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혁을 제대로 그려내는 게 유일한 목표였다”
[씨네21 2007-03-12 08:00]    

- [온라인 인터뷰] <하얀거탑> 방영 끝낸 안판석 감독 -

3월11일, 장준혁이 남긴 두통의 편지와 함께 <하얀거탑>이 막을 내렸다. 많은 이들로부터 오랜만에 만나는 현실감 넘치는 드라마를 평가를 받았던 <하얀거탑>의 성공에는 무엇보다 안판석 감독의 기여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장미와 콩나물> <아줌마>처럼 여성적인 취향의 드라마를 주로 만들어왔던 그는 <하얀거탑>에서 처음으로 남성들과 그들에 깃든 어두운 세계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김명민, 이선균, 이정길, 김창완 등 배우들의 숨막히는 연기 또한 그의 세밀하고 안정적이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연출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빛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안판석 감독을 만난 것은 지난 3월4일 밤 11시30분이었다. 18회 방송을 막 마친 상황이었던 탓인지 그의 얼굴에선 긴장감을 많이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인터뷰 후반부로 갈수록 오히려 긴장감이 더 느껴졌다. 아마도 인터뷰가 끝나는대로 마지막 두회의 극본 회의를 하러 가야 하는 탓이리라. 하긴, 장준혁의 죽음을 어떻게 끌고갈지를 결정하는 일이니 얼마나 힘드랴. 딱 1주일 전 안판석 감독과 나눈 심야의 대화를 정리한다.

<하얀거탑>은 장안의 화제작이 됐습니다.

어휴, 그래도 조금 성과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뭔가 반향이 없으면 정말 힘들거든요. 이 드라마에서 어떤 점은 부듯하고 어떤 점은 쪽팔리고 그래요. 무슨 얘기냐면, 시간이 없어서 뜻대로 다 못하고 엉성한 부분을 빤히 보면서도 그대로 방송에 내보내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사실, 그런 게 방송의 한계 아닌가요.

아무래도 드라마라고 하면 더 이해해주는 면이 있잖아요. 그래도 그런 게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쪽팔린데. 그렇게 쪽팔린 것 없이 할 수 있는 부분도 있는데 말이죠. 이를테면 조금만 시간이 더 있으면…. 그게 항상 아쉬운 것이니까. 예를 들어 오늘 같은 경우에도 마무리 편집하고 음악 넣고 이런 데가 좀 부실했어요. 음악 작업을 다 못하고 방송이 나간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심지어 1회 방송 같은 경우는 음악작업을 하는 중간에 기술 스탭이 테이프를 뽑아서 갔다니까요. 방송을 해야 되니까. 나는 그런 경험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게 뭐야, 어어어… 하다가 테이프를 뺏겼어요. 작업을 다 못했는데 방송이 나가버린 거죠.

<하얀거탑> 정도의 작품이면 사전제작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아니, 우리도 그랬죠. 전작제를 해보려고 여유있게 출발했어요. 대본작업도 일찍 하고, 사전 준비도 많이 하고, 촬영 스케줄도 일찍 잡아서 사전제작을 하려고 했는데, 드라마치고는 거대한 세트를 짓고 하니까 소품이나 미술을 채워야 하는데 그게 어렵더라고. 미술회사에서 장담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린 거예요. 그러다가 촬영이 두달 늦어졌죠. 촉박하게 제작하게 된 게 그 때문이에요. 그러다 보니 첫회 방송부터 아주 아슬아슬했죠.

그동안 얼마나 쉬셨나요.

첫회가 1월6일에 방송했고, 마지막 방송은 3월11일인데, 하루도 쉬지는 못하고 그냥 계속 일만 한 거예요. 잠은 하루에 많이 자면 4시간 정도, 한 숨도 못자는 경우도 많죠. 대충 1주일에 이틀 정도는 한숨도 못 잔다고 봐야 돼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힘들어요. (웃음) 그렇게 해서 완제품이 끝나고 방송을 하고 나면 다시 대본 회의를 시작해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부터 바로 촬영에 들어가고. 그렇게 촬영이 끝나고나도 여관에 들어가서 회의를 하곤 해요.

그럼 집에는 얼마나 자주 들어가세요.

집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 들어가요. 그래도 옷은 바꿔 입어야 하니까. 세트 촬영이 있는 날이면 이천 근처 여관에서 자고, 오늘 같은 날에는 여의도의 여관에서 자든지 이렇게 해요. 단 30분이 없을 경우가 많으니까. 이제 인터뷰가 끝나면 바로 마지막 대본을 위해서 회의를 하러 가야해요. 여의도 한 오피스텔에 사무실이 있거든요.

