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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치고 지방에 시오리(枝折) 고개라는 험준한 곳이 있다.
일대에 너도밤나무 거목이 빽빽해서 한낮에도 어두운 비경이다. 먼 옛날, 다이라노 키요모리에 의해 도읍에서 쫓겨난 후지와라 사부로후사토시가 오제로 향하다가 이 너도밤나무 숲에서 길을 잃어 고초를 겪고 있을 때 신비한 동자가 홀연히 나타나 나뭇가지를 꺾으며 일행을 산꼭대기까지 인도했다는 고사가 있는 까닭에 시오리 고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아즈키아라이) - P9

그때 세계가 엔카이의 내부로 흘러들어 쏴아아아, 하는 빗소리는 엔카이의 몸을 흐르는 혈류의 율동과 동조해 토막토막 단절되었다.
쏴. 쏴. 쏴. 쏴. 쏴. 쏴. 쏴. 쏴.
‘이곳은 이 장소는.‘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모든 것은・・・・・・ 모든 것은 이곳에서부터. (아즈키아라이) - P1415

네? 내가 무엇으로 밥벌이를 하냐고요?
보다시피 인형사, 산묘회(山猫廻し, 야마네코마와시. 에도 방언으로 인형사를 이름.)지요.
산묘라. 참, 산묘는 사람을 홀린답니다. 알고들 계시려나? 예, 족제비, 오소리, 여우에 너구리, 인간을 홀리는 짐승은 많고도 많지만요, 산묘도 홀린답니다.
거짓말이라고요? 천만의 말씀. 집에서 기르는 괭이도 홀리는걸요. 그 왜, 괭이는 기르기 시작할 때 기한을 말하지 않으면 해코지를 한다든가, 나이를 먹으면 둔갑을 한다지 않습니까?
그래, 네코마타(猫双, 꼬리가 둘로 갈라진 일본의 고양이 요괴.)라고 하던가요. (아즈키아라이) - P2122

살결이 희면 일곱 가지 결점이 가려진다고들 하지만, 정말로 새하얀 살결이었지요. 음식을 먹으면 목에 고스란히 비쳐 보일 정도・・・・・・라고 하면야 당연히 과장이지만요. 예? 나도 그렇다고요? 어머나, 세상에. 언니는 나처럼 되다 만 미인이 아니었답니다. (아즈키아라이) - P24

시집을 가면 더는 아가씨가 아닌걸요.
부농의 며느리란 몸만 고달파질 뿐이잖아요. 탱탱한 피부도 윤기를 잃고, 날렵한 손가락에도 마디가 생기고. 그건 당연하지요. 나이 먹으면 누구나 그렇게 되니까요.
다만・・・・・・ 예, 뭐랄까요. 반짝반짝, 아가씨한테만 있는 광채 같은 것이 시집을 가자마자 스윽 하고 꺼져버리는 듯한 기분이었달까요. (아즈키아라이) - P2526

그 후 며칠이 지나서 언니가 죽었습니다. 아사로 말이지요.
그럴 수밖에요. 뼈와 거죽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시신 주위에는 산묘의 털이・・・・・・.
예에, 많이도 떨어져 있었답니다. (아즈키아라이) - P36

한편, 행상인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전형적이어서 어조는 익숙하나 그 전개가 보이므로 무섭지가 않았다.
괴담이란, 기교만으로는 타인을 사로잡지는 못하는 것이다. (아즈키아라이) - P38

그래,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
팥을 이는 소리란 애당초 인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천연적 자연이 내는 소리의 부류는 아니다. 그러하기에 산속이나 물가,
사람이 있을 리 없는 장소에서 그 소리를 듣게 되면 기이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다듬이벌레는 분명 아즈키도키무시로 불리는 듯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모모스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즈키아라이) - P46

소인은 빗추야 도쿠에몬이라고 합니다.
에도 쪽에서 잡곡 도매상을 꾸려가고 있는 늙은이올습니만・・・・・・ 아, 아니,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뒷방 늙은이니까 꾸려가고 있다며 큰소리를 치지는 못하겠군요.
뭐, 팔자 좋은 영감인 겝니다.
예에, 아즈키아라이란 말이지요.
그건 여러분, 유령이올습니다.
예, 한을 남기고 죽은 동자가 촤륵 촤륵 팥을 일고 있는 게지요. 예에? 예에, 소인이 알고 있는 아즈키아라이 괴담은 그러한 것이올습니다. 저희 가게는 니혼바시에 있습니다만・・・・・・ 참, 그렇지. 거기 어행사, 에도에도 아즈키아라이는 분명히 있다네. (아즈키아라이) - P48

후계자가 없다.
뭐,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행수를 양자로 들였습니다.
허나 오 년 전까지는 소인도 정말이지 바빴습니다. 잡곡상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 일이 무척이나 바빠서 말입니다.
매집하기 위해 여러 지방을 돌아야 하는 데다 잡곡도매상조합의 간부까지 맡고 있었으니 가게를 비울 일도 많아서 세세한 일에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였지요. (아즈키아라이) - P49

어찌 그러시는지요. 스님. 안색이 좋지 않으시군요. 예? 불빛 때문이라고요?
그렇군요. 그럼 다행이지요. 하긴 초도 이제 불안해 보이니까요. 아침까지 버티기나 할까요.
아아, 새것이 있다고요? 그 시주함 속에? 과연 어행사이십니다. 준비가 철저하시군요. (아즈키아라이) - P52

원래 지나고 나면 대부분은 꿈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즈키아라이) - P62

엔카이는 리쿠라는 이름에 반응했고, 야스케라는 이름에 떨었으며, 다쓰고로란 이름에 전율했으리라.
사정을 모르는 자로서는 전혀 맥락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범인 말고는 알 수 없는 공통점이다. 그리고 엔카이는 그 세부사항에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반응한 것이다. (아즈키아라이) - P6970

가이 지방에 유메야마(夢山)라는 이름의 산이 있다.
단풍의 붉은빛과 솔의 푸른빛, 그림자와 빛과 안개와 구름, 그 형형색색의 빛깔이 혼연일체가 되어 산속인지 꿈속인지 실로 몽롱하고 모호하니, 우러르는 자 보는 자 한결같이 아득하게 피안을 감득(感得)하고, 들어서는 자 걷는 자 그저 현기를 느끼노라면 살아 있으면서 황천길로 흘러든 듯한 기분에 빠진다. 낮이라 짙은 어둠만 없을 뿐, 여기저기에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허물어져 있는 까닭에 유메야마라고 불리는 것이다. (하쿠조스) - P75

야사쿠는 여우사냥의 명인이었다.
미끼는 곰의 기름으로 조린 쥐. 여우덫.
그것은 신바람이 나도록 잡혔다.
잡아서 죽이고, 잡아서 죽이고.
먹기도 했다. 그러나 먹기 위해 잡은 것은 아니다.
팔기 위해서이다. 여우는 죽으면 돈으로 둔갑했다.
가죽을 벗겨 저자에 내어놓으면 신바람이 나도록 팔렸다. (하쿠조스) - P77

"남정네 상대로 시건방진 말을 하는 것 같은데요, 요물이란 있지 않을까 의심할 때는 반드시 나타나고, 없다고 여기면 결코 아니 나오는 법. 두렵다고 생각하면 낡은 우산도 혀를 내뽑은 채 손짓을 할 테고, 고목에 걸린 헌 짚신도 삿갓 안을 들여다보겠지요. 세간에서 요괴로 불리는 무리는 모조리 사람이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니, 당연히 스스로 내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쿠조스) - P87

홀이고 짝이고, 도박장은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 도박장을 거머쥐고 있는 자는 흑달마 고산타라는 시골 협객으로, 이 인물 역시 웬만한 수는 먹히지 않는 악당이었다.
그 흑달마가 느긋하게 계집의 무릎을 베고 술을 홀짝이고 있던 차에 귀호 광란의 소식을 받았다. 강자를 꺾어 약자를 돕는 것이 협객이 협객인 이유・・・・・・라고는 하나, 그것은 허울 좋은 이야기.
이 달마, 부하들의 수도 많으며 한 번에 열다섯은 죽일 수 있는 실력이라고 평판이 자자한 괴물이었으나, 호쾌한 소문에 비하면 인색한 자로서 남의 고통은 나 몰라라 하는 주제에 자신의 것이라면 먼지 한 톨도 아까워하는 수전노였다. 이날 이때껏 귀호의 악행삼매에 여염 사람들이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설사 악귀이든 뱀이든 도박장의 상객(上客)임은 틀림없지 않느냐고 주절대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하니, 오히려 협객 망신이나 시키는 비열한 사이비인 것이다.
참으로 이기적인 사내인 만큼 자신의 도박장이 어지럽혀졌다는 말을 듣자마자 머리 꼭대기까지 피가 거꾸로 솟아 똘마니들을 모을 수 있는 만큼 긁어모아 다급히 달려갔다. (마이쿠비) - P149

스루가에서 벤 자는 관리인 듯했다.
칼이 원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피는 날을 부식시킨다. 뼈를 치면 이가 나가기도 한다. 도신도 휜다. 한 사람을 벨 때마다 즉시 손질하지 않으면 칼은 곧 못쓰게 된다. 그러나 칼 손질은 의외로 어렵다. 연마사는 그 무기가 무엇을 베었는지를 한눈에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리 되면 거기에서 꼬리가 잡힌다.
여행지에선 한층 더 어렵다.
그래서 마타주로는 벤 상대가 찬 칼을 갖기로 했다. 그 편이 수월했다.
그 관리는 신분에 맞게 좋은 칼을 갖고 있었다. 얼간이 관리의 허리에 매달려 있어봤자 평생 뽑히는 일은 없으리라, 마타시게는 그렇게 생각했다. 칼이 딱해서, 그래서 관리를 베었다. 빼앗은 칼은 눈여겨본 것 이상으로 좋은 칼이었다. (마이쿠비) - P156157

그 외에는 인형극을 하는 이치무라 극단 사람들밖에 없다.
이치무라 극단은 이미 십 년 전부터 여름마다 가설극장을 세우는 친숙한 극단이다. 단장인 마쓰노스케는 번주(藩主)님도 배알하고 있다는, 이른바 공인받은 연기자였다.
아와지에서는 역대 번주의 비호도 있었던 덕분에 인형극이 특히성했는데, 현 번주는 유달리 인형극을 좋아해서 일반 백성에게도 보급되도록 크게 장려하고 있다. 아와지 인형은 바야흐로 명물이 되었으며, 마을에서도 흉내를 내고 있을 정도이다. 다시 말해 마쓰노스케 극단은 거의 상의(上意)를 받드는 형태로 순회흥행을하고 있는 것이다. (시바에몬 너구리) - P218219

