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 다이어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캐롤 쉴즈 지음, 한기찬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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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의 여자 버전이라고 들어서 냉큼 읽어보았다. 소문대로 색채나 여운은 비슷했으나 엄연히 <스토너>와 닮았다고는 할 수 없을 작품이었다. <스토너>는 주인공 한 사람을 조명해 주던 반면에 <스톤 다이어리>는 주인공을 비롯해 일가족과 주변인들까지도 소개하는 나름의 대형 무대를 갖추고 있더랬다. 그럼에도 분량은 길지 않아 생략된 구간이 많은 편이다. 그 빈틈을 독자가 알아서 채워 넣어야 하는 겉바속촉의 감성이 필요하니 참고하시길요.


어머니는 딸을 낳다가 죽고, 아버지는 이웃집 부인에게 딸을 맡긴다. 부인은 말도 없이 가출해 큰아들 집으로 와서 데이지를 키운다. 갑작스러운 이별을 겪은 부인의 남편과, 계획에 없던 가장이 된 큰아들. <스톤 다이어리>는 이런 식으로 예상치 못한 멘붕이 연거푸 날아든다. 이후 부인은 사고로 죽고, 아버지는 일 밖에 모르고, 어머니는 기억조차 없는 데이지. 심지어 신혼여행 중에 남편이 죽어, 결혼하자마자 과부가 되었고 시댁과 주변에게 애꿎은 비난을 받는다. 겨우 이십 년 남짓 인생에 별별 굴곡이 다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데이지는 낙담할지언정 어떤 감정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산다는 게 다 그렇단 듯이.


요양하러 고향 땅에 왔다가 어릴 때 같이 살던 부인의 큰아들을 만나는 데이지. 이어서 식물학자가 된 그와 결혼하고 세 자녀를 낳은 엄마가 된다. 겨우 얻게 된 안정감 앞에서 자신의 두 배나 되는 남편의 나이는 문제도 아니었다. 오히려 한마디씩 하던 지인들의 나쁜 소식만 들려와, 어떤 선택이든지 간에 잘 되리라는 법은 없음을 직간접적으로 알게 된 그녀였다. 안 그래도 고달픈 삶이 밑바닥을 친다면 패배자든 악바리든 뭐라도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데이지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단지 주어진 현실과 상황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고 아픔은 조용히 삼켜내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내게는 이것이야말로 지혜 중의 지혜라 생각된다. 원래 삶이라는 게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성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삶의 공식을 깨우친 지혜자들은 그 공평성 앞에 겸손을 갖추고 살아간다. 이제껏 내가 보아온 이들은 다 그랬다. 이 책의 주인공도 그러했고.


데이지의 친부는 꽤나 재능 있는 석공이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석탑 만들기로 떨쳐낸 그는 영입해간 기업의 대표 자리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먼 훗날 재혼하고서 갑자기 거대한 피라미드를 쌓기 시작한다. 한편 이 시기에 데이지는 남편을 떠나보낸 후 정원을 가꾸는 일로 슬픔을 달래었다. 그러다 남편의 식물학회 및 각종 단체에 초대되어 연을 맺고, 원예 칼럼을 기고하며 제2의 인생을 맞는다. 여기서 두 사람의 대조되는 지점이 흥미롭다. 돌로 세운 아버지의 조형물들은 변치 않을 영원함이었고, 각종 식물로 만든 딸의 정원은 언젠가 없어질 죽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석탑은 관광객들의 손을 타면서 형태를 잃었고, 피라미드는 갑작스러운 그의 변심으로 싹 다 밀어버렸다. 오히려 유한한 생을 지닌 딸의 식물들은 제 역할이 끝나면 스스로 마감하였고 또다시 생명화로 피어났다. 이렇듯 움켜쥘수록 손안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는 삶이었고, 그 도발에 말려든 인간의 실수는 반복돼 왔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욕망과 욕심을 잘 구분하여 앞으로의 흑역사를 줄여가보자.


그 밖에도 예상치 못한 짐을 떠안은 일이나, 자식들의 이런저런 실패와, 다 흩어져 혼자가 된 외로움을 표할 데가 없는 나날 등등, 쓸쓸하지만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되는 장면이 가득하다.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참 보잘것없구나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들. 이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사가 아닐까 싶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해지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여 그런 미래를 꿈꾼다거나 그 같은 인맥을 자랑하곤 하지만, 정작 필요시에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되는 것은 평범한 이들의 삶에서다. 화려하지 않아도 상관없고, 유명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믿음은 오늘날 병든 현대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되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에 호언장담이 웬 말이랴. 각자 어떤 생을 살았든지 그 공평성을 마주할 때가 분명히 올 것이다. 부디 그날이 오면 ‘잘 놀다 갑니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당신과 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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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11-26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땡기는군요. 리뷰 잘 읽고 담아갑니다!

물감 2023-11-26 17:50   좋아요 1 | URL
은오 님이 경악할 만한 교정 누락/오류가 몇 군데 있을 겁니다...
그거 때문에 별 하나 뺐습니다. 감안한다면 만족스러울 거에용

물감 2023-11-26 17:51   좋아요 1 | URL
아 근데 진짜 팬더 사진 참 적응 안되네

레삭매냐 2023-11-26 1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년 전에 읽은 책인데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스토너>와 비슷한 결이었나 어쨌나 -

일상의 사소한 일들이 결국 나를 이루는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감 2023-11-26 19:15   좋아요 0 | URL
평범하게 살다 평범하게 죽는 내용이라 뭐 없긴 합니다. 아름다운 퇴장이라 <스토너>같은 여운은 없었고요ㅋ

stella.K 2023-11-26 2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빈틈을 독자가 알아서 채워 넣어야 하는 겉바속촉이라...흠.
이렇게 쓰시니까 왠지 관심이 가네요. 무려 퓰리처상까지 받았다니.
스토너 괜찮았는데. 근데 무려 400 페이지가 넘다니...

