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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평점 :
지난 일요일에는 처음으로 친구 따라 낚시를 갔다. 이것은 활동 반경이 매우 좁은 나에게 매우 큰 결심이었는데 지금 어딘가로 떠나지 않으면, 이 갑갑함을 풀지 못하면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당장 서해로 달려가 자리 잡고 물멍을 때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동안 머리에 가득했던 잡생각들을 한 가지씩 흘려보내었다. 대체 인생이란 무엇일까. 자아가 생길 무렵부터 줄곧 해오던 질문이다. 지금 나이의 두 배쯤 살면 그 질문에서 자유로워지게 될까. 확신은 못하겠군. 젊었던 시절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다는 유명 연예인들의 인터뷰를 종종 듣는다. 그것은 단지 치열했던 지난날들이 끔찍해서가 아니라, 삶에게 질문을 받을 때마다 꼼짝 못 했던 자신이 싫어서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이 그때보다는 정답에 가깝다 할 수 있겠고, 더는 막연하게 살던 과거의 내가 아니기 때문에 욕심도 미련도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마음에 굳은살이 생기고 초연해지기까지는 많은 투쟁과 시행착오와 감정 소모가 있어야겠지. 그걸 생각하면 오늘의 방황은 순례자들이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리라.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 <무빙>의 주인공이 엄마에게 소리친다. 나는 내 성격이 너무 싫다고. 이렇게 소심하고 남 눈치만 보고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자신이 너무 괴롭다고. 너무 내 얘기 같아서 그만 울어버렸다. 우리 집이 가난하지 않았다면. 전학을 다니지 않았다면. 차라리 학원이라도 다녔더라면.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법을 몰라서 점점 혼자가 된 나는, 그렇다고 혼자서 잘 노는 편도 아니었다. 부모님도 친구들도 나에게 관심이 없어지자 언젠가부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습관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답답스러운 인생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중이다. 지금 다니는 직장은 팀장님이 활기차고 파이팅 넘치는 여성분인데, 어떤 날은 텐션이 낮은 채로 출근하셨다. 그때 나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감기 걸리셨나? 매출 떨어진 거 때문인가? 혹시 가족 중에 누가 아픈가? 어제 잠을 못 주무셨나? 아님 내가 뭐 잘못 보인 게 있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괜히 긴장하게 되는 거다. 그냥 무슨 일 있냐고 가서 물어보면 될 텐데, 이 간단한 일조차 쉽게 나서지 못하는 어른으로 커버렸다. 타인의 표정, 말투, 몸짓, 그 밖의 분위기에서 읽히는 감정의 빅데이터가 모든 상황에서 나를 조여온다. 그럴 때면 신경세포의 on/off 버튼이 있었으면 싶다. 남들은 다 신경 쓰고 잘만 사는데 어째서 나만 이렇게 감정의 몇 수 앞을 내다보고 겁먹고 쩔쩔매고 긴장하고 그래야 할까.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같이 있으면 에너지를 뺏기게 되어, 집에만 오면 녹초가 된다. 심지어 일을 많이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결국 나는 혼자 지내야만 할 팔자인가.
능력이라도 있으면 프리랜서를, 깡이라도 있으면 1인 방송을, 손재주라도 있으면 뭔가 뚝딱거리는 일이라도 해볼 텐데, 아무것도 없는 나는 할 수 없이 사람들과 잘 지내야만 한다. 물론 눈치 보던 습관 덕분에 사회성은 나쁘지 않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아쉬울 게 뭐 있어!라고 하고 싶지만 나는 막 칼 같은 성격이 못될뿐더러,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신경 쓰기 바쁘다. 상대방은 내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에 관심이 없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하는데 이런 게 잘 안된다. 정말 제3자가 보면 하등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 쏟는 일로 보일 것이고, 나 또한 그런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증상들이 자의식 과잉의 한 부분이란 것도 잘 안다. 고쳐보려고 이런저런 훈련을 해보았지만 시간 지나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태어났나 보다 하고 그냥 불편하게 살아간다. 보통 사람 간에 거리 두기가 좋다고들 그러는데, 나는 한공간에서 거리 두는 것보다 분리된 장소에서의 거리 두기가 맞는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직장을 관두고 혼자 하는 소일거리를 찾아볼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어차피 나는 돈도 정말 안 쓰거든.
