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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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하지만 읽지 못했던 작품이었는데 이런 연애담일 줄은 정말 몰랐다. 전혀 몰랐다. 그만큼 꽁꽁 숨겨두듯 혼자서 이 작가를, 이 작품을 아껴 왔다는 것도 나 역시 이제야 알았다. 이것 또한 까맣게 몰랐다. 충분히 기대를 하고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니 마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마냥 즐거웠다. 이 이야기의 단맛은 예상보다 훨씬 넓고 짙었으며, 여운까지도 깊고 길었다.

 

경민을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한아는 그 순간에도 체념하듯 생각했다. 체념이라고 부르는 애정도 있는 것이다. -23

흐르지 않는, 진득한 피가 갈라진 입술 사이로 배어나왔다. -194

 

 이야기는 저 좋을 대로 사는 남성 애인 경민과의 연애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쳐 버린 여성인 한아로부터 시작한다. 경민은 딱히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충분히 좋지 못한 사람이다. 헤어지고 싶을 정도의 사람이 아닐 뿐, 함께 하기에는 충분히 버거운 애인이란 어떤 존재인지 그리 구구하지 않은 묘사 속에서도 충분히 잘 드러났다. 선량하지만 무책임하며, 끝까지 자신의 애정을 구실로 삼는 사람. 어쩌면 이 버거운경민의 역할은 새로 다가올 가뿐한, 그렇지만 이상한경민을 맞기 위한 도구 내지는 수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같은 경민이 전혀 다른 지향과 상태로 한아에게 돌아왔기에, 그 차이와 혼란은 어느 새 연인이 접근할 때보다도 극대화된다.

 

처음에 얼마짜리 옷이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빛과 습기와 오염으로부터 소중하게 보호받은 옷이라면, 귀한 옷이다. 여왕의 옷자락을 드는 시동처럼 두근거리며 나무 옷걸이에 옮겨 걸었다. 상하지 않도록 한 솔기 한 솔기 치밀하게 뜯어내는 건 다음의 일이었다. -39쪽

 

 이 작품에서 가장 환상적인 지점은 경민이 변한 경위나, 갑자기 종적을 감춘 작중의 스타 가수 아폴로보다도, 한아라는 인물 그 자체다. 지극히 올곧으며 조금이라도 나은 지구와 환경을 바라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그 가치의 행간에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는 이런 사람은, 일상에 깊이 스며 있기 때문에 도리어 무척 희귀하다. 게다가 한아는 이런 자신의 지향으로 자신의 삶을 자립할 정도로 꾸려 나간다. 그런 까닭에 이 작품은 오직 한아와 경민의 낯선 연애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충분해졌다. 이런 흐름은 경민보다도 한아에게 의존하는 바가 더 크며, 이것이야말로 SF와 판타지를 아우른 장르적 토대를 이룬다. 오직 연애만 생각할 수 있는 세계라니. 그 점만으로도 감미로움이 충만하다.

 

. 따지고 보면 전혀 자연스러운 관계가 아닌데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대화가 끊이질 않아. 매일 소리 내어 웃고, 서로를 할퀴지 않아. 경민이의 한도는 어디까진지 모르겠어.” -205

한아는 이후 채 겪어보지 않은 광막함에 대해 계속 떠올렸고, 우주가 언제나 광막한 곳이어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마음속에도 그것이 일부 녹아들지 않았을까 여기게 되었다. 누군가는 어렴풋하게, 누군가는 살을 찔러오는 강렬함으로 안쪽의 춥고 비어 있는 공간을 더듬는 것이다. -161

 

 부자연스러운 한아와 경민의 연애는 결국 그 상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경민은 한아가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한아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경민이 이 변화의 이면에 감춘 비밀은 이 작품의 핵심인 까닭에 굳이 여기 적을 이유가 없지만, 그가 한아에게 드러내는 지극한 애정 역시 경이롭기는 매한가지다. 서사와 상상의 규모를 우주의 끝까지 넓힌 것으로도 부족해서 그 광대한 공간을 오직 애정과 이해만으로 가득 채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절감했다. 책 속에 자연스러운 구석은 별로 없는데, 결국은 자연스러울 정도로 편안한 이유였다.

