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학의 세계사 - 중학적 세계를 넘어 일본이 유럽과 열대에서 접속하다
이종찬 지음 / 알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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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특정한 시대에 한 사회의 해부도는 그 사회의 세계관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도상圖像, icon이다. ‘동의보감東醫寶鑑‘(1613)이 발간되자 사대부는 물론이고 실학자들에게도 갖추어야 할 사대 서목(書目, *사대 서목은 ‘동의보감‘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 ‘상례비요喪禮備要’, ‘삼운성휘三韻聲彙’를 말한다.)에 포함되었다. 허준(1546~1615)은 이 책에서 ‘신형장부도’를 제시했다. 그런데 왜 그는 이 해부도에서 손과 발을 그리지 않았을까? 조선 성리학의 노동에 대한 가치관이 이 해부도에 깊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 사대부들의 삶은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었던 사회에서 손과 발을 활발히 움직여 땀이 날 수밖에 없는 노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학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육체적 노동으로 삶을 영위하지 않았던 실학자들에게 손과 발은 중요한 신체 기관이 아니었다. 양반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신형장부도’는 조선 성리학과 실학의 신체관을 보여준 것이다. -259~261쪽

"식민성은 근대성의 외부가 아니며 근대성과 식민성은 상호 외재적인 두 항이 아니라 분리가 불가능한 한 쌍"이라 할 때, 열대야말로 근대성의 실험 공간이며 식민성의 발육 공간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열대에 대한 융합적 사유, 즉 열대학이야말로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적인 사관이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17세기 서구가 열대를 식민화, 타자화하는 과정에서 근대 민족국가가 점차 형성되었으며 그 결과 서구중심주의가 정착되어갔다는 사실을 깊이 고려하면 열대에 관한 융합적 사유가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설 대안이라는 가설은 논리적으로도 정당성을 담보하게 된다. -271쪽

근대가 "시간과의 경쟁"이었다면 16세기부터 17세기를 거쳐 18세기까지 근세는 공간과의 경쟁이었다. 지리적 상상력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일본 난학자들은 같은 시기 청나라 때 출간된 ‘사고전서四庫全書’(1794)나 ‘황청경해皇淸經解’(1829)의 발간에 동원되었던 중국의 고증학자나 소중화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조선 사대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공간적 세계를 지향했다. 공간과의 경쟁에서 앞서 간 나라가 근대 민족국가의 형식과 내용을 만들면서 시간과의 경쟁에서도 앞질러 갔던 것이다. -272~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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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학의 세계사 - 중학적 세계를 넘어 일본이 유럽과 열대에서 접속하다
이종찬 지음 / 알마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열대 공간의 중요성을 인식해 이를 지배했던 사회와 그렇지 못했던 사회의 차이가 제국과 식민의 길을 갈라놓았다. 서구와 일본이 전자에 해당하고, 조선은 후자에 해당한다. 이 책은 일본이 중화적中華的 세계를 넘어서고자 열대 무역과 박물학을 통해 유럽 문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난학을 만들어갔는지를 탐구한다. -7쪽

어릴 때 왜구의 섬나라로 배웠던 일본이 어떻게 거대 강국인 미국이나 러시아와 전쟁을 치를 ‘마음’을 먹게 된 것인지, 또한 만주를 비롯하여 열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과 인도양으로까지 진출하려는 ‘지리적 상상력’을 갖게 된 것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려면 난학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봐야 한다. -9쪽

히라도 번주(마쓰우라 시게노부松浦鎭信)가 호안(아라시야마 호안嵐山甫安, 1633~1693)을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에 있던 네덜란드 외과의에게 보냈기 때문에 호안은 가까이에서 네덜란드 의술을 배울 수 있었다. 히라도 번주는 히라도에 네덜란드 배가 입항하게 된 이래 특별한 사정으로 네덜란드인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으며 이 시대에는 지금처럼 여러 가지 엄격한 규제가 없었을 것이다. (난학사시)-32쪽

가쓰라가와(가쓰라가와 호치쿠桂川甫筑, 1661~1747)는 본래 야마토大和(지금의 나라奈良) 사람으로 모리시마森島라는 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의술의 스승인 아라시야마 호안에서 비롯된) 아라시야마의 유파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가쓰라가와로 개명했다. (*지리적으로 가쓰라 강이 아라시야마 산을 통과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두 명칭의 상호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다.) (난학사시)-32쪽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카스파르 샴베르거(Caspar Schamberger, 1623~1706)는 거의 모든 유럽 국가를 휩쓸고 지나갔던 30년 전쟁(1618~1648) 때 외과술을 배웠다. 그는 1643년에 VOC(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소속되어 1644년에 당시 네덜란드 식민 통치의 중심지였던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를 거쳐 1649년 나가사키 데지마로 왔다.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1604~1651)가 쇼군으로 집권하던 시기에 VOC의 일본 무역을 관리했던 이노우에 마시시게(井上政重, 1585~1662)는 카스파르의 외과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노우에는 카스파르가 에도에서 시술하도록 허락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카스파르의 외과술이 인정을 받게 되었다. (난학사시)-33쪽

이 무렵부터 세상 사람들은 네덜란드에서 온 물건을 신기하게 여기고 배로 온 진귀한 물건들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호사가로 알려진 사람들은 많든 적든 물건을 수집하며 아끼고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사가라번相良藩(지금의 시즈오카靜岡) 번주(*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 1719~1788)를 말한다. 에도 막부 10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 밑에서 노중을 수행하며 화폐 개혁을 주도했다. 그가 막부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졌던 시기인 1767년부터 1786년까지를 ‘다누마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가 노중(老中, 에도 막부 때 쇼군 직속으로 정무를 담당하던 최고 책임자)이었던 때 온 세상이 화려해졌다. 그런 가운데 매년 네덜란드에서 기압계, 온도계, 레이덴 병(전하를 축적해 방전 실험을 하는 장치), 비중계, 암상暗箱 카메라, 환등기, 선글라스, 메가폰 등 여러 가지 물건이 수입되었다. 이 외에도 시계, 망원경, 유리 세공품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건이 들어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정교함에 놀랐고, 매년 봄 에도에 네덜란드 상인이 오면 (그들의 숙소인) 나가사키야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난학사시)-43쪽

어느 날 요시오(요시오 고자에몬吉雄幸左衛門, 1724~1800)는 진귀한 책 한 권을 보여주며 "작년에 처음 수입된 하이스터(Lorenz 또는 Laurens Heister, 1683~1758, 하이스터는 독일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난 후 레이덴Leiden에서 당대 최고의 의학자인 헤르만 부르하버를 비롯한 몇몇 의학자들에게 배웠다. 네덜란드 육군 군의총감을 지낸 후에는 독일로 돌아가 유럽 의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의 ‘치술治術, Chirurgjjen’(*‘Chirurgjjen’은 외과라는 의미다. 이 책은 유럽의 여러 언어로 변역될 정도로 크게 알려졌으며, 일본에서도 널리 사용되었고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1838년까지 교과서로 활용되었다.)이라는 책인데 내가 너무 갖고 싶어서 사카이堺(오사카에 있는 시로 무로마치室町 시대부터 에도 초기까지 외국 무역의 중심지였다.) 산 술 스무 동이를 주고 바꾼 것이다."라고 했다. (난학사시)-45쪽

이때까지 해부라는 것은 에타(穢多, 천민 신분에 속한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에 속한 사람들이 맡아왔으며, 여기는 폐이고 여기는 간이며 여기는 위라고 가르쳐주는 식이었다. 그래서 해부를 보러 간 사람들은 보기만 하고 돌아온 주제에 자신이 직접 내부를 보고 조사했다고 말하곤 했다. 장부臟腑에 이름이 각각 적혀 있는 것도 아니므로 해부하는 사람이 가리키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때까지의 방식이었다. (난학사시) -56쪽

이날 해부 대상이 된 시체는 50세 정도의 여자로 큰 죄를 지은 사람이었다. 교토 출신으로 별명은 아오차바바靑茶婆였다고 한다. (난학사시)-58쪽

(‘타펠 아나토미아(Ontleedkundige Tafelen)’ 번역을 갓 시작한) 이 무렵은 ‘de’나 ‘het’, ‘als’, ‘welke’ 등의 조사도 뭐가 뭔지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씩 외운 단어가 있더라도 전후 관계가 전혀 파악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눈썹이라는 것은 눈 위에 있는 털"이라는 한 구절을 보아도 이런저런 의미가 떠올라 긴 봄날 하루 종일 꼬박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해가 저물도록 생각하고 같이 머리를 짜내도 매우 짧은 길이의 문장 한 줄 해석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난학사시)-60쪽

또 어느 날에는 코 부분이 "verheven 되어 있는"이라는 부분에서 ‘verheven’이라는 단어를 몰라 아무리 노력해도 해석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무렵에는 사전이라는 것이 없었다. 료타쿠가 나가사키에서 구입한 간략한 소책자를 보면 ‘verheven’의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에 "나뭇가지를 자르고 남으면 그 흔적이 verheven이 된다. 또한 정원을 청소하면 먼지와 흙이 모여 verheven이 된다."라고 나와 있었다.
이것이 대체 어떤 의미인지 몰라 예문을 보고 의미를 끌어다 맞추려고 해보았으나 알기가 어려웠다. 그때 내 머릿속에 나뭇가지를 자른 흔적이 회복되면 그 부분이 높아지고 청소를 해서 먼지가 쌓이면 그 또한 높아진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코는 얼굴 중앙에 툭 튀어나와 있으므로 ‘verheven’는 높다는 뜻이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높음’이라고 번역하면 어떻겠느냐고 두 사람(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 나카가와 준안中川淳庵)에게 말하니 모두 듣고 지당하다고 해서 결국 ‘높음’이라고 번역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난학사시)-60~61쪽