내 노후도 걱정이지만 계속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 걱정도 안 할 수가 없다. 언제 어디에 쓰일지 모를 비용을 생각하면 일을 계속해야 한다. 내가 좀 이상주의자라 현실감각이 둔한 편인데, 이런 나조차도 현실 걱정이 들 만큼 불안한 세상이 되었다. 이 자리에서 정권을 욕하려는 건 아니고, 슬슬 부모님을 책임져야 하는 문제가 피부로 와닿고 있어서이다. 나는 우리 부모님을 정말 사랑한다. 부자지간에도 서먹함이 없고, 모친하고도 통화를 자주 하는 제법 보기 힘든 유형의 아들이다. 두 분은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진심으로 나에게 용서를 구했다. 갖고 싶은 것도 못 사주고, 학원도 못 보내주고, 가족여행 한번 못 데려가고, 그러면서 자식을 혼내기만 했던 것들에 대하여 몇 번이고 미안하다 하셨다. 나는 괜찮아요. 두 분의 본심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때가 오고서야 나를 챙기시는 모습에 기분이 참 묘해진다. 가족 간에 좋았던 기억은 거의 없다. 뭐 그렇다고 나빴다는 건 아니고 아무튼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가정을 해본다. 차라리 가족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나도 좀 자립심 강하고 독한 성격으로 자라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어렸을 때는 나의 섬세함과 감수성과 공감력과 이타심이 나를 더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느끼지 못하거나 무심하거나 간과하는 것들을 나는 캐치하니까 좋은 거라고 믿었었다. 바보같이.
성차별 발언을 하려는 건 아닌데, 하여간 나에게서는 수컷의 특성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여성 같다는 건 아니고, 중성의 매력도 아니니, 그냥 수컷의 세포가 좀 많이 부족한 경우라 해야겠다. 나의 얼마 없는 인맥의 대부분이 여자인데, 남자보다 여자랑 대화가 더 잘 되고 좀 더 나다움을 갖게 된다. 남자들 사이에선 뭐 투명인간 취급인데, 그래도 여자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코드가 제법 맞아서, 나는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왜 하필 남자로 태어나서 이 고생인가 싶다. 나에게 인생 2회차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행복지수 높기로 소문난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사계절의 자연을 만끽하는 초절정 인플루언서로 살아보고프다. 이건 그냥 해본 소리고, 진짜 희망 사항은 ‘평범한‘ 인간으로 무난하게 살아봤으면 한다. 내가 말하는 평범의 기준은, 뭐든지 과하지 않고 적당한 걸 의미한다. 요즘은 일반인 되는 것도 힘들다고들 하는데, 평범하기가 부자 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세상이다.
나는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부모님이 바르게(?) 키워놓은 거라 해두자. 내가 나를 잘 아는데, 술이든 담배든 맛 들였다 하면 누구보다도 중독자가 될 거라 자부한다. 이렇게 세상 살기가 버거운 어린 양이 기댈 곳이라곤 글쓰기밖에 없어서 이런 새벽시간에도 잠 안 자고 키보드를 두들기는데, 니코틴과 알코올이 주는 위로를 어떻게 마다하겠냐고.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은 아예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 갑자기 생각난다. 군대에서 동기가 말하길, 내가 그렇게 한숨을 자주 쉬더란다. 듣기 싫으니까 제발 그만하라고, 그거 꼭 고쳐야 될 습관이라고 진지하게 말해주었다. 이 한숨 중독자는 겨우 고치고 전역을 했으나, 얼마 뒤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지면서 다시 한숨 중독에 빠져버렸다고 한다. 중독이란 건 연장된 현실 회피의 결과인데, 여기서 빠져나와 현실과 마주하려니 얼마나 무서운가. 그래서 중독은 또 다른 중독으로만 벗어날 수 있다. 금연하려고 씹은 금연껌에 중독되었다던 모 연예인의 말처럼. 생각의 중독을 끊으려면 뭐가 좋을까...
<명랑한 은둔자>에는 나의 고민과 감정의 결이 비슷한 이야기들이 가득 있다. 하여 책을 리뷰하는 대신에 저자와 공명하는 나의 이야기들로 채워봤다. 에세이 형식의 리뷰라 치지 뭐. 근데 참 저자도 어지간히 세상과 맞지 않는 이방인이더라. 캐럴라인 냅의 책들은 계속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지난 주만 해도 막 단풍이 들고 있었는데 벌써 낙엽이 지려하고 있다. 매년 가을은 내 인사를 받아주지도 않고 떠나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