거나 쓰나미로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마지막으로 이번 쓰나미로 생긴 고아들이다.-152쪽

저 자신도 물론 힘들지만 고아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보다 더 힘들겠어요? 이 아이들은 아체의 불행을 등에 지고 밤길을 걷는 어린 하느님인걸요. ...대학을 나와 혜택받은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늘 고민했어요. 저는 이농발(여성전사)이 된 친구들처럼 그런 용기가 없었어요.-158쪽

지난번에도 큰 후원을 해준 '쌈지'에서 딸기 볼펜을 기증했다. 그 볼펜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아이들이 "이건 몇 페이지 써요?"하고 물었다. 아체 볼펜은 노트 서너 페이지를 쓰면 다 떨어진다고 한다. 이 볼펜으로는 노트 한 권을 쓴다고 하니까 "정말요? 마술 펜이네!" 아이들은 환호를 올렸다.-159쪽

수학은 정직한 것입니다. 아체는 수학이 없는 사회입니다. 왜 저희 부모님처럼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은 굶주려야 하고, 왜 가족이 흩어져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자라야 하나요?-160쪽

세계적 다국적 기업인 액슨모빌이 여기 있다. 미국 오일 산업의 맹주이자,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침략전쟁의 숨은 손, 딕 체니와 미국 부시 가문의 돈줄이기도 한 액슨모빌이 바로 이 록스마웨에 빨대를 꽂고 아체인의 골수를 빨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결탁해 거대한 유전자원을 독식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와 인권을 중시한다는 미국이 아체 문제에 침묵해 온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한국도 아체의 지하자원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쓰는 도시가스와 천연가스 25%가 여기 록스마웨에서 빨아올린 것이다. -180쪽

수하르토를 가리켜 누군가는 '박두환'이라고 표현했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합친 인물이라는 것이다. ............ 1965년 11월부터 1년 동안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200만 명 이상 300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했다.
우리가 잘 아는 '지상낙원의 섬' 발리만 해도 인구의 10%인 20여만 명이 살해당했다. 그것이 우리가 모르는 '발리에서 생긴 일'이다. -181-182쪽

2005년 8월 15일, 마침내 인도네시아 정부와 자유아체운동 지도부는 30년 내전을 마감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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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아체의 평화를 단언하기엔 이르다. .......2003년에도 휴전협정이 맺어졌지만 6개월 만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약속을 깨뜨리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피의 살육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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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평화를 향한 아체의 걸음을 신뢰하고 싶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미국의 액슨모빌은 아체 유전자원을 2010년 경이면 거의 다 빨아먹게 된다. 아체에 자치권을 넘겨줘도 큰 손해가 되지는 않는다는 현실적 계산이 그들을 평화협정의 길로 가게 했을 것이다.-206-207쪽

아체의 자유와 평화는 인도네시아 자신의 민주주의외 미래의 발전을 위해서도, 나아가 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위해서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당위의 과제이다.-208쪽

아체인들은 위대했다. 오랜 정치적 억압과 40만 명이 죽어간 쓰나미 참사로 모든 것이 파괴되었지만, 단 한 건의 약탈이나 강도, 폭력, 자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선진문명국' 미국 뉴올리언스에 허리케인이 닥쳤을 때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아체인들은 절망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더없이 선한 인간성과 순수한 분노의 마음으로 다시 삶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폐허의 지평선에서 진정 위대한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를 감동적으로 보여 주었다. -209쪽

한정된 지구자원과 세계화한 경제구조 속에서 누군가의 풍요는 다른 누군가의 궁핍을 전제로 한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삶은 지구마을 가난한 이웃들의 아픔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우리의 삶은 그들의 자원과 노동과 부를 가져 온 바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어느 누구도 지구마을 가난한 나라 사람보다 더 가난하지 않다. 시대는 우리에게 자기 존재의 발밑을 돌아보라고 요구하고 있다. 더 많은 물질 소득과 더 많은 소비가 아닌,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살아가는 나누는 삶의 기쁨을 찾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인간성의 척도는 이제 국경 안에 있지 않다. 지구시대의 성숙한 인간성은 오직 국경 너머에서만 가능하다.-210쪽

나는 슬픔의 힘을 믿는다.
기쁨은 공유하기 어렵지만 슬픔은 함께 나눌 수 있다. 슬픔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공감에 이르고 하나가 된다. 슬픔은 우리를 돌아보게 하며, 우리 자신을 정화하고, 참된 나 자신과 진리에 가닿게 한다. 슬픔을 통해서 우리는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 모든 생명에게로 번져 나가는 크나큰 사랑과 만난다. 나는 인간의 깊은 곳에 흐르는 슬픔의 공유 능력, 저마다의 가슴에 간직한 그 선함을 믿는다.-210-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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