 

“(전략)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이거면 됐어.” -95

 

 책이 시작하자마자 유성우를 보겠다며 캐나다고 혼자 떠나 버렸던, ‘버거운경민이 이 작품의 결말에서 맡은 역할 내지는 취한 행동은 너무나 그답지만 그렇다고 딱히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내가 한아도 아니고, 그와 연애를 했던 사이도 아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무책임하게 떠났던 사람이 뒤늦게 돌아오는 것이 무척 싫고, 자신은 사랑했기에 떠났던 것이라고 설명인지 변명인지를 늘어놓는 것은 더더욱 싫다. 다만 여기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한아가 경민을 향해서 정리해야 할 감정과 서사가 있었기에 간신히 납득할 수 있었을 뿐이다. 어쨌든 한아는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고 두 사람은 그 과제를 해 냈다.

 

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랄라 하고 계속되기도 한다. -217쪽

 

 결말부의 내용만으로 어느 이야기를 호평하거나 혹평하는 것은 온당한 태도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말이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부러 비판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를 억지로 상찬하는 것도 그리 적절하지는 않다. 다행히 이 소설은 처음이 좋았듯이 끝도 그러하였기에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제는 어디서도 도저히 확신할 수 없는, 앞으로도 변치 않는 연애를, 관계를, 여기서는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한아를 사랑하는 소설이겠거니 싶었던 책의 제목조차도 실은 그 이상의 의미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진짜 경민에게는 지구에서 한아밖에 없으니까. 이 제목이야말로 어찌나 감미롭고 타당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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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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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결코 한아의 외모 때문에 벌어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추측과는 달리.
어쩐지 친해지고 싶은 호감형이기는 하지만 평일 오후 두 시의 6호선에서 눈에 띌 정도지, 출퇴근 시간 2호선에서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희미한 인상이었다.- P9

언젠가 자기 브랜드를 갖게 될 거라고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한아는 기대했던 사람들을 모조리 배신한 셈이지만, 그 조그만 가게에서 매우 행복하게 일했다.- P12

잦은 배웅은 간절함을 감소시켰다.- P15

유리가 늘 하는 말을 하며 먹을 갈기 시작했다. 한아는 자시니 그 먹 냄새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늘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향긋하면서도 꼬리꼬리했다.- P20

경민을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한아는 그 순간에도 체념하듯 생각했다. 체념이라고 부르는 애정도 있는 것이다.- P23

"(전략) 우주적 규모로 잘할 필요 없어요. 동네 규모로 좀 잘하면 안 돼?"- P33

처음에 얼마짜리 옷이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빛과 습기와 오염으로부터 소중하게 보호받은 옷이라면, 귀한 옷이다. 여왕의 옷자락을 드는 시동처럼 두근거리며 나무 옷걸이에 옮겨 걸었다. 상하지 않도록 한 솔기 한 솔기 치밀하게 뜯어내는 건 다음의 일이었다.- P39

한아도 디자이너지만, 디자이너들은 결국 남 좋은 일이 될 걸 알면서도 디테일 하나에까지 성실하다는 점에서 사랑스럽고 안쓰러운 존재들이었다.- P41

얼굴 붉힐 일 많고 번거로운 상황에 자주 놓이면서도 (아폴로 팬클럽 운영을) 계속해온 것은, 팬클럽이 망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쉽게 끝장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P56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었다.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P78

경민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재생시켜야 한다고 다짐한다. 어딘가 한아 안에 4K 화질로 저장되어 있을 거라고.- P90

최근의 상상이 최악이었던 것은 기본 전제가 더 끔찍했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야 도출해낸 것이다.- P94