감독님 생각으로는 <하얀거탑>의 어떤 면이 화제를 모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잘은 모르겠는데, 두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한 가지는,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소수의 단련된 눈을 가진 그룹이 있는데, 그들이 보기에 이제까지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을 이 드라마가 충족시켜준 게 있다고 봐요. 제작의 완성도라든가 문학적 함축미라든가 여러가지가. 아주 소수지만 감식안이 높은 그룹을 만족시켜줬고, 그래서 그들이 글도 쓰고 아젠다도 만들어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데서 반향을 일으켜준 것 같고. 그리고 그것과 아주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각 잡고, 똥폼잡는 강인한 남성의 풍모를 좋아하는 부류가 있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조폭영화를 좋아하듯이 말이죠. 이렇게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두 부류가 있다고 봐요. 그러니까 <하얀거탑>의 경우에는 이 양 대척점에 있는 그룹들이 강력하게 지지해서 반향이 형성되지 않았나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시청률은 그런 열렬한 반응만큼 나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청률이 안 나오는 거예요. 시청률이란 것은 광범위한, 아주 모든 계층을 만족시켜줘야 되거든요. 어떤 한 계층만 만족시켜주면 시청률은 잘 안 나와요. 그런데 웬만해서는 모든 계층을 다 만족시켜주는 것은 어렵거든요.

그동안 드라마를 보지 않았던 남성들, 특히 그중에서도 소위 지위가 있고 나이가 든 분들도 많이들 본 것 같아요.

그런 분들도 자기가 겪었던 음모나 술수의 세계의 일단이 보여지니까 관심이 있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사실 TV라는 게 하루 일과를 끝낸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늘어져서 보는 건데,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쉬게 하면서 만족시켜줘야 하는데, 이건 그런 드라마는 아닌 것 같아요.

끝나는 마당에 섭섭한 점은 없으신가요.

섭섭하다는 느낌을 가질 새가 없다는 말이 맞겠죠. 이 드라마를 제대로 다 끝낼 수 있을지 없을지 마지막까지 조마조마하니까. 그런 감상이 들 시간은 없고, 걱정만 하고 있어요.

배우나 스탭 중에는 섭섭해 하는 분은 없나요.

섭섭해 한다기 보다는 실실 웃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냐면 끝나가니까. (웃음) 정말 드라마를 찍는동안은 휴식 자체가 없었어요. 다른 드라마보다 힘든 면이 있었죠. 아쉬워하는 감정이 촬영 때 나타나는 게 있는데, 이를테면 장준혁이 아픈 장면을 찍는데, 상대 배우의 눈에 눈물이 어느새 그렁그렁 고이는 거예요. 그런 상황이 아닌데. 그러니까 어느 틈에 장준혁이라는 사람이 드라마 속에 나오는 가짜 인물이 아니고 묘하게 실체를 획득한 거죠. 아쉬움 같은 게 그런 데서 비치는 것 같아요.

감독으로서 드라마의 미흡한 점에 대한 아쉬움은 없습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원하는대로 100%를 못했다는 점, 그런 게 아쉽고.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이런 생각이 자꾸 드니까. 하여간 시간적인 한계가 가장 크죠. 잘 하는 것을 떠나서 일단 해내는 게 쉽지 않으니까 말이죠.

드라마 내용에 관한 것을 여쭤보자면, 애초에는 이 드라마가 장준혁과 최도영이라는 양 축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줄 알았는데, 사실 포커스는 장준혁에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그 한명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소설도 마찬가지에요. 일본 소설 겉 표지를 보면 ‘야망을 추구하는 천재의사 누구 대 순수한 영혼 누구’, 이렇게 나오는데 사실 본문을 읽어보면 장준혁 한 사람의 1인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어요. 나머지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인간됨이라든가를 계량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고.

그래선지 최도영은 많이 가려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홍보 등을 위해서 ‘장준혁 대 최도영’ 같은 표현을 쓰는데, 사실은 안 그래요. <하얀거탑>은 완벽하게 1인 스토리거든요. 최도영 같은 캐릭터는 오히려 비현실적일 수 있잖아요. 어떻게 그 나이에 그렇게 순백으로 있을 수 있을까 말이죠. 물론 그런 사람이 있긴 한데, 아주 극소수일 거예요. 그러니까 드라마 속 한 캐릭터를 맡을 정도로 어떤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니잖아요. 돋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죠. 사실 스토리가 발생하려면 어떤 욕망이 있어야하는데, 최도영에게는 욕망 자체가 없어요. 결국 최도영도 철저하게 주인공 장준혁의 심상을 반영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일 수밖에 없는 거죠.

이 드라마의 획기적인 점은 악한이 주인공이라는 점인 것 같습니다.

사실 악한이 주인공인 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어요. 아주 새로운 것이라 말할 수는 없죠. 예전부터 피카레스크 소설도 있고 말이죠. 물론 악한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게 쉽지는 않아요. 흥행이 잘 되기도 어렵고요. 시청자들로 하여금 설득력을 갖게 하기도 힘들어요. 정말이지 원작 소설의 힘으로 간 거죠.

악한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점 때문에 부담은 없었나요.

