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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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이라면 내가 또 할 얘기가 많이 있지. 이건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인데, 길에서 누가 내 이름을 하이톤으로 부르길래 봤더니 중3~고1때 좋아했던 몇 살 위의 누나였다. 못 본 지 10년도 넘은 나를 바로 알아본 것도 신기했지만, 여전히 나와 편하게 웃고 장난치는 이 순간이 더 신기했다. 누나의 변함없는 모습은 내 오래전 날들의 감정을 끄집어내었고, 그 잠깐 동안을 나는 고등학생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실컷 반가움을 나누던 중에 중학생 하나가 우리한테 다가왔고, 누나는 자기 딸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아 그렇구나. 격정의 기쁨은 이내 곧 당황이 되었고, 이 형용 못할 감정을 최대한 누르면서 급히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나는 무엇이 그리도 두려웠을까. 은연중에 다시 가까워지기를 바랐던 것일까.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상대에게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되자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흩날리던 벚꽃 잎은 어느새 눈송이로 변해 있었다.


츠바이크가 쓴 <감정의 혼란>도 내가 느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방탕에 빠져있던 롤란트는 한 문학 교수의 강의를 듣고 수제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교수의 집 위층에 세를 얻어 교수 부부와 급속도로 친해진다. 이제 문학으로 하나 된 두 사람은 길 잃은 어린 양과 목자의 관계로 발전한다. 그런데 꼭 한 번씩 교수가 제자의 동경심에 스크래치를 내는 게 아닌가. 모진 말을 내뱉기도 하고, 갑자기 잠수타버리는 등 교수의 돌발행동에 아주 그냥 멘탈이 바사사삭. 점점 시들어가는 롤란트를 보다 못한 교수 부인은, 그에게 절대 의존해선 안된다고 경고한다. 이유를 물었더니 알면 다친다는 뉘앙스만 풍기는데, 대체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제자가 달궈질 때마다 교수는 얼음 물을 들이붓는다. 제동장치 차원에서 그러는 걸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일편단심이 그렇게나 잘못인가. 병 주고 약 주고가 반복되다 보니 스승에 대한 사랑은 이내 방탕과 원망으로 이어졌다. 떼쓰는 어린아이가 되어 자신을 돌보지 않은 부모를 일방적으로 탓하게 된 것이다. 그의 투정을 받아준 건 교수의 부인이었고, 자신의 만행을 후회한 롤란트는 그길로 떠나갈 채비를 한다. 이때 사라졌던 교수가 돌아와 제자의 푸념을 듣고, 이제까지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준다. 서로 간에 오해를 풀긴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돼버린 두 사람. 감정의 터닝 포인트가 이들에게 몇 번이나 찾아온 건지. 예나 지금이나 인생은 타이밍이다.


일인칭시점의 이 작품은 주인공의 심경 변화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가슴속에서 맴돌던 사랑의 언어들은 끝내 호소력을 잃었지만 그 마음을 교수가 몰라준 것은 아니었다. 제자의 앞날을 내다본 스승이 나름의 결단을 내렸던 건데, 그 역시 혼란했던 이유로 표현이 서툴렀을 뿐이다. 나는 적나라했던 롤란트의 감정보다도, 설명이 없다시피 했던 교수의 심정에 더 마음이 동하였다. 감정이라는 건 움직여야 할 때보다 멈춰세워야 할 때에 더 많은 힘을 쏟게 되어있다. 그런 이유로 떠나는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이 더 아픈 법이다. 하여 감정을 통제하기 힘들 때마다 차라리 누가 대신 밀고 당겨줬으면 싶어진다. 교수와 제자도 그래 보였다. 서로가 원하고 있는데도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의 잔인함. 사랑에는 분명 용기가 필요하지만 때론 그것이 상대를 찔러 죽이는 비수가 되기도 한다.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고는 하나 어쩐지 알 것 같아서 자꾸 망설여지는 것이다. 나처럼 멘탈 바사삭이 지긋지긋한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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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2023-08-15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것은 교수의 동성애적 사랑을 표출하지 않기 위한 안간힘이 아니었나요?