예를 들어 교토에 갈 떄 도카이도東海道와 도산도東山道라는 두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두 길 중 어느 한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결국 교토에 도착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점이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번역에서도 이런 식으로 길을 가르쳐주면 된다고 생각하여 대략적인 내용만을 전달하여 했다. 이를 출발점으로 삼고 세상의 의사들을 위해 번역을 하기 시작했다. (난학사시)-72쪽

그럼에도 처음으로 네덜란드 서적을 번역해 출판하는 것(1774년의 ‘해체신서(解體新書)’)이니 쇼군의 은혜를 생각해 막부에도 책을 헌상하고 싶다고 했다. 다행히도 기쓰라가와 호슈 군의 아비지 호산 군이 나의 옛 친구였기 때문에 법안(*法眼, 가쓰라가와 호산을 말한다. 법인法印, 법안, 법교法橋는 본래 승려들의 칭호였으나 에도 막부에서는 의사, 화가에게 주어진 관직이었다.)에게 의논했더니 쇼군 댁의 규방을 거쳐 은밀하게 위로 헌상할수 있었다. 이렇게 아무런 문제없이 일이 순조롭게 끝난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한편 사촌인 요시무라 신세키吉村辰磧가 교토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추천으로 관백關白(천황을 보좌해 정무를 맡아보던 최고의 직책)인 구조九條 집안과 준후准后인 고노에 우치사키近衛內前 공(*1774년의 관백은 고노에 우치사키였으며 구조 나오자네九条尚実는 좌대신左大臣이어서 겐파쿠의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 히로하시廣橋집안에도 한 부씩 헌상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답례로 세 집안에서 경사스러운 옛 노래를 손수 적은 것을 받았고, 히가시노보조東坊城 집안에서는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읊은 것을 받았다. (다음)

(이어서) 당시 노중들에게도 한 부씩 헌상했는데 문제가 생긴 곳이 없어서 크게 안심했다. 이것이 네덜란드어 번역서가 최초로 출판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난학사시)-76쪽

또 난학에 뜻을 두고 있는 사람을 찾아 내 딸과 결혼시켜 양자로 삼고 학문에 정진하게 하여 나의 의도醫道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사람들을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구해주고 싶다고 밤낮으로 생각했다. 이때 마침 겐신(우다가와 겐신宇田川玄眞, 1770~1835)이 나타난 것에 기뻐하며 즉시 그를 집으로 불러 뜻을 물어본 결과 그의 대답은 겐타쿠(오쓰키 겐타쿠大槻玄澤, 1757~1827)기 말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에 나는 겐신을 양자로 삼고 부자의 연을 맺게 되었다.
(중략) 겐신은 이렇듯 학문에 열중했으나 아직 젊었기 때문에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리기 쉬웠고 혈기왕성한 시기였으므로 몸가짐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방탕해졌다. 내가 때때로 충고했음에도 점점 심해졌기 때문에 아까운 재능의 소유자라는 점은 알고 있었으나 방치하면 어떤 객기를 부릴지 모르는 상태였다. 번주의 명예를 더럽힐 수도 있을 것 같아 늙은 내 마음은 항상 불안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인연을 끊고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난학사시)-90~91쪽

해외 지역을 다니면서 나는 항상 지리학자 데릭 그레고리Derek Gregory의 ‘지리학적 상상력들Geographical Imaginations’(1994)을 염두에 두었다. 대서양을 바라보는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에 재직했던 그는 원래 ‘지리학적 상상력The Geographical Imagination’이라는 이름의 초고를 완성했다. 그런데 1989년 태평양을 바라보는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으로 직장을 옮기더니 자신이 대서양을 바라보면서 썼던 초고를 완전히 폐기하고 새로운 글을 썼다. 그리고 그것을 ‘지리학적 상상력들Geographical Imaginations’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103쪽

열대는 일본의 역사적 본질을 한국 독자들이 읽어낼 수 있는 생물지리적, 역사지리적 공간이다. ‘열대의 일본’에서 나는 독자들에게 이 열대를 모르고 일본을 이해하는 것이 결코 녹록하지 않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104쪽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고 1600년에 네덜란드 상선 리프데Liefde호가 일본에 표착하면서 일본은 네덜란드인들을 처음으로 대면했다. 이 상선의 항해장이었던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 1564~1620)가 도쿠가와 막부의 신뢰를 얻게 되면서 일본과 네덜란드의 무역이 시작되어 나가사키 북쪽의 히라도 섬에 무역항을 설치(1609)했다. 네덜란드와의 무역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자 막부는 봉건 질서에 위협 요인이 되는 예수회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1614년부터 1636년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에 걸쳐 가톨릭의 포교를 강력하게 규제하는 조치가 실시되어 결국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온 선교사들은 거의 모두 축출되었으며 무역을 위해 남게 된 이베리아 반도의 사람들도 1636년에 데지마라는 인공 섬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109~111쪽

네덜란드의 동남아시아Southeast Asia 식민 본부가 있던 바타비아에서 출항한 부역선이 몬순 바람을 타고 매년 7~8월에 데지마에 입항했으며 11월 말부터 12월 초 사이에 일본의 상품을 가득 싣고 데지마를 떠났다. -112쪽

두 가지 역사적 힘이 난학의 태동과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네덜란드가 동인도회사VOC를 통해 1619년부터 바타비아를 중심으로 열대 동남아시이에 대한 식민 지배를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VOC는 바타비아를 동남아시아의 몬순 경제와 유럽 시장을 연결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삼아 아시아 무역의 주요 도시에 상관들을 설치하면서 영항력을 확대해나갔다. VOC가 상관을 설치한 도시들은 데지마를 포함하여 인도 남서부 해안 지역인 말라바르Malabar(후추)-보들레르의 ‘악의 꽃Les Fleurs du mal’에 포함된 시 ‘말라바르 여인에게A Une Malabaraise’에 등장하는 그 지역이다-와 인도 동부 해안 지역인 코로만델Coromandel(직물), 세일론(계피), 시암(주석), 말라카(주석), 팔렘방Palembang(후추 및 주석), 반탐Bantam(후추), 반다Banda sea(육두구), 암보이나Amboina(정향), 호이안(견사), 그리고 미얀마, 중국, 대만의 도시에 이르기까지 모두 50개 지역에 해당한다. (이어서)

(다음) 다른 하나는 16세기와 17세기에 일본이 막대한 은을 토대로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베트남, 시암, 캄보디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열대 동남아시아에서 활발한 무역 활동을 전개했디는 점이다. 1592년부터 주인선朱印船 제도(*도쿠가와 막부에서 해외 무역을 허가하는 주인장朱印狀을 발부받고, 해외의 상대 국가에서도 무역을 허락받은 무역선을 의미한다.)를 실시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고 난 후인 1601년부터 1635년까지 355척의 일본 선박들이 동남아시아에서 무역 활동을 했다. 이 두 가지가 역사적 힘이 교차하면서 VOC와 도쿠가와 막부는 서로의 무역적 가치를 활용하기 위해 1609년 히라도에 상관을 설치하는 데 합의했다. 상관은 1641년에 데지마로 옮겨졌고 200여년 간 운영되다가 1854년에 문을 닫았다. -112~114쪽

39세에 인도 식민 총독이 되었던 조지 너대니얼 커즌( George Nathaniel Curzon, 1859~1925)에 의하면 청일전쟁은 1590년대 조선에서 있었던 두 차례 전쟁의 "역사적 산물"이다. "일본은 당시 조선에서 중국에게 당한 수모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3세기 동안 일본인들의 중국에 대한 복수심은 일종의 고착된 관념으로 뿌리내려왔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커즌과 같은 당시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이 청일전쟁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18~119쪽

근대 일본의 제국적 욕망에 의해 창안된 이른바 ‘대동아大東亞’는 난학자들이 구상했던 지리적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에 근거해 만들어진 영토적 공간이다. -120쪽

예수회Societas Iesu 또는 The Society of Jesus(1534년 설립)는 일본과 포르투갈 및 스페인, 인도 및 동남아시아 지역 사이의 문화접변을 가속화시키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127쪽

무슨 지도이건 간에 지도는 사상성, 예술성, 과학성, 실용성의 네 가지 차원에서 독해하게 된다. -134쪽

1601년에 베트남과 필리핀 정부에 무역 허락을 받은 도쿠가와 막부는 1603년에 캄보디아, 1606년에는 시암과 말라카와도 무역을 추진했다. 주인선 무역이 이루어지는 항구 도시에는 일본인 거주지나 정착촌이 생겨났다. <주인선 무역 지도>에 나와 있듯이 막부는 동남아시아의 주요 무역 항구들에 대해 주인선 무역을 추진했다.
주인선이 주로 무역 활동을 했던 도시로는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말라카, 동남아시아 향신료의 주요 산출지였던 말루쿠 제도의 테르나테Ternate와 암보이나, 동남아시아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던 시암의 수도 아유타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수도였던 바타비아,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던 필리핀의 마닐라, 포르투갈이 지배하고 있던 마카오, 안남의 통킹Tonkin, 참파Champa 왕국의 호이안 및 후에, 캄보디아의 프놈펜Pnompenh 등이 포함되었다. -139~140쪽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주인선 제도를 통해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왜구들이 네덜란드의 용병이 되어 영국과의 전쟁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144쪽