공유가 지쳐보이네요. 뭔가 고민있어 보이는 건가?
설마 물감님이 그런 건 아니겠죠? ㅋ

물감 2023-11-26 20:50   좋아요 1 | URL
잘 읽긴 했지만 수상을 한 이유는 모르겠어요ㅋㅋ그리고 스토너보다 가독성 좋아서 분량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리뷰에는 안 썼지만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독특한 형식에 있어요. 그래서 무슨 이런 소설이 다 있나 싶어져요.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고민이야 늘 있지만 어쩌겠어요. 그것이 평범한 인생인 것을ㅎㅎㅎ

새파랑 2023-11-2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 스토너의 느낌이 나네요 ㅋ 이 작품도 한사람의 일대기에 대한 거군요. 평범하게 보여도 들여다보면 다 다른게 인생인거 같습니다~!!

물감 2023-11-27 10:08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제목도 비슷한ㅋㅋ 저는 스토너에 한표입니다. 이 책은 좀 정신없게 흘러가긴 해요. 속도감이 대단합니다ㅋㅋ

coolcat329 2023-12-31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물감님 요즘 좋은 책 많이 읽으시네요.
제가 북플을 자주 못해서 이제야 봤습니다.
이 책 아주아주 옛날에 사서 읽다가 어려워서 포기하고 누구 줬던 거 같아요. 지금이라면 저도 읽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제가 겉바속촉이 아니었나봐요.
제가 감성이 부족해서 이 책이 힘들었나 봅니다.

물감 2023-12-31 13:03   좋아요 1 | URL
아니 언제 이렇게 댓글을 많이 달아주셨대요?ㅋㅋㅋ
저도 알라딘 잘 못들어오고 있네요.
연말이 다가오니 감성촉촉 가슴먹먹한 작품들을 찾게 되더라고요. 어쩐지 그래줘야 할 것만 같은 ㅋㅋㅋㅋ 이작품 확실히 기승전결 깔끔한 플롯은 아닌데, 그냥 눈 가는대로 읽다보면 어느순간부터 앗...하는 느낌이 와요. 정말 <스토너>랑 느낌 비슷한? 나중에라도 읽어보시면 좋을듯요^^

coolcat329 2023-12-31 13:41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이 책 언젠가 다시 도전해보고 싶었었는데 이젠 자신감까지 생겼습니다.
 
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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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같은 에세이를 생각하고 집어 들었으나 그보다는 훨씬 딥하여 마치 논문처럼 느껴진 책이다. 아예 못 알아들을 내용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수준이 매우 높고 어렵기도 해서 그냥 느낀 점 몇 가지만 적고자 한다. 내가 이해한 게 맞는다면 욕구는 곧 만족으로 이어지는 통로 같은 개념이다. 예를 들어 음식을 섭취해 배부름의 만족이 있다면 반대로 음식을 거부해서 통제에 성공한 만족도 있는 것이다. <욕구들>은 저자의 거식증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개인의 자유와 권리, 문화, 자아 등등 우리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각종 불안과 억압과 강박에 대한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그러므로 단지 음식 문제에 관한 내용으로 끝나선 아니 될 일이다.


초반에는 거식증이 온갖 병리 현상으로 이어진다는 저자의 주장과 견해들이 공감되면서도 너무 비약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래도 미국 사회가 바탕인데다 2003년 출간작이라 요즘과는 맞지 않는 내용도 있어서 그렇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과감한 여성들이 늘어가는 중이다. 하여 그런 사회의 오류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문제들과 시스템이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저자의 목소리는 그것들이 필연 여성이나 소수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한다. 혹여 그의 주장들이 지금과 다르다고 생각된다면 그건 오히려 축하해야 할 일이지 않을까.


그것보다도 ‘먹어서‘ 생기는 사회적 문제와 현상들을, (극도로) ‘안 먹어서‘ 생기는 문제들과 접목시키고 있어 혼란스러웠다. 보통은 ㅡ이미 과체중이거나 그렇게 될 낌새가 보이는 사람의ㅡ 몸이 비대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과하게 먹는 것을 말리곤 하는데, 여기서 자유든 권리든 주장하는 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ㅡ그가 거식증 환자든 아니든ㅡ 한참 체중 미달인 사람이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식욕을 통제하고 압박하면서 자아를 되찾고 권리를 지켜냈다고 하니 나의 무지로써는 참 어렵기만 하다.


이 욕구가 음식에서 패션이나 직장문제, 모녀관계 등으로 넘어가자 제법 알아들을만한 내용이 되었다. 이런 사회 이슈들이 남성들에게도 해당되거나 경각심을 갖게 해주는데, 난 무엇보다 저자의 거식증이 어머니의 인정을 바라는 욕구가 포함된 사실에 크게 공감하였다. 그렇게 말라버린 몸을 각인시켜서 모친에게 상처를 입히고, 지금 이것이 자식을 온전히 돌보지 못한 무책임의 결과라며 말없이 쏘아대는 그 상황을. 자신이 좀 남다르다고 느끼며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같은 공격성을 지니고 있다. 단지 표출할 때 적극적이냐 소극적이냐의 차이일 뿐. 결국 욕구는 자기만족이 기본이지만 타인과의 인정과도 연결돼있어, 여기에서 완전히 분리되고 해방되기란 불가하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를 키울 때, 타인에게 도움이 되었을 때에 오는 기쁨과 존재감을 가르친다. 그런데 이 교육을 아이가 예민하게 흡수하면 점차 관계 의존증이 되어 나 자체로서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성장한 아이는 내면과 외부가 계속 부딪히면서 무언가 잘못됨을 감지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를 몰라 하다가 소위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저자의 거식증도 회피 수단 중의 하나였다. 식욕을 통제하며 성공의 만족을 강조했으나 술 중독은 그러지 못했다는 아이러니가 있지만 차라리 그게 인간답고 좋더군. 중독은커녕 욕구랄 것도 없는 나 같은 인간이야말로 처방이 불가한 경우라서 말이지.