이를테면, 처녀인형을 놀린다고 치자. 놀리는 마쓰노스케는 물론 처녀가 아니다. 그러나 인형은 의심할 바 없이 처녀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형이 갖추지 못한 점은 움직이는 힘뿐인 것이다. 처녀로서의 혼은 이미 그 형상에 있다. 그러므로 힘을 내고 있는 것은 마쓰노스케이지만, 조종하고 있는 것은 인형이라는 얘기가 된다. 인형극이란 인형을 이용해 조종자가 연극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인형이 연극을 하기 위해 조종자의 힘을 빌리고 있을 뿐이다. 주역은 인형인 것이다.
불사(佛師)가 조각을 하면 단순한 나무도막이 영험한 불상이 되지 않는가. 불상은 나무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부처의 모습을 띠면 영험을 보인다. 혼은 형상에 깃드는 것이다.
인형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거룩한 복덕이야 없겠으나 말하고 우는 정도는 한다. 모종의 힘이 더해지면 걷기도 하리라. (시바에몬 너구리) - P232

그러나 최근에는 말고기 조달이 어려워졌다.
쓸모없는 말이나 병에 걸린 말도 속여서 팔아치우게 되었으므로 죽는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보유하고 있는 말도 여행 중 타지에서 죽는 비율이 많아지고 있었다.
헤이스케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말꾼들은 공들여 키우는 말이 예쁜 것이다. 남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싫은 것이다. 때문에 말꾼들은 죽을 것 같은 말이 있으면 일부러 먼 곳까지 데려가 노상에서 임종을 맞이하게 한다. 그렇게 하면 당연히 여행지에서 매장하게 된다. 말 시체를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말 공양을 할 수 있다. 이런 것이다.
지난 달, 마침내 말고기가 바닥이 났다. 그러자 초지로는 헤이스케에게 살아있는 말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헤이스케는 말꾼이 아니므로 말을 죽인 적이 없다. 게다가 말꾼들에게 부탁해본들 받아들여줄 리가 없었다. 헤이스케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한밤중에 가장 쇠약해진 말을 죽이고 말았다. (시오노 초지) - P370371

흉사가 계속 이어져도 ‘야나기야의 주인은 여복이 없다. 자손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은 안됐다‘ 라는 식으로, 일반적인 불행으로서 여겨졌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장사가 잘 풀려갔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번영하는 것에 반항하는 자는 역시 적었던 것이다. (야나기온나) - P403

"뭐, 재난이란 소나기 같은 거라서 별안간 들이닥치는 법이니까. 피하려고 한들 피할 수도 없지. 언젠가 나나 너나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거야. 일단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까 된 걸로 칠 수밖에는 없겠지." (야나기온나) - P416

그렇지. 마음의 문제라고.
산천초목 어떠한 것에도 불성이 있다고 스님도 말씀하셨어.
그러니 나무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은 발칙하기 짝이 없는 게지. 고맙다는 생각은 못할지언정 소홀히 다루어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느냐고.
수목이 있기에 집도 지을 수 있고 음식도 할 수 있으며 국도 뜰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자인 게지. (야나기온나) - P425

그렇지. 인간이란 두려움을 잊으면 끝이야.
신령님이든 부처님이든 뜰의 거목이든 뭐든 상관이 없어. 진심으로 두려움을 가지고 모시면 겸허한 기분이 되잖나. 그게 중요해, 신불도 믿지 않고, 나무는 베어버려. 그래서야 아무리 사람이 좋은들, 뭔가에 저주받더라도 할 말이 없어. (야나기온나) - P428429

바람이 불었다지.
휘익, 하고.
그러자 울던 아이가 조용해졌어.
이제야 잠이 들었구나 싶었다더군.
그래서 이불에 뉘려고 이렇게 걸어갔어. 그러자 뭔가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더란 말이지.
이상하다 싶어서 돌아보니 수양버들의 기다란 가지 하나가 등에 걸려 있었다고 하더구먼.
뭔가 싶어 툭 떨쳐봤지.
이게 떨쳐지지가 않아.
몇 번을 떨쳐도 안 떨어져.
잡아서 세게 당겨보니 등이 들썩 하더라는 거야.
그제야 정신이 확 들어서 포대기를 벗기고 아이를 내려놔보니・・・・・・.
그래.
버드나무 가지가 몇 겹이나 아이의 목을 감고 있었다더구먼. (야나기온나) - P430

교토 서쪽에 가타비라가쓰지라는 갈림길이 있다.
동으로는 우즈마사, 북으로는 히로사와에 이르고, 북동으로는 아타고토기와로 빠지며 서로는 사가아다시노로 이어지는 사통팔달한 도로의 갈림길이기는 하나, 그래도 어딘가 오갈 데 없는 감상이 피어오르는・・・・・・ 길이 갈라지는 곳이 아니라 길의 끝 같은 풍취의 갈림길이다.
그도 그럴 터.
갈림길에 서서 서쪽을 바라보면 그 앞은 인간들이 덧없는 생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가는 곳, 무덤이다. 염불사 팔천 석탑 아래에 잠든 무연불과 오구라 산기슭에서 바스러져 모래가 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자가 거하는, 그야말로 이 세상의 끝인 것이다. (가타비라가쓰지) - P487

마타이치는 그렇게 말했다.
"무리하게 쥐어흔들고, 찬물 끼얹고, 볼때기 때려서 눈을 뜨게해봐야 좋을 것 없어. 이 세상은 모두 거짓투성이야. 그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니 어딘가에서 무너지는 거야. 그렇다고 눈을 떠서 진짜 현실을 보게 되면 괴로워서 살아가지 못해. 사람은 약해. 그러니까 거짓을 거짓으로 알고 살아간다. 그것밖에 길이 없는 거라고. 연기 피우고 안개 속에 숨으며 환상을 보고, 그래서 만사가 원만하게 수습되는 거라고. 그렇지 않나?" (가타비라가쓰지) - P50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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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와 문자가 나열된 수식이 어떻게 의생명과학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일까요? 이는 수학이 복잡한 생명현상을 컴퓨터가 이해하기 쉽게 묘사할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의생명과학 분야의 지식들을 디지털 공간에 구현하고, 컴퓨터를 이용해 데이터를 분석하거나 가상 실험을 진행할 수 있게 됩니다. 다양한 분야의 수학 덕분에 생명과학의 여러 난제들이 시시각각 해결되고 있지만, 이 책은 그중에서도 특히 미적분학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 P13

속도 = dx/dt

믿기지 않겠지만, 우리는 방금 미분의 핵심을 다 배웠습니다. dx/dt는 x의 미분인데, 이는 다름 아닌 자동차가 움직이는 속도입니다. 즉, 자동차가 움직인 거리 x가 얼마나 빠르게 변하는지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미분입니다. 이 책에서 이것만 기억합시다.

미분은 현재 속도. - P27

속도(dx/dt)로부터 움직인 거리(x)를 구하는 것이 적분. - P28

그렇습니다. 적분은 ‘쉽게 측정할 수 있지만 그다지 관심 없는 속도‘로부터 ‘궁금하지만 측정할 수는 없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즉,

미적분학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 P30

dX/dt = X/24

이 식에 따르면 세포의 증가 속도는 현재 세포의 수인 X에 비례합니다. 즉, 현재 세포 수가 240개라면 그 속도는 10이 되고, 2,400개라면 그 속도는 100이 됩니다. 자연스러운가요? 잘 이해되지 않는 분들은 한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쪽이 인구 증가 속도가 빠를지를 생각해 봅시다. 중국이 훨씬 빠르겠지요? 왜 그럴까요? 인구 증가 속도는 현재 인구수가 많을수록 빨라지기 때문입니다. 암의 경우에는 세포분열 속도가 훨씬 빠른데, 예를 들어 20시간마다 분열하는 암세포의 증가 속도는 dX/dt = X/20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 P40

요컨대 처음 세포 수를 바탕으로 그 증가 속도가 24시간 동안 일정하다고 가정하면 24시간 후에는 세포 수가 2배로 증가하는 것이고, 세포가 늘어나는 것을 실시간으로 반영해주면 24시간 후에는 세포 수가 자연 상수 배(대략 2.7배)로 증가하게 됩니다. - P44

미분은 속도 변화를 직관적으로 묘사하게 해주고, 이것의 적분은 직관적이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게 해줍니다. - P48

왜 우리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요? 이 계산 결과를 보기 전까지 우리는 감염 속도 상수인 k 값이 얼마나 크고 작은지에 따라 감염 속도가 결정된다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이 예상은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렸습니다. K 값이 크더라도, 정상 세포 수 X와 감염 세포 수 Y가 줄어들어서 KXY 값이 작아지면 감염 속도는 느려질 수있습니다. 반대로 k값이 작더라도, 정상 세포 수 X와 감염 세포 수 Y가 많아지면서 KXY 값이 커지면 감염 속도는 빨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앞의 그래프를 보면 KXY 값이 작아진 시점에는 감염 속도가 줄어들어 다시 X가 증가하게 되고, KXY 값이 커진 시점에는 감염 속도가 빨라지며 Y가 감소하게 됩니다.
이렇게 계산 결과를 보면 납득이 가지만, 이 결과를 보기 전까지 정상세포와 감염 세포의 수가 오르락내리락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컴퓨터를 이용하기 전에는 우리가 직관을 이용해 얻은 결과들이 언뜻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우리의 직관에 잘 와닿지 않더라도 정상 세포와 감염 세포의 수가 오르락내리락하며 서로 공존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시스템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이보다 훨씬 복잡한 실제 생명 시스템을 인간의 직관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불가능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결론을 내릴 가능성도 높습니다. - P5354

하지만 해외를 가지 않더라도 시차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금요일 밤입니다. 수많은 학생과 직장인이 금요일 밤마다 일주일 동안 공부하거나 일한 것을 보상받기 위해 늦게까지 잠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날 늦게 잠들면 다음 날 늦은 시각까지 일어나지 않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체 시계에 들어오던 빛도 다른 시각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때 우리 몸은 시차를 겪게 됩니다. 이를 ‘사회적 시차‘라고 부르지요. 그 결과로 우리는 월요일에 등교하거나 출근해서 마치 해외에서 시차를 경험하듯이 피곤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주말에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잠들어도 월요일에 등교하거나 출근하는 것은 힘들겠지요. 덜 힘들 뿐. 그럼에도 금요일 밤 늦은 시각까지 깨어 있는 달콤함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 싶다면, 스마트폰이나 스마트 TV에 설치되어 있는 청색광blue light 방지 프로그램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생체 시계는 청색광에 가장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 P6566

이것으로 수리 모델로 예측한 1:1이라는 비율이 생체 시계가 음성 피드백 루프를 통해 24시간 주기의 리듬을 만들어 내는 핵심 원리임을 검증할 수 있었습니다.
이 연구 덕분에 미시간대학교에서 최고의 수학박사 학위 논문에 수여하는 섬너비마이어스상Summer B. Myers Prize을 받았습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였는데, 바로 다음 해에도 한국인 졸업생이 수상했습니다. 다름 아닌 최근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였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먼저 태어나 한 해 일찍 입학한 것이 참 다행입니다. - P8485