강조해야 할 것은 VOC(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일본의 은에 주목하기 이전부터 일본이 생산했던 은은 해상 실크로드의 허브인 말라카에서 무역 통화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17세기에 일본보다도 더 많은 은을 생산했던 멕시코 포토시Potosi와 마닐라를 연결하는 은 유통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스페인과 80년 전쟁(1568~1648)을 치르던 네덜란드에게 일본산 은 확보는 절박한 국가 과제였다. VOC가 이 시장에 개입해 일본산 은을 유럽으로 수입하면서 일본은 전 지구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주요한 행위자로 참여했다. 사쓰마번薩摩藩에서 주로 산출되었던 장뇌樟腦도 네덜란드로 가는 주요 수출품이었다. -146쪽

예를 들어 유럽에서 작은 나라에 머물렀던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Leopold 2세(1835~1909)가 벨기에보다 수십 배나 큰 땅덩어리인 열대 아프리카 콩고-현재의 콩고민주공화국을 말한다-를 지배하려는 제국적 욕망을 가지게 된 것도 네덜란드의 동인도 제도에 대한 식민 지배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147~148쪽

자바의 커피 가격을 결정하는 문제는 동인도제도의 통치자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서인도제도에서 산출되는 커피는 물론이거니와 전 세계 커피 가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네덜란드 본국과의 협상을 통해서만 자바의 커피 가격을 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0쪽

이처럼 (인도네시아를 식민 지배했던 네덜란드의) <커피 경작 보고서>는 다른 사회를 식민지로 만든다는 것이 인류의 동서고금에 대한 광범위하고도 상세한 지식에 근거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야말로 비밀리에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150쪽

다시 말해, 16세기 이후 일본은 유럽의 힘에 눌려 일방적으로 문호를 연 것이 아니라 열대 동남아시아에서의 무역 활동을 통해 유럽의 문물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며 문화접변을 실현해나갔다. 이런 점에서 페리를 통해 미국이 일본의 문호를 "강제로 열었다."라거나 막부 시대 내내 "쇄국" 정책을 실시했다는 역사적 기술은 네덜란드로 상징되는 유럽-열대 동남아시아-동아시아-데지마로 이루어진 문화접변을 통해 근대적 일본이 형성된 과정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일본은 데지마를 통해 조심스럽고도 주의 깊은 관찰력으로 열대 동남아시아 및 유럽과의 문화접변을 깊고도 넓게 실행했다. -151~152쪽

이처럼 데지마를 통해 일본을 만났던 유럽 박물학자와 의학자는 유럽의 박물학과 의학을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박물학과 의술을 유럽에도 전하는 문화 중개자 역학을 맡았다. 데지마는 단순히 도쿠가와 막부가 유럽 문물을 수용하는 수동적인 무역항이 아니었다. 유럽-열대-일본 사이의 문화접변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160~161쪽

도쿠가와 막부 8대 쇼군이었던 요시무네(德川吉宗, 1684~1745)가 집권했을 때(1716~1745) 일본 인구는 이미 1800만 명에 달해 있었다. 당시 영국 인구가 고작 450만 명, 스페인이 800만 명, 프랑스가 1400만 명이었음을 볼 때 일본의 인구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 1720년경 도쿄는 100만 명, 오사카는 38만 2000명, 교토는 34만 1000명, 나가사키는 4만 2000명이었다. 인구에 관한 한 도쿄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이 점이 18세기 일본을 이해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165쪽

도시화로 인한 인구 증가를 관리하기 위해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교호享保 개혁’을 추진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요시무네는 농업 분야의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게이초 시대에는 전국의 경작지가 150만 정보町步에 쌀 생산량이 1800만 석이었으나 교호 시대(1716~1735)에는 300만 정보에 300만 석으로 약 두 배나 증가했다. 요시무네는 기존의 중화적 세계관으로는 인구 증가에 따른 경제적 현실을 해결하기 미흡하다고 판단해 유럽의 실용적 지식에서 대안을 찾으려 했다. -166쪽

알게 모르게 에도와 나가사키는 난학의 우위를 두고 서로 경쟁했다. 소우주로서의 몸에 천착했던 (스기타) 겐파쿠는 에도의 난학을, 대우주로서의 천체와 지구에 조예가 깊었던 모토키 료에이(本木良永, 1735~1794)는 나가사키의 난학을 주도했다. -171쪽

이런 상황에서 나가사키의 통사였던 시즈키 다다오志筑忠雄는 러시아와의 무역을 반대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쇄국鎖國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1801년에 (엥겔베르트) 캠페르의 ‘일본지’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용어를 창안했던 것이다. 다다오는 캠페르의 네덜란드어 서적을 번역하면서 "일본이 지금처럼 나리를 닫고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외국 사람들과 통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실로 이익인가 아닌가."라는 문장이 너무 길다고 생각하여 "나리를 닫다."라는 어구를 "쇄국"이라 표현했다. 하지만 캠페르의 독일이 원저에는 "일본에서는 자국민의 출국과 외국인의 입국을 금한다."라는 표현만 있을 뿐 "나라를 닫다"라는 구절은 없었다. 다다오는 북방 지역인 에조치와 사할린의 주민들과 무역을 유지함으로써 러시아의 위협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쇄국론은 근세 일본의 역사를 인식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왔다. 기존의 쇄국론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일본 전파를 차단하고 경제적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번藩이 주도했던 무역을 막부가 독점하며 일본인들의 해외 도항을 금지한 것으로 알려져왔다. (다음)

(이어서) 근세 일본의 역사를 연구하는 토비Ronald P. Toby는 이런 쇄국론을 30년간 비판해왔는데 그의 주장은 나의 논지와 딱 들어맞는다. 단적으로 말하면 처음부터 쇄국은 없었다. 1500년에 1600만 명이었던 일본 인구는 1750년에 2600만~3200만 명이 될 정도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인구사의 관점에서 볼 때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쇄국을 한 상태에서 인구가 크게 증가한 나라는 없다. 1630년대 막부가 취했던 일련의 ‘쇄국령’은 오히려 1716년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전 해금海禁 정책(*하해통번지금下海通蕃之禁의 약자로 명나라의 왜구 대책 중 해외 도항 무역을 금지한 정책)에 가깝다. 다다오가 러시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 만들었던 용어는 1850년이 되어서야 막부의 공식적인 문헌에 포함되었을 정도로 쇄국은 도쿠가와 막부의 공식적인 해외 정책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17~18세기에 일본은 중국 및 조선과 무역 관계를 꾸준히 증가시켜나갔다. 유럽이 중국 및 일본과의 무역에 박차를 가하기는 했지만 유럽이 차지했던 무역의 비중은 동아시아 권역 내부의 그것에 비하면 부수적이고 부차적이었다. -182쪽

시바 고칸(司馬江漢, 1747~1818)도 ‘춘파루필기春波樓筆記’(1811)에서 러시아와의 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면서 일본의 쌀이 풍부하고 가격이 싸기 때문에 러시아로 수출해 일본 농민의 경제적 위상을 향상시키고 막부의 재정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2~193쪽

특히 오쓰키 겐타쿠, 시바 고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혼다 도시아키本多利明,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 등 지리적 상상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난학자들의 지적 작업에 근거해 근대 일본이 열대 남태평양을 아우르는 상상의 공동체 ‘대동아大東亞’를 설정했다는 점에서, 난학은 근대 일본의 군사적 이념을 구성하는 데 핵심적인 위상을 가진다. 결국 일본에서 난학이 태동하고 발달하게 된 역사적 과정을 일본과 네덜란드의 직접 교류라는 좁은 틀이 아니라 유럽-네덜란드-열대 동남아시아-동아시아 및 러시아-일본을 연결하는 전 지구적 네트워크global network로 바라볼 때 난학의 세계사적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196~197쪽

하지만 16세기에 활동했던 가노파狩野派 화가들은 당시의 종교, 문화 중심지였던 교토를 본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남만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 시기 교토에는 약 2,000여 개의 사찰과 신사가 운집해 있어 남만 문화가 확산될 수 없었다. 216쪽

이렇게 볼 때 "메이지 이념이 난학자들에게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의학을 매개로 해서가 아니라 의학 그 자체가 중앙집권적이고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240쪽

지식의 사회화와 관련하여 출판이 차지하는 위상은 조선 실학과 일본 난학의 갈림길에서 매우 막중했다. 18세기 한양의 출판 상황은 같은 시기 오사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네덜란드 학문을 받아들였던 나가사키에 비해서도 매우 열악해 조선 실학자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사회적으로 표출할 수 없었다. 실학자는 아니지만 저명한 서적 수장가였던 유희춘(1513~1577)은 선물로 책을 받거나 빌리거나 중국 사신에게 부탁하여 책을 구입하는 등 순전히 개인적인 수단에 의존하여 책을 수집하고 볼 수 있었다. 지방의 소장 사림 세력이 책을 확보하기 위해 서점의 설립을 주장하긴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백성들에게 책을 보급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이념을 보급하기 위해서였다. 출판의 시장 경제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양에서는 실학의 꽃이 필 수 없었다. 이처럼 조선 실학자들의 지적 노력은 지식의 사회화로 나아가지 못했다. -255쪽

(조선과) 반대로 일본의 경우 번역과 출판에 힘입어 교양 독자층이 형성되었다. 조선 실학자들이 귀양을 가서 쓴 책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았던 책도 확산은커녕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반면 일본 난학자가 쓴 책 중 막부의 허락을 받아 출간된 책들은 일본 사회에 널리 확산되었다. 바로 공적인 공간인 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1810년대에 이미 에도에 600여 개, 오사카에는 300여 개의 사립 도서관이 있었으며 농촌을 다니며 책을 빌려주는 이동도서관을 설립하려는 서점들도 늘어났다. 조선의 경우 한양에 필적하는 도시 공간이 다른 지역에는 거의 발달하지 않았던 데 반해 일본의 경우 나가사키에서 오사카, 교토, 에도를 연결하는 난학의 공간적 네트워크가 발달했다는 것도 중요한 차이점이다. -256쪽