많이 있었죠. 일단 시청률이 잘 나오기 어렵거든요. 악한이 주인공인 탓에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켜주기가 어려워요. 그리고 드라마에서 뭔가를 탐구하려는 사람 같은 경우는 만족시켜줄 수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에서 위안만 받고 하는 사람에게는 불만족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드라마에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출생의 비밀이라든가 3각, 4각관계, 불륜 같은 것은 좋은 소재거든요. 그런 것을 써야 많이들 봐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런 게 완전히 빠져있는 것이라서 우려들을 많이 했죠. 일본에서 흥행에 성공했던 드라마라는 점이 도움이 돼서 여기까지 굴러왔지, 제로 베이스에서 완전히 이 이야기만 갖고 추진했다고 한다면 쉽게 드라마화가 결정되기 어려웠을 거예요.

장준혁은 여러모로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인 것 같습니다. 그에 따라 동정론 또한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애초 기획 때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는 것 같은데요.

다르지는 않아요. 오히려 제작 의도와 관련이 있죠. 결국 드라마의 이야기라는 게 처음 시작할 때는 남을 보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시청자들은 일단 장준혁이라는 타자를 보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덧 거울을 보듯 그 안에서 자기를 보게 되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게 다 자기애가 있어서 그를 감정이입해서 사랑하게 되고 결국 자기와 동질화시키게 되는 거죠. 이 드라마는 장준혁이라는 인간을 철저히 해부하는 드라마인데, 결국 관객은 자기해부를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 점이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장준혁은 소의(小醫)이긴 하지만, 특정분야에서는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고, 리더십도 훌륭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도 존재하는 등 여러 면에서 부러운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 캐릭터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시청자들을 사로잡기만 해도 그것 또한 문제라고 생각지는 않으신가요.

저는 그 점이 중요하다고 봐요. 만약 장준혁이 어떤 일을 해서 단순하게 처벌을 받게 된다면 시청자 본인이 갖고 있던 익숙하고 상투적인 세계관과 부합하니까 드라마가 끝난 다음에 다시 더듬어볼 이유가 없을텐데, 이 이야기의 경우는 그렇지 않아요. 생각할 지점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일단 장준혁을 동일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준혁을 둘러싼 대다수 캐릭터들 또한 악인 또는 선과 악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인데, 참 리얼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들 신문을 보면서 ‘저 새끼 나쁜 새끼’ 뭐 이렇게 말들 하는데, 나쁘다거나 좋다거나 하는 그 판단이 각자의 깊은 명상 속에서 나온 결론이라기 보다는 상투성 속에서 나온 것이잖습니까. 이전까지만 해도 권모술수를 쓰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짓밟는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해왔는데, 이 드라마를 보다보면 어느덧 장준혁을 지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는 거죠. 그런 점이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야 욕망이란 뭐고, 이상이란 뭐고, 무언가 진지한 생각을 한번이라도 하게 된다고 보는 거죠.

그러나 시청자들로 하여금 장준혁을 좋아하도록 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요.

좋아해야 하는 거죠. 아까 말했듯, 자기를 좋아하듯이 말이에요. 그렇게 스스로가 딜레마에 빠져야 해요. ‘항상 나는 옳아’, 이게 아니라 모두가 자신의 딜레마를 들여다 봐야 하는 거죠.

일본 소설 원작과 한국판 드라마의 차이는 있나요.

크게 봐서는 그대로라고 보면 돼요. 일본과 한국의 차이, 시대의 차이 정도를 고려한 변화만 있었죠. 1960년대 일본에서 나온 소설이니까.

이 드라마의 핵심 중 하나는 캐스팅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그중에는 허를 찌르는 캐스팅도 있었고요.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허를 찔렀다고 할 수 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요. 내가 여기서 20년 이상을 일했기 때문에 이정길 선생님이나 김창완 선생님의 연기력이나 원래의 풍모 같은 것을 잘 안다고 생각하거든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거예요.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은 착한 역도 잘하고, 악한 역도 잘하고, 하드보일드한 것도 잘하고, 코미디도 잘한다는 거죠. 반면 하나를 못하는 사람은 다 못하고. 물론 부담스러운 점 한 가지는 많은 관객들이 관습에 틀에서 이야기를 자꾸 보니까 김창완씨가 드라마에서 나름의 캐릭터 묘사를 하고 있는데, 그런 것을 보지는 않고 ‘착한 사람이 왜 저래’라고 받아들이는 것 같아 그런 데 대한 우려가 있긴 하죠.

다른 캐스팅은 몰라도 장준혁 역의 김명민씨는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기가 막히게 했죠.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기대 이상으로, 어떻게 저렇게 잘할까 싶게. 진짜 좋은 배우더라고요.

처음부터 장준혁 역에 김명민씨를 생각하셨나요.

사실 다른 사람을 생각했었는데, 스케줄이나 현실성 이런 것을 맞춰가다가 김명민씨를 생각하게 됐죠. 그렇게 생각을 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이게 가장 좋은 카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명민씨는 일단 연기에 열심히 임하는데다가 머리가 비상하고, 배우로서 꼭 필요한 감성이 발달해 있거든요.