물감 2023-08-16 08:03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대로 안간힘이 맞습니다. 다만 교수가 자신의 사랑과, 제자의 사랑의 현주소를 잘 파악했다고 봐요. 몇 수 앞을 내다봐야 하는 바둑처럼, 제자에 대한 사랑이 커져갈수록 그의 걸림돌이 되어선 안된다 싶었을 거구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을 좋아해준 사람이 나타났으니, 결말을 알아도 현재의 게임을 즐기고는 싶었겠죠. 그래서 영영 안볼 것처럼 매몰차지는 못했다고 봅니다. 아무래도 교수 시점의 내용이 적다보니 독자의 상상으로 채워야만 하나, 교수 자신보다도 제자를 지키려는 사랑의 번민으로 느껴졌어요. 저였어도 스승의 돌발행동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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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태풍 ‘카눈‘이 한국을 강타하기 직전에 이사를 끝마쳤다. 고층에서 내려다보는 바깥 풍경은 짓궂은 날씨 속에서도 촉촉한 감성이 돋게 해 기분이 이상했다. 국민들이 태풍 피해로 한숨짓는 마당에 눈치 없이 감상에 젖어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마침 읽고 있던 <새의 선물>은 이 모호한 기분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난감한 상황을 매 화마다 연출해 내는 다소 잔인한 작품이었다.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도 인간적이라서 중립 상태를 유지하기도 버거웠다. 무엇보다 이토록 정제된 감정의 글과 서사라니. 정녕 내가 생각하던 한국문학의 표본이었다.


이것은 한국의 1960년대, 한참 어수선했던 시절을 다룬 근현대사이다. 일찍이 고아가 된 진희는 겨우 12살에 다 성장했다고 할 만큼 조숙한 아이이다. 진희가 이모할머니 집에 사는 동안 느꼈던 인간사의 이모저모를, 12살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설명해 준다. 홀로서기의 중요성을 깨우쳤으나 세상의 부조리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렸던 소녀는, 벌어지는 일련의 해프닝들로 순수를 잃으며 성장통을 겪는다. 그리고 이것은 그 과정을 지나쳐온 독자들의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기도 하다.


사실 진희보다도 이모인 ‘영옥‘이 주인공이다. 철딱서니 없는 영옥은 진희와 대조되는 인물이자 조용할 날이 없는 트러블 메이커인데, 그 덕분에 진희의 성숙도는 날로 깊어만 간다. 소녀는 이모를 매일 혼 내키는 할머니에게서 미운 정을 배웠고, 사랑놀음에 데인 이모에게서 감정 낭비의 교훈을 얻었다. 진희가 생각하는 어린이의 역할이란 성숙한 어른으로 되기 위한 준비과정일 뿐이었다. 자신은 자타 공인의 조숙한 아이였고, 그래서 더는 성장할 이유가 없다고 믿었다. 헌데 저 한심해 보이는 기분파 이모에게 사람들이 왜 자꾸 모여드는 것일까. 세상은 반듯하게 살아가는 의젓한 진희보다, 늘 사고 치고 울상인 영옥의 손을 몇 번이고 잡아주었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착실히 살아온 것에 대한 보답이 고작 이건가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밖에도 이해하기 힘든 사람은 많았다. 험담하면서도 계속 만나는 부인들, 때리는 남편을 감싸고도는 아내, 모자란 아들을 대놓고 치켜세우는 엄마, 절친의 애인을 빼앗은 죽마고우, 미약한 존재감을 죽음으로 겨우 어필한 선생 등등... 그게 다 지긋지긋한 현실을 부정하려는 각자만의 방편이었으나 결코 정답이 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돌을 던질 수 있는 ‘죄 없는 자‘란 아무도 없었기에, 서로를 욕하고 탓하면서도 어떻게든 계속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곧 인생이자 요지경 세상이었다. 진희는 온통 오답만 체크하는 어른들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삶이란 장난기와 악의로 차 있다. 기쁨을 준 다음에는 그것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 기쁨을 도로 뺏어갈지도 모르고, 또 기쁨을 준 만큼의 슬픔을 주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무 기쁨을 내색해도 안 된다. 그 기쁨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삶의 악의를 자극하는 것이 된다. - 343p


