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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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태풍 ‘카눈‘이 한국을 강타하기 직전에 이사를 끝마쳤다. 고층에서 내려다보는 바깥 풍경은 짓궂은 날씨 속에서도 촉촉한 감성이 돋게 해 기분이 이상했다. 국민들이 태풍 피해로 한숨짓는 마당에 눈치 없이 감상에 젖어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마침 읽고 있던 <새의 선물>은 이 모호한 기분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난감한 상황을 매 화마다 연출해 내는 다소 잔인한 작품이었다.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도 인간적이라서 중립 상태를 유지하기도 버거웠다. 무엇보다 이토록 정제된 감정의 글과 서사라니. 정녕 내가 생각하던 한국문학의 표본이었다.


이것은 한국의 1960년대, 한참 어수선했던 시절을 다룬 근현대사이다. 일찍이 고아가 된 진희는 겨우 12살에 다 성장했다고 할 만큼 조숙한 아이이다. 진희가 이모할머니 집에 사는 동안 느꼈던 인간사의 이모저모를, 12살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설명해 준다. 홀로서기의 중요성을 깨우쳤으나 세상의 부조리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렸던 소녀는, 벌어지는 일련의 해프닝들로 순수를 잃으며 성장통을 겪는다. 그리고 이것은 그 과정을 지나쳐온 독자들의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기도 하다.


사실 진희보다도 이모인 ‘영옥‘이 주인공이다. 철딱서니 없는 영옥은 진희와 대조되는 인물이자 조용할 날이 없는 트러블 메이커인데, 그 덕분에 진희의 성숙도는 날로 깊어만 간다. 소녀는 이모를 매일 혼 내키는 할머니에게서 미운 정을 배웠고, 사랑놀음에 데인 이모에게서 감정 낭비의 교훈을 얻었다. 진희가 생각하는 어린이의 역할이란 성숙한 어른으로 되기 위한 준비과정일 뿐이었다. 자신은 자타 공인의 조숙한 아이였고, 그래서 더는 성장할 이유가 없다고 믿었다. 헌데 저 한심해 보이는 기분파 이모에게 사람들이 왜 자꾸 모여드는 것일까. 세상은 반듯하게 살아가는 의젓한 진희보다, 늘 사고 치고 울상인 영옥의 손을 몇 번이고 잡아주었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착실히 살아온 것에 대한 보답이 고작 이건가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밖에도 이해하기 힘든 사람은 많았다. 험담하면서도 계속 만나는 부인들, 때리는 남편을 감싸고도는 아내, 모자란 아들을 대놓고 치켜세우는 엄마, 절친의 애인을 빼앗은 죽마고우, 미약한 존재감을 죽음으로 겨우 어필한 선생 등등... 그게 다 지긋지긋한 현실을 부정하려는 각자만의 방편이었으나 결코 정답이 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돌을 던질 수 있는 ‘죄 없는 자‘란 아무도 없었기에, 서로를 욕하고 탓하면서도 어떻게든 계속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곧 인생이자 요지경 세상이었다. 진희는 온통 오답만 체크하는 어른들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삶이란 장난기와 악의로 차 있다. 기쁨을 준 다음에는 그것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 기쁨을 도로 뺏어갈지도 모르고, 또 기쁨을 준 만큼의 슬픔을 주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무 기쁨을 내색해도 안 된다. 그 기쁨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삶의 악의를 자극하는 것이 된다. - 343p


12살의 진희도 언젠가는 저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한다. 삶을 조롱하기 위해 세상이 존재한다면, 최소한 놀리는 재미가 없다고 느끼게 해주자는 판단을 내렸다. 상처받기 싫어서 보이는 진희의 방어기제들이 안타까우면서도 이해되는 나 자신이 싫어진다. 어른이란 다 그런거야 라는 변명을 애써 삼키고 있는 내 모습이 가여워서. 이제는 오답도 정답 중에 하나라고 믿게 된 내가 슬퍼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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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8-13 0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오별 실시간으로 본 건 처음인 것 같다 ㅋㅋㅋㅋ 리뷰부터 흥미롭습니다. 담아가요! 이사도 축하드리고요 😆

물감 2023-08-13 14:23   좋아요 1 | URL
워낙 별점폭격기라서 저의 별다섯 기준이 뭔지도 잊어버렸어요. 딱히 흠 잡을 게 없다면 오별 줘버리죠 뭐 ㅋㅋㅋ 여러 독서 커뮤니티에서 자주 언급하길래 궁금했었는데 과연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피곤한데도 이렇게 리뷰까지 쓰고 싶어질 정도로요^^
‘진희‘가 잠자냥 님하고 되게 비슷해요. 어쩌면 은오 님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네요. 읽게 된다면 한 번 느껴보시길요ㅋㅋㅋ

2023-08-13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13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3-08-14 1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의 선물> 커버가 이렇게 달라졌군요! 은희경 작품 중엔 이 작품이 원탑 같습니다.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물감 2023-08-14 18:08   좋아요 1 | URL
보면 볼수록 화자가 리틀 잠자냥..... ㅋㅋㅋㅋㅋ
너무 좋았어서 다른 작품들도 봐볼까 했는데 이 작품만한 평이 잘 없더라고요?
일단 좀 더 지켜보기로...

다락방 2023-08-15 22:02   좋아요 2 | URL
은희경 작품 중엔 이 작품이 원탑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물감 2023-08-15 22:12   좋아요 1 | URL
어쩐지 이것만 읽어도 된다는 말로 들리네요ㅋㅋㅋ

페크pek0501 2023-08-17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엄청 재미있게 읽은 책이에요. 그다음 은희경 작가의 소설을 또 사 보게 되었는데 이것만 못했다는...^^

물감 2023-08-17 21:45   좋아요 1 | URL
진희의 조숙함과 순수함의 균형을 잘 잡았더라구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런 글을 재밌어하긴 할까 싶네요ㅋㅋㅋ 6070문학도 어느새 고전이 돼버린 현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