폭식이든 거식이든 제 몸을 학대하는 욕구의 행위에는 분노와 슬픔이 서려있다고 한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채워지지 않는 필요에 대한 분노.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 여겨지는 것에 대한 슬픔. 내 안에 뭔가가 빠져있어 공허하다거나 또는 가득 차 있어 속이 갑갑하다거나. 그게 무슨 얘긴지 잘 알겠어서 참 괴롭고 또 괴롭다. 저자는 허함이라는 허기의 존재에서 달아나기 위해, 그 상실과 비통의 감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거식증이란 갑옷을 둘렀지만, 그 철저한 강박과 루틴이 저자를 수렁에서 건져내지는 못했다. 모든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들듯이 감정과 고통의 조각들은 존재의 욕망으로 귀결됨을 깨달았기에. 몸에서 본능적으로 느낀 ‘부재‘를 이만큼 주목해 본 적이 있었나 싶다. 놀라운 관점과 생각거리를 던져준 저자에게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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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22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잉 프사 가을 물감

물감 2023-11-22 11:12   좋아요 0 | URL
겨울 아니고요?ㅋㅋㅋ

잠자냥 2023-11-22 11:15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두 계절 노린 큰 그림...

물감 2023-11-22 11:30   좋아요 1 | URL
영원불변의 잠자냥 님 프사가 바뀜을 보고 월동준비의 충동이 일어났걸랑요 ㅋㅋㅋ
 
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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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의 작품을 몇 권 읽어본 바, 나는 이 작가를 막 좋아하지는 않을 듯하다. 작품성은 우수하지만 스타일이 영 별로랄까. 나는 인간의 심리를 깊게 다루는 작품을 매우 좋아한다. 서머싯 몸의 작품들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으나 계속 읽어봐도 저자의 통찰이나 깨달음에 공명하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그는 몇 발자국 떨어져서 얘기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헤르만 헤세의 경우, 자신을 작중 인물에 대입하여 삶과 고뇌를 몸소 풀어가곤 하는데, 서머싯 몸은 늘 동떨어진 화자의 입장에서 관찰만 하고 있어 수박 겉 핥기의 심리 묘사로 그칠 때가 꽤 있다. 무심하게 툭 던지는 그의 고찰들은 어쩐지 ‘아님 말고‘처럼 들린단 말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이것을 의도적인 장치라고도 하던데, 독자의 생각과 상상이 마음껏 개입되기를 바랐다고 하기엔 너무 많은 걸 떠넘기려 한다는 생각도 든다. 여하간 이 분도 썩 친절한 작가는 아니올시다.