덴쇼天正소년사절단이 열대 풍토와 질병을 이겨내면서 동남아시아, 인도양, 아프리카, 대서양을 몸소 체험했고, 도쿠가와 막부가 주인선 무역 제도를 통해 열대 동남아시아에 일본인 정착촌을 형성했으며, 바타비아에 본부를 둔 VOC와 데지마에서 문화접변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난학자들은 열대의 ‘물物’을 실증적으로 탐구했다. 조선 실학자들이 연경(현재 북경)을 통해 배우려던 유럽 지리학은 구체적인 ‘물’이 사상捨象되어버린, 다시 말해 시각적 근대와는 동떨어진 관념적인 지도에 불과했다. -257~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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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卍).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7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춘미.이호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과연 거장이다. 장면들을 표현해서 작품을 구축하는 내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시선과 필치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이토록 확고한 작가여서, 시대를 가로지르고서도 하나같이 번잡한 이야기를 써 냈다. 그는 마치 어느 작가라도 호흡을 놓치지 않고 모든 순간을 치밀하게 그려낼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작정하고 스스로를 몰아넣은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애욕과 번민이 들끓어서 작품 밖의 독자까지 휘둘리는 와중에도 오직 작가 본인만 그 세계에 현혹되지 않는다. 다만 누가 자신의 욕망에 어떻게 휘둘리는지, 그들은 어떤 장소에서 어떤 방식이나 수단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지 집요하게 그려낼 뿐이다. 이런 인물, 배경, 사건을 벌여놓고도 용케 그 아수라장에 휘말리지 않는 균형감은 펜을 놓치지 않은 그의 손목에서 비롯됐을까, 아니면 글 위에서 휘청대지 않은 그의 발목에서 나왔을까. 듣는 사람을 모두 웃기고서도 혼자 무표정을 지키는 개그맨을 떠올린다면 너무 경박한 노릇이겠지만, 다니자키가 누구보다 현란한 이야기를 창조하고서도 그 세계에 도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어쩌면 그 홀로 말이다.

 

(518. 소노코가 미쓰코에게. 봉투 길이 12센티미터, 7.2센티미터 정도. 그림은 가로로 그려져 있다. 사슴 등에 있는 흰 얼룩처럼 진홍색 바탕에 드문드문 은색 점선이 있고, 아래쪽에는 커다란 벚꽃 잎 세 장의 끄트머리가 보인다. 그 위에는 연회석에서 춤추는 무희의 뒷모습을 절반만 그려놓았다. 빨강, 보라, 검정, 은색, 청색의 다섯 가지 색을 아주 짙게 인쇄해서, 그 위에 글씨를 쓰면 알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름은 뒷면에 쓰여 있다. 편지지는 길이 21센티미터, 13.5센티미터 크기에 2.4센티미터 정도의 하얀 백합꽃이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백합꽃 주변은 연분홍색으로 선염이 되어 있다. 따라서 줄이 그어진 부분은 지면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에 4호 활자보다 더 작고 가느다란 글씨로 쓰여 있다.) (())-p.42

 

 「()의 이야기를 여기서 줄일 재주는 없지만, 그게 애초에 가능한 일일지도 의심스럽다. 멀리서 보았다면 그저 빤한 치정극(癡情劇)이었을 텐데, 이렇게나 샅샅이 보았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 어지럽고 어리석게 뒤엉켜서 더러워 보이는 욕정들을 어떻게든 섬세하게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그 가닥들은 낱낱이 탄력과 광채를 발한다. 다니자키는 비단 여느 이야기에서는 보기 어려운, 그러면서도 충분히 있을 법한 그악스러운 욕망과 파탄을 그려냈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만 드러나는 인간과 감각의 결을 기어이 찾아내고 보여 줬다는 점에서 대가라는 칭호가 너무도 잘 어울렸다. 무감(無感)해 보이는 남편과 사는 가키우치 소노코가 미혼의 미녀인 도쿠미츠 미쓰코와 정서·육체적으로 깊이 친밀해지면서 주고받았던 서신들의 외양을 묘사하는 대목은 특히 경이로웠다. 사뭇 차분한 어조로 그려내는 그 봉투와 편지지들의 요염한 자태가 그 당시 두 사람이 서로에게 품었던 감정 그 자체인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저 아름다운 서한을 받았을 때의 감정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이미 들렸다. 다니자키도 그 참에 편지지 무늬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소개하려 한다. 편지지 무늬가 때로는 편지 내용보다 두 사람의 사랑의 배경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p.38)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역시 한 발은 슬쩍 빼는 소리다. 영악한 수법이라고 말하기는 누구나 쉬워도 꼭 저 위치에, 저렇듯 유려하게 묘사할 사람은 너무도 희귀하다. 무엇보다 마치 눈앞에 놓인 저 편지 하나가 아름다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달뜬 호흡은 오직 그만의 것이다. 못내 징그러워도 할 수 없는.

 

야마토 이야기에도 우다 상황께서 헤이주를 불러 어전에 국화를 심었으면 하는데, 좋은 국화 하나를 바치도록 하라˝는 분부를 내렸다고 나와 있다. 우다 상황은 헤이주가 그 지령을 받고서 황감하게 여기며 막 물러나려는 것을 다시 불러 ˝헌상하는 국화에다 노래 하나를 첨해서 들이라. 그러지 않으면 안 받으리로다라고 말하되 헤이주는 더한층 황송해 마지않으며 물러가서, 자기 집 마당에 가득 피어 있던 국화들 가운데서도 가장 멋진 것으로 몇 개를 골라 거기다가 노래 한 수를 붙여 바쳤다. 고킨슈5권의 가을 노래 가운데 닌나 사(仁和寺)에 국회를 바칠 때 노래를 달아 바치라는 어명을 받들어 만들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국화꽃에는 가을 말고도 한창때가 또 있군요

이렇게 색이 변하면서 한층 더 아름다워지니*

*상황이 닌나 사로 옮긴 후 더 번창한다는 의미이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p.202~203

 

 메이지 유신 이후 오사카의 상류층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그린 ()과 달리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먼 옛날 헤이안 시대의 교토 귀족 사회가 배경이다. ()이 인물들 주변의 소재와 장소를 치밀하게 묘사하며 인물과 그들 사이의 감정을 확장한다면, 이 작품은 그 시대의 각종 고문헌들을 풍부하게 인용하며 서사와 교차시킴으로써 작품의 고유한 문양을 직조한다. 이 작품 속의 다이라노 사다부미(平貞文, 헤이주(平中)), 후지와라노 구니츠네(藤原国経) 대납언(大納言), 후지와라노 토키히라(藤原時平, 시헤이(時平)) 좌대신(左大臣), 후지와라노 시게모토(藤原滋幹) 좌근위소장(左近衛少将) 등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일본 고전 문학 속에서 이 작품으로 걸어 나온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먼 과거의, 그것도 소설 속 인물들에게 사실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연기처럼 흐릿하고 희미해지기 쉬운 존재들에게 명확한 윤곽 정도를 부여할 뿐이다. 매끄럽게 짜인 비단 위의 무늬가 아무리 또렷해서 하나하나의 결이 선연히 만져지더라도 섬유의 표면에 굳게 붙들려서 벗어나지 못한다. 애초에 구체적일 수 없는 방식으로 구현된 세계인 셈이다. 그럼에도 바탕과 무늬가 함께 빛나면 이렇게 아름답다.

 

문득 그 건너편을 보니 시냇물가의 깎아지른 언덕 위에 커다란 벚나무 한 그루가 주위로 막 내리는 저녁 그늘을 와락 튕겨내듯이 찬란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보는 이 하나 없이 피고 지는 싶은 산중의라고 읊은 쓰라유키의 옛 노래는 가을 단풍을 읊은 것이었지만 그런 때 그런 골짜기에, 누구 하나도 모르게 봄을 자랑하며 피어 있는 벚꽃 또한 밤의 비단인 것은 틀림없었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p.320~321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예술은 형식이다. 형식, 기교, 문체에 의해 미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해설)-p.342

 

 아내보다 늙어 버린 자신의 열등감을 분별없이 해소하려다 도리어 괴멸된 대납언, 타인의 아내를 그악하며 얄팍하게 빼앗고서도 사뭇 교묘하고 능란하게 수작을 부렸다며 자만하기까지 하는 좌대신, 무절제한 욕정과 여성 편력으로 과거의 상대였던 대납언의 아내를 좌대신이 빼앗도록 결정적인 빌미를 바치고서도 아내 쪽은 남편의 눈을 속이고, 남편 쪽은 아내의 눈을 속여서 조금 무리하게 아슬아슬한 위험 지대를 건너서 아무도 모르게 살짝 한두 번 만나는 것이야말로 연애의 진미였다. (중략) 높은 지위나 권세를 이용해 남의 여편네를 강탈하는 식의 폭거는 너무나 야만적인 이야기”(p.249)라면서 마치 남의 일처럼 분노하며 변명하는 헤이주, 아내를 위한다는 망상에 빠졌던 남편인 아버지 탓에 어이없이 어머니를 잃었다는 사실에만 하염없이 몰입하며 자기 연민에서 차마 벗어나지 못하는 시게모토 소장까지 이 작품의 인물들이 저지른 소행부터 당하는 감정까지 그 어디서도 새로운 구석은 찾아내기가 어렵다. 너무도 흔한 남자들의 저마다 아픈 사연이다. 다만 그것들을 가닥가닥 자아내고 서로 엮어서 그 위에는 무늬를 넣고 하나로 펼친 사람이 다니자키였다. 모든 것은 그의 수완 아래서 휘황했다.