노벨상 수상자들이 발견한 생체 시계의 음성 피드백 루프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그림 3.14 왼쪽 위). 이 피드백 루프를 열심히 바라보고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R과 A의 비율 1:1일 때 리듬이 만들어진다고 예상할 수 있을까요? 직관만으로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획기적인 것을 넘어서 천재적인 발상마저 필요합니다. 반면 이 음성 피드백 루프를 미분방정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적절한 대학 수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해낼 수 있는 일이고(그림 3.14 왼쪽 아래), 이 미분방정식을 푸는 것도 기초 프로그램만 사용할 줄 알면 컴퓨터를 시켜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습니다(그림 3.14 오른쪽 아래). 마지막으로 24시간 주기의 리듬이 나오는 조건을 찾는 것 역시 대학원에서 다루어지는 수학 내용을 열심히 따라간 이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수학을 이용하면 1:1이라는 비율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됩니다. 즉, 우리의 직관만으로는 결코 떠올릴 수 없거나 천재적인 발상을 필요로 하는 예측을 수학을 이용해 손쉽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수학을 생명과학에 접목하는 중요한 이유 하나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생명 현상을 컴퓨터가 이해하는 언어로 번역해 놀라운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P8586

이를 바탕으로 생체 시계에는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 생체 시계가 빨라지지 않도록 반대로 느리게 만들어 주는 메커니즘, 즉 온도 보상 메커니즘이 존재할 것이라는 가설이 세워졌습니다. 이후 기술이 발전해 포유류의 생체 시계도 실험실에서 배양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실험실의 온도를 올려주었더니 유사하게 생체 시계 주기가 거의 변화하지 않고 살짝 길어지는 것이 관찰되었습니다. 그림 3.15의 그래프와 같이, 온도가 10도 올라가더라도 생체 시계 주기가 0.5시간 더 길어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온도 보상 메커니즘을 대다수 생명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그리고 정말 독특하게도, 생체 시계만이 온도 보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예를 들어, 대략 1초에 한 번씩 뛰는 심장 박동은 온도가 10도 올라가면 2배 더 빨리 뛰고, 세포가 분열하는 주기도 10도 올라가면 약 2분의 1로 짧아집니다. - P8990

모든 생체 시스템 가운데 오직 생체 시계만이 가지는 이 신기한 온도 보상 메커니즘을 찾기 위해 수많은 생명과학자들이 밤낮없이 수십 년간 도전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박사과정 당시 저 역시 직관적으로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이 매력적인 문제에 흥미가 생겼습니다. 지도교수인 대니얼 포저 Daniel Forger에게 이 난제에 도전해 보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교수님의 표정이 곧바로 어두워졌습니다. 너무나 매력적인 문제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자신을 비롯해 수많은 연구자들이 몇십 년간 도전하다 실패한 성배와 같은 연구로서 실패 확률이 너무 높아 추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자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다음 날 저에게 논문으로 가득 찬 박스 2개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본인이 학생 때부터 이 문제를 연구하면서 하나둘 모아놓은 논문들인데, 이 논문들부터 읽어보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어떻게 실패했는지 알아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여름방학을 수백 편의 논문을 읽고 정리하면서 보냈습니다. 다 읽고 나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아무리 공부해도 기존의 연구에서 제시된 아이디어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괜한 의욕에 소중한방학을 헛되이 보낸 것 같아 너무나 속상했습니다. 그렇게 온도 보상 메커니즘은 저의 마음속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 P9091

이 연구는 「피리어드 단백질 인산화 스위치와 일주기 온도 보상 메커니즘A Period2 Phosphoswitch Regulates and Temperature Compensates Circadian Period」이라는 논문으로 2015년 가을 《몰레귤러 셀Molecular Cell》을 통해 출간되었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저의 소속이 미시간대학교, 오하이오주립대학교, KAIST로 되어 있는데, 이는 대학원생 때 시작된 연구가 박사후 연구원을 거쳐 교수로 일할 때까지 이어진 덕분입니다. 그 후 지금까지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왜 온도에 따라 느린 분해 자리가 빠른 분해 자리에 비해 더 민감한지도 알게 되었고, 생체 시계 분야의 많은 연구자들이 수리 모델로 밝힌 인산화 스위치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 P102103

앞의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면, 처음에는 인산화되지 않은 피리어드 단백질(그림 3.22 주황색 점)이 핵 주변으로 모입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는 핵 주변에 모인 피리어드 단백질의 농도가 충분히 높지 않아 인산화된 피리어드 단백질 (그림 3.22 보라색 점)의 수도 매우 적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더 많은 피리어드 단백질이 핵 주변에 쌓이면, 충분히 높은 농도에 이르러 마침내 다 같이 인산화가 일어납니다. 그•러고 나면 모두 자연스레 핵 안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피리어드 단백질들 사이의 ‘우정‘ 메커니즘은 피리어드 단백질의 인산화였던 것입니다. - P108

한편 하나의 피리어드 단백질이 핵 주변에 도착하는 시간은 매일 크게 변하지만, 피리어드 단백질 수천 개가 핵 주변에 도착하는 평균 시간은 매일 유사할 수 있습니다. 피리어드 단백질 하나가 핵 주변에 도착하는 시간의 분산보다 피리어드 단백질 1,000개가 도착하는 평균 시간의 분산이 1,000배 더 작기 때문입니다(그림 3.23). 개인은 부정확하지만 집단은 매우 정확할 수 있다는 이 원리를 생체 시계가 현명하게 이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산화가 일어나는 시점을 하나의 피리어드 단백질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피리어드 단백질로 결정함으로써 피리어드 단백질들이 매일 일정한 시간에 핵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 P109110

호기심에서 출발한 연구였지만, 이 연구 덕분에 불안정한 수면의 새로운 원인과 새로운 치료법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지방 액포와 같은 물질들이 세포 안에 과도하게 많아짐에 따라 세포가 지나치게 혼잡해지면, 피리어드 단백질이 핵 주변으로 오는 것이 어려워지고 핵 주변에 쌓이지도 않게 되는데요. 그러면 인산화가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아 피리어드 단백질이 핵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부정확해지고, 그 결과로 생체 시계도 부정확해질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지요. - P110

첫째가 갓 태어난 시기라, 집세 1,200달러를 지불하고 남은 600달러로 가족 셋이 빠듯하게 살고 있어서 저축한 돈도 없었습니다. 영어가 유창한 친구들은 방학 때 개설되는 계절학기의 강의를 맡아 월급을 충당했지만 저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방학 내내 월급을 받을 수 없다고 하니, 생계를 어떻게 유지할지 막막할 뿐이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갓 부임한 신임 교수인 대니얼 포저로부 터차 한잔 마실 여유가 있는지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지는 보스턴에 본사를 두고 있는 글로벌 제약회사 화이자에서 연구비를 지원받아 연구를 수행해야 하는데 아직 같이할 학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생체 시계‘라는 단어도 그 자리에서 처음 들어보았고, 입학 때부터 줄곧 지도교수로 삼고 싶었던 다른 교수님과 방학 동안 함께 공부하기로터라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포저 교수님이 덧붙인 말 한마디를 듣고는 아무런 고민 없이 곧바로 수락했습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방학 동안 1만 달러를 지급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 P116117

이번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기존의 치료 체계를 여러 관점에서 더 정밀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치료 시간의 관점에서, 그리고 성별의 관점에서 질병을 바라볼 때 비로소 더욱 효과적인 치료도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특히, 시간이라는 차원을 추가해 약의 효과를 예상하려면 시간에 따른 변화를 예측하는 미분방정식 기반의 수리 모델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 P132

계속되는 실패 속에서 1년을 보내며 모두가 지칠 무렵, 우연히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황소The Bull>라는 작품을 보게 되었습니다. 황소의 모습을 단순화해 핵심만 남긴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보는 순간, p53을 조절하는 분자들의 복잡한 그림도 핵심만 남기고 단순화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p53 단백질을 조절하는 기제들은 수십 가지가 있었지만 이것들이 모두 다섯 가지 범주(p53 단백질의 생산, 핵과 세포질에서의 분해, 핵과 세포질 사이에서의 이동)로 분류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 P138139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충청남도 ‘아산‘의 작은 병원에서 몇몇 의사를 대상으로 열리는 작은 세미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웬걸, 대구에서 나고 자란 저는 아산병원이 서울에 있는 매우 큰 병원이란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도착하고 나서 먼저 병원의 엄청난 규모에 놀랐고, 수학자의 강연을 듣기 위해 앉아 있는 수많은 의사들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 P148

첫 번째 수면은 실제 수면 시간(검은색 막대)이 수리 모델이 예측한 필요 수면 시간(회색 막대)보다 길기에 충분 수면(파란색 박스)입니다. 반면 두 번째 수면은 실제 수면 시간이 필요 수면시간보다 짧기에 불충분 수면(빨간색 박스)입니다. 재미난 것은 13번째 수면 시간이 16번째 수면 시간에 비해 짧음에도 13번째 수면은 충분 수면이고 16번째 수면은 불충분 수면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왜 발생할까요? 비밀은 매일 필요 수면 시간(회색 막대)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에 있습니다. 변화무쌍한 필요 수면 시간으로 인해, 어떤 날은 5시간만 자도 충분하지만 어떤 날은 7시간을 자더라도 불충분한 것이지요. - P155156

그러면 수면 충분 정도는 실제로 어떻게 늘릴 수 있을까요? 바로 취침 시간에 따라 수면 시간의 길이를 자연스럽게 조정하는 것입니다. 교대 근무자의 취침 시간은 오전, 오후, 밤, 새벽으로 다양합니다. 어떤 교대 근무자는 하루에 6시간은 무조건 자야 한다는 생각에 취침 시각과 무관하게 항상 같은 시간을 자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면 오히려 불충분 수면이 나올 확률이 높다는 것이 수리 모델의 예측이었습니다. 한편 길게 자기 어려운 오전 수면은 짧게 하고 긴 잠을자기 쉬운 밤 수면은 길게 하면 수면 충분 정도가 늘어날 확률이 커진다는 것이 수리 모델의 예측이었습니다. - P158159

모델이 예측하는 바를 검증하기 위해 교대로 근무하는 간호사들을 근무 중 주간 졸림증을 호소하는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취침 시각에 따라 수면 시간의 길이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모델이 예측한 대로, 높은 주간 졸림증 그룹은 취침 시간에 관계없이 늘 유사한 수면 시간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낮은 주간 졸림증 그룹은 밤잠은 길고 아침잠은 짧은 자연스러운 수면 패턴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 P160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제작된 애플리케이션SLEEPWAKE에서는 사용자의 각성 상태의 변화가 실시간으로 예측됩니다(그림 5.12). 예를 들어, 앱을 사용하면 주말 사이 평소와 다른 수면 패턴을 취할 때 월요일 오전에 각성 상태가 좋지 않아 ‘월요병‘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해외 출장으로 생기는 시차 부적응으로 낮 시간대의 각성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지요. 더 나아가, 오늘 어떻게 자야 내일 딱 원하는 시간에 좋은 각성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도 알려줍니다. 예를 들어, 다음 날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예정된 시험에서 높은 각성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고 입력하면 그날 어떻게 자야 다음 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이 모든 것은 수리 모델이 우리가 어떻게 자는지에 따라 다음 날 각성 상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예측해 주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 P165166