<달과 6펜스>는 명성에 비해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갑자기 화가가 되겠다고 직장과 가족을 버리고 달아난 남자의 설정이야 세상에 온갖 별종이 다 사니까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런데 멀쩡하던 사회인이 하루아침만에 인간성을 개나 줘버린 괴짜가 돼버렸다는 건 납득하기가 어렵다. 아무튼 이 작품도 화자가 주인공의 주변을 맴돌면서 기록했기 때문에 매끄럽지 못한 구간이 많은 편이다. 그냥 체념하자. 런던에서 파리로 건너간 스트릭랜드는 거렁뱅이처럼 살면서도 불평이나 탄식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걸고넘어지는 요소들이 없어서 좋아했다. 그래야 미술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원하던 그림을 마음껏 그려보지만 정작 그는 타인에게 작품을 보여주거나 전시하거나 판매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럴만한 실력도 못되었거니와 그가 미술을 대하는 태도나 철학은 일반 예술가의 것과 영 딴판이라 더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 독보적인 괴짜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스트릭랜드야 대놓고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라지만 그 밖에 인물들도 참 아이러니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으로 엉터리 삼류 화가인 D와 그의 아내인 B에 대해 말해보자. 넉살 좋은 동네 바보인 D는 스트릭랜드의 허접한 그림에서 신들린 재능을 훔쳐본 뒤로 그를 숭배한다. 어느 날 몸져누운 스트릭랜드를 집에 데려와 요양해 주자는 남편을 극구 반대하는 B는, 그의 설득에 못 이겨 이 돼먹지 못한 괴짜 환자를 돌보게 된다. 그 결과, 아내는 환자에게 마음을 뺏기고, 남편은 아내에게 버림받아 울고불고 난리가 난다. 가난한데다 볼품없는 외양에, 이성을 돌같이 여기는 스트릭랜드의 어디가 좋아서 바람이 났을까. 아무튼 고상했던 내조의 여왕은 갑자기 악녀로 돌변하더니 관능의 세계로 훌쩍 떠나버렸다. 반면에 순수를 잃어버린 D는, 스트릭랜드를 손봐주려다가 그의 그림을 보고 대뜸 용서해 주기로 한다. 고통과 감정을 전부 뒤로할 만큼 경외스러운 예술가의 재능이라니. 보다시피 이 사람들의 변덕과 충동은 누구나 이해하고 받아들일만한 사이즈가 아니다. 내 식대로 말해보자면, 열렬히 추구하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으니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드는 게 당연하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괴팍하고 불경하게 보일 테지만, 당사자들은 신의 땅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얼마나 황홀하겠는가. 하여 아무나 이해할 수 없고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예술가의 정신세계라는 말이렸다. 그러니까 예술 분야에 영안을 가졌느냐 아니냐에 따라 판가름이 나는 것이므로, 당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화자는 도덕과 윤리에서 한참 벗어난 비인간적인 스트릭랜드를 경멸하면서도 그에 대한 관심을 끊지 못한다. 이 괴짜의 흥미로운 점은, 어떤 고난과 고통에도 내색 한 번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래서 끝내 문둥병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도 화가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이미 혼과 영이 신의 세계에 입성해있으니, 육신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일 테다. 그렇기에 죽음도 두렵지 않았고,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 힘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 테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위대한 정신은 인정하겠다만, 그 하나 때문에 자신의 결여된 부분을 못 깨닫는 건 안타깝기만 하다. 아무리 결핍에서 싹트는 예술이라 해도 전 과정이 괴로워야 할 이유는 없는데 말이다. 사실 이건 인물보다도 작가의 철학과 사상이 더 중요하겠지. 서머싯 몸도 전쟁을 겪었던 사람이라서 그런가, 문장 곳곳에서 증오심이 배어 나온다. 그 때문에 저자의 풍자소설들은 대중성이 약한 편이다. 호소력이 딸리니 잘 먹혀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여하튼 내용은 잊어버려도 제목만은 절대 잊혀지지 않을 작품이다. 이상 세계를 의미하는 달과, 물질세계를 의미하는 6펜스라니. 진짜 끝내주게 잘 지었다. 그런데 작중에서는 이 제목에 관해 언급하는 장면을 찾아볼 수가 없다. 지난번에 읽었던 <케이크와 맥주>도 그렇고, <면도날>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도 서머싯 몸의 스타일이랄까. 늘 항상 몇 발자국 떨어져 있으려는 인상을 받는다. 누군가는 시크하다고 하겠으나 내게는 그저 성의 없는 태도로만 보인다. 한 번씩 묵직한 생각거리를 던져놓고도 금방 돌아서 다른 화제로 넘어가버리는 게 아주 습관이다. 서머싯 몸이 생각하는 작가란, 판단하기보다 알고자 하는 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198p). 과연 그 말처럼 호기심도 넘치고 관찰도 많이 한다지만 딱 거기까지 일뿐이다. 판단할 생각이 없다 보니 사유들은 한층 더 깊어지지 못한 채 붕 떠버리는 글이 되고 만다. 본인의 호기심만 충족하면 된다는 듯한 저자의 이기심을 나는 줄곧 지적하고 싶었다. 뭐 누가 알아주겠냐마는. 그리 좋아하진 않아도 이이의 작품들은 계속 읽어볼 생각이다. 이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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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1-16 1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제가 서머싯 몸이 안땡기는 이유가 이거였군요~! 저도 왠지 괜찮기는 한데 뭔가 손이 안가더라구요 ㅋ 물감님은 도스토예프스키 스타일이신거 같아요~!!

물감 2023-11-16 11:33   좋아요 1 | URL
늘 어긋났던 우리 NF끼리 드디어 통하는 게 생겼군요 ㅋㅋㅋ
서머싯 몸은 애매한 가시같은 불편함이 있어요. 워낙 풍자하길 좋아하는 작가라, 독자들도 바보 만드는 걸 좋아하는 듯 하고요. 하지만 저는 바보가 아닌지라, 작가의 놀음에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하하하핳. 도끼옹 작품은 최대한 출간순서대로 읽고 싶은데 책이 없어서 잘 안되네요. 제가 된발음을 싫어해서 열린책들 도끼옹 작품을 안 읽습니다. 물론 창비도 된발음이지만........

stella.K 2023-11-16 1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싯적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
시크한게 나름 좋았고 저도 전작은 아니어도 몇 작품은 읽어 봐야지
해 놓고 여태 못 읽고 있네요.
다시 읽으면 저도 물감님과 같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귀가 좀 얇은 편이라서 말이죠.ㅋㅋ

물감 2023-11-16 19:27   좋아요 1 | URL
어떻게 감상이 다 똑같겠어요. 저같은 미꾸라지도 좀 있어줘야 건강한 서평문화가 생기는 법 아니겠습니까ㅋㅋㅋ 실망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인간의 굴레에서>는 기대 좀 하고있습니다🙂🙂🙂

stella.K 2023-11-16 19:40   좋아요 1 | URL
미꾸라지! ㅎㅎㅎㅎ
겸손하시긴. 그러고 보니 추어탕이 생각나는군요.
지금까지 탁 한 번 밖에 안 먹었는데. ㅋㅋ

물감 2023-11-16 20:31   좋아요 1 | URL
ㅎㅎ 저도 추어탕이 급 먹고싶어지네요. 몸 보신할 때인가 봅니다. 이번 주말에는 건강식으로 챙겨드시길요^^

페크pek0501 2023-11-16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 고갱을 모델로 썼다고 해서 더 유명해진 소설 같아요. 저도 리뷰를 쓴 적이 있지요.
어느 집에서 기거하다 그 집 부인과 눈이 맞고 함께 떠나기로 하잖아요. 그 반전이 충격적이었어요. 그 화가를 싫어한다고 했던 부인이 갑자기 자기 남편을 버리고 그 화가를 사랑하다며 따라가겠다고 나서잖아요. 멋진 반전이었어요. 여기서 작가의 통찰력이 빛을 발한다고 봤어요. 인간은 그럴 수 있음을 작가는 안 거죠.
사랑 따위에도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하는 한 예술가의 생애도 신선했어요.
저는 이 소설보다 인간의 굴레에서, 를 더 좋아합니다. 명문장이 많거든요.