 

다이마루 백화점 앞까지 가지 않고 다자에몬바시 거리 남쪽으로 꺾은 지점에서 여기가 가사야마치인데 어디에 댈까요?”라고 운전수가 말하기에, “이 부근에 이즈쓰라는 요릿집이 있나요?” 하고 물었지만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그 부근 사람한테 물어봤더니 거긴 요릿집이 아니라 여관입니다하기에 어디지요?” 하고 물었더니 바로 앞의 골목 안쪽입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런데 그게 말이죠. 소에몬초(쇼와 시대(1926~1989) 초기까지 오사카에서 최고급 화류계 거리였던 곳)랑 신사이바시 바로 뒤인데도 사람 왕래가 적은 어두운 골목이더라고요. 기생들 집이라든가 작은 요릿집이라든가 여관이 많았는데 모두 일반 주택처럼 조용하고 입구가 좁은 수수한 구조였고요. 가르쳐준 골목에 가보니까 여관 이즈쓰라고 작게 써놓은 등이 달려 있어서, “오우메, 여기서 기다려하고는 저만 들어갔어요. 여관이라고는 하지만 애매하고 수상쩍은 집이 골목 막다른 곳에 있는 것이라 격자문을 열고도 잠시 머뭇거렸어요. (())-p.62

 

 다니자키의 이야기로 접어드는 경로는 분명 어두웠다. 음울하지는 않아도 음습하다고는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희미하고 협소하다.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무엇도 없는 골목길을 따라 한참 걸어 들어가야만 숨김없는 속내를 매끄럽게 풀어내는 공간에 이른다. 그곳에 맘에 드는 인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을지 모르지만, 어느 이야기라도 하찮지는 않을 것이다. 깊고 그늘진 길 끝에서 아무것도 아닌 듯이 시침을 뚝 따고 앉은 그의 세계인 까닭이다. 기껏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이럴 줄 몰랐다며 도로 나갈 사람을 처음부터 꺼리는 방법으로는 이만한 장치가 드물다. 물론 내키지 않는데도 기어이 들어왔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다며 뛰쳐나가거나, 이제는 도무지 나갈 수 없다고 진상을 부리더라도 둘 다 다니자키의 탓은 아니다. 일단 그 입구를 알아채고, 열어서, 들어온다면 좀처럼 빠져나가기 어려운 욕망들을 만난다. 축축하고 그늘진 자리에서만 보드랍고 반짝이는 이끼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좁고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이 세계를 외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골목들이 깊을수록, 들어갈수록 재미있다는 사실은 이미 교토에서 충분히 배웠다. 이왕이면 짙은 밤에 들어가야 더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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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卍).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7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춘미.이호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선생님은 이미 아시겠지만 제가 무의식중에 모델로 삼은 사람이-어차피 신문에도 났으니까요-도쿠미쓰 미쓰코 씨에요. (가키우치 미망인은 그렇게 엄청난 일을 겪은 뒤에도 별로 초췌해지지 않았고 옷도 태도도 일 년 전과 똑같이 화려하고 현란했다. 미망인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간사이 지방의 좋은 집안 아가씨처럼 보였다. 그녀는 결코 미인은 아니지만 ‘도쿠미쓰 미쓰코’라는 이름을 부를 때 얼굴에서 이상하게 광채가 났다.) (만(卍))-14쪽

(사진을 보니 똑같이 맞춘 옷이라는 게 과연 간사이 지방 여자들이 좋아하는 천박한 색채다. 가키우치 미망인은 머리를 모아 묶은 서양식 헤어스타일, 미쓰코는 시마다 머리(앞뒤를 조금 볼록하게 만들어 위로 틀어 올린 일본의 전통적인 머리 형태로 주로 미혼 여성이 했음)를 했는데, 오사카풍 아가씨 모습이긴 해도 그 눈은 무척 정열적이고 정감이 넘쳤다. 한마디로 연애의 천재라고 해도 좋을, 기개 넘치는 매력적인 눈매였다. 분명 미인이 틀림없고, 자기는 미쓰코를 돋보이게 할 뿐이라는 미망인의 말도 겸손만은 아니었지만 그 얼굴이 과연 (가키우치 미망인이 학교에서 그리던) 양류관음보살의 존안에 부합될지는 의문이었다.) (만(卍))-18~19쪽

그쪽에서는 저(가키우치 소노코)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이 그대로 쓱 지나쳤지만, 저는 미쓰코 씨가 지나간 뒤의 공기까지 깨끗하다고 느꼈어요. (만(卍))-19~20쪽

(가키우치 미망인이 극히 일부라고 한 그 편지들은 사방 24센티미터 정도 크기의 실크 보자기에 터질 만큼 잔뜩 들어 있었다. 보자기 끝을 간신히 묶어놓은 작고 단단한 매듭을 푸느라 그녀의 손가락 끝이 벌게졌다. 그 모습은 마치 매듭을 꼬집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편지가 쏟아져 나오자 온갖 종류의 색종이가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편지들이 한결같이 요염한 극채색 무늬가 그려진 봉투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봉투는 부인용 편지지를 네 번 접어야 겨우 넣을 수 있을 만큼 작았고 겉면에는 네다섯 가지 색으로 다케히사 유메지(다이쇼 시대의 화가이자 시인으로 나른하면서도 애수에 잠긴 듯한, 독특한 매력을 가진 미인화로 유명)풍의 미인화, 달맞이꽃, 은방울꽃, 튤립 등이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놀랐다. 아마 도쿄 여자들은 이렇게 야한 봉투에 대한 취미는 결코 없을 것이다. 비록 러브레터라 하더라도 도쿄 여자들은 좀 더 단순한 무늬를 선호한다. 그녀들한테 이런 걸 보이면 악취미라고 하면서 경멸할 게 뻔하다. 도쿄 남자 역시 애인한테서 이런 봉투의 러브레터를 받으면 하루아침에 정나미가 떨어질 것이다. (다음)

(이어서) 아무튼 그 자극적이고 야한 악취미는 과연 오사카 여자다웠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하는 두 여자가 주고받은 편지라는 사실을 생각하니 한층 더 악취미로 여겨졌다. 그 편지 가운데서 이야기의 진상을 아는 데 참고가 될 만한 몇 통만 인용하겠다. 그 참에 편지지 무늬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소개하려 한다. 편지지 무늬가 때로는 편지 내용보다 두 사람의 사랑의 배경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만(卍))-37~38쪽

(5월 6일, 가키우치 부인 소노코가 미쓰코에게. 봉투 길이 12센티미터, 폭 6.3센티미터, 핑크색 바탕에 체리와 하트 무늬가 있다. 체리는 모두 다섯 개, 까만 줄기에 새빨간 열매가 달려 있다. 하트는 열 개 인데 두 개씩 겹쳐 있다. 위쪽 하트는 연보라색, 아래는 금색. 봉투 위와 아래에 금빛 톱니무늬가 있다. 편지지는 극히 흐린 연녹색 바탕에 담쟁이덩굴 무늬가 인쇄되어 있고 은색 점선이 그어져 있다. 소노코 부인의 펜글씨는 여성들이 부드럽게 흘려 쓰는 간략체를 썼는데 능란한 것으로 보아 꽤 습자 연습을 한 게 틀림없고 여학교에서는 나름대로 글씨를 잘 쓰는 편이었을 것이다. 오노 가도(다이쇼,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서예가)의 서풍에서 좀 더 흐물흐물한 느낌의, 좋게 말하면 유려하고 나쁘게 말하면 뺀들뺀들한 글씨체로, 신기할 만큼 봉투의 그림과 딱 어울린다.) (만(卍))-38쪽

(5월 11일, 미쓰코가 소노코에게. 봉투 길이 13.5센티미터, 폭 7.8센티미터. 핑크색 바탕 중앙에 폭 3.4센티미터 정도 넓이의 바둑무늬가 있고, 그 가운데에 네 잎 클로버가 흩어져 있다. 아래쪽에는 트럼프 모양이 두 장, 하트의 1과 스페이드의 6이 겹쳐 있다. 바둑무늬의 클로버는 은색, 하트는 빨간색, 스페이드는 까만색, 편지지는 짙은 갈색의 무지無地이고, 오른쪽 끝부터 비스듬하게 하얀 잉크로 펜글씨가 쓰여 있다. 필적은 소노코보다 서투르고 차분하지 못해 갈겨 쓴 것처럼 보이지만 이쪽 편이 글씨도 크고 꾸민 티가 없어서 생생하고 자유분방한 느낌을 준다.) (만(卍))-40쪽

(5월 18일. 소노코가 미쓰코에게. 봉투 길이 12센티미터, 폭 7.2센티미터 정도. 그림은 가로로 그려져 있다. 사슴 등에 있는 흰 얼룩처럼 진홍색 바탕에 드문드문 은색 점선이 있고, 아래쪽에는 커다란 벚꽃 잎 세 장의 끄트머리가 보인다. 그 위에는 연회석에서 춤추는 무희의 뒷모습을 절반만 그려놓았다. 빨강, 보라, 검정, 은색, 청색의 다섯 가지 색을 아주 짙게 인쇄해서, 그 위에 글씨를 쓰면 알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름은 뒷면에 쓰여 있다. 편지지는 길이 21센티미터, 폭 13.5센티미터 크기에 2.4센티미터 정도의 하얀 백합꽃이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백합꽃 주변은 연분홍색으로 선염이 되어 있다. 따라서 줄이 그어진 부분은 지면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에 4호 활자보다 더 작고 가느다란 글씨로 쓰여 있다.) (만(卍))-42쪽