사실, <하얀거탑>을 보면 장준혁을 비롯한 악인들의 세계는 너무 리얼하고 구체적인데, 최도영이 중심이 된 선인(善人)들의 세계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부담이 많이 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거든요. 실제 눈으로 그런 사람을 옆에서 보기도, 만나기조차 힘들잖아요. 비현실적이기는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나도 읽으면서 비현실적이네, 이런 생각을 했으니까. 문제는 모든 것을 다 충족하기는 어렵다는 거죠. 어떤 것을 원하면 그 점에 충실해서 주변을 꾸려야지, 여러 옳은 방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다 얻으려 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했거든요.

그게 아니라면, ‘모든 사람들은 악당’이라는 전제의 하드보일드 누아르처럼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하려면 <하얀거탑>을 원작으로 할 필요가 없었겠죠. 여기에서는 비현실적이지만 순백의 영혼들이 주인공의 심상을 밝혀내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죠.

편집할 때 주로 뺀 대목은 어디였나요.

편집을 하면 시간이 오버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결국 어떤 부분을 어쩔 수 없이 들어내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럴 때 장준혁과 관련된 부분은 이후에 이야기가 연결되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정보를 다 담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뺄 수 없었죠. 반면 최도영과 관련된 부분은 나중에 힘을 받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베이스로 깔아놓는 부분이 많았어요. 그래서 지금 당장은 빼도 되는 게 많더라고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뺀 장면도 많이 있죠.

장준혁의 외과 과장 선거가 한창일 때, 최도영은 소아암 환자 진주를 돌보기 위해 헌신을합니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는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최도영은 너무 감상이 앞서는 것 아닌가 하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논란이 또 성립되는데, ‘의사는 감성적이어야 하나 아니어야 하나’가 그것이겠죠. 그 점에서는 소설보다 많이 나간 점은 있어요. 소설에서는 그 배역이 좀 밍밍하고 그 배역이 나왔을 때 특별히 다뤄지는 테마가 없으니까 그런 것도 넣어보고 싶었어요. 의사란 끝까지 감정을 배제한 채 이성만 유지해야 하나, 아니면 환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게 나은가, 묻고 싶었어요. 장준혁과 최도영을 보면 최도영은 감정이입으로 갈 것 같았어요. 그 점이 옳은지 그른지 밝혀보고 싶어서 집어넣었죠. 결국 그게 옳은지 그른지는 보는 사람 나름으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는 거죠.

<하얀거탑>은 어찌보면 권선징악의 이야기인데, 현실로 생각해보면 악인들이 더 출세하지 않나요.

음… 그런데 결국 그들은 파멸한다고 생각해요. 누구라도 말이죠.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은 결국 파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짧게 보면 성공해서 살아남는데 길게 보면 결국 파멸하고 말죠.

장준혁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최도영인 듯 보입니다. 그게 굉장히 일방적이어서 때로는 짝사랑하는 듯한 분위기마저 보여주는데요.

장준혁은 최도영의 칭찬을 받고 싶어하죠. 나한테 그건 그럴 듯 해보이는 게,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속마음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잖아요. 대체로 정치적으로 발언을 하지. 그러니까 장준혁이 ‘나 잘했어?’라고 물을 때 다들 정치적으로 대답하니까 그 답을 듣더라도 정말 그런지 아닌지 모르는 거죠. 그런데 나이브하게 자기 속마음을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은 최도영 밖에 없으니까 자꾸 그 사람의 판단이나 평가가 궁금하고 그런 거죠. 장준혁은 의학자로서 궁극의 지존이 되고 싶은데, 그것을 평가해줄 사람은 최도영 밖에 없는 것이죠.

다루기 가장 부담스러웠던 스토리 라인이 있었다면 어느 대목입니까.

다 부담스러웠어요. 과장 선거도 그렇고, 그 이후의 이야기도 그렇고. 그런데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스토리 전개가 빠르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빠르지 않거든요. 고작 과장 선거 하나를 갖고 9회를 했으니까. 알고 보면 느린 것을 빠르게 보이게 하는 것이었죠. 결국 그게 가장 어려운 것이었어요. 단순한 이야기인데, 이것을 복잡하게 만들고 빠르게 보이게 하고 하는 것.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가질 수 있는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게 어려웠다는 거죠. 결국 모든 것을 다 동원했어요. 샷의 배열이나 편집, 음악까지. 촬영할 때도 그랬고.

엔딩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소설에 나와있는 그대로예요. 장준혁이 아파서 쓰러지고 이주완 과장이 집도를 하게 되고.그러면서 죽어가는 이야기죠. 장준혁이라는 캐릭터의 묘한 점이랄까, 매력이랄까, 독창성이랄까 하는 점이 엔딩에서 나오는데, 두통의 편지를 써놓고 죽어요. 그중 하나는 상고이유서이고, 또 하나는 자기 병에 대한 소견서죠. 그 점이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지치거나 하는 인물이 아니라 끝까지 뭔가를 해보려는 인물이죠. 참회하지는 않는 거죠. 아주 집요하고. 그게 왜 매력적인가 생각해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꼴까닥하기 직전까지 (웃음) 뭔가를 해보려고 노력하잖아요. 그리고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잠재의식 속에서는 하지만, 쉽게 인정은 안하죠. 그만큼 자기부정이 어려운 거겠죠. 그렇게 자기부정을 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매력적이라는 것이죠.