"(전략)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이거면 됐어."- P95

나쁜 새끼. 이마에 뽀뽀를 하고는 우주 끝까지 달려가버린 싸가지 없는 새끼......- P108

"일단 친구부터 해. 그리고 지구를 침략하려 들면 바로 파혼할 거야."- P109

경민의 손보다 온도가 높고 굳은살이 없는 손이었다. 쌓인 기억이 없는 손이었다.- P109

한아는 계속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다시 여행하고 싶지는 않아? 공항에 오니까 여행 싫어하는 나도 막 그런 기분이 드는데."
"네가 내 여행이잖아. 잊지 마."- P137

그러고 나서 한아가 느낀 감정은 새로웠다.
"보고 싶어."
그 말이 자연스럽게 새어나왔다. 망할, 외계인이 보고 싶었다. 익숙해져버렸다. 그런 타입도 아니면서 매일 함께 보내는 데 길들여져버렸다.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P143

한아는 이후 채 겪어보지 않은 광막함에 대해 계속 떠올렸고, 우주가 언제나 광막한 곳이어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마음속에도 그것이 일부 녹아들지 않았을까 여기게 되었다. 누군가는 어렴풋하게, 누군가는 살을 찔러오는 강렬함으로 안쪽의 춥고 비어 있는 공간을 더듬는 것이다.- P161

"(전략) 자연스럽게 불규칙한 것일수록 재현하기 힘들대. (후략)."- P171

한아는 일을 하다가 짬짬이, 드레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표백을 하지 않은, 그래서 눈이 시린 하얀색은 아닌 따뜻한 미색의 원단을 바탕으로 애틋한 손님들의 옷에서 떨어져나온 흰색 계통의 자투리천들이 들어갔다. 한아는 11월의 바다처럼 짙은 코발트색 실을 썼는데 그로써 드레스 하나에 새로운 것, 오래된 것, 빌린 것, 파란 것 모두가 들어간 셈이었다.- P173

하루 푹 자고 나서 쌀뜨물에 담가두었던 식기들을 친환경 세제로 설거지했다. 두 사람은 설거지를 하느라 차가워진 서로의 손을 잡고 차를 마셨다.- P180

"(전략) 넌 어슐러 르 귄이랑 몇 년이나 같은 별에 살았잖아. 그건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일이야. 끝까지 노벨문학상을 안 주다니. 멍청이들."- P183

흐르지 않는, 진득한 피가 갈라진 입술 사이로 배어나왔다.- P194

떠나지 않았다면 내 평생이 모두 네 것이었을 거라는 잔인한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한아는 그저 엑스가 조금이라도 편해지길 바랄 뿐이었다.- P204

"응. 따지고 보면 전혀 자연스러운 관계가 아닌데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대화가 끊이질 않아. 매일 소리 내어 웃고, 서로를 할퀴지 않아. 경민이의 한도는 어디까진지 모르겠어."- P205

"다음번에는 속하게 된 곳을 더 사랑할 수 있거나, 아니면 함께 떠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 여기도 아니고 나도 아니었지만, 다음번에는 꼭."- P211

칫솔에 치약을 근사할 정도로 적당량을 묻혀 한아에게 내밀었다.- P214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껍질은 언제까지나 남기 마련이었다.- P216

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랄라 하고 계속되기도 한다.-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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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트, 우리가 지어 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 - 그림과 원리로 읽는 건축학 수업
로마 아그라왈 지음, 윤신영 외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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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구상해서 건축했는지 말하는 책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어떻게 건축해서 사용하는지 말하는 책은 아직도 적다. 사람들이 공학적 결과보다는 예술·인문적 영감 비슷한 것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이 방향에서 일반 대중들의 관심과 이해를 끌어낼 수 있을 정도의 글을 쓰기 어려운 탓도 있을 것이다. 어떤 연유로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을 생각해 냈는지에 비하면, 어떤 자료와 방법으로 그 건물을 지어 냈는지는 조금은 덜 매력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멋진 건물들을 여럿 보고, 관련된 책들도 적지 않게 접하며 의 영역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는 나름대로 충분히 살펴보았다고 생각한 까닭에, ‘어떻게의 영역이 더 궁금해졌다. 그럴 때에 마침 이 책이 나왔다.