남편은 제 성격에 맞추려고 노력한다지만 그게 정말로 마음을 맞추려는 게 아니고 저를 어린애 취급 하면서 적당히 어르는 것 같아 그 태도에도 약이 올라 죽겠더라고요. (만(卍))-44쪽

"정말 우리 아가씨는 무서운 분이에요. 저는 사모님 뵐 때마다 늘 너무 죄송하고 딱해서......" (만(卍))-60쪽

다이마루 백화점 앞까지 가지 않고 다자에몬바시 거리 남쪽으로 꺾은 지점에서 "여기가 가사야마치인데 어디에 댈까요?"라고 운전수가 말하기에, "이 부근에 이즈쓰라는 요릿집이 있나요?" 하고 물었지만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그 부근 사람한테 물어봤더니 "거긴 요릿집이 아니라 여관입니다" 하기에 "어디지요?" 하고 물었더니 "바로 앞의 골목 안쪽입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런데 그게 말이죠. 소에몬초(쇼와 시대(1926~1989) 초기까지 오사카에서 최고급 화류계 거리였던 곳)랑 신사이바시 바로 뒤인데도 사람 왕래가 적은 어두운 골목이더라고요. 기생들 집이라든가 작은 요릿집이라든가 여관이 많았는데 모두 일반 주택처럼 조용하고 입구가 좁은 수수한 구조였고요. 가르쳐준 골목에 가보니까 ‘여관 이즈쓰’라고 작게 써놓은 등이 달려 있어서, "오우메, 여기서 기다려" 하고는 저만 들어갔어요. 여관이라고는 하지만 애매하고 수상쩍은 집이 골목 막다른 곳에 있는 것이라 격자문을 열고도 잠시 머뭇거렸어요. (만(卍))-62쪽

미쓰코 씨 집은 아시야가와 역에서 강 서편을 좀 더 산 쪽으로 올라간 곳으로, 근처에 시오미자쿠라(汐見櫻)라고 하는 유명한 벚나무가 있어요. (만(卍))-69쪽

그 전화가 온 게 두시경이었는데 그러고 나서 삼십 분이 지났을 무렵 벌써 미쓰코 씨가 왔더라고요. 아무리 병원에서 재촉해도 외출하려면 늘 한두 시간은 몸치장을 하는 사람이니까 저는 빨라도 저녁때가 아니면 밤에 오겠지 하고, 설마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대문 벨소리 다음에 현관 콘크리트 바닥을 밟는 신발 소리가 나면서...... 현관부터 안쪽은 전부 열어뒀었거든요. 바깥에서 휙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그리운 냄새가 복도를 따라 들어왔어요. (만(卍))-77쪽

"어디 갈까?" "미쓰 씨, 어디 좋은 곳 몰라? 조용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어." "그럼 나라에 가요." 미쓰코 씨가 말해서 "맞아, 그래, 그래. 둘이 처음 사이좋게 놀러 간 곳도 나라였지. 추억 많은 와카쿠사 산의 저녁 경치...... 왜 지금까지 그 추억의 장소를 잊고 있었을까?" "진짜 좋은 곳을 생각해냈지? 우리 또 와카쿠사 산에 올라가자"라고 했을 때는 정말 얼마나 기뻤던지...... 감격했을 때의 제 버릇으로 눈물을 글썽이면서 "빨리 가자, 빨리" 하고 서둘러 오사카 택시회사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택시에 탈 때까지, 발이 땅에 닿아 있는 것 같지도 않았어요. (만(卍))-86~87쪽

‘이래서는 안 되는데’라고 생각은 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미쓰코 씨한테 이용당한다는 사실도 "언니, 언니" 하면서 사실은 깔본다는 사실도 다 알고 있었어요. 네, 그야 언젠가 미쓰코 씨가 ‘이성한테 숭배받는 것보다 동성한테 숭배받을 때가 훨씬 자랑스럽다. 남자가 여자를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지만, 여자가 여자를 홀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그렇게까지 아름다운가 하고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거든요. 분명히 그런 허영심으로 남편에 대한 제 사랑을 빼앗는 데 재미를 느꼈겠죠. (만(卍))-92쪽

그까짓 일에 일부러 문서를 교환하고 난리 법석이라고 해도 좋을 일을 벌이고 법조문 같은 문장을 늘어놓는 게 원래 그 남자(와타누키 에이지로)의 버릇이래요. (만(卍))-133쪽

와타누키가 그렇게 말하고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안 그러면 네(도쿠미쓰 미쓰코) 앞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주겠어"라고 해서 "거봐, 당신은 정말 비열한 인간이야. 난 각오했으니까 그런 증거가 있으면 더 이상 사람을 못 살게 굴지 말고 신문에든 뭐에든 팔아먹어"라고 싸우고 헤어졌대요. (만(卍))-157쪽

말하자면 일상적인 열정을 바치는 건 재미가 없고, 약의 힘으로 정욕을 사라지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타는 듯한 애욕을 느끼는 걸 봐야만 만족한다는 거였죠. 결국 두 사람(가키우치 고타로와 소노코 부부)을 혼이 빠진 껍데기로 만들어 이 세상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흥미도 못 느끼게 하고, 그저 미쓰코라는 태양의 빛만으로 살아갈 수 있게, 그밖에는 아무런 행복도 원하지 않게 하고 싶었던 거예요. (만(卍))-176~177쪽

저(가키우치 소노코)는 사람의 얼굴이라는 게 마음가짐에 따라서 완전히 변하는구나, 하고 진심으로 생각했어요. (만(卍))-177쪽

이 이야기는 당대의 색광(色狂)으로 이름을 날렸던 헤이주(平中)의 한 삽화에서 시작된다.
그 유명한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끝머리에도 "너무너무 아름다워 홀딱 반했던 참이라, 슬금슬금 다가가 벼루 옆의 물을 종이에 슬쩍 적셔서 내밀었더니 대뜸 말하기를 더 이상 색(色)일랑 치워라, 자칫 헤이주 꼴 날라, 운운"이라고 나와 있다. 이것은 겐지가 일부러 자기 코 끝에 붉은색 연지를 발랐다가 아무리 씻어내도 씻기지 않아 조바심을 피우듯 하니까, 당시 겨우 열한 살이던 무라사키 님도 똑같이 조바심을 내며 종이에다 물을 적셔서 손수 겐지의 코끝을 닦아주려고 하자, "헤이주처럼 먹물이 묻었다면 어찌했을꼬. 그런대로 붉은 연지색이니 참아낼 수도 있으려니와"라고 겐지가 우스갯소리 한마디를 하는 것이다. 『겐지 이야기』의 주석 책 중 하나인 『가카이쇼河海抄』에도, 그 옛날 헤이주가 또 어느 그러저러한 여자 곁으로 가서 감동에 겨워 우는 척하려 들었으나, 그날따라 쉽게 눈물이 나오지 않자 곁에 있던 연적을 슬쩍 팔소매에 넣었다가 눈두덩을 적셨는데 그의 평소 버릇을 알고 있던 여자 쪽에서는 미리 그 연적 안에 먹물을 넣어두었다나. (다음)

(이어서) 그러나 헤이주는 그런 것까지는 알 턱이 없어 그 먹물로 눈두덩을 적셔, 여자 쪽에서 금세 헤이주에게 거울을 내보이며 "내 이 아픔도 그대가 보려니와 사람들에게 보이는 그대 얼굴 꼬락서니라니......"라고 한 구절 읊었더라는 고사(故事)도 있어, 이 자리에서 겐지의 몇 마디도 그걸 빗댄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카이쇼』는 이 우스갯소리 한 토막을 일본의 설화집 『곤자쿠 이야기今昔物語』에서 인용하면서 『야마토 이야기大和物語』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운운하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곤자쿠 이야기』나 『야마토 이야기』에는 그런 것까지 실려 있지는 않다. 한데 겐지로 하여금 이런 농담 한마디를 던지게 하는 것으로 보아, 해이주의 먹물 이야기 한 토막은 호색한들의 흔한 실패담으로 이미 『겐지 이야기』의 저자 무라사키 시키부 시대에도 일반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185~186쪽

노상 그랬듯이 간절하게 이런저런 사모의 심정을 토로하며 적은 뒤에, ‘당신께서 이 글을 읽기라도 하셨는지 일단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결코 친절한 답장을 바리는 것은 아닙니다. 받으셨으면 보았다, 읽었다, 이 두 마디만이라도 회답을 해주십시오’ 하고 거의 울음 섞인 글을 아이를 통해 보냈더니, 그 계집아이가 여느 때와 달리 희희낙락 웃으며 돌아와서는,
"오늘은 이렇게 회답이 있으셨어요"
라며 한 통의 봉투를 건네주었다. 헤이주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그것을 받아들고 급하게 열어 본즉, 자그마한 종이쪽지 하나만 달랑 들어 있을 뿐이었다. 다시 자세히 들여다본즉, ‘보았다, 읽었다, 이 두 마디만이라도 회답을 해주십시오’ 라고 써 보냈던 부분 중에서 ‘보았다’라는 글자만 찢어 넣어져 있었다. (다음)

(이어서) 헤이주는 열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제까지 별별 여자들과 갖가지로 연애라는 것을 해보았지만 이 정도로 심술궂고 독종인 상대는 난생처음이었다. 나로 말하자면 막말로 온 세상이 아는 미남자 헤이주다. 이 세상 누구나 그 이름만 들어도 얼씨구나 하고 넘어왔는데, 아니, 이 정도로 콧대가 높은 계집이 있다니. 그야말로 느닷없이 귀싸대기라도 한 방 맞은 듯 잠시 멍해졌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194쪽