참고로, 인공지능도 다름 아닌 함수입니다. 예를 들어, 개나 고양이의 사진(X)을 집어넣으면 개인지 고양이인지 판단해 답(Y)을 주는 인공지능도 Y = f(x)의 형태를 갖습니다. 주어진 바둑판(X)을 바탕으로 다음 수(Y)를 예측하는 알파고도 Y = f(X) 꼴의 함수이지요. 주어진 도로 상황(X)을 바탕으로 어떻게 속도를 조절하고 핸들을 조정할지 결정(Y)을 내리는 자율주행 인공지능도 Y = f(X) 함수입니다. 인공지능의 f가 매우 복잡해서 학교에서 배우는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할 수 없을 뿐이지요. - P171

인공지능의 발달로 Y = f(X)을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를 이용하면 무궁무진하게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이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의 골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요? 먼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데이터 X가 무엇인지 탐색해 보아야 하고, 그 X를 이용해 어떻게 그보다 더 쓸모 있는 정보 Y로 변경할 수 있을지에 관한 아이디어가 필요합니다. - P172

인공지능의 본질은 Y = f(X)이고, 인공지능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데이터를 기하적인 구조로 바라보는 행렬과 벡터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 P173

전화의 주인은 아산의학상 수상자이자 바이러스 면역 분야의 국내 최고 전문가인 KAIST 신의철 교수님이었는데, 당시 교수님은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지요. 같은 학교에 있었지만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는데, 1시간가량 대화하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통화했습니다. 하지만 통화의 요점은 간단했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 수를 0명으로 만들겠다는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위해 정부와 온 국민이 노력하고 있는데, 누군가는 코로나19와 공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수학자로서 이 일에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지요.
처음에는 코로나19가 저의 연구 분야와 달라 조금 망설였지만, 누군가는 코로나19와 공존하는 미래를 계획해야 한다는 생각에 크게 공감했고 결국 함께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대화가 잘 통하는 연구자와 진행하는 공동 연구이기에 승낙한 것이었는데요.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 수십 명과 협력한 지난 10여 년간의 경험을 통해, 대화가 잘 통하는 연구자와 함께 진행하는 연구가 더 즐거울 뿐만 아니라 성공률도 더 높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연구 팀에는 코로나19 역학 분야 수리 모델링 및 데이터 분석 전문가인 최선화 박사(국가수리과학연구소), 이효정 교수(경북대학교), 최보승 교수(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감염 전문가인 노지윤 박사(고려대학교 의과대학)가 합류했고, 연구실 안에서 가장 훌륭한 연구 성과를 내고 있던 홍혁표 학생(현재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수학과 교수)이 연구를 주도하기로 했지요. - P179181

신의철 교수님 설명의 핵심은 코로나19에 감염되거나 백신 접종을 맞은 이들이 두 가지 면역을 얻는다는 데 있었습니다(그림 6.1). 하나는 코로나19 재감염을 막아주는 중화항체 면역이고, 다른 하나는 코로나19에 걸리더라도 덜 아프게 해주는 T세포 면역입니다. 그런데 중화항체 면역은짧게 유지되기 때문에 우리가 백신을 맞고도 몇 달이 지나면 코로나에 다시 걸리게 되는데, 이를 ‘돌파 감염breakthrough infection‘이라고 합니다. 반면 T세포 면역은 몇 년간 오래 유지되기 때문에 돌파 감염으로 코로나19에 걸리더라도 덜 아프게 하고 중증으로 치달을 확률을 낮추어 줍니다. 백신의 역할이 코로나19에 덜 걸리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걸리더라도 덜 아프게 하는 데 있는 셈이지요. 한편, 돌파 감염을 겪고 몸이 회복했을 때도 백신을 맞은 것처럼 중화항체 면역과 T세포 면역 반응이 모두 증강됩니다. - P181183

즉, T 세포 면역만 가진 집단(SL)이 면역을 잃어버리기 전 코로나에 걸리면 대부분 경증 환자(IM)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 사회적 거리두기가 너무 강력해 오랜 시간 코로나19에 걸리지 않으면, T세포 면역만 가진 집단(SL)은 면역을 잃은 집단(SH)이 되고 이때 코로나19에 걸리면 중증 환자(IS)로 넘어갈 확률이 커지는 것입니다. - P190

연구를 발표하고 2년이 지난 2023년에 일본에서 발표된 자료를 보면, 다행히 예측이 잘 들어맞았던 듯합니다. 그림 6.4의 그래프에서 보면,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해제하고 확진자 수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한편 중증 환자 비율이 거의 0으로 크게 줄어 중증 환자 수도 감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해제하면 중증 환자 수가 오히려 줄어든다는, 우리의 직관과 충돌하는 미적분학의 예측이 맞은 것이지요. 이 결과는 앞으로 새로이 발생하는 전염병에 대한 방역 정책을 설계할 때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미적분의 또 다른 쓸모이지요. - P192

융합 연구를 자주 하는 만큼, 강연이 끝날 때마다 자주 받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녀를 어떻게 하면 융합 연구자로 키울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저의 대답은 늘 똑같습니다. 융합 연구자의 두 가지 특성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첫 번째 특성은 대화를 유쾌하게 이어가는 것입니다. 운이 좋게도, 저는 지난 10여 년간 의학, 약학, 생명과학 분야 연구자들 수십 명과 협력해 융합 연구에서 여러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실패한 공동 연구도 있었지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융합 연구를 함께 성공적으로 끝맺은 이들은 모두 유쾌한 대화 상대였습니다. (중략)
두 번째 특성은 자신이 아는 것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잘 설명하는 것입니다. 융합 연구는 서로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여 동일한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 P219220

C(복합체)는 10개, S(기질)는 1,000개 있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이때 효소와 기질이 붙어 복합체가 하나 더 생기면 C의 양이 10개에서 11개로 10퍼센트 증가하는 반면, S는 1,000개에서 1,001개로 0.1퍼센트밖에 변하지 않습니다. 즉, C가 S에 비해 매우 빠르게 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효소 농도가 기질 농도와 유사하거나 많아지면, C가 S에 비해 더 이상 빠르게 변하지 않게 되어 미카엘리스-멘텐식Michaelis-Menten equation에 심각한 오류가 생깁니다.
반면 새로운 접근 방식은 C가 S 대신 보다 빠르게 변한다고 가정합니다. T는 C와 S의 합입니다. 따라서 효소의 농도와 무관하게 항상 T는 C보다 크지요. 따라서 C가 T보다 빠르게 변한다는 가정은 효소의 농도에 관계없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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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마와라시
온다 리쿠 지음, 강영혜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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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은 모르나 교토의 가쓰라리큐(일본 왕족의 별장옮긴이)에는 을 본뜬 문고리가 많이 있다고 한다.

언젠가 그 문고리를 느긋하게 손질하고 싶어.”

그 장면을 상상하는지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던 형 모습을 기억한다.

나도 형 일을 돕게 된 이후 그 문고리를 사진집 등을 통해 보았다.

확실히 한자 달 월자를 본뜬 모양이나 달 형태를 그대로 모방한 모양 등 가쓰라리큐를 위해 특수 제작한 그 문고리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지금이라면 형이 넋을 잃는 것도 이해하지만, 당시 문고리라는 존재는 우리 형은 어쩌면 조금 별난지도 모르겠다라고 인식한 계기에 불과하다. -15~16

 

 20247월 말 8월 초 일본에서 이-푸 투안段義孚(중국 청말민초淸末民初의 군벌 돤치루이段祺瑞의 종손從孫이다.)공간과 장소를 다 읽고, 함께 챙겨 간 온다 리쿠의 스키마와라시를 이어 읽었다. 하필 주인공 고케쓰纐纈 형제가 골동품상에 간이주점을 운영하는 덕분에 여름 여행에서 넘긴 짧은 페이지가 더 각별했다. 게다가 하필 교토의 가쓰라 리큐桂離宮, 하필 그 문고리의 달 모양이라니. 굳이 이 이궁에 여러 번 다녀왔지만, 그곳의 장지문 문고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살펴본 기억이 없다. 달구경을 위한 노대露臺인 쓰키미다이月見台에서 보는 보름달이 얼마나 아름다울지만 상상했을 뿐이다. 경내의 모든 건물을 공개하는 곳은 아니지만, 다시 간다면 볼 수 있는 달이라도 놓치지 않아야겠다.

 

나는 타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127

약속한 가게가 있는 곳은 신바시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커다란 상업빌딩이었다.

옛날에 지어진 빌딩은 어쩐지 분위기가 독특하다. 묵직한 공기, 느긋한 통로 공간. 전체적으로 만듦새에 여유가 있고 잘 닦여진 바닥이 둔탁하게 빛난다. -133~134

 

 소녀로 나타난 미지의 존재 스키마와라시와 화자인 산타散多가 지닌 미지의 능력이 이 소설의 축을 이루고, 그 특유의 미스터리적 분위기가 여름에 사뭇 어울렸다. 스키마와라시가 어느 계절에나 여름 원피스 차림에 잠자리채와 채집통인 도란胴乱을 들고 돌아다닌 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정작 내킨 부분은 단서로 쓰인 건축 자재로서의 타일, 그 타일을 만지기 위해 돌아다닌 여러 고풍스러운 건물의 묘사였다. 산타의 형 다로太郞의 취향인 문고리처럼 건축, 그중에서도 특히 작은 요소를 부각한다는 점이 마음에 내켰다. 인상적인 건물들을 만날 때,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지 이입하고 경험한 까닭이다. 다양한 건물을 감각하는 산타만의 방식이 그가 비로소 타일을 만질 때 펼쳐지는 불가사의한 복선들까지도 설득력을 부여했다. 레트로한 정취를 구현하는 온다 리쿠다운 필력이 발휘된 셈이다.

 

그녀들의 역할은 끝났다.