 

사람들은 구부러진 캐노피와 기다란 실루엣 그리고 독특한 파사드 등 설계에 투영된 야망과 상상력에 감탄하고 반응하며 셀카봉에 장착한 휴대전화 속의 수많은 사진에 드라마틱한 배경으로 남겨둔다. 이것은 건축학적 드라마로, 공학이 얼마나 낭만적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219

 

 거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구조 공학자가 쓴 이 책은, 철저히 어떻게에 집중한다. 이 저자는 오늘날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는 현대 건축의 규모와 개성이 단순히 건축가 한 개인의 설계, 의도를 넘어선 공학의 지속적 성장과 혁신의 결과임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인물인 까닭이다. 그는 (storey)’부터 다리(bridge)’까지 지금 사람들이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건축 공학의 요소들을 소개하고 나서, 앞으로 변화할 건축과 공학의 미래를 일별하는 으로 마무리한다. 이 책만으로 지금의 건축과 공학을 낱낱이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낯설었던 방향에서 건축을 바라보며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지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내가 설계한 건축물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고 건물 안에서 일하며 집에서 살아간다. 내 작품이 자신들에게 문제를 일으킬 거라는 걱정은 꿈에서도 하지 않는다. -20~21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엔지니어의 꿈이다. 건물이 안전하게 설계되어 거주자들은 건물이 서 있기 위해 동원된 수많은 복잡한 기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자신의 일을 편안하게 계속하는 것 말이다. -56~57

 

 애초에 공학자, 엔지니어의 글을 읽은 경험 자체가 많지 않았던 까닭에, 공학자이자 여성으로서 이 분야에서 활약한 저자의 생각 자체가 흥미롭게 다가온 점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엔지니어들이 바라는 바는, 이용자인 시민들, 즉 공학의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서도 편안히 지내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오직 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그 결과물, 이 책의 경우에는 건축물로서만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고풍스럽고 교만한 전문가주의의 소산이라고 말할 구석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 짓고 말기에는 건축·구조 공학자들이 담당하는 결과물이 외부인들, 문외한인 시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그 중요성이 너무도 크다. 사회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 전문성에 대한 책임감을 밝힌 구체적, 자발적이며 견고한 문장이 아무래도 다소 낯설었던 탓이라고 여긴다.

 

건축 기술과 구조 시스템 그리고 계산 능력이 매년 향상되고 있다. 구조공학자가 되기에 더없이 신나는 시기다. -171

회의실에 들어가면 나만 여자인 경우가 많다. 가끔 세어보면, 남자 11명에 나, 아니면 남자 17명에 나다. 대개는 남자 21명에 나였다. (중략) 나는 미스터 아그라왈 씨에게라고 적힌, 일과 관련된 수많은 편지를 받았다. 내 이름에서 성별을 유추할 수 없다면 그냥 남성이라고 추측하는 편이 낫다. 그게 맞을 확률이 90퍼센트 이상이니까. 실망스럽게도 나는 이 직종에서 소수에 속하기 때문이다. -263

 

 지금 한국, 특히 서울에서 곳곳에 지어졌고, 또한 지어질 여러 특별한 건물들을 생각할 때, 건축 기술과 그 구조의 시스템이 크게 발전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진화하리라는 것은 비전문가조차도 짐작할 수 있다. 건축 공학 기술의 발달을 시공간적, 입체적으로 이 책에서 소개한 저자 역시, 그런 까닭에 자신의 일이 앞으로 더욱 흥미진진해지리라는 기대를 아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남성이 주도했던 이 분야에서는 여전히 소수인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여러 어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궁극적으로는 끈기와 탄력성으로 이런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건축, 공학이라는 분야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중, 사회의 이면에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전문성과 원칙을 중시할 수밖에 없기에, 그런 개인적 자질만으로는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 건축가, 공학자가 독립된 까닭에, 그 안의 여성들이 고립될 수도 있다는 의문이 남았다.

