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전설적 ‘도굴왕’ 가루베 유족들
연꽃무늬 기와 4점 공주박물관 반환키로
“이것뿐일까” 의문도
[조선일보 신형준기자]
일제 강점기, 그는 ‘도굴왕’으로 불렸다. 1933년, 그는 백제 성왕(6세기) 무덤으로 추정되는 송산리 6호분을 발굴한 뒤 무덤 안을 깨끗이 청소했다. 그러고는 조선총독부에 알렸다. “도굴됐다”고. 어떤 유물이 나왔는지 끝내 밝히지 않았다. 패망 직후에는 백제 유물을 트럭 한 대분이나 싣고 일본으로 도망쳤다고 사람들은 증언했다(유홍준 문화재청장·이구열 원로 문화재기자).
그는 우리 백제사를 고고학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연구자’다.
1927~1932년에만 공주지역의 고분 738개를 조사했고, 10여편 이상의 글을 남겼다. 금강이나 공주의 어원이 ‘곰강’(熊川)과 ‘곰주’(熊州)였다고 주장할 정도로 해박했다(윤용혁 공주대 교수).
가루베 지온(輕部慈恩·1897~ 1970). 와세다대 문학부 출신. 한국사 연구를 위해 만 30세 되던 1927년 1월 공주고보 교사로 방한, 1943년 강경여중 교장….
교육자인 동시에 ‘백제 유적 약탈자’로도 불렸던 그가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유물 4점이 돌아온다. 국립공주박물관(관장 신창수)은 27일 “가루베의 유족이 ‘아버지가 남긴 한국 유물은 이게 다’라며 백제 기와 4점을 돌려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연꽃무늬 기와 완형 2점과 깨진 것 2점(서기 6~7세기)이다.
기증식은 29일 열릴 예정이지만 유족은 오지 않는다. 니혼대학 교수를 지낸 가루베의 제자로, 유족을 대신해 유물 반환의 절차를 대행한 미와 가로쿠(三輪嘉六) 일본 규슈박물관장만이 참석한다. 가루베씨의 유족은
지난해 말 대전의 한 방송사가 가루베 특집을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한국 유물 기증 의사’를 밝혔다. 그 뒤 나라박물관에 위탁 보관 중이던 ‘유물 전부(기와 4점)’를 공주박물관에 보내겠다고 지난 10월 미와 관장을 통해 알렸다.
광복 직후 국립박물관측이나 공주고보 제자들은 가루베에게 “백제 유물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고 여러 차례 물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유물은 공주박물관에 두고 왔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러나 가루베의 백제 고분 조사에 대해 당시 조선총독부조차 “연구 목적이라는 미명 아래 이뤄진 유례 없는 유적 파괴”라고 비판했다.
공주 송산리 6호분이 대표적이다. 가루베의 신고로 1933년 공주 송산리 6호분을 현장 조사한 조선총독부 학자 고이즈미(훗날 평양박물관장)는 “가루베는 도굴된 상태 그대로 신고했다고 말했지만 무덤 내부는 깨끗이 치워져 토기 조각 하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일본인 수집가들 사이에서 “가루베가 6호분 발굴로 20만원(당시 좋은 논 한 마지기 값이 70~80원)은 해먹었다” 등의 이야기가 나돌았다(윤용혁·이구열).
공주박물관 측은 “유족에게는 무척 고맙지만 가져간 유물이 이것뿐일까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다”며 “만약 더 있다면 유족이 앞으로도 현명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신형준기자 [ hjshi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