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에서의 7년 1
하인리히 하러 지음, 박계수 옮김 / 황금가지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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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아름다움을 뽐내는 듯한 에베레스트를 표지로 삼은 이 책은, 머지않아 내 곁에도 백설로 덮인 그 모습부터 내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때문에 보려고 마음먹은 책이 아니었는데도 손이 저절로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눈길을 순식간에 사로잡은 그 마력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정해야만 했다. 그 목적지가 다름 아닌 달라이 라마의 땅, 티베트였기에……

 지은이는 오직 자유로의 동경만을 무기 삼아 어처구니없이 들어갔던 인도의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하였다. 전쟁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떠밀려서 오직 적국인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영국의 포로 수용소에서 고초를 당한 지은이나 이런저런 갈등의 사이에서 괜시리 뒤숭숭한 나에게는 조용한 평화와 아름다운 자연까지 선사하는 티베트는 '꿈의 나라'였다. 물론 그 꿈의 나라로의 여정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인도와 티베트 사이에 가로놓인 신들의 성지, 히말라야는 아무 이방인에게나 그 끝을 보여줄 정도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멀리서 보기에는 다만 맑고 성스러운 성녀같은 이 산, 히말라야에 이렇듯 악녀같은 표독스러움이 숨어있으리라고는 나 역시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 험한 자연의 냉혹함이야말로 평화의 땅 티베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방어 수단임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이 깊은 산 속에 감춰진 이 땅까지도 노리던 수많은 이방인들 속에서, 티베트가 평화의 본성을 잃지 않게 해준 든든한 방벽인 셈이다.

 그런 티베트의 심장부인 라사에 도착한 지은이 일행은 그동안 겪은 고행의 대가인지 무척 윤택한 생활을 했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그들은 탐험가의 삶이 몸에 익었는지 낯선 땅 티베트의 많은 것을 알려고 노력했다. 그런 중에 만나게 된 티베트의 최고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그리고 그 가족들과도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젊은 달라이 라마의 영도 아래 외세의 침략 없이 견뎌온 티베트였지만, 그들에게 닥칠 위기는 나날이 굳건해지는 국민들의 신앙심과 비례했다. 나날이 종교에 기우는 티베트인들이 머잖아 다가올 위기까지도 종교에 의탁했기 때문이다. 평화에 대한 갈망, 그러나 무력한 종교에 대한 맹신, 이것이 티베트의 슬픔이었다. (1997. 11. 10∼14, 1997. 11. 14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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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2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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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로렌초님께.

 저 역시 당신께 '일 마니피코'라는 경칭을 붙이지는 않겠습니다. 굳이 붙이지 않더라도 당신의 40여년 생애와 지금까지의 500년 세월 동안 당신은 충분한 위대함과 화려함으로 채색되어 있으니까요. 사실 전 아직 그런 당신을 가까이서 모신 적이 없는, 당신의 미켈란젤로와는 격이 다른 '인간'일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당신은 아직도 제게 작은 기억의 파편들로 이루어진 미완성의 퍼즐입니다. 이 퍼즐의 완성은 영영 요원할 지도 모르지요. 다만 그 빈 조각 사이를 당신을 향한 제 흠모로 채우는 지금이 저에게 더 행복한 것만은 사실이랍니다.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500년 전에도, 후에도 사랑과 존경을 받아왔던 당신에게 던져진 삐딱한 시선을…… 그는 파치같이 당신의 행운을 시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모든 역량-행운과 재능-을 쏟아부어 당신 자신의 위대함과 피렌체의 번영을 이룩했음을 누구보다 장엄하게 칭송했지요. 그러나 그러한 당신의 치세 동안에 피렌체는 길들여졌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로렌초 일 마니피코 아래서만 번영할 수 있는 도시로 말입니다. 설령 당신의 후계자가 피에로가 아닌 다른 이였더라도 떨어진 꽃을 다시 피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당신의 목표는 현 상태의 유지였습니다. 풍부하다 못해 한 때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던 피렌체의 재정을 이용한 군사 행동으로 소국의 병합 정도는 꿈꿀 수도 있었을 테지만 당신은 루도비코 일 모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 끝을 '사랑'에서 찾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피렌체 시민과 이탈리아의 피를 원치 않은 것입니다. 그 생명들이야말로 당신이 딛고 선 굳건한 대지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당신이셨으니까요. 설령 그 배경에 당신 이면의 정치적 책략이 있었더라도 저는 이 또한 사랑의 한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당신이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야망'대신 이탈리아에 대한 사랑이라는 '희망'을 선택함으로써 르네상스와 피렌체의 꽃은 비로소 활짝 핀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완벽함으로 이미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당신의 조용한 현상유지는 안정을 원하던 피렌체 시민의 요구를 충족시켰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삐딱한 사나이', 마키아벨리의 어떤 정치론에서도 당신에게 어울리는 위치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가 세상에 나선 시대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마키아벨리라는 사나이는 지난 시절을 자주 돌아볼 만큼의 여유는 없었지만, 그의 안목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은 항상 시대를 관통하고 있었지만 그의 시대에 이성(理性)의 지도자인 로렌초, 당신의 자리가 없었을 뿐입니다.