물감 2023-11-16 23:16   좋아요 1 | URL
즐겁게 읽으신 분들한테 어쩐지 찬물을 끼얹는 기분이지만.. 이해해주셔요ㅋㅋ

음. 저는 화가를 따라가버린 부인이 그다지 충격이진 않았어요. 작가가 인간의 변덕스러움을 말하고자 이 책을 쓴 것은 아닐 테니, 요 이해안가는 충동을 독자들한테 어떻게 설득시킬 것인가가 관건이지 싶습니다. 과연 작가는 온갖 말들로 열심히 설명하고는 있는데요, 고것이 썩 와닿지가 않더란 말이죠. 물론 예술이란 게 알아듣기 쉬운 영역은 아니지만요. 그래서 저는 리뷰에 적은대로, 추구하던 꿈과 이상의 세계를 만난 사람들이라 이해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는 말로 정의내렸습니다. 지금으로선 그것이 더 저와 독자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말 같거든요. 작가가 예술가들의 열정은 잘 설명했지만 예술가들이 남다른 것에 대한 이유는 들지 못했습니다. 전 이런 게 서머싯 몸의 무책임한 태도로 보여져요.

<인간의 굴레에서>는 화자(관찰자)가 아닌 작가 본인의 이야기라길래 기대하고 있어요. 명문장도 많다고 하시니 더 기대됩니다. 분량의 압박이 좀 크긴 하지만........

페크pek0501 2023-11-18 10:48   좋아요 1 | URL
오! 그런 자기만의 취향과 소설에 대한 안목, 훌륭해 보입니다.
한 수 배워 갑니다.^0^

물감 2023-11-18 14:06   좋아요 2 | URL
쑥스럽네요ㅎㅎ
즐거운 주말 되시기를🙂

coolcat329 2023-12-31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간의 굴레에서> 기대가 됩니다.
<달과 6펜스>는 아무래도 엄청난 예술가 이야기이다 보니 더 붕 뜬 느낌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이해하기 힘들더라구요. 꼭 이해하지 않아도 되지만요.ㅎㅎ

물감 2023-12-31 13:09   좋아요 1 | URL
문학이 다 그렇지만 유독 이 작품은 이해냐, 공감이냐를 두고 싸우는 기분이랄까요. 저는 보통 공감파인데 이 작품은 왜인지 이해파로 접근하게 되더군요. 주인공의 정신세계가 워낙 남달라서 말이죠. 결국은 이해 못했어요. 차원이 다른 갑다 하고요 ㅋㅋㅋ
본문에도 썼지만 전 서머싯 몸의 스타일이 썩 달갑진 않아요. 그래도 아주 간혹 이것봐라? 하는 통찰이 은근 맛있어서 계속 읽어는 보려고요. <인간의 굴레에서>는 분량의 압박이 있지만... 새해에는 읽어보렵니다 ㅋㅋㅋ
 
찌질한 악마 새움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솔로구프 지음, 이영의 옮김 / 새움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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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도 춥고 하니까 러시아 문학이나 읽자 싶어 뒤져보다가 이 작품을 발견했다. 무려 도스토옙스키 다음으로 가장 완벽한 러시아 소설이라는데 그렇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읽어줘야 인지상정 아닌가.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찌질 감성의 끝판왕이 나온다고 하니 이래저래 기대가 컸다. 그래서였을까. 아무리 읽어도 작품의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고, 갈수록 반복되는 이야기에 그만 질려버렸다. 역시는 역시나였다. 평이 화려한 작품들은 경계가 필수인데, 러시아라고 다를 줄 알았던 건지 방심했다가 또 낚였음. 퉤에.


중학 교사인 페레도노프는 오만함, 야비함, 비굴함, 졸렬함 등등 나쁜 것들만 죄다 갖춘 역대급 빌런이다. 인성 파탄자에다 수업도 잘 못하는데 어떻게 선생이 되었는지부터가 의문이지만, 그와 결혼을 원하는 여자들이 줄을 섰다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라니, 뭐 이런 설정이 다 있냐. 감정 그래프가 쉼 없이 오르내리는 이 빌런은 헛된 망상을 즐기며 그에 따른 폭언과 거친 행동도 아끼질 않는다. 이는 아무리 가깝고 친한 사람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근데 이상하게 주변인들이 주인공의 망나니 짓을 잘만 받아줘서 당황스럽지만 그냥 러시아인들은 다 이런갑다 하게 된달까. 아무튼 등장 인물들이 쾌활과 광기의 중간쯤에 있는데, 일일이 묘사하기도 귀찮으니 궁금하시면 직접 읽어보길 바란다. 참고로 이 작품에는 멀쩡한 인물이 없다시피하다.


동거 중인 사촌 동생 B는 페레도노프와의 결혼을 꿈꾼다. 콧대 높은 오빠를 낚기 위하여, B와 혼인하면 빌런에게 장학관 자리를 내준다는 공작부인의 약속을 꾸며놓는다. 그게 뻥인 줄도 모르고 동네방네 떠들고 자랑하고 다니는 빌런과, 사태의 진실을 알고도 장단 맞춰주는 모든 사람들. 그를 놀려먹는 게 마냥 즐거운 사람들에게서, 그동안 페레도노프를 얼마나 재수 없어 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걸 끝내 알지 못했으니 이 작품은 어떤 교훈을 주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회를 막 풍자하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찌질한 사람들‘이 제목으로 딱이겠던데.


