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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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의 작품을 몇 권 읽어본 바, 나는 이 작가를 막 좋아하지는 않을 듯하다. 작품성은 우수하지만 스타일이 영 별로랄까. 나는 인간의 심리를 깊게 다루는 작품을 매우 좋아한다. 서머싯 몸의 작품들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으나 계속 읽어봐도 저자의 통찰이나 깨달음에 공명하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그는 몇 발자국 떨어져서 얘기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헤르만 헤세의 경우, 자신을 작중 인물에 대입하여 삶과 고뇌를 몸소 풀어가곤 하는데, 서머싯 몸은 늘 동떨어진 화자의 입장에서 관찰만 하고 있어 수박 겉 핥기의 심리 묘사로 그칠 때가 꽤 있다. 무심하게 툭 던지는 그의 고찰들은 어쩐지 ‘아님 말고‘처럼 들린단 말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이것을 의도적인 장치라고도 하던데, 독자의 생각과 상상이 마음껏 개입되기를 바랐다고 하기엔 너무 많은 걸 떠넘기려 한다는 생각도 든다. 여하간 이 분도 썩 친절한 작가는 아니올시다.


<달과 6펜스>는 명성에 비해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갑자기 화가가 되겠다고 직장과 가족을 버리고 달아난 남자의 설정이야 세상에 온갖 별종이 다 사니까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런데 멀쩡하던 사회인이 하루아침만에 인간성을 개나 줘버린 괴짜가 돼버렸다는 건 납득하기가 어렵다. 아무튼 이 작품도 화자가 주인공의 주변을 맴돌면서 기록했기 때문에 매끄럽지 못한 구간이 많은 편이다. 그냥 체념하자. 런던에서 파리로 건너간 스트릭랜드는 거렁뱅이처럼 살면서도 불평이나 탄식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걸고넘어지는 요소들이 없어서 좋아했다. 그래야 미술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원하던 그림을 마음껏 그려보지만 정작 그는 타인에게 작품을 보여주거나 전시하거나 판매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럴만한 실력도 못되었거니와 그가 미술을 대하는 태도나 철학은 일반 예술가의 것과 영 딴판이라 더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 독보적인 괴짜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스트릭랜드야 대놓고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라지만 그 밖에 인물들도 참 아이러니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으로 엉터리 삼류 화가인 D와 그의 아내인 B에 대해 말해보자. 넉살 좋은 동네 바보인 D는 스트릭랜드의 허접한 그림에서 신들린 재능을 훔쳐본 뒤로 그를 숭배한다. 어느 날 몸져누운 스트릭랜드를 집에 데려와 요양해 주자는 남편을 극구 반대하는 B는, 그의 설득에 못 이겨 이 돼먹지 못한 괴짜 환자를 돌보게 된다. 그 결과, 아내는 환자에게 마음을 뺏기고, 남편은 아내에게 버림받아 울고불고 난리가 난다. 가난한데다 볼품없는 외양에, 이성을 돌같이 여기는 스트릭랜드의 어디가 좋아서 바람이 났을까. 아무튼 고상했던 내조의 여왕은 갑자기 악녀로 돌변하더니 관능의 세계로 훌쩍 떠나버렸다. 반면에 순수를 잃어버린 D는, 스트릭랜드를 손봐주려다가 그의 그림을 보고 대뜸 용서해 주기로 한다. 고통과 감정을 전부 뒤로할 만큼 경외스러운 예술가의 재능이라니. 보다시피 이 사람들의 변덕과 충동은 누구나 이해하고 받아들일만한 사이즈가 아니다. 내 식대로 말해보자면, 열렬히 추구하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으니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드는 게 당연하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괴팍하고 불경하게 보일 테지만, 당사자들은 신의 땅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얼마나 황홀하겠는가. 하여 아무나 이해할 수 없고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예술가의 정신세계라는 말이렸다. 그러니까 예술 분야에 영안을 가졌느냐 아니냐에 따라 판가름이 나는 것이므로, 당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화자는 도덕과 윤리에서 한참 벗어난 비인간적인 스트릭랜드를 경멸하면서도 그에 대한 관심을 끊지 못한다. 이 괴짜의 흥미로운 점은, 어떤 고난과 고통에도 내색 한 번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래서 끝내 문둥병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도 화가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이미 혼과 영이 신의 세계에 입성해있으니, 육신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일 테다. 그렇기에 죽음도 두렵지 않았고,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 힘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 테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위대한 정신은 인정하겠다만, 그 하나 때문에 자신의 결여된 부분을 못 깨닫는 건 안타깝기만 하다. 아무리 결핍에서 싹트는 예술이라 해도 전 과정이 괴로워야 할 이유는 없는데 말이다. 사실 이건 인물보다도 작가의 철학과 사상이 더 중요하겠지. 서머싯 몸도 전쟁을 겪었던 사람이라서 그런가, 문장 곳곳에서 증오심이 배어 나온다. 그 때문에 저자의 풍자소설들은 대중성이 약한 편이다. 호소력이 딸리니 잘 먹혀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여하튼 내용은 잊어버려도 제목만은 절대 잊혀지지 않을 작품이다. 이상 세계를 의미하는 달과, 물질세계를 의미하는 6펜스라니. 진짜 끝내주게 잘 지었다. 그런데 작중에서는 이 제목에 관해 언급하는 장면을 찾아볼 수가 없다. 지난번에 읽었던 <케이크와 맥주>도 그렇고, <면도날>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도 서머싯 몸의 스타일이랄까. 늘 항상 몇 발자국 떨어져 있으려는 인상을 받는다. 누군가는 시크하다고 하겠으나 내게는 그저 성의 없는 태도로만 보인다. 한 번씩 묵직한 생각거리를 던져놓고도 금방 돌아서 다른 화제로 넘어가버리는 게 아주 습관이다. 서머싯 몸이 생각하는 작가란, 판단하기보다 알고자 하는 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198p). 과연 그 말처럼 호기심도 넘치고 관찰도 많이 한다지만 딱 거기까지 일뿐이다. 판단할 생각이 없다 보니 사유들은 한층 더 깊어지지 못한 채 붕 떠버리는 글이 되고 만다. 본인의 호기심만 충족하면 된다는 듯한 저자의 이기심을 나는 줄곧 지적하고 싶었다. 뭐 누가 알아주겠냐마는. 그리 좋아하진 않아도 이이의 작품들은 계속 읽어볼 생각이다. 이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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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1-16 1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제가 서머싯 몸이 안땡기는 이유가 이거였군요~! 저도 왠지 괜찮기는 한데 뭔가 손이 안가더라구요 ㅋ 물감님은 도스토예프스키 스타일이신거 같아요~!!