12살의 진희도 언젠가는 저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한다. 삶을 조롱하기 위해 세상이 존재한다면, 최소한 놀리는 재미가 없다고 느끼게 해주자는 판단을 내렸다. 상처받기 싫어서 보이는 진희의 방어기제들이 안타까우면서도 이해되는 나 자신이 싫어진다. 어른이란 다 그런거야 라는 변명을 애써 삼키고 있는 내 모습이 가여워서. 이제는 오답도 정답 중에 하나라고 믿게 된 내가 슬퍼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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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8-13 0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오별 실시간으로 본 건 처음인 것 같다 ㅋㅋㅋㅋ 리뷰부터 흥미롭습니다. 담아가요! 이사도 축하드리고요 😆

물감 2023-08-13 14:23   좋아요 1 | URL
워낙 별점폭격기라서 저의 별다섯 기준이 뭔지도 잊어버렸어요. 딱히 흠 잡을 게 없다면 오별 줘버리죠 뭐 ㅋㅋㅋ 여러 독서 커뮤니티에서 자주 언급하길래 궁금했었는데 과연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피곤한데도 이렇게 리뷰까지 쓰고 싶어질 정도로요^^
‘진희‘가 잠자냥 님하고 되게 비슷해요. 어쩌면 은오 님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네요. 읽게 된다면 한 번 느껴보시길요ㅋㅋㅋ

2023-08-13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13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3-08-14 1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의 선물> 커버가 이렇게 달라졌군요! 은희경 작품 중엔 이 작품이 원탑 같습니다.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물감 2023-08-14 18:08   좋아요 1 | URL
보면 볼수록 화자가 리틀 잠자냥..... ㅋㅋㅋㅋㅋ
너무 좋았어서 다른 작품들도 봐볼까 했는데 이 작품만한 평이 잘 없더라고요?
일단 좀 더 지켜보기로...

다락방 2023-08-15 22:02   좋아요 2 | URL
은희경 작품 중엔 이 작품이 원탑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물감 2023-08-15 22:12   좋아요 1 | URL
어쩐지 이것만 읽어도 된다는 말로 들리네요ㅋㅋㅋ

페크pek0501 2023-08-17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엄청 재미있게 읽은 책이에요. 그다음 은희경 작가의 소설을 또 사 보게 되었는데 이것만 못했다는...^^

물감 2023-08-17 21:45   좋아요 1 | URL
진희의 조숙함과 순수함의 균형을 잘 잡았더라구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런 글을 재밌어하긴 할까 싶네요ㅋㅋㅋ 6070문학도 어느새 고전이 돼버린 현실...ㅋ
 

이번 페이퍼는 테스 게리첸의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를 정리해본다. 의사로 활동하던 게리첸은 자신의 지식과 전공을 살려 '로빈 쿡'처럼 의학스릴러를 써냈고, 매우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 역시 미드로 나와있는데 드라마는 안봐서 모르지만 원작은 매우 즐겁게 읽었다. 최근까지도 다양한 작품을 써낸 걸로 아는데 국내에는 2010년에 나온 8편을 끝으로 미출간 되고 있다. 역시 한국에서는 인기가 없었나보다.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일단 정리해보자.

















1. 외과의사 (2002)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9282829


보통 시리즈물의 주인공 직업은 저자의 본업을 따라가곤 한다. 그런데 게리첸은 경찰을 주인공으로, 빌런을 의사로 만들었다. 그래서 빌런의 활약이 어나더 레벨을 자랑하는 작품이 돼버렸다. 의학 스릴러인데 전혀 어렵지도 딱딱하지도 않고 술술 읽혀져서 놀랬던 기억이 난다.

















2. 견습의사 (2002)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9069281


전편에 비해 여러가지로 아쉽긴 해도 볼 만하다. 1편의 빌런을 따라 하는 모방범이 나타나자 극 야마도는 리졸리. 동맹을 맺은 두 빌런은 이제 리졸리를 죽이기로 작정한다. 빌런이 둘이나 되니 재미도 두 배가 되었다면 좋겠지만, 2편 빌런은 아무래도 따라쟁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대단한 활약은 없었다. 시리즈 통틀어서 2편 내용이 가장 기억이 안난다.

