B한테 속은 줄도 모르고 승진할 생각에 들떠서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주인공. 반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시기하여 죽이려 들거나, 음식에 독을 탄다거나, 마법을 부린다거나, 동물로 둔갑하여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피해 망상에 빠져든다. 물론 원래부터 정상은 아니었는데 이제는 그 수치가 한참을 초과하고 있어, 그나마 귀엽게 봐주었던 허세나 허언증도 더 이상 꼴 보기 싫어질 정도로 변해버렸다. 즐거워했다가, 불안에 떨다가, 윽박지르다가, 혼쭐나고 깨갱했다가, 다시 행복에 겨워하는 사이클의 무한 반복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삐뚤어진 자기애‘로 똘똘 뭉쳐있긴 하지만 저밖에 모르는 유아독존은 또 아니라서, 도대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건지 작가를 이해 못 하겠더라. 해서 메시지 생각 안 하고 그냥 읽었는데 심지어 재미도 일관되게 없었다는...


그래. 사람은 누구나 악한 마음을 품고, 마음 속에 악마가 살고 있다고 해. 그 개개인의 악마를 인물화하여 인간 사회의 추악한 민낯을 고발하고 싶었다 치자고. 그렇담 최소한의 성공과 실패, 상승과 몰락이 나와줘야 하잖아? 근데 이 작품은 정말 모든 사람들이 추잡해서 누가 더 낫다 아니다를 논할 수가 없다. 주인공이 역대급 빌런이면 뭐 하나. 전혀 돋보이질 않는데 말이다.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찌질함과는 거리가 있어서, 차라리 ‘창비‘의 <허접한 악마>나, ‘책세상‘의 <작은 악마>가 더 나은 제목일 듯하다. 이런 게 도스토옙스키의 뒤를 잇는 희대의 명작이라니. 회초리가 어디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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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11-10 2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회초리 ㅋㅋㅋㅋㅋㅋ
엄청 그럴 듯한 해설은 안 붙어 있나요?

물감 2023-11-10 22:10   좋아요 2 | URL
해설은 없고 저자와 역자의 인터뷰집이 있는데요, 도통 무슨 얘긴지 모르겠습니다ㅋㅋㅋㅋㅋㅋ

구단씨 2023-11-10 23: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인공 직업이 혹시 코미디언인가요? 왜케 웃겨요. ㅎㅎㅎㅎㅎ
처음 소개부터 진짜, 막장인지 또라이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이 인간 마냥 웃기네요.
근데, 물감님 리뷰도 너무 재밌어요. 까르르르르르~~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당황했던 처음 기억은 잊고, 그냥 ‘재미도 일관되게 없었다‘는 문장이 강렬하게 남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11-11 11:34   좋아요 0 | URL
막장에 돌아이 맞습니다ㅋㅋㅋ 아아 간만에 까칠해지네요. 그치만 구단씨 님을 웃겨드렸으니 그걸로 만족합니다 ^^ 한국의 막장드라마가 훨씬 낫습니다😀😀😀

새파랑 2023-11-11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로구프 다른 작품이 있나 찾아봤는데 없네요 ㅋ 전 물감님 덕분에 처음 들어본 작가인데 내용은 특유의 러시아 스타일인데 구성은 좀 허술한가보네요 ㅋㅋ 화려한 평에 낚이면 안되나 봅니다 ~!!

물감 2023-11-11 11:38   좋아요 1 | URL
ㅋㅋㅋ진짜 정 읽으실거면 창비 번역으로 읽으세요. 근데 비추하고 싶어요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11-14 11:48   좋아요 0 | URL
술파랑 한번 도전해봐요. ㅋㅋㅋ 창비 <허접한 악마>로 읽었는데 저는 좋았는데...?! 별다섯줬었다능. 내가 허접한 인간이라 그런지 공감 막 가던데....ㅋㅋ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3-11-14 12:02   좋아요 0 | URL
전 찌질하고 허접하니 딱 맞겠네요 ㅋㅋㅋ

물감 2023-11-14 21:39   좋아요 0 | URL
사회를 풍자하거나 여러 인간 군상을 다룬다고 보기엔 너무 고만고만하고 평범(?)하거든요. 그냥 인간은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추악한 존재다,라는 걸 말하는건지... 창비에는 해설이 있을테니 읽어보시고 공유좀 해주세요. 이 책은 해설이 없어요 ㅋㅋㅋ

잠자냥 2023-11-14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거 창비 <허접한 악마>로 읽었는데 재미있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

꼬마요정 2023-11-14 12:26   좋아요 0 | URL
이 책이 허접한 악마예요? ㅋㅋㅋ 책 제목 바뀌면 다른 책 같아요 ㅋㅋ 창비랑 표지가 완전 다르네요.

잠자냥 2023-11-14 20:57   좋아요 1 | URL
네 <허접한 악마>인데 허접과 찌질의 어감 차이도 꽤 크네요;