 

재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공학을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 사람들은 때로 콘크리트를 구식 재료라고 생각한다. 고대에 뿌리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중략) 아마 언젠가는 콘크리트를 완전히 대체할 새로운 재료가 등장할 것이다. 한편으로 계속 늘고 있는 인구의 수요에 맞추기 위해 도시들이 엄청난 속도로 지어질 것이다. 콘크리트 건물은 앞으로 오랫동안 지평선을 빛낼 것이다. 내가 쓰다듬을 콘크리트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135

새로운 공학이 항상 크고 담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변변찮은 근본에 의지할 수도 있다. -309

 

 결국 무수한 재료들이 아래서 위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누적되어야만 하나의 건축물이 완성되듯이, 그 건축물의 이면에 있는 공학 역시 오랜 시간 동안,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무수한 시행착오와 지식, 원리가 축적되어서 이루어진 학문이라는 사실을 이 책에서 거듭 배웠다. 건물이 완성되고 나면 가장 밑바닥의 가장 작은 일부분을 굳이 살피지 않게 되듯이, 오늘날처럼 웅장 휘황한 건물들이 즐비한 시대에는 도리어 그것을 세운 건축·구조 공학을 의식하기가 더욱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물며 그 세계는 의식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이들이 모여 있으므로 더더욱. 그럼에도 이 책은 바로 지금 이 건축의 기초와 원리를 조금씩 살펴보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알려 주었다. 기초의 시작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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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트, 우리가 지어 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 - 그림과 원리로 읽는 건축학 수업
로마 아그라왈 지음, 윤신영 외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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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로운 나라(영국)애서 새로운 학교에 다니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금세 나와 비슷한 부류를 찾아냈다. 나처럼 페러데이의 법칙에 매혹되고, 실험실에서 단지 재미로 실험을 하는 여자 아이들 말이다.- P11

누구도 혼자 힘으로는 (건설) 프로젝트를 전담할 수 없다. 사람들은 각자 전문 영역이 있고, 진짜 어려운 점은 그들 모두를 모아 복잡 미묘하고, 조용하지만 열정적인 춤을 추게 하는 일이다. 재료와 물리학적 노력, 그리고 수학적 계산이 아로새겨지는 춤 말이다.- P13.14

일단 완성되면, 나는 건축가가 아닌 한 명의 개인으로서 그 건축물을 만나고 주변을 맴돌게 된다. 그 후에는 다른 사람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내가 만든 창조물과 나름의 관계를 발전시켜나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다. 건물을 바깥 세상으로부터 보호받는 집이나 일터로 만들어가는 모습 말이다.- P14

직접 설계한 건축물 위를 지나거나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은 정말 특별하다.- P19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내가 설계한 건축물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고 건물 안에서 일하며 집에서 살아간다. 내 작품이 자신들에게 문제를 일으킬 거라는 걱정은 꿈에서도 하지 않는다. - P20.21

엔지니어의 주요 임무는 해당 건축물이 다양한 힘에 제대로 저항하는지를 계산하는 것이다. 이 힘들은 건축물을 밀고 당기고 흔들고 뒤틀고 쥐어짜고 구부리고 가르고 찢고 부러뜨리고 쪼갠다.- P25

건축가가 탁 트인 공간으로 묘사한 곳에 반드시 기둥을 세워야 하는 경우도 많다. 반대로 건축가들이 생각하기에 뭔가 구조물이 있어야 하는 곳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없어도 괜찮은 경우도 많다. 이 경우 건축가들은 좀 더 많은 공간을 얻게 된다. 기술적인 문제에 봉착했을 때, 건축가와 엔지니어는 서로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기술적 완결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끝에 우리는 건축 구조와 심미적 통찰력이 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설계안에 다다르게 된다.- P30