3. 파견의사 (2003)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9323321


수녀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3편부터 병리학자인 아일스가 본격적으로 가세한다. 그리고 리졸리의 로맨스도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어째 메인사건보다 서브내용이 더 흥미진진했던 기억이...

















4. 바디더블 (2004)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9842617


임신한 리졸리는 잠깐 쉬어가고, 아일스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녀는 집 앞에서 죽어있는 여자가 자신과 똑같이 생겨서 멘탈이 나간다. 알고보니 입양아였던 자신과 쌍둥이인 자매였고, 사건에 연루된 용의자와 자신의 과거까지 밝혀낸다. 리졸리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라서 긴박함을 배로 느낄 수 있었던 꿀잼 작품이다.

















5. 소멸 (2005)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9872113


시체 보관실에 있던 여성 시신이 살아난다. 병원으로 이송 중이던 그 여성은 갑자기 인질극을 벌이는데 하필 만삭의 리졸리가 인질이 된다. 과연 게리첸이 의사라서 가능한 발상이었지 싶다. 인질극은 무사히 종결되지만 인신매매라는 사회문제로 이어져 무겁게 흘러간다. 훌륭한 소재나 화두에 비해 아마추어 같은 구성/구조여서 아쉽다는 평이 많다.

















6. 메피스토클럽 (2006)


이실직고하면 6편은 안 읽고 건너뛰었다. 작가가 슬럼프라느니, 시리즈 컨셉과 안 맞다느니 하는 비난이 많은 작품인 데다, 패쓰해도 전혀 문제없다고 하여 그렇게 했다. 오컬트 종교 단체에 관련된 내용이라 영 흥미가 안 생겨요.


















7. 악녀의 유물 (?)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0502785


보스턴 박물관에서 발견된 미라의 다리에는 총알이 박혀 있다. 박물관 지하를 뒤지던 리졸리는 비밀공간에 있던 미라 머리들을 찾아낸다. 감식 결과, 그 미라들은 죽은 지 오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피해자들이 모두 고고학 관계자임을 알아내, 범인에게 다가가는 리졸리의 폭풍 수사 이야기. 킬링 타임용으로 최고였다.

















8. 아이스콜드 (2010)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1045186


8편은 아일스가 주인공이다. 친구와 산 길에서 차 사고가 난 그녀. 다친 동료를 주변 마을로 데려가보니 집집마다 문이 다 열려있었다. 사람은 전혀 없고 반려동물만 전부 죽어있다. 폭설에다 통신도 마비된 상황. 고립된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낯선 그림자. 아일스의 필사적인 생존 게임이 시작된다. 잘 나가다가 갑자기 김 빠지는 게 좀 그랬지만 재미는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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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시리즈 중반까지는 의학스릴러 컨셉이었지만 나중에는 일반 범죄소설로 변해버려 안타까웠다. 역시 주인공을 의학계 인물로 만들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8편을 끝으로 국내에 10년 넘게 미출간인 걸 보면 수명이 다 했다고 봐야겠다. 페이퍼를 쓰다 보니, 내가 소설에 막 재미들렸을 때 읽어가지고 리뷰를 죄다 짤막하게 써놓은 게 좀 후회되었다. 그렇다고 재독하기엔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아. 그냥 추억 너머에 보관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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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씨 2023-08-18 16: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외과의사> 며칠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시간 없어서 못 읽고 그냥 반납해야 하나 싶어서 갈등 좀 하다가,
물감님 페이퍼에서 언급된 것을 보고 기어코 읽어버렸습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못 읽고 또 잊혀질 듯해서요.
결론은, 읽기를 잘 했다는 거죠. ^^
근데 별점을 보니, 첫 작품만한 후속작은 없다는 게 이 시리즈에서도 적용되는 걸까요? ^^