다이고 하나코에게 그 도란을 전해준 것으로 이제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밝은 여름이 눈앞에서 달려간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여름이라는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541

 

 가장 작은 요소에서 낡고 또렷한 환상이 펼쳐질 정도로 공들인 건물들을 정성스레 묘파한 것은, 결국 그런 건물들을 구축한 일본의 여름과 같았던 한 시대가 지나간 까닭이다. 일본 곳곳에서 이 나라가 눈부셨던 시대를 세공한 건물들, 게다가 이제는 심심찮게 철거되는 그런 건물들을 보며, 온다 리쿠는 이 여름을 전송한 듯하다. 한 시대와 기억의 소멸을 감수하는 정서의 밀도에 비해 서사가 치밀하거나 참신하지 못한 면도 분명히 있다. 이 약점이 크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애초에 그 부분을 내가 의식하거나 기대하지 않은 덕분이다. 작가도 그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문고리와 타일 들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라면 그것도 납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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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할아버지가 오래 알고 지내던 손님이 다도실을 리뉴얼하는데 문고리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잘은 모르나 손님의 어머님이 다도 선생님인데 희수 기념으로 개장하는 것이라 축하의 의미를 담은 디자인으로 바꾸고 싶다고 했단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형이 "거북이 문고리가 좋겠네" 하고 중얼거렸다.
당시 형은 아직 여덟 살 정도였는데 창고 안에 있는 부품 전부를 놓아둔 장소까지 달달 외웠다.
깜짝 놀란 할아버지가 형과 함께 창고를 보러 가서 형이 꺼낸 문고리를 보고 또 놀랐다고 한다. 오래된 물건이지만 상태도 좋고 거북이 등딱지 부분에 손을 잡도록 만들어놓은 디자인도 근사했기 때문이다. 결국 할아버지는 그 문고리를 사용하였다니 그때부터 이미 형은 상당한 심미안을 지녔던 듯하다.
그렇게 그 무렵부터 문고리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는데,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잘은 모르나 교토의 가쓰라리큐(일본 왕족의 별장—옮긴이)에는 ‘달‘을 본뜬 문고리가 많이 있다고 한다.
"언젠가 그 문고리를 느긋하게 손질하고 싶어."
그 장면을 상상하는지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던 형 모습을 기억한다.
나도 형 일을 돕게 된 이후 그 문고리를 사진집 등을 통해 보았다.
확실히 한자 ‘달 월‘ 자를 본뜬 모양이나 달 형태를 그대로 모방한 모양 등 가쓰라리큐를 위해 특수 제작한 그 문고리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지금이라면 형이 넋을 잃는 것도 이해하지만, 당시 문고리라는 존재는 ‘우리 형은 어쩌면 조금 별난지도 모르겠다‘라고 인식한 계기에 불과하다. - P15.16

도자기를 잘 모르는 나도 네즈미시노(1570년대 일본 기후현 미노 지역에서 하얀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를 이르는 말—옮긴이)가 도자기 종류 중 하나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리고 좋은 찻종,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져 경매될 정도의 유래가 있는 찻종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는 물건이 많다는 것도 안다.
‘가마이타치‘는 통통한 네즈미시노 회색 찻종의 이름인 듯하다.
찻종에는 풍류적인 이름이 많다. 그 찻종의 ‘정경‘(구운 색, 표면의 모양, 요철, 겉모양의 인상 등을 빗대 이렇게 말하는 모양이다)을 표현했다고들 하는데 나로서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많다.
"뭐? 이 모양이 학으로 보인다고? 정말로? 으음, 그거 거의 로르샤흐 테스트 아니야? 그 왜 그림을 그린 후 반으로 접은 다음에 펼쳐서 나온 모양을 보고 무엇으로 보이는지 조사하는 정신 분석 같은 거. 손님, 괜찮아? 고민이라도 있어?"
이렇게 묻고 싶어질 때도 있다. - P35

S 선생님은 유명한 젊은 다도 선생님인 모양이다. 고미술에도 조예가 깊어서 그에 관한 에세이도 썼다고 한다.
"선생님이 가마이타치로 몇 번인가 차를 우리셨대. 그러고는 ‘사용감은 아주 좋은데, 어쩐지 심보가 고약한 구석이 있군, 이 찻종‘이라고 말씀하셨어."
흠.
"심보가 고약하다는 게 무슨 의미야?"
"글쎄. 나도 그렇게 되물었는데 선생님도 ‘설명을 잘 못하겠네‘ 하시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뭐라 해야 좋을까. 붙임성 있고 상냥해서 쉽게 친해진 사람인데 다른 곳에서 내 험담을 하는 걸 들었다는 느낌이랄까‘라고 하셨어."
그것이 ‘가마이타치‘라는 이름이 붙은 유래일까. - P38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우리는 언뜻 보기에 평범하게, 하지만 나름대로 꽤 감칠맛 나는 인생을 보내고 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를 테니 떳떳치 못한 심경일 때도 있고 스릴을 느낄 때도 있다. - P97

어디까지나 나는 ‘커피숍에서 치즈케이크를 먹는 것을 좋아한다‘이기에 ‘치즈케이크를 사서 집에서 먹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행동이고 흥미가 없다. - P102.103

카페 문화는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서 인구 대비 커피숍이 확연하게 많은 곳과 적은 곳이 있다.
적은 곳도 카페 문화가 없어서가 아니다. 옛날부터 다도가 성행했던 곳에는 자택에 화로가 있어서 차를 끓이는 습관이 있기에 밖에서는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다.
그런가 하면 커피숍이 잔뜩 있어서 휴일에는 가족끼리 단골 커피숍에 가서 브런치를 먹는 곳도 있으니 식문화는 그야말로 흥미롭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곳저곳에서 가게를 방문하는 일은 직업상 이동이 많은 형과 나의 자그마한 즐거움이다. - P104

처음 들어간 가게에서는 역시 블렌드 커피를 주문하는 것이 기본이다. 블렌드는 점주의 취향이 드러나기에 자신의 취향과 맞는지도 알 수 있다. - P107

K 점주가 집 정리를 부탁하고 싶다는 친구를 소개해주고, 끝내는 자기 가게의 폐점 정리도 맡길 정도로 친해지리라고 이때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N마치는 오래된 역참 마을로, 작지만 오랫동안 교통의 요지 중 하나였다. 이런 곳은 눈에 띄지는 않지만 사람과 물건의 왕래가 잦고 갖가지 물건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 뒤로 고마운 매입처 중 하나가 되었다.
처음으로 우리가 K를 방문한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K 점주에게 연락이 왔다. - P119

나는 타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 P127

이발사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몰랐는데 일본 타일은 정해진 몇 곳에서 거의 다 만들어진다더군."
"네, 메이지 시대(1868~1912년)에 국가가 운영하는 연구소와 공장이 교토에 세워지고, 국가 주도로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원래 요업이 성행했는데 처음에는 주로 메이지 유신으로 고객을 잃은 교야키(교토에서 만들어지는 도자기의 총칭—옮긴이) 장인이 중심이 되었다고."
형이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군. 형은 K에서의 일 이후 타일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 P127

약속한 가게가 있는 곳은 신바시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커다란 상업빌딩이었다.
옛날에 지어진 빌딩은 어쩐지 분위기가 독특하다. 묵직한 공기, 느긋한 통로 공간. 전체적으로 만듦새에 여유가 있고 잘 닦여진 바닥이 둔탁하게 빛난다. - P133.134

이 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그 여기저기에서 부모님이 만든 집과 시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것이 또 엄청나게 많아서 설마 이런 벽촌에(실례)까지, 하고 생각되는 장소에서도 일한 흔적을 만난다.
"아버지랑 어머니, 얼마나 일을 하신 걸까."
"이러니 우리가 얼굴도 거의 못 보지."
"이런 페이스로 계속 일을 했다면 사고를 당하지 않았어도 언젠가 과로사하셨을 거야."
세계 유산에 등재된 산골짜기의 오래된 집락을 방문했다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이 지은 민가를 발견했을 때는 형도 나도 기가 막혔다.
두 분이 지은 집은 어째서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고, 마음을 담아서 지었다는 점이 전해져왔다.
친밀감이 있고 아담해서 마음이 편안한 집. 이런 집이라면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집.
일반적으로 건축가는 자택에 자신의 사상을 담아 그것을 명함 대신으로 한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결국 두 분은 자신들의 집을 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 P155

둘째, 이것은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낀 것인데 세상은 거의 모든 일이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시작할 타이밍, 무언가를 그만둘 타이밍, 무언가를 물을 타이밍 그리고 무언가를 고백할 타이밍.
세상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있으면 그것은 대개 그쪽에서 다가온다.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더라‘, ‘지금밖에 없다고 직감했다....... 이런 타이밍은 대체로 옳다. - P193

촉촉이 비가 내리는 오후, 우리는 교토에 있었다.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교토는 사족을 못 쓰는 곳인지, 일을 끝낸 다음이라고는 하나 형은 항상 교토에 들를 때마다 자신의 문고리 컬렉션을 찾아 헤맨다.
형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친한 골동품점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문고리는 없었지만 형은 우아한 앤티크 경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이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원한다고 생각하는지는 천차만별이라, 그 덕에 이 장사가 성립될 수 있는 거라 절실히 느낀다. 그리고 나는 경첩에 흥미가 없다는 사실도.
제시액이 서로 맞지 않아서 잠시 흥정이 이어진 결과 경첩은 그대로 그 골동품점에 남게 되었다. - P194

덧붙여 풍경 소인의 정식 명칭은 ‘풍경이 들어간 통신 날짜 소인‘이다. 요컨대 명승고적 등의 도안이 들어간 소인을 말한다.
우편을 보낼 때 일반적으로 찍는 소인은 날짜와 시간대와 담당 우체국 이름밖에 적혀 있지 않지만, 풍경 소인에는 각양각색의 정취가 느껴지는 도안이 그려져 있다. 가마쿠라의 대불이라든가 이세신궁 같은 명소의 그림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런 특성 탓에 어느 우체국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나름대로 기념이 될 만한 것이 있는 우체국에 비치되어 있다.
물론 각 풍경 소인이 비치된 우체국에 부탁하지 않으면 찍을 수 없다. 우송도 의뢰할 수 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우표를 사서 메모장에 붙이고 창구에 내밀어 풍경 소인을 찍어달라는 기본적인 방법을 이용한다. - P248

"그래. 컬렉터는 모으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니 모으는 것 자체가 재미있을 뿐 실은 마음속에서는 컬렉션의 완성 그 자체는 바라지 않아. 모은다는 행위와 모은 것 하나하나가 내가 여기 있다는 존재 증명 같은 것이야. 내가 사라져도 물건은 남아. 내가 모은 것의 집합체가 내 인생의 덩어리 같은 거지."
잠깐 사이를 두고 형이 말을 이었다.
"네 풍경 소인을 보고 생각했어. 스탬프 랠리는 저도 모르게 모으고 싶잖아? 스탬프 수첩에 공백이 있으면 어떻게든 메우고 싶어져. 그것도 마찬가지야. 그 공백은 존재의 공백이야. 자신이 그곳에 없었다는 공백이 무서운 거야. 그러니 네가 말하는 ‘느슨함‘이 부러운 이유는 그 공백이 무섭지 않은 점, 공백을 개의치 않는 점이야."
"흠."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래서 컬렉터라는 인종은 그다지 자각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다고 더 강하게 바라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
더욱더 예상외라고 생각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형은 결코 ‘나서는 타입‘이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컬렉터 또한 소극적인 사람이 많으니 놀랍네."
"응. 나도 인생 자체에 집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분석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을 때는 뜻밖이었어." - P261.262

"참 재미있단 말이야. 일러스트레이터나 화가 본인과 만나면 ‘그렇군, 이 사람이 그런 선을 그리는구나‘ 하고 늘 이해가 돼. 이름은 몸을 나타낸다가 아니고 선은 몸을 나타낸다지." - P345

또 어디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나 긴장하는 동시에 우리는 이 장소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세월이 자아내는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셔터의 녹, 콘크리트의 갈라진 틈, 그러데이션으로 변한 함석 색깔. 그것이 고대 유적처럼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을 내보인다.
"장소의 힘은 엄청나니까 그 땅이 내뿜는 에너지에 어울리는 작품을 만드는 일은 힘들어요."
갑자기 다이고 하나코의 말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 P378