물감 2023-11-16 11:33   좋아요 1 | URL
늘 어긋났던 우리 NF끼리 드디어 통하는 게 생겼군요 ㅋㅋㅋ
서머싯 몸은 애매한 가시같은 불편함이 있어요. 워낙 풍자하길 좋아하는 작가라, 독자들도 바보 만드는 걸 좋아하는 듯 하고요. 하지만 저는 바보가 아닌지라, 작가의 놀음에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하하하핳. 도끼옹 작품은 최대한 출간순서대로 읽고 싶은데 책이 없어서 잘 안되네요. 제가 된발음을 싫어해서 열린책들 도끼옹 작품을 안 읽습니다. 물론 창비도 된발음이지만........

stella.K 2023-11-16 1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싯적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
시크한게 나름 좋았고 저도 전작은 아니어도 몇 작품은 읽어 봐야지
해 놓고 여태 못 읽고 있네요.
다시 읽으면 저도 물감님과 같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귀가 좀 얇은 편이라서 말이죠.ㅋㅋ

물감 2023-11-16 19:27   좋아요 1 | URL
어떻게 감상이 다 똑같겠어요. 저같은 미꾸라지도 좀 있어줘야 건강한 서평문화가 생기는 법 아니겠습니까ㅋㅋㅋ 실망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인간의 굴레에서>는 기대 좀 하고있습니다🙂🙂🙂

stella.K 2023-11-16 19:40   좋아요 1 | URL
미꾸라지! ㅎㅎㅎㅎ
겸손하시긴. 그러고 보니 추어탕이 생각나는군요.
지금까지 탁 한 번 밖에 안 먹었는데. ㅋㅋ