물감 2023-11-14 21:32   좋아요 1 | URL
그런데 허접하다는 말도 썩 안 맞는데요? 뭐가 허접하다는 거지...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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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에는 처음으로 친구 따라 낚시를 갔다. 이것은 활동 반경이 매우 좁은 나에게 매우 큰 결심이었는데 지금 어딘가로 떠나지 않으면, 이 갑갑함을 풀지 못하면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당장 서해로 달려가 자리 잡고 물멍을 때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동안 머리에 가득했던 잡생각들을 한 가지씩 흘려보내었다. 대체 인생이란 무엇일까. 자아가 생길 무렵부터 줄곧 해오던 질문이다. 지금 나이의 두 배쯤 살면 그 질문에서 자유로워지게 될까. 확신은 못하겠군. 젊었던 시절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다는 유명 연예인들의 인터뷰를 종종 듣는다. 그것은 단지 치열했던 지난날들이 끔찍해서가 아니라, 삶에게 질문을 받을 때마다 꼼짝 못 했던 자신이 싫어서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이 그때보다는 정답에 가깝다 할 수 있겠고, 더는 막연하게 살던 과거의 내가 아니기 때문에 욕심도 미련도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마음에 굳은살이 생기고 초연해지기까지는 많은 투쟁과 시행착오와 감정 소모가 있어야겠지. 그걸 생각하면 오늘의 방황은 순례자들이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리라.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 <무빙>의 주인공이 엄마에게 소리친다. 나는 내 성격이 너무 싫다고. 이렇게 소심하고 남 눈치만 보고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자신이 너무 괴롭다고. 너무 내 얘기 같아서 그만 울어버렸다. 우리 집이 가난하지 않았다면. 전학을 다니지 않았다면. 차라리 학원이라도 다녔더라면.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법을 몰라서 점점 혼자가 된 나는, 그렇다고 혼자서 잘 노는 편도 아니었다. 부모님도 친구들도 나에게 관심이 없어지자 언젠가부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습관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답답스러운 인생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중이다. 지금 다니는 직장은 팀장님이 활기차고 파이팅 넘치는 여성분인데, 어떤 날은 텐션이 낮은 채로 출근하셨다. 그때 나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감기 걸리셨나? 매출 떨어진 거 때문인가? 혹시 가족 중에 누가 아픈가? 어제 잠을 못 주무셨나? 아님 내가 뭐 잘못 보인 게 있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괜히 긴장하게 되는 거다. 그냥 무슨 일 있냐고 가서 물어보면 될 텐데, 이 간단한 일조차 쉽게 나서지 못하는 어른으로 커버렸다. 타인의 표정, 말투, 몸짓, 그 밖의 분위기에서 읽히는 감정의 빅데이터가 모든 상황에서 나를 조여온다. 그럴 때면 신경세포의 on/off 버튼이 있었으면 싶다. 남들은 다 신경 쓰고 잘만 사는데 어째서 나만 이렇게 감정의 몇 수 앞을 내다보고 겁먹고 쩔쩔매고 긴장하고 그래야 할까.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같이 있으면 에너지를 뺏기게 되어, 집에만 오면 녹초가 된다. 심지어 일을 많이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결국 나는 혼자 지내야만 할 팔자인가.


능력이라도 있으면 프리랜서를, 깡이라도 있으면 1인 방송을, 손재주라도 있으면 뭔가 뚝딱거리는 일이라도 해볼 텐데, 아무것도 없는 나는 할 수 없이 사람들과 잘 지내야만 한다. 물론 눈치 보던 습관 덕분에 사회성은 나쁘지 않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아쉬울 게 뭐 있어!라고 하고 싶지만 나는 막 칼 같은 성격이 못될뿐더러,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신경 쓰기 바쁘다. 상대방은 내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에 관심이 없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하는데 이런 게 잘 안된다. 정말 제3자가 보면 하등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 쏟는 일로 보일 것이고, 나 또한 그런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증상들이 자의식 과잉의 한 부분이란 것도 잘 안다. 고쳐보려고 이런저런 훈련을 해보았지만 시간 지나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태어났나 보다 하고 그냥 불편하게 살아간다. 보통 사람 간에 거리 두기가 좋다고들 그러는데, 나는 한공간에서 거리 두는 것보다 분리된 장소에서의 거리 두기가 맞는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직장을 관두고 혼자 하는 소일거리를 찾아볼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어차피 나는 돈도 정말 안 쓰거든.


내 노후도 걱정이지만 계속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 걱정도 안 할 수가 없다. 언제 어디에 쓰일지 모를 비용을 생각하면 일을 계속해야 한다. 내가 좀 이상주의자라 현실감각이 둔한 편인데, 이런 나조차도 현실 걱정이 들 만큼 불안한 세상이 되었다. 이 자리에서 정권을 욕하려는 건 아니고, 슬슬 부모님을 책임져야 하는 문제가 피부로 와닿고 있어서이다. 나는 우리 부모님을 정말 사랑한다. 부자지간에도 서먹함이 없고, 모친하고도 통화를 자주 하는 제법 보기 힘든 유형의 아들이다. 두 분은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진심으로 나에게 용서를 구했다. 갖고 싶은 것도 못 사주고, 학원도 못 보내주고, 가족여행 한번 못 데려가고, 그러면서 자식을 혼내기만 했던 것들에 대하여 몇 번이고 미안하다 하셨다. 나는 괜찮아요. 두 분의 본심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때가 오고서야 나를 챙기시는 모습에 기분이 참 묘해진다. 가족 간에 좋았던 기억은 거의 없다. 뭐 그렇다고 나빴다는 건 아니고 아무튼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가정을 해본다. 차라리 가족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나도 좀 자립심 강하고 독한 성격으로 자라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어렸을 때는 나의 섬세함과 감수성과 공감력과 이타심이 나를 더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느끼지 못하거나 무심하거나 간과하는 것들을 나는 캐치하니까 좋은 거라고 믿었었다. 바보같이.