그녀들의 역할은 끝났다.
다이고 하나코에게 그 도란을 전해준 것으로 이제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밝은 여름이 눈앞에서 달려간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여름이라는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 P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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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사진인지를 판단하는 방법을 글로 적어보시라. 그리고 그 방법대로 판단하는 과정을 밟아보시라. 틀린 답을 내기 일쑤다. 논리와 언어로는 그 방법을 잡아내지 못한다. 우리가 늘 하는 일이니 분명히 가능한 일인데, 그 방법을 일일이 표현하려 들면 난감해진다. 아직 우리가 이해하는 언어로는 구체적으로 작성할 수 없는 소프트웨어가 우리 몸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광근) - P9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서당개에게 5만 년어치의 글을 들려준다면? 기계 학습을 돌리는 컴퓨터에게 5만 년어치 책을 주입해주면 학습 결과로 얼추 글을 쓰는 서당개를 만들어 준다. 종종 엉터리 글을 쓸 수는 있지만 어느 정도 해낸다. (이광근) - P10

컴퓨터의 원천 설계도를 선보인 튜링(Alan Turing)의 업적이 사실 그런 것이었다. 튜링은 1930년대에 기계적인 계산이 뭔지를 명확히 정의한다. 그 정의 덕분에 컴퓨터로 하는 온갖 문제 풀이 능력과 한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의가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유지된 덕분에, 파악했던 것들이 지금까지 사실로 유지될 수 있었고,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분야가 서로 신경 쓰지 않고 전속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광근) - P11

이 책에서 내가 논의할 알고리즘은 조금 특별한 것들이다. 대부분의 알고리즘과는 달리, 디자인한 사람이 모르는 환경에서 그 알고리즘들이 실행될 수 있다. 그 알고리즘들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그 환경을 효과적으로 헤쳐나가는 방법을 배운다. 상호작용을 충분히 하고 나면 그 알고리즘들은 더 똑똑해진다. 어떤 전문성을 가지게 된다고 할까. 알고리즘에 미리 심어 넣은 전문성이 아니라 실행하며 외부 환경에서 배워 익힌 전문성이다.
이런 알고리즘을 에코리즘ecorithm이라고 부르겠다. 에코리즘이 따르는 학습을 얼추거의맞기probably approximately corect, PAC학습이라고 한다. 이 학습 모델은 성공적으로 학습했다는 게 뭐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비용은 어떻게 되는지를 판단하는 틀을 제공한다. 그 안에서 디자이너들은 알고리즘이 배운 전문성이나 그것을 배우는 비용을 재 볼 수 있다. (이광근) - P18

따라서 인덕(학습)의 정의는 수학적인, 명확한 것이어야 한다. 튜링 테스트같은 애매한 것이 아니라 튜링의 기계적인 계산의 정의 같아야 한다. 튜링이 계산을 애매하게 정의했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쯤 있을까? 튜링 시절 그럴듯하게 들렸을 기계적인 계산의 정의는 어떤 게 있을까? 이런 건 어떤가. "어떤 일이 기계적으로 계산 가능하다는 것은 다음의 경우만이다. 그 일을 보통의 지능을 가진 사람이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예를 들어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계산할 수 있는 경우." 이런 정의가 그럴듯하다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었을 테지만, (튜링이 계산에 관한 지금의 개념을 담은 논문을 발표한) 1936년에 이런 애매한 정의로 시작했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21세기의 정보 혁명은 싹트지 못했을 것이다. - P11

이 책의 핵심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학습 현상을 수학적으로 명확하게 정의한 것이다. PAC 또는 얼추거의맞기probably approximately correct 모델이라고 한다. 이 모델은 학습 과정을 계산 과정으로 보는데, 특히 그 연산 횟수가 제한된 것으로 한다. 생명체는 너무 긴 시간을 학습에 쓸 수가 없다. 다른 일도 해야 하거니와 수명 때문에도 학습 시간이 마냥 길 수는 없다. 또, 이 모델은 학습 중에 외부 세계와 주고받는 횟수도 비슷하게 제한된 것으로 한다. 그리고 학습으로 유기체가 새로운 정보를 분류하는 데 틀리는 경우가 적어야 하지만 항상 맞을 수는 없다는 점을 담고 있다. 인덕induction, 歸納은 ’아마도’가 낀다. 그래서 늘 백 퍼센트 정답만 인덕할 수는 없다. 정답과 조금 어긋난 것을 만들 여지가 늘 있다. 또 세상이 갑자기 변하면 학습한 것은 언제라도 쓸모 없어질 수도 있다. - P11.12

이 책에서는 이런 에코리즘의 언어를 써서 진화, 학습, 지능을 설명하려고 한다. 에코리즘이라는 알고리즘으로 생명의 진화 같은 자연 현상을 설명할 수 있으려면 만족해야 할 것이 많다. 특히 제한적인 횟수만 환경과 상호작용해서, 그리고 제한적인 자원만 사용해서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에코리즘도 그렇고 그걸 품고 고안된 일반 학습 모델(얼추거의맞기probably approximately correct, PAC 학습이라고 부르는)도 그런 제한된 자원량 이상을 소모하지 않는 알고리즘이 되도록 정의한 것이다. 이런 알고리즘으로 설명되는 자연 현상은 우리 경험에 익숙한 것(학습, 유연한 반응, 그리고 적응 등)부터 진화와 지능까지 광범위하다. - P26

기계적인 계산으로 자연 현상이 이해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비교적 최근 아이디어지만, 자연의 비밀을 밝히는 데 사용하는 무기의 하나로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다. 물리의 법칙을 표현하는 데 수학 방정식이 유용하다는 아이디어, 실험실의 실험이 화학 세계의 사실을 밝힐 수 있다는 아이디어, 그리고 사회과학에서 통계 분석이 인과 관계에 관한 실마리를 준다는 아이디어들은 널리 받아들여졌다. 기계적인 계산의 관점이 유용하다는 아이디어도 그런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 P34

컴퓨터과학의 대상은 컴퓨터가 아니다.
천문학의 대상이 망원경이 아닌 것처럼.
—다익스트라(Edsger Dijkstra) - P37

튜링이 보인 건 기계적인 계산이라는, 혹은 생각 없이 한 스텝 한 스텝 실행하는 정보 처리라는 애매한 개념이 체계적으로 정의되고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기계적인 계산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계산이 뭔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이다. - P40

멈춤 문제halting problem의 불가능에 대해서 주의해야 하는 점은, 모든 기계에 대해서 그 멈춤 여부를 정확히 답하는 기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과 ‘정확히‘가 핵심 조건이다. 몇몇 기계에 대해서만 정답을 내는 기계는 가능하다. 혹은 모든 기계에 대해서 답을 내지만 때때로 틀린 답을 내는 기계는 가능하다. 모든 기계에 대해서 항상 정답을 내는 기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P44

튜링 3원소 중 하나인 기계적인 계산의 정의, 이게 그래서 중요한 시작이었다. 튜링은 그 모델로 기계적인 계산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을 모조리 잡아내려고 했다.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현상까지 모조리, 사람이 창의성이나 영감을 이용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별생각 없이 하는 일들이라면 모두 튜링기계로 표현하려는 게 목표였다. - P46

컴퓨터과학과 물리학이 주로 사용하는 수학도 차이가 있다. 튜링 이전의 수학은 연속한 세계를 다루는 것continuous mathematics이 지배적이었다. 물리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수학이다. 변화가 한없이 작은 양으로도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세계다. 하지만 튜링기계는 연속하지 않는 모델이다. 변화가 뚝뚝 끊겨서 일어나는 세계를 다루는 이산수학discrete mathematics의 세계다. 튜링 이전까지는 이산수학은 거의 연구되지도 않았다. 사실 튜링의 영향이라고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데, 이산수학이 부상하게 된 것이 튜링 때문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다룰 학습과 진화 등의 현상을 정의할 때도 이산 모델이 가장 튼튼한 모델이 된다. 학습과 진화의 핵심 현상을 끄집어내는 데 가장 유효한 것이 이산 모델들인 것이다. 연속 모델이 결국에는 큰 관심을 받겠지만, 첫 스텝으로서 가장 근본적인 개념을 정의하는 데는 연속 모델보다는 이산 모델이 직관적이다. - P50.51

여담으로, 현재의 과학 분야 전반에서 계산 복잡도의 중요성을 흡수하는 과정에 있지만, 전통적인 과학 교육은 아직 그런 상황을 준비하는 것 같지는 않다. 계산 복잡도로 보면 전통적인 수학과 과학 과목에서 푸는 문제들은 모두 현실적인 비용에 풀 수 있는 것들로 제한되어 있다. 산수도 그렇고 선형대수도 그렇다. 이 상황은 당연히 이유가 있지만(현실적인 비용으로 할 수 있는 방법만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그러나 이런 문제들만 다루는 교육은 잘못된 인상을 남긴다. 쉽게 정의되는 문제는 모두 효율적으로 풀린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이러면 학생들이 잘못 준비될 수 있다. 전혀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계산적으로 비용이 현실적인 풀이법을 찾아야 한다는 기준을 간과할 수 있다. - P55

그림 3.4 무작위randomized 알고리즘의 예. 임의의 모양이 사각형 안에 그려져 있다고 하자. 그 모양의 면적을 어림잡는 방법으로 그 사각형 안에 점을 무작위로 찍어서 그 중에서 모양 안에 들어가는 점들의 비율로 계산하는 것이다. 조건은 점은 사각형 안에 어디에나 동일한 확률로 찍는 경우여야 하고, 각각의 점 찍기는 독립적이어야 한다. 크게 틀리는 경우는 아주 운이 나빠서 균일하게 점을 찍지 않게 되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점점 더 많이 점을 찍으면 줄어들게 된다. 무작위 알고리즘은 근본적으로 이런 식의 성공 보장을 한다. - P58

현재까지 다항 시간 안에 인수 분해를 하는 알고리즘은 양자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 이외에는 알려진 게 없다. 무작위 알고리즘(BPP) 중에도 없다. 인수의 존재 여부를 알아내는 것과 인수를 찾아내는 것 사이의 어려움은 기하급수로 차이가 난다. 이 차이가 암호 시스템들의 기초다. 예를 들어 RSA 암호시스템에서는 두 개의 큰 소수 p, q를 골라서 곱한 결과 x를 공개하고 p, q는 내가 비밀로 가지고 있는다. 다른 사람들이 x를 가지고 내게 보낼 메시지를 암호화하면 나만 p, q를 가지고 그 암호화된 메시지를 풀 수 있다. 임의의 소수 p, q를 만드는 일은 임의의 수를 선택하고 소수인지를 확인하면 되지만, 암호화된 메시지를 엿들으려면 x를 인수분해해서 p, q를 알아내야 하는데 이건 훨씬 어려운 일이다. (이 인수분해 문제는 BOP에 속한다. 즉, 양자 컴퓨터로는 다항시간 안에 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양자 컴퓨터가 실현 가능할지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이다.) - P63

가설 P≠NP는 현재는 물리 법칙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 물리 법칙도 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물리 법칙은 당연히 수학적으로 증명되는 게 아니다. 계산에 대한 가설이 물리 법칙과 역할이 비슷한 이유는 누군가 틀렸다는 증거를 내놓기 전까지는 가설로서 유용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가설은, 다항 시간에 마칠 수 있는 알고리즘은 NP-완전 문제들에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에 이 가설이 틀렸다고 밝혀지면 물론 좋은 일이다. 모든 NP-완전 문제들을 푸는 효율적인 알고리즘을 찾아낸 셈이므로, 그게 충분히 효율적이면 혁명적인 결과가 될 것이다. - P66

알고리즘의 풍부한 능력에 대한 또 다른 면은 이런 것이다. 아주 간단한 알고리즘인데 그 실행 양상은 우리 같은 유한한 존재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실행 양상을 파악할 수 없는 알고리즘으로 잘 알려진 것이 있다.
다음의 알고리즘이다.