결국 <하얀거탑>은 정치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앞서 말했지만, 여기서 나는 한 사람의 인생만 제대로 그리면 된다고 봐요. 그러니까 장준혁의 인생만 제대로 그리면 된다는 것이고, 그게 지상의 목표이기도 하죠. 그런데 그 사람과 관계된 사람들을 떨쳐내고서 그 사람 혼자만 남겨둬서는 그 사람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거죠. 결국 그 사람을 둘러싼 사람들을 모조리 대입시켜봐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의 내면이 흐름을 얻게 되고, 다양한 모습을 얻게 되는 거죠. 그런 면에서 정치드라마라고 하는 건, 초반과 중반에 장준혁을 둘러싼 인간관계 속에서 그 사람의 리액션을 보면서 관계의 정치성이 드러나는 거죠. 그리고 이제 그 단계를 넘어서니까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그 사람의 내면이 발가벗겨진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이제 마지막으로 그 사람의 내면 속으로도 들어가보는 거죠. 한 인간을 잘 쫓아가려면 이것저것 리트머스 종이를 대어봐야 하는 거고, 그런 의미에서 정치드라마로 흘러간 것이었죠.

촬영 전에 일본 드라마도 참고하셨나요.

처음에는 보지 않았어요. 애초 판권 계약을 할 때 원작소설만을 대상으로 했을 뿐 아니라 후지TV도 계약에 참여해서 일본 드라마의 크리에이티브가 들어오면 안 되는 조항이 있었거든요. 그런 마당에 만약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따라 할 수 있을까봐 안 봤던 거죠. 그런데 이미 다들 봤더라고요. 조연출이며, 작가며…. 자기들끼리 일본 드라마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회의하면 나만 바보된 느낌이었고, 그래서 나중에 봤죠. (웃음) 2003년판 후지TV에서 만든 드라마였죠.

보니까 어떠시던가요.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일본 드라마가 도움을 준 가장 큰 점은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아 저런 이야기가 드라마가 될 수도 있구나’ 하는 확신을 준 것이었죠. <하얀거탑> 소설을 볼 때는 참 재미가 있었는데, 드라마로 옮겼을 때도 과연 재밌을지 의문이 많이 있었어요. 그러던 차에 일본 드라마를 보니까 드라마로서 재밌더라고요. 일본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소설 속 이야기 자체가 너무 단순하고 별 게 없다는 생각에 이 드라마 안에 결국 사랑 이야기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생각을 했어요. 뭐 사랑, 배신 등을 이리저리 버무려야 20부작이 나온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웃음)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극본도 5편까지 썼다고요. 연애 라인 같은 것을 집어넣어서. 아무래도 서걱거린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는데, 일본판 드라마를 보니까 우직하게 잘 만들었더라고요.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원작대로 해야 하는구나 생각을 했던 거죠. 사실 일본 드라마에도 우리로 치면 이윤진(송선미)와 최도영의 사랑이 나오는데, 뭐 대단해 보이지도 않고 재미도 없더라고요. 하여간 그래서 5편까지 써놓은 것을 모두 엎어서 대본을 처음부터 다시 썼어요.

원작 소설에도 최도영과 이윤진을 둘러싼 러브라인은 존재하는데요.

사실 최도영의 사랑 이야기는 성립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뭔가 모순되는 점이 생기게 되고 그 모순을 풀자 치면 결국 최도영을 주인공으로 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장준혁이라는 사람을 포커스로 맞추는 것을 포기해야 하거든요. 결론적으로 안될 수밖에 없는 거죠.

비주얼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는 생각입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누아르 스타일입니다. 특히 부원장실, 각 과장실, 연구실은 의도적으로 어두운 조명으로 설계했고, 블라인드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하는데요.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었나요.

비주얼 컨셉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어요. 고민을 한 끝에 그런 누아르 스타일을 하기로했던 것인데, 고민을 했다. 비주얼 컨셉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고민 끝에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좋아해줬다는 생각이에요. 아까 말했듯이 소수의 공부한 사람들은 어쩌면 작위적으로 봤을 수도 있겠지만. 하여간 많은 사람들이 봐야 하는데, 이런 스타일은 일종의 설탕옷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상당수의 사람들이 누아르적인 분위기, 마초적인 느낌, 남성적인 것 등등을 비판은 해도 좋아한다고요. 은밀한 욕망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죠. 작위적이고 비현실적이지만, 비주얼을 강력하게 밀어부치면 압도가 됩니다.만약에 그런 점을 다 걷어내고 모든 방에 불을 환하게 밝혀놓은 채 촬영을 했다면 아마 이 드라마를 아무도 안 좋아했을지도 몰라요. 비주얼을 그렇게 한 이유 또 한가지는 원래 느린 이야기인데, 급박하게 흘러가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였죠.