남자(헤이주)가 진짜배기로 오늘 밤의 이 해후에 감격했다면, 잠시의 순간인들 여자(지쥬노기미)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 옳았다. 한데 여자 혼자 가게 내버려두고 그냥 자빠져서 기다리고 있다니, 그따위 행태가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200쪽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지쥬노기미’를 사모하는 헤이주의 마음은 더더욱 진지해져갔다.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유희 삼아 장난 섞어 쫓아다녔을 뿐인데, 그 이후부터는 오로지 그녀에게만 정신을 쏟으며 애걸복걸, 무슨 수를 쓰더라도 꼭 성취하리라 열을 냈다. 애오라지 그런 의욕으로만 불탄다는 것은, 저도 모르게 상대가 쳐놓은 덫에 걸려드는 일임에도, 한 걸음, 한 걸음, 그 덫에 빨려들어가는 걸 스스로 짐작은 하면서도 이미 제힘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201~202쪽

그럭저럭하는 동안 그해 여름이 지나고 가을도 저물어, 헤이주의 집 안 뜨락에 피었던 국화꽃 색향도 조금씩 퇴색해가는 계절이 왔다.
고금에 호색가로 이름깨나 떨쳤던 이 사내는, 사람 꽃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식물 꽃도 보듬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국화를 재배하는 데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 같다. "또한 이 사내의 집 침실 앞마당에는 특히 공을 들인 아름다운 국화도 여러 종류 있있다"고 적혀 있는 『헤이주 일기』의 한 단(段)에는 어느 아름다운 달밤에 집주인이 마침 댁에 없는 것을 눈치챈 여자들 여럿이 은밀하게 국화꽃 구경을 왔다가 키가 껑충한 국화 줄기에다 제각기 노래를 하나씩 지어 매달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야마토 이야기』에도 우다 상황께서 헤이주를 불러 "어전에 국화를 심었으면 하는데, 좋은 국화 하나를 바치도록 하라"는 분부를 내렸다고 나와 있다. (다음)

(이어서) 우다 상황은 헤이주가 그 지령을 받고서 황감하게 여기며 막 물러나려는 것을 다시 불러 "헌상하는 국화에다 노래 하나를 첨해서 들이라. 그러지 않으면 안 받으리로다"라고 말하되 헤이주는 더한층 황송해 마지않으며 물러가서, 자기 집 마당에 가득 피어 있던 국화들 가운데서도 가장 멋진 것으로 몇 개를 골라 거기다가 노래 한 수를 붙여 바쳤다. 『고킨슈』 제5권의 가을 노래 가운데 ‘닌나 사(仁和寺)에 국회를 바칠 때 노래를 달아 바치라는 어명을 받들어 만들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국화꽃에는 가을 말고도 한창때가 또 있군요
이렇게 색이 변하면서 한층 더 아름다워지니*
*상황이 닌나 사로 옮긴 후 더 번창한다는 의미이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202~203쪽

두세 명의 내객이 엇바꾸듯이 차례차례 춤을 추기 시작할 무렵부터 향연은 차츰 절정으로 접어들었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겨울 느낌이 가시지 않은 추운 새벽녘임에도, 이곳만은 낭랑하고 왁자지컬하게 즐거운 자리라 웃음소리, 노랫소리, 말소리 들이 잦아들 줄 모르고, 사람들은 모두 윗도리 앞섶을 풀어헤치고 한쪽 소매는 걷어 올린 채 속옷까지 죄다 내보이며 평소의 예의 따윈 모두 잊어버리고 떠들썩하기만 했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224쪽

노인(후지와라노 구니쓰네 대납언)이 발 쪽으로 손을 들이밀자 그 발의 겉면이 안에서부터 불룩하게 부풀어 오르면서, 밤눈으로 보기에도 보라색, 엷은 홍매화 색 등 갖가지 색깔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소맷자락이 비집고 나왔다. 그건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의 일부였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삐져나와 보이는 모양이 마치 만화경처럼 반짝반짝 눈부신 색채를 지닌 물결이 밀려오는 듯하고, 요염한 양귀비꽃이나 모란꽃처럼 두드러져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 크기의 한 송이 꽃은 겨우 반 정도 몸뚱이를 내놓은 모습으로 늙은 남편에게 가만히 소맷자락을 잡힌 채, 그 이상은 모습을 드러내기를 거부하는 듯이 보였다. 늙은 남편은 그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끌어안듯 하면서 그녀를 손님 쪽으로 더 당기려 했는데, 그럴수록 그쪽은 발 그늘 속으로 몸을 숨기려고만 들었다. 얼굴은 부채로 가려서 눈이나 코는 들여다볼 수도 없고, 부채를 든 손가락 끝도 소매 속에 숨겨져 있어 단지 양어깨로 길게 내려 드리워진 머리카락만 보일 뿐이었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234~235쪽

헤이주의 생각에 따르면, 아내 쪽은 남편의 눈을 속이고, 남편 쪽은 아내의 눈을 속여서 조금 무리하게 아슬아슬한 위험 지대를 건너서 아무도 모르게 살짝 한두 번 만나는 것이야말로 연애의 진미였다. 높은 지위나 권세를 이용해 남의 여편네를 강탈하는 식의 폭거는 너무나 야만적인 이야기라 결코 자랑거리가 못 된다. 그러므로 좌대신(후지와라노 시헤이)의 저런 짓거리는 남의 체통이나 세간의 법까지 짓밟는 방약무인한 행위이며, 호색가끼리의 의리까지 무시한 행동으로, 저래서는 호색가의 자격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헤이주는 슬그머니 불쾌한 감정이 가슴에 치밀어올랐다. 흔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사내들이 그렇듯, 매사에 게으르지만 속되지 않고 사람을 대할 때는 부드러우며 어지간해서는 잔일에 매이지 않는 헤이주였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처음 겪는 일이라 시헤이가 한 짓에 화가 나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249쪽

‘고센슈後撰集’ 제11권 ‘사랑’ 3부에는 "대납언 구니쓰네 댁에 거처하던 여주인과 은밀한 관계를 맺고, 두고두고 사귀자고 밀약까지 했으나, 이 여인, 태정대신으로 추서된 시헤이에게 창졸간에 납치되어 그 댁으로 옮겨 앉은즉, 그다음부터는 글 한 쪽 전할 길도 막혀, 여인의 (전 남편 구니쓰네와의 사이에서 낳은) 다섯살 정도 된 아이가 그 댁 본원의 서쪽 뜨락에서 놀고 있을 때 불러, 어머니에게 갖다 보이라며 팔뚝에다 몇 자 썼으되, 다이라노 사다부미(헤이주)......"라 하고, 다음 노랫말이 실려 있는데,

그 옛날에 사귀었던 일 새삼 슬퍼져
아무리 그때 굳게 약속했기로서니 지금은 여운만 남았으니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인 이 노래 뒤에 또, ‘답시, 작가 미상’이라는 다음과 같은 노랫말이 보이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현실 세계에서 누구와 맹세했던가
지금은 꿈속에서 헤매는 나는 누구인가. (다음)

(이어서) (중략) ‘그분’은 자기 아들의 팔뚝에 적혀 있는 옛 남자의 노래를 보고 심히 울었다고 하는데, 결국 그 글을 받아 "현실 세계에서......"라는 화답의 노랫말을 역시 아이 팔에다 적어 "가서 이걸 그이에게 보여주거라" 하고 아이를 밀어버리고, 자신은 황급히 칸막이 그늘에 몸을 숨겼다던가.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253~255쪽

뿐만 아니라 시게모토는, 어떤 제목의 시인지는 가물가물하지만 ‘야밤이 깊어 방 안에 홀로 누웠지만 누가 나를 위해 이부자리의 먼지를 털어주려는가’ ‘아침밥의 양이 줄고 잠이 적어지니 밤 긴 것을 알겠고나’ ‘몸은 마르고 백발 섞인 머리카락이 빠져 머리 빗기도 귀찮고 두 눈은 봄이 부셔 줄곧 눈에 약이나 넣는도다’ ‘모름지기 술잔이나 기울여 내장으로만 퍼넣으니 취해서 자빠진들 어느 누가 상관하리’ 등, 여러 가지 비슷한 구절을 부분부분 기억한다. 아버지는 그런 구절들을 소슬한 뜨락 한구석에 앉아 아무도 못 듣게 조용히 읊거나 사람을 멀리하고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감격한 목소리로 울먹였는데, 그럴 때마다 두 볼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291쪽

사랑하는 분의 환영을 부여안고 밤낮으로 괴로워하는 아버지가 딱하고 가엾게 여겨지지 않은 건 아니지만, 흔한 말로 그렇게 아름답게만 보였던 어머니 모습이라면, 그냥 귀하게 간직하려 애쓸 것이지, 더러운 길바닥 시체까지 끌어들여서 썩어 문드러진 추악한 모습으로 생각하려 함에는, 무언지 욱하고 노여움 같은 반항심까지 끓어올랐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309쪽

문득 그 건너편을 보니 시냇물가의 깎아지른 언덕 위에 커다란 벚나무 한 그루가 주위로 막 내리는 저녁 그늘을 와락 튕겨내듯이 찬란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보는 이 하나 없이 피고 지는 싶은 산중의’라고 읊은 쓰라유키의 옛 노래는 가을 단풍을 읊은 것이었지만 그런 때 그런 골짜기에, 누구 하나도 모르게 봄을 자랑하며 피어 있는 벚꽃 또한 ‘밤의 비단’인 것은 틀림없었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320~321쪽

다니자키 문학은 일본 근대문학사에서 고립된 문학으로 평가되고 있다. 꾸밈과 장식이 너무 지나쳐 벼락부자 취향의 문학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 해설)-326쪽