1. 양의 정수 n으로 시작한다.
2. n=1일 때까지 다음을 반복한다:
(a) 만일 n이 짝수면 n을 n/2로 바꾼다.
(b) 만일 m이 홀수면 n을 3m +1로 바꾼다.

예를 들어, n=44에서 시작하면 다음의 값들을 만든다. 44, 22, 11, 34, 17, 52, 26, 13, 40, 20, 10, 5, 16, 8, 4, 2, 1. n의 첫 값이 정해지면, n의 다음 값들을 차례로 계산하는 것은 간단하다. 알 수 없는 것은 시작하는양의 정수가 뭐가 되었든 만들어지는 숫자열이 항상 끝날지 여부다. 수학자 콜라츠(Lothar Collatz)가 1937년에 낸 문제인데 그 이후로 많은 양의 정수로 시작해 봤는데 모두 1을 만들고 알고리즘이 끝났다. 그러나 (그 문제가 얼마나 간단한지에 대비해서 놀랍게도) 누구도 증명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경우 늘 끝나는지, 아니면 어떤 양의 정수의 경우 끝나지 않는지.
콜라츠 문제는 간단한 알고리즘에 숨은 근본적인 복잡성에 대한 한 예다. 특히 그 알고리즘은 외부 환경과는 완전히 격리되어서 작동하는 알고리즘이었다. 입력이란 것도 필요 없이 구성할 수 있다. - P69.70

학습은 많은 단계를 통해서 달성되는데, 각각의 단계를 따로 놓고 보면 그럴듯하지만, 뭐 하자는 건지 어디로 향하는지 무심하다. 이 단계들은 큰 그림의 계획하에 작용하는 알고리즘을 따른다. 그 때문에 각 단계는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단계들이 모두 모여서 뭔가를 이루는 일종의 수렴 과정이랄까.
진화도 비슷하다고 주장하려고 한다. 진화의 많은 작은 단계가 따로 놓고 보면 크게 의미 있지는 않다. 하지만 큰 그림을 품은 알고리즘 스타일의 계획 아래 발맞춰 진행되면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된다. - P77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학습할 수 있는 것의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경고 시그널로도 볼 수 있다. 실험 데이터를 많이 모은다고 반드시 대상 시스템을 더 잘 이해하게 돕는것은 아니다,라는 경고. 단적인 예로, 개별 사람들의 행동이 가까이서 관찰되어 왔고 수천 년 동안 널리 기록되어 왔지만 아직 우리는 그런 행동을 만드는 뇌의 작동 방법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 생물학 연구방법에 대해 참고할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 P86

의식 현상을 계산 과정으로 보자는 아이디어가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그 ‘계산 과정‘이라는 것이 대단히 폭넓기 때문이다. 만능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계산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뇌 모델이나 생각 과정 모델은 매번 그 시대의 첨단 기계 장치들로 바뀌어 왔기 때문에, 혹자는 컴퓨터가 현재로선 첨단 기계지만 미래에는 또 바뀌게 될 거라고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은 아니라고 본다.
컴퓨터가 모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 세상의 모든 기계적인 계산을 컴퓨터가 실행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단순히 현재 가장 첨단의 복잡한 기계 장치이기 때문에 자격이 있는 게 아니다. 컴퓨터가 하는 계산이 기계적인 계산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진지하게 보는 것이다. - P91

우리의 과제는 논리가 놓치는 직관의 세계가 뭔지, 그리고 그 세계로 가는 과학적인 방법은 무엇인지 찾는 것이다. 직관의 세계를 논리적인 가이드에 준해서 잘 작동하는 세계로 정의하고, 그 세계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직관 혹은 상식이 발휘하는 능력은 명확한 논리적인 가이드가 없는 세계에서 좋은 판단을 해내는 능력이다. 그런 능력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논리가 없어 보이는 세계를 논리의 그물로 온전히 길어 올리는 일이다. 논리적인, 수학적인 이론을 세우는 일이다. - P92

두 개의 가정만 있으면 인덕을 이치에 맞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 두 개의 가정은 논리를 위해서 필요한 면도 있지만 실제 세계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모든 학습 과정에 늘 깔려있는 것이기도 하다.
첫 번째 가정은 변동 없다는 가정invariance assumption이다. 학습한 결과가 사용되는 미래 상황은 학습할 때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가정이다.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사한다면 예전 도시에서의 경험은 새 도시에서도 도움이 된다. 두 도시 상황이 대단히 다르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다. 변동 없다는 가정을 조금 수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다. 어떤 상황들이 있는지, 그리고 상황마다 얼마나 자주 발생할지가 학습 전후로 변동이 없다는 가정이다. 이 가정은 세상이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고, 변하더라도 어떤 규칙성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거다. 이런 규칙성이 세상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지난 한 시간 동안 해가 지평선을 향해 꾸준히 내려가고 있었다면, 앞으로 한 시간 동안도 해는 꾸준히 지평선에 가까워지리라고 우리가 예상하듯이. - P96.97

깊은 신경망(deep neural net, DNN, 딥뉴럴넷) 알고리즘이 (PAC 학습 알고리즘으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기계 학습에서는 잘 사용되고 있는 많은 알고리즘의) 한 예다. DNN 알고리즘은 실험적으로는 PAC 알고리즘의 양상을 보인다. 정확도를 올리는 데 필요한 학습 시간이 기하급수로 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장에서 사용되는 실제 DNN 알고리즘들이 PAC 알고리즘인지는 아직 엄밀히 증명된 바는 없다. PAC 알고리즘이려면 모든 분포의 샘플들에 대해서 그렇게 작동해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자격이 안 되지만 쓸모 있는 알고리즘은 흔하다. NP-완전 문제를 푸는데, 실제 현장에 출현하는 입력들에 한해서는 다항 시간에 답을 내는 알고리즘이 종종 있다. 그런 알고리즘은 NP-완전 문제를 다항 시간에 푸는 알고리즘은 아니다. 모든 입력에 대해서 다항 시간에 답을 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DNN 알고리즘들이 이와 유사할 수 있다. 이상적인 PAC 알고리즘 자격은 안되지만 현실에서는 쓸모 있는. - P114

그런데, 그런 함수(많은 데이터에 숨은 간단한 함수)를 다항식 비용으로 인덕하는 건 대부분 불가능할 것 같은 이유는 데이터를 더 많이 봐야만 정답 함수의 면모가 드러나서가 아니고, 있는 데이터에서 정답 함수의 면모를 끄집어내는 과정, 이 과정 자체가 다항식 비용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아서다. - P121

내가 믿는 바, 사람들이 복잡한 개념을 학습할 수 없는 주된 걸림돌은 데이터가 아니다. 적당한 개수의 샘플 데이터에서 규칙성을 도출해내는 계산 과정의 복잡도가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행성 궤도가 타원형을 그린다는 것을 인덕하는 데 큰 어려움이 바로 이것이었다. 필요한 데이터를 모으는 데 수백 세대가 걸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타원형 궤도라는 개념이 사람들이 쉽게 도출할 수 있는 규칙성 중에 한동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P121

정리하면, 학습의 한계를 이해하려거든 계산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P=NP로 판명되거나 그에 버금가는 예상외의 강력한 결과가 나온다면, 모든 다항식 복잡도(P 클래스)의 함수가 다항식 개수의 데이터만 있으면 학습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P=NP는 아니라고 컴퓨터 과학자들이 널리 예상하고 있다. 따라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모든 P 클래스 함수가 데이터만 있다고 학습 가능한 건 아닐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즉, 데이터 안에 학습할 함수에 대한 모든 게 있다는 생각만으로는 학습 가능한 함수들의 경계를 파악하는 데 충분치 않다. - P123

[RSA(Rivest-Shamir-Adleman) 암호 시스템의] 공개 열쇠를 인수분해해서 짝꿍열쇠의 핵심 부품을 찾아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큰 수의 인수분해를 현실적인 비용으로 할 수 있는 디지털 컴퓨터 알고리즘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 P124

정규 언어를 학습하는 일은, 다항식 개수의 문장들만 보고(문장마다 그 언어에 속한다 속하지 않는다 여부가 표시되어 있다) 학습한 후 새 문장이 오면 해당 언어의 문장인지 답을 내주는 일이다. 정답 언어의 오토마타를 추정해 내는 게 한 방법이다. 원칙적으로, 오토마타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문장을 받아서 얼추 거의 맞게probably approximcately correctly 판단해 주는 가설을 추정해 내는 거다. 촘스키 이후로 수십 년 연구해 왔지만 그런 학습 알고리즘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1980년대에 그 실패가 말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규 언어를 PAC 학습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존재하면 RSA 암호 시스템을 깰 수 있다고 증명되었다. 그런 암호 시스템이 깨질 수 없는 한 정규 언어를 학습하는 기계적인 방법은 없다. - P126

내 생각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접근 가능한 목표를 모두 좇도록 항상 준비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은 배울 게 풍부한 환경에서는 선생이 없더라도 계속 학습할 수 있다. 그 덕에, 이전에 학습한 개념을 갈고닦는 것뿐 아니라 접근 가능하기만 하면 전혀 새로운 개념도 배울 수 있다. - P131

진화가 PAC 학습의 한 예라면, 진화도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최종 목적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때그때의 목표가 진화에도 있어야 한다. 진화를 목표 없는 경쟁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경쟁만으로 어떻게 단순한 단백질 회로가 시각이나 달리는 기능을 하는 정교한 시스템으로 발전하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비유로, 주식회사를 생각해 보자. 다른 회사들과 경쟁하는데 경쟁만으로 회사의 여러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보다는 이윤 창출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행동이 나온다. 꼭 경쟁만이 회사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 P144

여기서 ‘최선‘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오해가 없기를, ‘최선‘이 최적을 뜻하는 건 전혀 아니다. 인류는 최선을 좋은 진화 과정의 결과로 출현한 것이다. 최적의 결과를 좇은 진화의 목적물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최선‘으로 의미하는 바는 아주 지엽적인 의미다. 하나의 개체와 하나의 환경에 대해서 어느 한순간에 ‘최선‘이라는 뜻일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어떤 행동은 현재 환경에서 다른 행동보다 더 이득이 된다. 우리 몸의 일곱 번째 단백질을 발현시키는 함수들 중 좀 더 좋거나 좀 더 나쁜 함수가 있고, 하루에 먹을 초콜릿 양에도 좋은 양이 있고 나쁜 양이 있다. 뭐가 더 좋은지는 그때그때 환경에 따라 변한다. 현재 행동 때문에 다음번에 가장 유익한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 지금 현재 환경에서 지금과 다음번 행동 조합만을 따저서 가장 큰 이득을 만드는 행동을 유도하는 함수가 ‘최선 함수‘다. - P146