개인적으로 여성적인 취향의 드라마를 많이 만들다가 남자들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다뤘는데, 처음 아니셨나요.

처음이죠. 일단 안 해본 것을 하니까 쾌감은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직접 만드는 것이야 이런 장르가 처음이지만, 관객으로서는 <대부>도 좋아하거든요. 하여간 좋아하는 다른 것을 해보는 색다른 재미가 있어요.

실제 의사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자문을 해주는 의사 선생님과 촬영장에서 모니터도 같이 보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분께 뭔가 이상하면 이야기해달라고 하는데 ‘됐다, 됐다’해서 넘어갔으니까 ‘됐나 보다’ 하는 거예요. (웃음) 그래도 한국사회도 조금 성숙한 게, 예전 같으면 의사처럼 좀 파워있는 사람을 소재로 삼아 그들의 부정적인 면모가 드러내면 격심한 반응을 보이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반응이 전혀 없더라고요. 촬영협조를 얻고 있는 아주대만 해도 그래요. 맨 처음 아주대 홍보실에 공문을 넣었을 때만 해도 홍보실 반응은 ‘도와주고 싶어도 의사들의 안 좋은 구석이 많이 나오는 드라마라 원장님이 어떠실지 모르겠다’였다. 하지만 막상 공문을 집어넣자, 원장님은 두말 않고 찬성해주셨다. 그분은 이미 소설 <하얀거탑>을 읽어보셨더라.

<하얀거탑> 외에도 유난히 의학드라마가 많아졌습니다. 미국도 그렇고.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외과의사 봉달희>는 촬영 때문에 한번도 본 적이 없고, <그레이 아나토미>는 촬영하기 전에 세편 정도를 봤어요. 사실 병원이라는 공간이 이야기가 되는 곳이죠. 그 구성원인 의사나 간호사들은 계속 한 공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거든요. 밥을 먹어도 그 속에서 먹고, 연애도 그 속에서 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야기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러고 보면 이번에 촬영을 하면서 의사들을 다시 보게 된 면도 많아요. 예전에 의사라면 ‘열쇠 3개’ 운운하면서 부정적인 면이 많았는데 이번에 좋은 면을 많이 봤어요. 무엇보다 참 열심히들 하더라고요. 쉬지도 않으면서 일하고 짬짬이 공부도 해야 하고.

<하얀거탑>이라는 드라마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그건 참 내게 어려운 질문인데… 쉽게 하기 힘든 진지한 이야기, 라는 생각은 들어요. 나 스스로 남 앞에서 진지해지기가 쉽지 않잖아요. 어색하기도 하고, 쿨하지 못하게 웬 진지인가 싶기도 하고. 하여간 그런 진지한 문맥이 형성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려운 것 같아요.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거든요. 진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문맥을 형성시키는 것 자체가 힘든데, 이번에는 묘하게 뭔가 아다리가 맞아서 그런 문맥을 형성시켰고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마디로 소회를 말하면 <하얀거탑>은 진지한 드라마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면 <하얀거탑>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드라마인가요.

특별히 무슨 의미는 없고… 그저 한회씩 할 뿐이에요. 안 다뤄본 장르고… 하여간 너무 어려운 질문이거든요.

이 드라마를 만들기 직전 영화를 했다는 게 도움이 됐나요.

상당히 도움이 됐어요. 영화를 하기 전에는 나의 일을 대하는 태도가 꽤 진지하다고 생각했고, 집중력 또한 상당히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영화를 해보고 나니까 그동안 덜 진지했고 덜 집중했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그런 면에서는 집중력도 더 생기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조금 더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 것 같아요.

다음 작품은 어떤 구상을 하고 있나요.

아직 생각이 없어요. 한가지, 드라마를 하다보니 너무 힘이 들어서 빨리 영화를 해야지 하는 생각 밖에 없어요. 만약 영화를 하면 또 그게 더 힘들다고 느낄 것이고, 그러면서 드라마를 빨리 해야지, 할 것 같아요. (웃음)

(글) 문석

mayday@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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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3-12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로 마지막회를 보면서 장준혁 과장의 행동에 행복한 미소를 띄워봅니다.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후학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기증하는 것은 정말 박수를 보내야 할 행동이었다고 할까요. 잘 읽고 갑니다. 날씨가 많이 풀려습니다. 이제는 기지개를 정말로 피고 야외로 꽃내음을 맡으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행복한 3월이 되시기를.......

외로운 발바닥 2007-03-13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준혁의 마지막은 정말 슬프지만 멋졌던 것 같습니다. 시신기증과 함께 자기 뜻을 꺾지 않는 상고이유서가 오히려 더 장준혁 다웠던 것 같네요.

