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스메웨 유전지대 한 중심을
제왕처럼 독차지한 액슨모빌
사람 하나 없는 텅 빈 도로에서 사진을 찍다가
긴급출동한 무장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철커덕, 기관총이 옆구리를 찌르고
굶주린 야수의 이글대는 저 눈빛
그대로 불을 토할 듯한 방아쇠의 손가락
나는 공포에 질려 아무 저항도 못하고
거대한 철문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백주대낮에 아무 죄도 없이
낯선 이국땅에 무릎 꿇린 나는
그 순간 인간이 아니었다
시인도 혁명가도 아니었다
나는 한 마리 아체의 개였다

이 검은 총구들 앞에서 풀려날 수만 있다면
계엄군의 아가리에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나는 개가 되어 짖기라도 하고 싶었다

한 순간의 공포, 불안, 체념, 비굴,
무력감이 하얗게 지나가자
싸늘한 자기혐오, 변명, 울분,
허탈감이 엄습해 왔다

이것이 아체인의 심정, 아체인의 운명,
나날이 반복되는 아체인의 삶이었다
나는 이마를 겨눈 차가운 총구 앞에서
오래된 아체인의 눈물을 흘렸다

한 나라의 정예 군인들이 충성스럽게
미국의 자본을 위해 외국인의 이마에 총을 겨누고
날마다 방탄차로 거리를 누비며 총격을 하는 땅
제 몸의 골수를 뽑아가는 자들이 던져 주는
한 줌 빵 부스러기를 개처럼 다투어야 하는 땅
록스마웨 거리를 맨발로 구걸하러 다니는
수많은 아이들의 휑한 눈동자가 떠올라
나는 검은 총구를 바라보며
마지막 인간의 눈물을 흘렸다

이 압도적인 첨단의 총구들 앞에서
인간으로는 숨쉴 수 없는 땅
제 정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땅
인간의 위엄을 지니고는 직립할 수 없는 땅
무거운 가난과 절망과 너무 긴 패배감으로
저마다 제 먹고 살 일에 코를 박고
TV를 켜고 차가운 유머나 던지는
삶에서 정치와 사회와 저항이라는
인간성의 등뼈를 빼내 버려야만
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땅
이것이 총구 앞에 무릎 꿇린 채
한 마리 개가 되어 떨고 있는
나의 눈물, 나의 아체였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구할 수 있는 모든 돈을 모아
저 고독한 밀림의 전사들에게
빛나는 무기를 사 주고 싶었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내가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언어로
아체의 젊은이와 소년 소녀들에게
자살폭탄 공격이 너의 유일한 인간의 길이라고
악마처럼 속삭이고 싶었다

아 나는 코리아의 민주화 이후가 너무 힘들다고
사람들이 일상에 묶여 움직여 주지 않는다고
우리의 진정한 혁명을 너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좌절하고 조급해하던
나의 죄를 고해하며 빌고 싶었다

내 머리를 겨눈 계엄군의 총구 앞에서
한 순간 개가 되어 공포에 떨고 있던 나는
아체인의 공포, 아체인의 절망,
무릎 꿇린 아체인의 운명 앞에
오래도록 무릎 꿇어 빌고만 싶었다

<아체는 너무 오래 울고 있다> 박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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