성차별 발언을 하려는 건 아닌데, 하여간 나에게서는 수컷의 특성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여성 같다는 건 아니고, 중성의 매력도 아니니, 그냥 수컷의 세포가 좀 많이 부족한 경우라 해야겠다. 나의 얼마 없는 인맥의 대부분이 여자인데, 남자보다 여자랑 대화가 더 잘 되고 좀 더 나다움을 갖게 된다. 남자들 사이에선 뭐 투명인간 취급인데, 그래도 여자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코드가 제법 맞아서, 나는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왜 하필 남자로 태어나서 이 고생인가 싶다. 나에게 인생 2회차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행복지수 높기로 소문난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사계절의 자연을 만끽하는 초절정 인플루언서로 살아보고프다. 이건 그냥 해본 소리고, 진짜 희망 사항은 ‘평범한‘ 인간으로 무난하게 살아봤으면 한다. 내가 말하는 평범의 기준은, 뭐든지 과하지 않고 적당한 걸 의미한다. 요즘은 일반인 되는 것도 힘들다고들 하는데, 평범하기가 부자 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세상이다.


나는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부모님이 바르게(?) 키워놓은 거라 해두자. 내가 나를 잘 아는데, 술이든 담배든 맛 들였다 하면 누구보다도 중독자가 될 거라 자부한다. 이렇게 세상 살기가 버거운 어린 양이 기댈 곳이라곤 글쓰기밖에 없어서 이런 새벽시간에도 잠 안 자고 키보드를 두들기는데, 니코틴과 알코올이 주는 위로를 어떻게 마다하겠냐고.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은 아예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 갑자기 생각난다. 군대에서 동기가 말하길, 내가 그렇게 한숨을 자주 쉬더란다. 듣기 싫으니까 제발 그만하라고, 그거 꼭 고쳐야 될 습관이라고 진지하게 말해주었다. 이 한숨 중독자는 겨우 고치고 전역을 했으나, 얼마 뒤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지면서 다시 한숨 중독에 빠져버렸다고 한다. 중독이란 건 연장된 현실 회피의 결과인데, 여기서 빠져나와 현실과 마주하려니 얼마나 무서운가. 그래서 중독은 또 다른 중독으로만 벗어날 수 있다. 금연하려고 씹은 금연껌에 중독되었다던 모 연예인의 말처럼. 생각의 중독을 끊으려면 뭐가 좋을까...


<명랑한 은둔자>에는 나의 고민과 감정의 결이 비슷한 이야기들이 가득 있다. 하여 책을 리뷰하는 대신에 저자와 공명하는 나의 이야기들로 채워봤다. 에세이 형식의 리뷰라 치지 뭐. 근데 참 저자도 어지간히 세상과 맞지 않는 이방인이더라. 캐럴라인 냅의 책들은 계속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지난 주만 해도 막 단풍이 들고 있었는데 벌써 낙엽이 지려하고 있다. 매년 가을은 내 인사를 받아주지도 않고 떠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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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11-05 0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를 눌렀습니다.
내가 만약 남자로 태어났다면 물감 님 같은 모습이 아녔을까? 상상하면서요.ㅋㅋㅋ

물감 2023-11-05 08:27   좋아요 2 | URL
아이고, 절대 안됩니다요ㅋㅋㅋㅋ(결사반대 1인 시위 중)

새파랑 2023-11-05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으시다니 부럽습니다 ㅜㅜ

눈치보는 것도 성격 때문인거 같아요. 눈치 없는 사람은 오히려 편하게 지내는데 ㅎㅎ

중독은 뭐든 안좋은거 같아요~!!

물감 2023-11-05 10:38   좋아요 1 | URL
밧줄에 묶인 새끼 코끼리가 생각나네요. 나중에는 밧줄이 없는데도 도망치지 못하는 모습이 딱 저 같습니다. 성장배경과 환경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ㅎㅎㅎ 술 적당히 드시길 바랍니다. 새파랑 님을 오래오래 보고 싶거든요^^

stella.K 2023-11-06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은 딱 제 스탈이네요. 대화 잘 통하는 형제님 만나는 게 쉬운게 아니거든요. 우리 친하게 지내요.ㅋㅋ
이 책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든데 저도 읽어보고 십네요.^^

물감 2023-11-06 14:19   좋아요 1 | URL
반가운 댓글이네요^^ 저는 마음만 잘 맞으면 카페서 쫓겨날 때까지 떠들 수 있답니다 ㅎㅎㅎ 이 책 정말 좋았어요. 생각보다 딥하고 심오한 이야기도 나오지만 거부감 안들게 참 잘 썼더라고요. 아프고 병든 현대인들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그만입니다!

hugh79.go 2023-11-13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렸을때 남들 캐치 못하는것을 캐치할때 ‘특별’ 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것이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저주’ 에 가까운 기질이란 것을 깨닫고 있었는데 뭔가 많이 공감이 가네요.. 한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의 분리도.. 우리 같은 사람은 만나서 연대하기도 쉽지 않고.. 흑흑..

물감 2023-11-13 11:38   좋아요 0 | URL
저랑 같은 분이 또 있어서 반갑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놈의 특별함이 뭐라고 좋아했던건지 참. 인지 기능이 너무 발달하면 이렇게 생이 고달파지네요 ㅠㅠ 같은 사람끼리 만나는 게 최선일 듯 하지만 주변에 없어도 너무 없죠. 그냥 버틸 수 밖에요 ㅎㅎㅎ 같이 잘 버텨봐요 ... 하하핳

얄라알라 2023-12-26 2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코올과 니코틴이 아닌 생각의 중독~~와!!게다가 부모님을 생각하시는 그 ...좋은 마음!!알라딘 서재 플친님들께서 물감님께 호감을 보이시는 와중에 저도 얹어봅니다^^ 와! 물감님!

물감 2023-12-27 09:56   좋아요 0 | URL
푸념 같은 글에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머리 비우고 싶어서 독서하는데 오히려 생각만 가득해지네요 ㅎㅎㅎ 연말 잘 보내시구 맛난거 많이 드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