 이미 때는 모든 이성을 집어삼킨 전쟁의 시대였고, 마키아벨리는 그 끝을 체사레에게서 찾았던 거지요. 그래도 전 지금 쉼없이 변하는 스릴이 있는 어둠의 마키아벨리보다 조용한 가운데 잔잔한 낭만이 있는 빛의 당신에게 가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 속에 저의 자리를 마련해주세요. 그곳에서 당신의 친구로서 사랑을 나누겠습니다. 미래가 더 이상 희망이 될 수 없음을 저 역시 믿고 있으니까요. 안녕히 계십시오.

 어두운 밤 기숙사에서
 사랑의 통치자께 당신의 시민
(2000. 3. 15∼24, 2000. 3. 14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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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6 - 팍스 로마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6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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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는 아쉬움 속에서 눈을 감고, 아우구스투스의 팍스 로마나의 시대가 왔다. 이 시대의 '개창자(開創者)'인 카이사르는 그 시대의 초반을 자신이 이끌려 했으나 팍스(평화)의 시대는 그를 거부했다. 이미 그의 손에는 너무 많은 피가 묻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아쉬움은 남지 않았으리라.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인 아우구스투스는 그가 선택을 받은 이였으니 말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그 자신과 다른 이들의 피로써 이뤄 놓은 기반 위에 그의 건물을 지었다. 비록 카이사르의 후계자라고는 하나, 평화의 시대의 인물인 아우구스투스는 분명 카이사르와는 다른 지도자로써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 극명한 예가 바로 그가 입안한 '윤리 대책'이었다. 모든 부유함이 로마로 모이는 평화의 시대의 유일한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도덕 의식의 결여'를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선포된 이 대책으로 인하여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딸과 손녀까지도 먼 섬으로 귀양보내고야 만다. 또한 정식 부인이 있으면서도 수많은 여인들과 사귀면서 사생활을 맘껏 즐긴 카이사르와의 차별성은 이로써 분명해졌다.

 국민들에게도 새 시대의 국민으로써 새로운 지도자의 리더십에 따라야 한다는 인식을 명확시 공표한 것으로도 볼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지도자에게 있어서 군사적 재능으로 대표되는 외치(外治)의 능력은 중요한 덕목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이제 로마는 유럽에서 아프리카까지 당시 알려져 있던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로써 외치의 임무는 사실상 완수된 셈이었다. 그 넓은 영토를 자신의 것으로써 유지하고 다스리는 것은 이제부터 대제국 로마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내치(內治)의 능력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시대의 도래룰 예상했기에, 카이사르는 자신과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아우구스투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그의 변변치 못한 군사적 재능을 보강시키기 위해 아그리파를 곁에 붙여준 것이 아닐까? 아직 안토니우스 등 쟁쟁한 경쟁자가 있던 당시로써는 아그리파가 꼭 필요했다. 이 정도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2대에 걸친 팍스 로마나의 집념은 실로 집요했다.