이제 봄이 조금씩은 오는 것 같습니다. 산타님도 발굴 작업 더 자주 나가시겠네요.
산타님도 따뜻하고 즐거운 3월 되시기를...^^
 
 전출처 : 로쟈 > 아이리스 장과 난징대학살

올해는 1937년 난징 대학살이 일어난 지 70주기가 되는 해이고 이 사건을 다룬 영화들이 제작될 거란 소식은 작년 11월에도 전한 바 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040276&paperId=1007817). 오늘자 프레시안의 '할리우드 통신'은 그 영화들이 대거 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기사에서는 우리에게 '아이리스 장'이라고 소개된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원제는 <난징의 강간>)의 저자가 '아이리스 창'으로 표기되고 있다('Iris Chang'이니까 영어로는 그렇게 읽히겠다). 만지면 덧나는 상처 같은 역사적 상흔이지만 우리와 무관하달 수도 없기에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국내에서도 개봉되는 것인지...  

프레시안(07. 03. 08) 아이리스 창의 <난징대학살> 영화화

"미국 하원이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키더라도 사과하지 않겠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과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 야당 및 진보세력, 그리고 미국 정가 일각에서도 아베 총리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이 일본의 과거사 인식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데는, 올해가 난징 대학살(1937~38) 70주기를 맞는 해란 점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타임지는 최근호(12일자)에서 난징 대학살 70주기를 맞아 미국, 일본, 홍콩, 중국 등에서 관련 극영화, 다큐멘터리들이 대거 제작, 개봉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한 난징 주민은 무려 26만명. 강간 피해여성만 2만명이 넘는다. 그러나 일본정부와 보수파는 난징대학살의 실상이 왜곡됐거나 과장됐다는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난징대학살 관련 영화들이 속속 선보이는 것을 계기로 세계각지에서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고 타임은 전망했다.

난징대학살 관련 영화 중 가장 먼저 개봉되는 영화는 빌 구텐타그, 댄 스터언 감독의 <난징>. 지난 2003년 9.11테러 관련 다큐멘터리 <쌍둥이 빌딩>으로 아카데미 장편다큐부문상을 수상했던 두 감독의 극영화 데뷔작이다. 우디 해럴슨과 마리엘 헤밍웨이가 1930년대말 난징에 거주하다가 일본군에 의한 현지 중국인 학살을 목격하게 되는 미국인들로 등장한다. 두 감독은 사건 당시의 기록필름, 생존자 및 목격자들의 증언, 극중인물들처럼 난징에 살았던 외국인들의 서신 및 일기 등을 기초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지난 1월 미국 선댄스영화제에 처음 선보여 호평받았으며, 이번달 말 홍콩 국제영화제에도 출품될 예정이다.
  
<난징>제작 뒤에는 아메리칸온라인(AOL) 부회장 테드 레온시스의 재정적, 정신적 뒷받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2004년 카리브해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베스트셀러 <난징대학살(원제 : 난징의 강간)> 저자인 아리리스 창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신문기사를 통해 알게됐다"며 "그때까지 내가 그처럼 끔찍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고 영화 <난징>제작에 뛰어들게 됐던 계기를 털어놓았다.


  
레온시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난징대학살>은 지난 97년 미국에서 출간돼 무려 10주간이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목록에 올랐던 저서. 중국계 미국인인 저자는 난징에서 직접 발굴한 광범위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사건의 실상을 상세하게 재구성해냈다. 이 책은 난징대학살에 대해 알지못했던 미국 독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아이리스 창은 당시 나이 29세로 유명 작가반열에 올랐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7년뒤인 2004년 아이리스 창은 갑작스럽게 자살로 생애를 마쳐 다시한번 독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다. 하지만 주변인물들은 창이 생존시 일본 보수우파로부터 많은 협박을 받아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그것이 그의 죽음에 한 원인이 됐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미국사회에 난징학살의 진상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창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도 현재 제작 중에 있다. 캐나다 감독 빌 스파힉의 <잊지 못하는 여자 : 아이리스 창 스토리>가 바로 그것. 그런가하면 창의 책도 곧 영화화된다. 제작자인 제럴드 그린은 <난징대학살>의 영화화 판권을 3800만달러에 구입, 곧 촬영에 들어갈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감독은 <툼레이더>를 만들었던 사이몬 그린.

이 밖에 올리버 스톤 감독, 홍콩 감독 스탠리 통, 중국감독 류추안 등도 난징 관련 영화를 준비중이거나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다. 타임에 따르면, 아이리스 창의 어머니 잉잉창은 "영화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난징의 비극을 알리려는게 아이리스의 소원이었다"며 딸의 책을 기초로 한 작품 등 관련 영화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대해 감격을 나타냈다.
  