물감 2023-08-18 17:39   좋아요 3 | URL
1편은 정말 재밌죠 ㅋㅋㅋ 가독성도 끝내주지 않습니까?! 솔직히 그것만 읽어도 되구요. 시리즈가 막 연결되는 맛은 없기 때문에 제기준 별점 높은 것들만 골라 읽으셔도 좋을듯 합니다^^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0
헤르만 헤세 지음, 황승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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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를 참 좋아하지만 이 작품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안 든다. 이렇다 할 서사도 없고 주제나 메시지도 느껴지지 않고, 그렇다고 막 의식의 흐름도 아닌 어중간한 전개 방식. 이제껏 보아 온 작품들과 전혀 다른 스타일을 해갖고 아주 그냥 당황했다. 분량이 짧았기에 망정이지, 길었으면 바로 포기했을 정도였다. 나 말고도 많은 독자들이 별점을 짜게 주긴 했네. 또 나하고만 궁합이 안 맞는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듯해서 기분은 좋다.


나는 노래에서 멜로디가 가사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그것처럼 소설에서는 문장보다 스토리가 더 우선이다. 이런 성향 때문에 이번 작품과는 정말 상성이 맞지 않았는데, 자연의 아름다움과 끓어오르는 감정 등을 시적 표현으로 잔뜩 도배해놨기 때문이었다. 이해는 되는 게, 주인공이 시인 이태백을 너무나 동경한다는 설정이라서 그렇다. 하여 문장 문장마다 시처럼 써놔가지고 읽는 데 아주 곤욕을 치렀다. 시의 아름다움은 짧은 단락 속에 깃든 강렬함에 있다고 보는데, 그런 기교를 남발하고 있으니 1절만 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화가 클링조어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왔음을 인지한다. 이유는 안 말해주는데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술자리 몇 번 가지다 옛 친구에게 편지 한통 써주고 끝나는 이야기. 아, 마지막에 자화상을 그리긴 했다. 그래 뭐, 죽음을 목전에 둔 이의 허망함을 그린 내용이라면 오히려 낭만 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죽음과 전혀 무관하다는 듯한 태도와 언행은 보기에 따라 완벽한 스웩이자 힙하다고도 하겠다. 하지만 클링조어가 그런 말들로 포장해 줄 만한 깜냥은 아니었다. 솔직히 이 작품이 좋았다는 분들은 모두 문장력만을 칭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강조하는 내용이 있었으니, 바로 예술가의 몰락이다. 아무리 멋들어진 그림 한 폭을 완성해도 세월이 가면 색을 잃고 표현도 무너져버린다. 여기서 헤세의 몰락은, 낡은 것을 내보내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세대교체의 개념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기존의 예술성이 무너지고 새로운 내면을 통해 재탄생한 예술성과 탈바꿈하는, 새로운 감각의 질서를 말하는 듯하다. 나름대로 해설을 요약해 본 건데 이해는 되지만 정리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감각의 교체를 주장하고, 독특한 문체를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1차 대전을 지나온 저자의 심경 변화에 있단다. 징하게도 안 풀리는 헤세의 인생사를 보노라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설과 보충 설명이 필수인 작품들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모름지기 작품의 본 내용만으로도 알아듣고 이해하고 해석할 수가 있어야 한다. 여러 사람들이 난해해한다면 그건 독서력을 탓할 게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이런 작품이 있을까 봐 걱정되지만 헤세 뽀개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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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8-07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안 읽고 싶더라니...... 영원히 안 읽을 목록에 추가 완료. 감사. ㅋㅋㅋ

물감 2023-08-07 13:51   좋아요 1 | URL
이걸 안 읽으셨다는 사실이 놀라운데요? 정녕 헤세가 쓴 책인가 할 정도였습니다... 헤세도 욕 좀 먹어보고 그래야죠ㅎㅎㅎ

잠자냥 2023-08-07 14:06   좋아요 1 | URL
헤세는 주요 작품?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수레바퀴> <싯다르타> <황야의 이리> <크눌프>만 읽었어요. 그나마 대부분 10대 때 읽은 거고, <황야의 이리> <싯다르타>는 성인 때 읽었는데 그냥 그랬고요. ㅋㅋㅋ 성인이 되어 다시 읽어 본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도 아, 괜히 다시 읽었다 싶어서 헤세는 이제 그만 졸업...하려고 했으나 물감 님이 말씀하신 <로스할데>와 <유리알 유희>까지만 읽어보고 졸업하려고 합니다.