 그러나 모든 정적들이 제거되고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까지 거명되던 아그리파가 병약한 아우구스투스보다도 먼저 세상을 등지게 된다. 이렇듯 수많은 희생으로 이룩된 평화의 제단이었다. 그 제단으로 토가 자락을 이끌며 올랐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그 마지막 희생자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 평화의 끝은 결국 사회의 보수화(保守化)일 수밖에 없다. 사회 전반의 지나친 경직, 이것이 바로 평화의 함정이다. 이런 시대인 만큼 자유분방한 카이사르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의 피로써 만든 시대였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였다. 그래도 아우구스투스의 77년은 카이사르의 그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 그 77년 동안 로마는 그의 마지막 손가락이 가르킨 방향, 제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아우구스투스만은 보고 싶지 않은 현실까지 냉철하게 응시하는 가운데 로마의 미래는 변하고 있었다.(1997. 10. 21∼26 1997. 10. 26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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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5 -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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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는 결국 루비콘을 건너고야 말았다.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의 운명이 걸린 이 순간에도 한 구절의 명언을 남길 정도로 그는 당당했다. 앞으로의 날들이 오직 한 사람, 그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서였을까? 이제 로마는 바야흐로 세계 제국으로의 첫발을 내딛고 있었으나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과두정(寡頭政) 체제는 그 흐름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로써 제정(帝政)으로의 방향 전환이라는 카이사르의 목표는 뚜렷해졌으며 그의 모든 행동은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그에게 '때'가 이른 이상에는, 성급한 판단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도 이미 그의 승리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한 성급함이 부끄럽지 않도록 그는 승리할 수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수적 우세가 압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가 계속해서 승리했기에 로마의 미래를 결정할 구체제와 신체제의 격돌이라는 이 전투의 중요성을 인식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굳이 말하자면 너무 시시한 탓이었던 것일까? 하지만 카이사르가 단지 그 혼자만의 신념으로 이와 같은 승리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압도적인 병력을 이끌고 있었던 폼페이우스에게는 없었던 군사적 철학이 그에게는 있었다. 바로 전쟁의 주체가 되는 병사들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고, 그러한 자신의 철학을 당사자인 병사들의 마음에까지 새기는 것이었다. 대제국 로마의 새로운 전기를 연 인물다운 용병술이었다. 반면 폼페이우스는 그의 지지세력인 원로원파와 마찬가지로 병사들을 자신들의 지위와 재산을 지키는 소모품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군대 경력이 많은 폼페이우스 자신은 그렇지 않았더라도 병사들의 입정에서는 지금까지 그들이 본 지도층, 곧 원로원 의원들의 태도에 불신을 품고 있었다. 결국 그들에게는 맘에 없는 싸움이었으니 승패는 여기에서 이미 정해진 것이다. 지휘관인 폼페이우스도 그 끝이 온전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이집트에서 비참하게 암살당하고 카이사르는 일센티미터의 코를 오늘날까지 남기는 '트러블 메이커', 클레오파트라를 만나서 자식까지 얻는다. 이 무렵 카이사르는 우리 생활에 필수인 달력을 현실에 맞게 개정했다. 대다수 서민들은 이런 사소한 배려를 고마워한다는 것을 아는 '허영심 많은'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큰 일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중 하나가 사실상,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과두정의 폐지와 제정의 성립을 의미하는 정치 개혁이었다. 당연히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한 불평 분자는 생겨날 수 밖에 없었고, 그 분출은 너무도 불쾌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끝은 결국 카이사르의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아쉬운 죽음이었다. 어쩌면 한 일보다 할 일이 더 많았을 지도 모르는 그였지만, 자신의 붉은 피로 로마의 대지를 적시고 말았다.