물감 2023-11-16 20:31   좋아요 1 | URL
ㅎㅎ 저도 추어탕이 급 먹고싶어지네요. 몸 보신할 때인가 봅니다. 이번 주말에는 건강식으로 챙겨드시길요^^

페크pek0501 2023-11-16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 고갱을 모델로 썼다고 해서 더 유명해진 소설 같아요. 저도 리뷰를 쓴 적이 있지요.
어느 집에서 기거하다 그 집 부인과 눈이 맞고 함께 떠나기로 하잖아요. 그 반전이 충격적이었어요. 그 화가를 싫어한다고 했던 부인이 갑자기 자기 남편을 버리고 그 화가를 사랑하다며 따라가겠다고 나서잖아요. 멋진 반전이었어요. 여기서 작가의 통찰력이 빛을 발한다고 봤어요. 인간은 그럴 수 있음을 작가는 안 거죠.
사랑 따위에도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하는 한 예술가의 생애도 신선했어요.
저는 이 소설보다 인간의 굴레에서, 를 더 좋아합니다. 명문장이 많거든요.

물감 2023-11-16 23:16   좋아요 1 | URL
즐겁게 읽으신 분들한테 어쩐지 찬물을 끼얹는 기분이지만.. 이해해주셔요ㅋㅋ

음. 저는 화가를 따라가버린 부인이 그다지 충격이진 않았어요. 작가가 인간의 변덕스러움을 말하고자 이 책을 쓴 것은 아닐 테니, 요 이해안가는 충동을 독자들한테 어떻게 설득시킬 것인가가 관건이지 싶습니다. 과연 작가는 온갖 말들로 열심히 설명하고는 있는데요, 고것이 썩 와닿지가 않더란 말이죠. 물론 예술이란 게 알아듣기 쉬운 영역은 아니지만요. 그래서 저는 리뷰에 적은대로, 추구하던 꿈과 이상의 세계를 만난 사람들이라 이해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는 말로 정의내렸습니다. 지금으로선 그것이 더 저와 독자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말 같거든요. 작가가 예술가들의 열정은 잘 설명했지만 예술가들이 남다른 것에 대한 이유는 들지 못했습니다. 전 이런 게 서머싯 몸의 무책임한 태도로 보여져요.

<인간의 굴레에서>는 화자(관찰자)가 아닌 작가 본인의 이야기라길래 기대하고 있어요. 명문장도 많다고 하시니 더 기대됩니다. 분량의 압박이 좀 크긴 하지만........

페크pek0501 2023-11-18 10:48   좋아요 1 | URL
오! 그런 자기만의 취향과 소설에 대한 안목, 훌륭해 보입니다.
한 수 배워 갑니다.^0^

물감 2023-11-18 14:06   좋아요 2 | URL
쑥스럽네요ㅎㅎ
즐거운 주말 되시기를🙂

coolcat329 2023-12-31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간의 굴레에서> 기대가 됩니다.
<달과 6펜스>는 아무래도 엄청난 예술가 이야기이다 보니 더 붕 뜬 느낌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이해하기 힘들더라구요. 꼭 이해하지 않아도 되지만요.ㅎㅎ

물감 2023-12-31 13:09   좋아요 1 | URL
문학이 다 그렇지만 유독 이 작품은 이해냐, 공감이냐를 두고 싸우는 기분이랄까요. 저는 보통 공감파인데 이 작품은 왜인지 이해파로 접근하게 되더군요. 주인공의 정신세계가 워낙 남달라서 말이죠. 결국은 이해 못했어요. 차원이 다른 갑다 하고요 ㅋㅋㅋ
본문에도 썼지만 전 서머싯 몸의 스타일이 썩 달갑진 않아요. 그래도 아주 간혹 이것봐라? 하는 통찰이 은근 맛있어서 계속 읽어는 보려고요. <인간의 굴레에서>는 분량의 압박이 있지만... 새해에는 읽어보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