이나바 선생(이나바 세이키치)은 13, 14세밖에 안 된 소년들을 앉혀 놓고 양명학파의 유학, 선학, 플라톤, 쇼펜하우어 등을 논하고 일본 고전문학을 가르쳤다. 그때 다니자키가 쌓은 소양은 한자어를 화려한 자개를 뿌려놓은 듯 유려하게 구사하는 토대가 되었다. (해설)-329~330쪽

나이 오십에 이르러 다니자키는 꿈에 그리던 이상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셈이다. 이때 마쓰코는 서른이었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일류 작가로서의 안정기를 맞이한 다니자키는 마쓰코 부인의 영향 아래 고전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을 억제된 문체로 그리기 시작해 ‘겐지 이야기’의 현대어역 전 26권,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세설’, ‘열쇠’, ‘꿈의 배다리’, ‘미치광이 노인 일기’, ‘부엌 태평기’ 등의 역작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해설)-337쪽

그(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예술은 형식이다. 형식, 기교, 문체에 의해 미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해설)-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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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새벽 세시
오지은 지음 / 이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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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오사카를 떠나서 인천으로 돌아오지만, 그곳을 떠날 때 슬펐던 기억은 없다. 애초에 머문 적 없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저 교토를 가기 위해 거쳐야만 한다는 의미에서, 나에게 오사카는 인천과 유사한 장소다. 인천에 도착했을 때 기분이 바닥을 치는 것은 오사카를 떠났기 때문이 아니다. 항상 오사카에 도착했을 때부터 충분히 저조한 상태다. 이미 교토를 떠나왔고, 다시 돌아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니까. 내가 원해서 만든 패턴이어서 앞으로 변하지 않겠지만 익숙해질지는 잘 모르겠다. 가서 살지 못한다면 이럴 수밖에 없겠지.

 

나는 시간을 갖기로 결심했다. 사치스러운 결정이지만 절박한 마음에서였다, 지금 이 생각, 이 상황을 그냥 흘려버리면, 많은 것을 포기한 어른이 되어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방향 없이 그저 어슬렁거리고, 변명만 가득한 사람이 되어버릴까 봐 무서웠다.

 

짐을 싸서 늦겨울의 교토로 떠났다. 조용하고 쓸쓸한 곳에 가고 싶었다. 옛것이 보고 싶었다. 싸락눈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한 달이 지난 때였다. -p.16

 

 역시 교토로 떠난 이야기가 실린 까닭에 이 책을 읽었다. 지금 이 상황을 놓칠 수 없어서 그곳으로 떠났다는 대목에서 어쩔 수 없이 작년에 교토에서 보낸 80일이 떠올랐다. 재작년 말, 작년 초의 나는 이 책의 저자처럼 다급하거나 우려스러운 마음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그저 태평했을 뿐이다. 용케 적절한 결정을 내렸을지는 몰라도, 운이 좋아서 제때 제자리를 찾아갔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누구도 붙잡지 않는데도 지난 해 초봄에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렀다면, 올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는 변명만 남았겠지.

 

 다행히 제때 떠난 덕분에, 돌아온 후로는 많은 문제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문제의 원인이었던 셈이다. 떠나서 바라보니 그 자리에서는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많은 상황이 더 이상 해결할 수 없고, 해결해서도 안 되는 문제들이 된 후였다. 그대로 서울에 머물며 어느새 풀리지 않게 묶여 버린 매듭에 얽혀 있었다면, 얼마나 절박한 지경에 빠졌는지도 모른 채로 허덕였을 것이다.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던 것은 파탄이 닥치기 바로 직전이었던 까닭이다.

 

(호텔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찾았다, 하고 작게 혼잣말을 하고는 열쇠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이 방에는 멋진 책상이 있어요.”

(중략) 책상은 오래된 원목이었다. 매니저가 강조할 만했다. 이 책상을 리폼한 디자이너가 여기 있다면 어디서 발견했는지, 어떤 식으로 리폼했는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한참을 떠들 수 있을 것 같은 가구였다. 시간이 보이는 물건이 있는 덕에 방이 살풍경해 보이지 않았다.

(중략) 원래 기숙사였던 건물을 호텔로 리모델링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났다. 창문 옆에 있는 커다랗고 낡은 히터가 유일한 흔적이었다. 살면서 점점 기대 이상의 순간을 만나기 힘들어지는데 여기는 기대보다 좋은 방이다. 운이 좋다. -p.21~22

 

 절박한 마음이 조용하고 쓸쓸하며 예스러운 도시를 떠올렸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에 호감을 가질 이유는 충분했다. 게다가 그가 바라본 교토는 내가 겪으며 아꼈던 정경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더 기꺼웠다. 그가 잠시 깃들었던 동네와 골목이 내게도 익숙하며 각별한 곳이라는 사실은 마치 행운처럼 여겨졌다. 교토 역에서 남쪽으로, 마냥 멀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 호텔에 두 번 묵었다. 처음으로 혼자 떠났던 두 번째 교토 여행에서 뭣 모르고 머물렀던 이 곳이 퍽 맘에 들어서, 그 후에도 한 번 더 들렀다. 앞으로도 자주 찾고 싶지만 이제는 무척 인기가 높아서 쉽지 않을 듯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찾아야지. 그게 내 성의니까.

 

 읽자마자 근처에 이온 몰이 있는저 호텔이 어디인지 확신할 정도라면, 내가 교토와 아주 조금은 친해졌다고 말해도 괜찮을까? 책을 읽는 동안, 교토에서 머물렀던 경험을 다룬 글을 읽을 때는 저자보다도 그가 걸었던 거리들을 훨씬 더 깊이 생각했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긴 머리를 교토의 미용실에서 선뜻 자를 때는, 두 달 넘게 머물면서도 도무지 시원치 않은 일본어로는 뭐라 말하고 싶지 않아서 고스란히 머리를 길러서 돌아온 기억이 다시 떠올라 버렸다.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가장 한심했던 흔적.

 

그리워하던 것 그대로였는데 실망하게 되는 이 얄팍함은 무엇일까. -45 


 저자는 교토에 다녀와서도 자신은 크게 나아지거나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이 책을 읽어 나갈수록 그는 점점 더 나아지는 듯이 보인다. 교토에 들어갔을 무렵의 그가 그만큼 자기 연민과 자기 비하의 감미로운 순환 논리에 탐닉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처음부터 스스로의 기대가 얼마나 얄팍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리워했던 팬케이크가 기대한 그대로인데도 실망하는 자신이 이상한지 되묻는, 결국 팬케이크를 먹기 전의 자신도, 먹은 후에 실망한 자신도, 팬케이크도 모두 잘못이 없다고 변명하듯 부연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도 전형적이다.

 

 실망할 가능성은 외면하고 기대했다면 결국 실망하는 것이 당연하다. 본인이 무엇을 기대하는지도 모른 채로 일방적으로 떠맡긴 그런 것을 충족시켜 주는 상대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대하는 내용을 꾹꾹 눌러 담을 시간에, 그것들이 그렇게나 요구할 가치는 있는지도 상상할 필요가 있다. 기대의 속을 온전히 자신의 희망으로만 꽉꽉 채우고서는, 이렇게 소중한 마음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서글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제 꽤 많이 지겹다. 분명히 하루 이틀 그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도 나아지지 않아서 더욱더 그렇다.

 

같은 교토라고 해도 꽃이 피는 시기는 다 다르다. 꽃놀이를 좋아하는 국민성과 정원으로는 한가락하는 절들이 가득한 교토의 특성 덕분에 개화시기 지도라는 것이 있을 정도다. 어디는 일찍 피어서 좋고, 어디는 늦게 피어서 좋다. -87~88

그곳에 있는 나무는 위치가 응달이라 그런지 다른 나무보다 꽃을 틔우는 것이 느렸다. 사람도 별로 없었다. 작은 꽃봉오리들이 키 작은 나뭇가지에 맺혀 있었다. 참 예뻤다. 활짝 핀 꽃보다 더 예뻐 보였다. 저 작은 몸에 어마어마한 힘이 모여 있겠구나. 앞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고, 떨어질 힘. 그리고 그것을 반복할 힘. 그 옹골찬 모습을 나는 한참 바라보았다. -88~89

 

 지난 주 일요일에 교토-나라에서 돌아왔다. 꼭 나라에서 보고 싶은 전시회가 열린 까닭에 일요일에서 일요일까지 78일을 보냈다. 그동안은 월요일 출근 탓에 주로 토요일에 귀국하는 일정이었는데, 이렇게 다녀오니 역시 딱 예상했던 만큼 한 주 동안 피곤했다. 은근히 신경은 쓰이는데, 굳이 토요일에 돌아오느니 일요일까지 채울 수는 있을 것도 같고 아리송했다. 어쩌면 이 예상을 확인하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아서 여태 토요일에 돌아왔을지 모르겠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서 쓸모는 없다.

 

 4월 둘째 주의 교토는 이미 벚꽃이 절반 훨씬 넘게 지고 떠난 후였다. 작년에는 예년보다 추워서 4월 셋째 주는 되고서야 꽃이 만발했는데, 올해는 예년보다 더워서 첫째 주에 이미 꽃이 거의 피고 져 버린 탓이었다. 이래서야 예년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지 싶었지만, 작년에 겪었듯이 벚꽃이 그렇게나 지고서도 교토는 여전히 봄이었다. 애인과 남은 벚꽃이나마 보아서 기뻤고, 덕분에 올해의 첫 등꽃 향기를 벌써 함께 맡았다. 올해의 벚꽃을 교토에서 만났다고 하기에는 다소 허전했지만, 내년에는 못 볼지도 모를 교토의 등꽃이 벌써 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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