진화 과정은 학습 과정과 똑같다. 학습할 수 있는 목표를 좇는 학습 과정은, 이미 배운 것에 조금씩 새로운 것이 덧붙여지면서 차례차례 쌓여간다. 그리고 그전에 배운 대부분이 유지된다. 진화 과정도 같다. 다양한 생물종에 걸쳐서 유전체의 많은 부분이 유지되며 변화가 조금씩 쌓여간다. 변함없는 부분들은 아마도 바뀌지 않는 게 좋은, 중요하고 복잡한 진화 결과를 표현하는 부분들일 것이다. 지구상에서 생명체에 공통으로 필요한 생화학 기초 정보 같은, 이 부분이 조금만 바뀌면 유기체는 불가능하다. 유전체의 다른 부분은 굉장히 빠른 진화 과정을 겪으며 변한다. 잘 작동하고 있고 유용한 장치를 만드는 유전 정보는 버리지 않고 보존하는 것이 진화에 꼭 필요하다. 학습에서도 그렇듯이. - P150.151

이렇게 쉽게 부서지는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근거 없지만 상식선에서 하는 생각 과정을 명확하게 결정된 프로그램으로 구현하는 한, 이치 따지기reasoning 시스템이 논리적인 방식이건 확률적인 방식이건 쉽게 부서지는 문제는 어쩔 수 없다. 표현한 정보가 내부적으로도 부대끼고 표현 대상이 되는 바깥 세계와도 동떨어지면서 그 시스템에서 일어나는 논리 추론의 의의는 무너지게 된다. 근거가 있는 생각 과정에 대해서는 논리적인 원칙을 가지고 잘 구성되었겠지만, 근거 없이 상식적으로 진행되는 생각 과정에 대해서는 어떤 유용한 보장도 할 수 없게 된다. - P188

레지스터가 아주 소규모일 수밖에 없는 실용적인 이유가 뇌에서도 똑같이 성립한다. 작업보따리working memory를 관리하는 회로들이 꽤 복잡할 것이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잘 조정하는 일도 복잡할 것이다. 복잡하고 빠른 장치를 대용량으로 갖추기에는 비용이 너무 클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음의 눈이 한순간에 다룰 수 있는 정보 조각이 몇 개 안 되는 것이다.
작은 작업보따리는 결코 궁극의 제약 사항이 아니다. 뇌는 단순 계산만이 아니라 학습도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더 심한 제약들이 있다. 마음의 눈을 통해 보는 시야가 좁은 것은 세계를 학습하는 데 꼭 필요하다. 더 많은 정보에 주의를 기울일수록 그로부터 패턴을 도출해내기는 더 복잡해진다. 7±2개가 시야 범위와 계산 효율 사이의 적절한 균형인 것이다. 우리의 의식이 그렇게 작은 조리개를 통과하게 됨으로써 현실적으로 학습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 P197.198

인간에게서 타고난 것과 길러진 것을 구분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기 전에 일어난 진화 과정과 수정된 후의 학습 과정이 너무 비슷해서 이 둘을 경계면을 찾기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의 성격 중에 어느 것이 5.5살 이전 경험에서 배운 것이고 어느 것이 그 이후에 익힌 것인지 구분하려고 한다고 하자. 말이 되지 않는다. 비슷하게, 탄생 순간이 모든 게 시작되는 지점은 아니다. 우리가 수정되거나 탄생했을 때, 이미 우리는 많은 중요한 것들을 반 정도 학습한 형태로 가지고 있다.
타고난 것이냐 길러진 것이냐는 틀린 질문이다. 계속되는 변화의 과정 중에서 거의 아무 순간이나 잡아서 억지로 묻는 식이기 때문이다. - P215

사람의 초기 학습 본능은 세계가 중립인 것으로 생각하게끔 진화했을 것이다. 주어진 모든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표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진화했을 것이다. 부모나 선생은 이런 상황을 이용할 수 있다. 학습이 신속히 진행하도록 돕는 정보를 내놓으며 아이의 학습을 도울 수 있다. 반대로, 나쁜 경우 호도할 수도 있다. 왜곡된 정보를 내놓아서 학습 알고리즘이 잘못된 일반화로 신속히 수렴하게 할 수도 있다.
사람은 우연의 일치나 속임수에 쉽게 넘어간다. 학습할 수 있는 것은 거리낌없이 좋고 앞에 놓인 정보를 중립적으로 보려는 경향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의 행동을 믿게 된다. 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속이려고 드는 게 아니라고 본다. 식당에 가서는 그 식당 대표 음식을 먹고 있다고 믿게 된다. - P216217

추가적인 이유가 있을 듯싶다. 왜 학습 알고리즘들이 확실한 증거가 있기 전부터 가설을 부지런히 만드는지. 예전에 논의한 퍼셉트론perceptron 알고리즘이 처음 제안되었던 이유는 한 스텝 한 스텝 진행되는 것이 뇌 모델과 비슷해 보여서인데, 이 알고리즘의 또 다른 성질은 소위 온라인 알고리즘이라는 것이다. 예시를 몇 개를 보았건 간에, 매번 예시를 보면 새 가설을 잡는다. 우리 뇌가 그런 온라인 알고리즘을 구현한 것이라면(그렇다고 나는 믿는데) 매번 예시를 보고 가설을 내놓으려 할 것이다. 우리 뇌는 성급하게 판단하도록 짜여 있는 것이다.
성급한 판단은 중립적인 세계에서 전반적으로 우리에게 이득일 것이다. 한 번 만나고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음식점도 한 번 가보고 판단한다. 빈약한 증거로 성급하게 편견을 가지는 경향은 기본적인 본능이라고 본다. 빈약한 정보로도 일단 결정을 내리는 시스템을 가진 결과일 것이다. - P218

누구나 그렇듯이 우리 각자는 개별적으로 우리 의견이나 느낌을 위해서 투쟁하고 행동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하고 겸손해야 한다. 우리 느낌과 의견이 다른 사람 것보다 더 우월하다고 정당화할 수있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 P221.222

제일 정교한 이론 있는 기술은 그 한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사용해야 한다.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론 없는 분야(사회과학을 포함해서)에서, 우리의 의사 결정은 가장 정교한 지적 도구로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PAC 학습에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불확실성에 휘둘린다. - P226

이 책에서 사람의 인지를 어떻게 보는지 정리해 보면 이렇다. 사람이 이해하는 개념은 계산에서 온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후로 모종의 알고리즘 스타일의 학습 과정으로 얻어진. 그런 개념은 또 통계적인 과정에서 온 것이다. 학습 과정이 통계적인 증거로부터 기본적인 타당성을 끄집어 낸다는 의미에서. 즉, 증거를 더 많이 볼수록 우리의 확신이 증가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마음의 눈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바깥 세계와 내부의 기억 장치가 만난다. 우리는 이 마음의 눈을 통과하는 정보를 통제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의 눈은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 신경계 회로들은 지식의 거대한 합을 만들고 있는데 이는 많은 진화와 학습이 축적된 결과다. 다윈 방식으로 다시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지식은 차례차례 일어난 작은 변화를 통해서 축적해 온 것이다. 각 변화는 학습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고, 이치 따지기는 이런 회로를 마음의 눈 안에서 현재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뇌 시스템은 이론 없는 것을 다루도록 진화했지만, 이론 있는 결정을 할 때도 같은 회로를 사용한다. - P227

나는 항상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e‘이라는 용어에 불편함을 느껴왔다. 내 주 전공이 그 분야라고 말하는 것도 좀체 꺼려왔다. 다익스트라(Edsger Dijkstra)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그는 컴퓨터과학의 선구자로서 공헌한 것이 많기도 하지만 뚜렷한 의견과 촌철살인의 위트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내게 어떤 공부를 하냐고 물었다. 기억할 만한 대화를 만들려는 욕심에서 그랬던 것 같은데 이렇게 답했다. "AI(인공지능)요." 그가 즉각 되받았다. "I(지능)를 연구하지 그래요?"
‘지능‘이 ‘인공지능‘보다 더 일반적이라면, 그의 말대로 당연히 더 일반적인 문제를 파야 한다. 그것이 더군다나 지능과 같은 자연 현상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되돌아보면, 그동안 내가 해왔던 공부가 그랬던 것 같다. 이 책에서 인공지능 관련해서 이야기한 모든 것이 사실은 광범위하게 일반 지능에도 모두 적용된다. - P233

어떤 문제에는 간단한 방법이 아주 효과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장 가까운-이웃nearest-neighbor 알고리즘이다. 답안 예시들이 있고 가설은 만들어 내지 않는다. 새로운 질문이 주어지면 답안 예시들 중에서 가장 가까운 것을 찾아서 그 답안대로, 혹은 답안을 참고로 주어진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최근의 자연어 번역이 이 기술을 사용해서 성공한 경우다. 두 언어 사이의 번역 예들을 어마어마하게 모아 놓으면, 새로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에 대한 값진 정보가 거기에 있다. - P238.239

인식 능력에서 아기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준비되어 태어난다. 간접적인 증거로,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일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상식들을 모두 정의하려고 할 때 만난 어려움이 있다. 소설을 이해하려면 소설에는 표현되지 않은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 너무 당연한 것들이라서 소설에는 없는 것들이다. 성인이 읽는 복잡한 소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린이를 위한 동화에서도 거의 같은 분량의 상식이 필요하다고 한다. 튜링의 꿈에 찬물을 끼얹는 이야기지만, 아기들은 놀랄 만큼 잘 학습된 상태로 태어나고 더 잘 배울 수 있게 준비되어 있다. - P244

튜링은 기계를 프로그램하는 것과 기계가 배우게 하는 것 사이의 딜레마를 이야기했다. 그는 학습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때 다음의 주장이 힘을 받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학습한 기계가 일종의 고정된 프로그램을 실행하게 되는 것이므로 처음부터 그런 프로그램을 프로그래머가 만들 수 있었던 게 아닐까라는 주장이었다. 기계 학습이 성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우에 학습한 결과를 같은 일을 하는 프로그램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학습 과정을 통하지 않고는 모든 관련된 인자 값을 가진 학습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 P256

학습이 가진 중요한 장점은, 학습은 학습 시스템이 과거에 학습한 지식과의 관계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선생이 전달하는 예시마다 학생은 이미 알고 있는 개념의 예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예시들은 이런 방식으로 학생이 이미 익힌 지식과 관계를 맺는다. 선생이 정확히 그 관계가 뭔지를 모르더라도 그렇게 작동된다. 이런 의미에서 가르치기는 프로그램 짜기보다 훨씬 더 생동적인 행위다. 학생의 이전 지식이 학습의 주고받는 과정에 자동으로 동원되기 때문이다. - P257

우리 조상들이 지구 위에서 겪은 익스트림 생존 훈련과 똑같은 유산을 로봇들에게 제공하지 않는 한 그들은 인간이 스위치를 끄는 것에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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