불규칙적이고 세기의 변동이 심하며 예측 불가능한 바람은 항상 엔지니어를 괴롭힌 존재였다. 바람은 여전히 안정적인 건축물을 짓고 싶은 엔지니어라면 풀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P38

하지만 건물이 높이 지어질수록 건물이 만나는 바람의 세기도 커진다. 20세기에 더욱 높고 가벼운 건축물을 짓기 시작하면서 바람의 힘은 중요한 고려 요인이 되었다.- P43

나는 구조 공학자로서 건물이 어떻게 기능하고 하중이 어디에 실리는지 살펴보는 것을 좋아한다. 보기에는 별로 아름답지 못하지만 건물이 순조롭게 기능하게 하는 핵심 시스템들을 감추거나 가리는 대신 퐁피두 센터처럼 노출시키는 시스템은 내겐 기쁠 정도로 정직한 구조다. 구조에 대한 통찰로 우리를 이끄는 시스템 말이다.- P48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엔지니어의 꿈이다. 건물이 안전하게 설계되어 거주자들은 건물이 서 있기 위해 동원된 수많은 복잡한 기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자신의 일을 편안하게 계속하는 것 말이다.- P56.57

구조공학자와는 젠가게임을 하지 마라. 우리는 어떤 블록을 빼야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건축물에서 어떤 부분을 빼야 무너지지 않을지 말이다.- P69

인내심이 핵심이다. 벽돌이 완전히 마르는 데에는 2년까지 걸리기 때문이다. 최근에 만들어진 벽돌은 완전히 마르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수축된다. 이런 벽돌을 쌓은 다음 회반죽을 바른 벽에는 균열이 생긴다. 그래서 비트루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우티카 사람들은 적어도 5년 전에 만들어져 도시 통치자의 인증을 받은, 마른 벽돌로 벽을 세운다."- P86

나는 벽돌이 보이는 것이 좋다. 퐁피두 센터 바깥쪽에서 공조기나 에스컬레이터를 보는 것만큼이나 좋다. 나는 내가 설계하는 건축물이 노골적이고 정직한 것이 좋다. 내 케이크처럼, 건물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좋다(내가 케이크에 크림을 입힐 줄 모른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P88

오늘날 대부분의 영국 가정에서는 벽돌을 사용한다. 값이 싸기 때문이다. 하지만 벽돌에는 불리한 점이 있다. 벽돌을 한 번에 하나씩 놓는 전문가의 노동이 필요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느린 과정이다. 그리고 벽돌 하나의 표준 규격이 있기 때문에 건축물의 구조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한다. 벽돌 건축물은 장략에 매우 약하다. 모르타르 접착제로 붙인 건물들을 잡아당기먄 쉽게 떨어지곤 한다. 벽돌은 거의 항상 압력만 받는 건축물에 쓰일 수 있다.- P92

재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공학을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 사람들은 때로 콘크리트를 구식 재료라고 생각한다. 고대에 뿌리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콘크리트는 미래의 재료이기도 하다. 과학자와 공학자는 아주 강한 콘크리트 혼합을 연구하기도 하고, 환경 친화적인 콘크리트를 연구하기도 한다. 아마 언젠가는 콘크리트를 완전히 대체할 새로운 재료가 등장할 것이다. 한편으로 계속 늘고 있는 인구의 수요에 맞추기 위해 도시들이 엄청난 속도로 지어질 것이다. 콘크리트 건물은 앞으로 오랫동안 지평선을 빛낼 것이다. 내가 쓰다듬을 콘크리트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P135

