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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평점 :
911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미국 사람이 썼는데, 그 안에 정치적인 시각이 전혀 없이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바로 믿겨질까. 믿을 수 없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그때 그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9살 소년으로, 아버지의 유품에서 발견한 열쇠 찾아 삼만 리가 이 책의 커다란 줄기이며, 그 안에 소년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드레스덴에서 가족을 잃은 상실감에 소통하지 못하는 슬픔이 또 하나의 큰 줄기를 이룬다.
아홉살 어린이의 시각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또 사랑하는 가족을 버려둔 채,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쓰며 한 마디 말을 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 또 그런 할아버지를 평생을 사랑하고 평생을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어지럽게 얽혀서, 이야기의 줄기를 놓치지 않게 잘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페이지도 많고 줄간도 좁고, 어지러운 쉼표 속에 마침표도 별로 없는 이 긴 문장들을, 페이지들을 잠시도 쉴 수 없게 만들며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이 책에는 있다. 그것은 편집과 기발한 발상의 승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속에 녹아 있는 감동의 정체 때문이기도 했다.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 열망과, 위로받고 싶은 마음의 갈망이 독자를 애태우며 그 속에 감정이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네가 있는 곳에 왜 나는 없는가"라는 소제목 속에선 할아버지의 마음이 전개되고, "나의 감정들"에선 할머니의 마음이 전달되고, 나머지는 주인공 소년 오스카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시각적으로도 독특하지만, 전달에 있어서도 한층 더 효과를 주는 표현들로 이미 써놓은 글을 줄로 그어 버리고 다시 쓴 문구들, 여러 다양한 색깔들의 글씨, 여러 사진들, 안 들리는 글자를 지워버리고 빈 여백으로 놓아버리는 효과 등등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아이는 아버지의 열쇠가 무엇의 열쇠인지 찾기 위해 유일한 단서인 "블랙"이란 이름을 가지고 무려 8개월이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헤맨다.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들이 가지치기 하듯이 또 다시 연결되고 모두가 안고 있는 외로움과 소통하지 못하는 서러움 등이 지면을 통해 독자에게 전해진다. 끝없는 미로 속을 헤매는 것 같은 기분이 들때 쯤, 사건의 실마리는 풀리고 얽혔던 관계들도 제 자리를 찾아간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마지막 씬이었는데, 시간을 돌려 과거로 만들어 가는 아이의 결정적인 한 마디, "우리는 무사할 것이다"에서 왈칵, 뜨거운 게 솟구친다. 이어서 빌딩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사진을 거꾸로 돌리는 느낌의 연속 사진들...
달라지지 않는다. 바뀌어 지지도 않는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도, 상처는 치유되어야 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긍정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생을 이어간다. 그 까닭을, 그 과정을, 작품은 엄청나게 시끄러운 방법으로,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시도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너무 아프고, 너무 서럽지만, 그 이상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방법으로...
원래 소설을 두 번 읽는 편이 아닌데, 이 책은 좀 더 지나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 오래오래 여운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