물감 2023-08-07 14:24   좋아요 1 | URL
전 아직 못 읽은 작품이 많은데, 잠자냥 님처럼 장편만 다 읽어볼 계획이에요. 죄다 비슷비슷해서 질리기도 한데 어쩌다 읽으면 나름 쏠쏠한 맛이라서요ㅎㅎ 날 더운데 건강 조심하세요!
 
가여운 것들
앨러스데어 그레이 지음, 이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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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을 재해석한 작품이라는데 소재만 따라 했을 뿐이다. 비슷한 내용도 아니어서 오마주 했다고는 볼 수 없지 않을까. 스코틀랜드 문학은 이번이 처음인데, 장르의 특성 때문인지 어딘가 괴짜 같다는 인상이었다. <가여운 것들>은 1992년에 출간된, 비교적 현대문학에 속한다. 독창적이지도 않은 작품이 세기말에 나와서 이런저런 수상을 휩쓸었다는 게 이해는 안되는 데, 아무튼 대단한 작품이라고 하니 참고하면 좋을 듯.


외과의사 백스터는 강물에 뛰어든 여성의 시신을 수술하여 새 생명을 창조해낸다. 뱃속에 있던 태아의 뇌와 교체하여 다시 태어난 벨라. 창조자와 해외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의 지능은 유아에서 청소년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때 한 변호사가 벨라를 데리고 외국으로 도주해 버린다. 한참 뒤 이들에게 온 편지 내용이 아주 가관이다. 벨라는 호색증에다 돈 쓰기를 좋아하는 여자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변호사는 된통 당하고 헤어졌다는 내용인데, 잡설이 많긴 했어도 여기까지만 보면 되게 흥미진진하고 좋았다. 그 뒤로는 계속 늘어져서 지루한 감이 있다.


자신의 뛰어난 의학 기술이 총동원된 벨라는 말 그대로 백스터의 인생작이었다. 하지만 창조물에 대한 기쁨은 금세 절망으로 바뀌게 된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는 쉽게 눈에 띄었고, 많은 이들의 관심대상이었는 데다, 지능과 맞지 않는 성인의 몸이라 통제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의 설정과 일맥상통하나, 백스터는 좀 더 관대하고 느긋한 태도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벨라의 외형이 인간이고, 점점 성인의 지능을 갖춰나가는 중이라 두려워할 건 사실 없었다. 다만 제대로 된 학습과정을 밟지 않아 일반적인 코드와 감수성이 아니라서 문제였다. 벨라의 엉뚱함이 없었다면 이 작품은 진작에 망했으리라.


벨라의 편지에는 여행 중에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여러 가지를 경험했던 일들이 적혀있다. 솔직히 지루한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주목할 필요는 있다. 그녀는 어린이 또는 청소년의 눈높이로 어른들의 세계를 마주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직 미성숙한 벨라를 성인으로 대했고, 그녀는 제 나이와 경험에 상관없이 모든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원래 같았으면 어린 친구들에게 금지될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살이의 어떤 모순을 풍자하려는 장치 같긴 한데, 서양권이라서 그런가 썩 와닿지는 않았다. 아무리 정통과 명예를 운운해도 동양권에 비하면 무척이나 자유분방하니까 말이다.


벨라와 화자의 결혼식을 반대하는 무리가 등장한다. 영국에서 스코틀랜드까지 달려온 벨라의 진짜 남편이다. 남편이 아무리 설명해도 벨라는 알아듣지 못하고, 백스터는 그녀의 창조 과정을 설명하여 당신의 소유가 아님을 주장한다. 이 진흙탕 싸움에서 벨라의 과거가 모두 밝혀지는데, 결과를 떠나서 모두가 패자 아닌 패자가 되어 가엽게만 느껴진다. 읽을 땐 몰랐는데 리뷰를 쓰다 보니 알겠더라고. 여하간 무난한 작품이었고, <프랑켄슈타인>의 오마주라는 타이틀은 빼버리는 게 더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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