건축 기술과 구조 시스템 그리고 계산 능력이 매년 향상되고 있다. 구조공학자가 되기에 더없이 신나는 시기다.- P171

토양에는 엔지니어가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역사와 개성이 있다.- P188

사람들은 구부러진 캐노피와 기다란 실루엣 그리고 독특한 파사드 등 설계에 투영된 야망과 상상력에 감탄하고 반응하며 셀카봉에 장착한 휴대전화 속의 수많은 사진에 드라마틱한 배경으로 남겨둔다. 이것은 건축학적 드라마로, 공학이 얼마나 낭만적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P219

현대든 과거든 오수 처리 방식은 도시가 얼마나 성공적이고 진취적인지를 나타내는 지표였다.- P243

엔지니어들은 종종 이런 식으로 타협해야 한다. 이상적인 해결책이 반드시 가장 실용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P259

회의실에 들어가면 나만 여자인 경우가 많다. 가끔 세어보면, 남자 11명에 나, 아니면 남자 17명에 나다. 대개는 남자 21명에 나였다.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일을 하다 보면 그중 누군가가 무심코 욕을 내뱉곤 당황하다가 내게 직접 사과의 말을 건넨다. 그러면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다(그들은 내가 꽉 막힌 도로에서 운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나는 ‘미스터 아그라왈 씨에게’라고 적힌, 일과 관련된 수많은 편지를 받았다. 내 이름에서 성별을 유추할 수 없다면 그냥 남성이라고 추측하는 편이 낫다. 그게 맞을 확률이 90퍼센트 이상이니까. 실망스럽게도 나는 이 직종에서 소수에 속하기 때문이다.- P263

로마인들은 부지런하고 효율적인 다리 건설가였다. 그러나 서기 4, 5세기에 서로마제국이 쇠퇴한 이후 1100년대까지 다리가 거의 건설되지 않았다. 이 시점에 교회는 기금을 모아 수많은 다리를 짓기 시작했다.- P288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엄마는 사투리가 약간 들어가고 음정이 맞지 않는 목소리로 "런던 다리가 무너지네, 내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노래하며, 그 위태로운 역사에서 영감을 받은 동요를 가르쳐줬다. 공학에 관한 희귀한 노래다. 미래의 엔지니어들에게 미리 나쁜 설계의 위험성을 가르쳐준다.- P292

새로운 공학이 항상 크고 담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변변찮은 근본에 의지할 수도 있다.- P309

상상력만이 가능성을 제한한다. 우리가 무엇을 꿈꾸든 엔지니어는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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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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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상상력을 엿보면 그의 다채로운 세계에 매혹되는 동시에, 나의 단조로운 사고를 자각하게 된다. 전자가 전적으로 재미의 문제라면 후자는 일종의 학습의 문제다. 어느 작품에서 이 두 문제를 모두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하나라도 제대로 제시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 이 책에는 두 가지 문제가 모두 들어 있는데, 하나의 작품이 둘을 모두 갖춘 경우는 거의 없어서 그조차도 흥미로웠다. 두 종류의 이야기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르 귄이 무슨 의도를 두었던 것인지까지 생각하거나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이야기 속 의도의 명료함과 흥미의 농밀함이 반비례한다는 인상은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다.

 

“(전략) 그런데 당신(샘레이)은 우리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하지 않소?”

바로 떠날 수 있을까요? 집을 오랫동안 비우고 싶지 않거든요.” (샘레이의 목걸이)-40

 

