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네요! 푸른 님 이름이랑 구슬 님 이름을 영어로 하면 블루와 마블이니까 부루마블이랑 마찬가지네요. 진짜 신기한 우연이다."
루미가 재밌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푸른은 루미의 말을 흘려들으며 구슬을 봤다.
‘구슬 님도 나랑 부루마블을 만들게 될줄은 몰랐겠지? 귀찮은 일을 떠맡아서 기분이 안 좋으려나?‘
그때 푸른과 눈이 마주친 구슬이 활짝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가슴이 설렜다. 푸른은 부푸는 기대를 애써 억눌렀다.
‘김칫국 마시지 말자. 저건 업무용 미소야. 동료를 향한 사심 없는 미소. 예의상 짓는 미소라고. 나랑 일하게 돼서 짜증 난다는 티를 낼 수는 없으니까 억지로 웃는 걸 거야.‘
하지만 억지로 웃는다기에는 너무나 밝은 미소였다. 푸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미소를 외면했다. 사실은 기뻤다. 따로 보상도 없고 기한도 촉박한 일을 떠맡게 된 건 귀찮았지만, 그 일을 구슬과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대됐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 P8.9

얼마나 깊게 빠지든 모든 사랑은 지나간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푸른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왔다. - P9

구슬은 익숙한 동작으로 보관대에서 자전거를 빼내어 타더니 금세 멀어졌다. 푸른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구슬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사실은 집이 어디인데 걸어가느냐고 물어봐주길 바랐다. 합정역 근처에 있는 회사에서 당산역과 영등포 사이에 있는 집까지 걸어가면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푸른은 사람으로 꽉 찬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것보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걸어서 가는 것이 좋았다. - P13

"그래, 그럼 평생 이렇게 갇혀 있든가. 나도 시계에 갇혀 있나 이 방에 갇혀 있나 그게 그거야. 시계보단 여기가 낫지. 너랑 나랑 평생 여기서 둘이 살자. 어차피 금방 굶어 죽을 거라 같이 오순도순할 시간이 그리 길진 않겠지만." - P27

"아니,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널 좋아하는지 아닌지에 달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에 달린 게 아니야. 말도 안 되는 핑계 대지 말고 얼른 전화해! 다시 말하지만 대단한 걸 하라는 게 아니고 전화만 하라니까?" - P28

"모노폴리라는 게 기본적으로 부동산 독점을 바탕으로 만든 게임이잖아요. 부루마블은 모노폴리의 일종이고요. 저는 솔직히 좀 거부감이 들어요. 다들 부동산 가격이 미친 도시에 살면서 집값 때문에 허덕이는데, 부동산 독점 게임을 만들고 즐긴다는 게 별로예요."
구슬은 그동안 이런 비판적인 이야기를 꺼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조금 편해지신 걸까?‘ 생각하면서 푸른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 P47.48

"아니에요. 모노폴리는 원래 부동산 독점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임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허무함이 모노폴리 게임의 진짜 정서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잠깐 꾸고 마는 꿈이 정말 의미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 저한텐 그런 게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꿈이 끝나면 현실로 돌아와도요?"
"글쎄요, 그거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저는 꿈이 현실을 바꾸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눈앞에 놓인 상황만 생각하면서 그게 현실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체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그것보다는 내가 원하는것을 꿈꾸고, 그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쪽이 훨씬 더 좋아요."
푸른은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해놓고는 민망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 P49.50

"자전거를 타고 전 세계를 도는 거예요. 말도 자전거 모양으로 하고, 도시마다 있는 자전거 타기 좋은 길도 소개하고요. 방금 떠오른 거라 아직 구체적인 건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푸른의 이야기를 듣고 구슬도 표정이 밝아졌다.
"좋은데요?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별장이나 호텔을 짓는 대신 공공건축물을 지어도 좋겠어요. 미술관이나 도서관 같은 거요. 복지 센터도 좋고요. 도시에 건축물을 지으면 거기에 게임 참여자의 이름이 붙는 거죠." - P55

"당신이 정말 좋아." 중얼거리고는 자신의 마음이 그 말로 가득 차서 울리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좋아. 정말, 정말로. 당신이 너무 좋아.‘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푸른은 가만히 누워 구슬을 떠올렸다. 사랑이 편안한 적은 처음이었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사랑은 처음이었다. 그저 더 다가가고 싶기만 했다. 더 가까이. 구슬의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지금 이 순간 푸른은 구슬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사랑하고 있었다. - P70.71

"저녁 드셔야죠."
구슬이 상자 뚜껑을 덮으며 말했다.
푸른은 감사하다는 말이 툭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담담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배고프네요.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 P109

"아니요. 그건 하나도 안 부담스러웠어요.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어요, 푸른 님 고백."
구슬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러면 그날 왜 그렇게 가신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푸른 님 방 문이 열려 있어서 무심코 안을 봤는데 뻐꾸기는 말하고 있고, 푸른 님은 주사위를 던지고, 침대 위에서 폭죽이 팡팡 터지고. 내가 모르는 이상한 게임이 펼쳐지고 있는데 푸른 님 같으면 거기 계시겠어요? 아무렇지 않게 방으로 들어가서 이게 다 뭐냐고 물어볼 수 있으시냐고요."
"못 물어봤겠죠. 너무 당황하고 놀라서 일단은 밖으로 나갔을 것 같아요."
"저도 그랬어요."
"그랬군요."
두 사람은 어색하게 골목에 서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 P119.120

"제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게임은 아니었지만, 중반부터는 제 의지였어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겁이 많은 성격이에요. 특히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에게 거부당할까 봐 겁부터 나서 다가가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열심히 도망가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요. 그런데 게임을 시작하고 나니까 도망가는 게 불가능해졌어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했죠. 먼저 전화도 하고, 뭘 하자고 이것저것 제안도 하고요. 실은 연락드릴 때마다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는데 구슬 님은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전 구슬 님하고 시간을 보내는 게 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너무 행복해서 계속했던 거예요. 항상 도망쳤지만 이번에는 끝까지 가보고 싶어서요." - P121.122

"어쩌면 신들이 장난을 친 걸지도 모르겠네요."
신들의 장난. 푸른은 구슬의 말뜻을 금세 알아들었다. 푸른이 구슬에게 고백한 직후에 일부러 ‘고백하기‘가 나오도록 장난을 친 거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지 같은 보드게임을 만든 자들이라면. - P123.124

"혹시 보드게임 담당 뽑는 주사위 던지기 했을 때도 구슬 님이 원하는 숫자가 나오게 하셨던 거예요?"
몇 번의 입맞춤 후에 푸른이 구슬에게 물었다.
"네, 푸른 님이 절 좋아하신 것보다 제가 먼저 푸른 님을 좋아했거든요."
"말도 안 돼. 언제부터요?"
"푸른 님을 처음 본 순간부터요."
"그럼 저보다 더 먼저 좋아하신 건 아니네요. 저도 구슬 님을 처음 본 순간부터 반했거든요."
"영광이네요."
"저도 영광이에요."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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