 카이사르 본인의 예상보다 10년은 일찍 전개되고야 만 이 상황으로 말미암아 약관 18세의 나이에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와 한창 혈기왕성한 장년에 스스로 카이사르의 후임자임을 공언하는 안토니우스 사이에 제2의 내란이 벌어졌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필 안토니우스에게 끼어든 클레오파트라로 인해 안토니우스의 치밀하지 못한 성격은 그녀의 천박함과 어우러지고 만다. 그 결과로 둘은 서로의 결애서 떠나고 파르살루스 평원에 이어서 악티움 해역에서 카이사르의 이상(理想)은 두 번째 대승을 거두고, 그의 갈 길을 만천하에 알린다.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 사상의 쌍벽이라던 키케로의 죽음을 끝으로 과거의 인물은 가고 새 시대가 다가온다. 아우구스투스의 팍스 로마나의 시대가.(1997. 10. 13∼20, 1997. 10. 20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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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4 -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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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 이번 권의 제목이 다름 아닌 그의 이름이었고 그 분량까지도 상 하로 나뉠 만큼 상당한 것이어서 이 인물에 대해 어느 때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다. 그의 심모원려(深謀遠慮)를 나 같은 이가 어찌 알리요마는, 카이사르는 그 당시의 로마와 같은 변혁기에 나오는, 이른바 하늘이 낳은 인물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자신이 그의 자유분방함을 가두는 영웅(英雄)의 자리를 마다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하늘이 채워준 그릇을 그냥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남보다는 훨씬 크지만, 역시 그들과 같이 비어있는 자신의 그릇을 홀로 채워나갔다. 그러한 큰그릇을 채우려면 범인(凡人)들이 가진 한두 가지 능력만으로는 가능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쉬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데 멈춤이 없었다. 그는 일생동안 자신의 그릇을 채워나갔던 것이다. 특히 기원전 60∼49년에 걸친, 이번 권의 대부분을 할애한 갈리아 전쟁은 저자의 풍부한 자료 제시와 마치 그곳에서 직접 취재하는 듯한 정학한 기술로 카이사르의 격에 맞는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기술과 자료마저도 카이사르가 직접 써서 남긴 '갈리아 전기'가 그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일분일초가 급한 전쟁터에서 글을 쓰는 그 여유도 여유려니와 자신의 패배까지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대로 기록하는 그의 솔직함에도 호감이 갔다. 그러나 실제로 카이사르의 패배는 손에 꼽을 정도여서 싸울 때마다 이긴다는 상승장군(常勝將軍)의 칭호가 아깝지 않았다. 말 그대로 생과 사가 오가는 전쟁터의 현장감을 그대로 전하는 그의 손끝에서 카이사르는 수 천년 후의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그 자신을 스스로 창조했다. 더군다나 그가 이룩한 찬란한 승리의 뒤에는 항상 그만의 기민한 정보 수집과 시의 적절한 활용이 있음을 알았을 때 오늘날 강조되는 정보전의 중요성을 기원전의 그 시대에 알고 있었던 통찰력에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정보의 위력은 그의 '정치적' 전쟁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본국에서도 한참 떨어진 전쟁터에서 수도의 정국을 낱낱이 파악하는 예리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던가.

 이렇게 빈틈없는 카이사르가 이루려는 야심만큼 허영심도 많은 사람이라는, 허영심이란 다름 아닌 남에게 잘 보이고픈 마음이라는 작가의 새로운 해석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에서 즐겁게 해주었다. 카이사르는 전쟁 내내 문화와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현지민들에게 과시하는 여러 가지 공사를 벌였다. 현지만에 대한 과시, 곧 허영심과 당장 로마의 우위를 피지배층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당장의 필요성을 동시에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의 이런 다중효과를 노리는 성향 또한 그가 항상 이길 수 있는 키워드의 하나였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기울여 로마의 밖을 다질 즈음, 안에서는 나날이 위세를 더하고 기세를 드높이는 그의 축출을 위해 조용하지 못했으니, 언제 들어도 결의에 찬 사자후(獅子吼)를 루비콘 강가에서 터뜨린다. "나아가지,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마의 혼미가 기다려온 위대한 개인, 그 자격의 시험이 시작되는 것인가? (1997. 10. 3∼13, 1997. 10. 13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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