 책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머나먼 길을 떠난 엔기어의 이야기 샘레이의 목걸이로 시작한다. 르 귄이 만족한 그 자신의 낭만성이 무엇인지 참 잘 보여 주었다. 얻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것이 의외로 가뿐히 손에 들어오는 것도, 그렇게 없던 것을 쥐는 사이에 당연히 내 것이리라 생각했던 무언가가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것도, 무척이나 낭만적이었다. 얻는 만큼 잃어서 낭만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제각각 그렇다는 소리다.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처음에는 내 것이 아니었던 그것을 결국은 얻을 것이다. 하다못해 그 일부라도. 그리고 그렇게 갖는 동안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것이 사라지고야 말 것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게 어떻게 없어지는지도 몰랐던 것이 사라지는 이치를 그렇게 배운다. 이렇게 될지 알았다면 없는 것을 찾지 않고, 있는 것을 잃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한 번쯤은 생각하겠지만 입 밖에 내지도 깊이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그때는 원하는 것이 있었을 뿐이므로. 누구나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르누아르가 좀이 슨 검은 가운을 입는 동안 키슬크는 자신의 은색 튜닉을 실용적이면서 특징 없는 외투로 가렸다. 페니위더가 생각에 잠겨 목에 벌레 물린 곳을 긁는 동안 보타는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넷은 아침거리를 구하러 집을 나섰다. 연금술사와 성간 고고학자가 프랑스어로 말하며 앞서 가고, 갈리아에서 온 노예와 인디애나에서 온 교수가 라틴어로 말하며 손을 잡고 뒤따랐다. 좁은 길은 붐볐고,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네 사람 위로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사각탑 두 개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옆으로는 센 강이 부드럽게 출렁였다. 바야흐로 파리는 4월이었고, 강둑에는 밤꽃이 피어 있었다. (파리의 4)-77

 

 「파리의 4이 참 아늑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일 뿐인데도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만큼은 그저 평온했다. 시간을 건너뛰고서도 어떤 소란도 없이 그때 겪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경우만을 잘도 이어서 붙여 놓았다. 르 귄은 이 네 사람이 이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이대로 그렇게 파리의 골목골목을 거닐며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그려냈다. 대단한 갈등이나 사건, 무엇보다도 사유가 없어서 이런 마음을 끌어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렇게나 소소한 서사로 이렇게 따사로운 정취를 이루었다는 것이야말로 탁월하다. 봄날의 교토를 거닐 때 감도는 감미로운 몽상이 무엇이었는지 여기서 배운 듯하다.

 

극한 지방 탐사대원들은 팀 동료가 지성인이고 착실히 훈련을 받았으며 정서가 불안해도 개인적으로 공감대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랐다. 대원들은 밀폐된 선실과 역겨운 장소에서 함께 일해야 했으며, 따라서 각자의 망상, 절망, 편집증, 혐오감, 강박 관념 따위가 대원들 간의 관계를 해칠 정도로 크지는 않을 거라고 기대하는 게 당연했다. 늘 그럴 수는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315

 

 인간을 자유롭게 우주로 보낼 수 있는 시대가 되어도 인간관계는 여전히 복잡하고 미묘하며 왜곡될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게나 발전한 시대인 까닭에 오히려 인간들이 서로를 더욱 못 견디게 될 수도 있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에서 르 귄은 그런 상황을 보여 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뿐인 배경 속에서, 여전히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 과학과 기술이 그렇게나 나아졌는데도 인간이 여전히 상대의 한계를 용인하기 위해 저렇게나 애를 써야 할 정도라면 지금보다 더 인간관계에 시달린다고 생각해도 틀리지는 않을 듯하다. 여러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대를 견디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를 견디지 못하는 방식도 견디지 못해서 결국 자신을 망가뜨릴 때까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우고야 만다. 이방인인 그들을 공격하는 숲 속의 나무들은 그들 사이에서 자란 무수한 혐오감과 비슷해 보인다.


앞쪽에, 그곳에, 저녁 녘의 넓은 들판에서 마른 하얀 꽃들이 나부끼며 속삭였다. 72년이 지나도록, 라이아는 저 풀들의 이름을 배울 짬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혁명 전날)-498 


 이 책에 담긴 모든 이야기를 되새길 수는 없다. 그저 내 상상력의 범위를 넓혀 준 것만으로 충분했던 이야기도 있고,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 유쾌했던 이야기도 있으므로 그 이상 말을 더하면 번거롭다. 다만 어느새 왕년의 혁명가가 되어 버린 혁명 전날속 라이아가 그랬듯이 모르는 이름의 존재만큼은 기억해 두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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