그런가하면 일본에서도 난징 영화가 만들어진다. 지난 1월 미시마 사토루 감독은 기자회견을 열고 빌 구텐타그 감독의 <난징>을 "중국의 조작된 자료만을 토대로 한 작품"으로 맹비난하며, 자신의 영화<난징의 진실>이 "사실있는 그대로"를 관객들에게 알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수 우파인 미시마 감독은 " 30년대 말 난징에서 일본군에 의한 조직적 학살, 강간이 자행됐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한편, 구텐타그 감독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수많은 법의학적 증거,수많은 사진증거, 수많은 필름 증거, 그리고 수많은 목격자들의 증언이 존재한다. 난징의 참상을 입증하는데 이 이상 더 어떤 증거가 필요한가"라며, 역사의 진실을 거부하는 일본을 날카롭게 비판했다.(신영 기자)

07. 03. 08.

P.S. 난징대학살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http://www.youtube.com/watch?v=YoW2WYdOsvg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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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4 - 386세대에서 한미FTA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4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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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한홍구는 끊임없이 과거사, 군대문제 등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해왔다. 대한민국사 1,2,3에 이어 나온 4권은 과거 독재 정권시절 언론, 기업인에 대하여 행해진 악랄한 탄압, 언론과 기업의 강취에서부터 노근리학살, 한미 FTA, 386세대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약간은 두서없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한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미워해야 마땅할 자들에 대한 정당한 공분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들의 만행을 까발리는 것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분노 뒤의 상황을 걱정하면서 희망의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지만, 아직도 이 책의 방점은 앞부분에 찍혀 있지 않나 싶다.


미워해야 마땅할, 아니 엄중한 법적 처벌을 받고 사죄하며 부끄러움에 얼굴도 제대로 들고 다니지 못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사회적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고 자신들을 벌주어야 할 세력을 탄압하고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감추어온 우리 역사의 아이러니를 저자는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다.


올해로 소위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지도 10년째가 되었다. 미워해야 마땅할 놈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세력이 정권에서 물러나고 소위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은 지 이미 10년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미워해야 마땅할 놈들이 자신들의 죄과를 반성하고 그들을 한번 정당하게 미워해보는 과거사 청산은 아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응당 죄를 짓고 부끄러워 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목청을 높여 역공세를 펼치고,

공과에 대한 일률적 판단은 어렵다 할지라도 수많은 탄압과 폭정에 대한 명백한 책임이 있는 독재자, 의 딸이 독재자의 후광만을 등에 업고 독재자의 그림자는 짊어지지 않은 채 대권에 도전하고 있을 정도로 미워해야 마땅할 놈들의 기득권은 아직도 강력하고 사회적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미움 받고 있지 않다.


물론 미워해야 마땅할 놈들과 연계된 세력은 무조건 악이고 민주화 세력은 무조건 선이라는 도식적인 이분법은 타당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어디까지가 미워할만한 놈인지 구분하기도 애매하고(단적인 예로 독재자의 잘못을 독재자의 딸의 잘못으로 바로 연결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미워해야 마땅할 놈들이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적으로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소위 민주화 세력도 잘못도 많고 그들 자체가 이미 기득권이 된 그들이 과거의 잣대로만 언제까지나 순수성과 민주성을 담보한다고 볼 수도 없다. 그리고 과거에 연연하는 것보다는 현재와 앞으로의 우리사회가 어떻게 발전해 나갈 것인가가 더욱 중요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인정하더라도 잘못한 자들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큰 잘못을 하여 사회적으로 미워해야 마땅할 놈들이 오히려 떵떵거리며 사는 사회는 기본적인 규범이나 틀조차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이다. 최소한 사회적 잘못에 대해서는 벌을 주고, 벌을 줄 수 없다 하더라도 소위 정당한 사회적 공분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과거가 미래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과거에 대한 진지한 반성 없이는 밝은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저자는 일부 이슈에서는 주관적이고 때로는 편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북한에 대한 맹목적 무비판이라든지 김대중 정부에 대한 특별한 이유 없는 높은 평가(북한과의 6.15.선언 때문인 것 같은데 그 자체의 역사적 가치나 평가는 제쳐두고서라도 그것만으로 김대중 정부의 사회, 경제정책의 실패에 대한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고 본다.), 같은 운동권(?) 출신으로서의 386에 대한 편애(마지못해  386이나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비판은 하는데 비판의 알맹이가 없고 결국 문제의 원인을 과거 독재정권에 돌리는 듯한 느낌이다) 등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주류사회에 대한 삐딱한 시선은 여전히 가치 있다고 본다.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많고, 저자 자신이 민주화세력으로서 언제나 도덕적, 이념적 우월성을 가진다는 듯한 태도가 조금 거슬릴 때도 있지만, 아직은 우리사회가 한홍구와 같은 삐딱함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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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 산책 - 정운영의 마지막 강의 Economic Discovery 시리즈 7
정운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자본주의와 20세기의 역사,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고 정운영 선생의 글 몇 개를 모은 것이다.


첫째 장인 20세기 경제산책에서는 제국주의에서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 및 사회주의와의 냉전을 거쳐 세계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흐름을 분석하고 새삼 인간의 탈을 주문할 만큼 막가는 세기말 자본주의의 탈선(p52)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세계화는 한마디로 자본의 효율성에 맞춘 경제 질서의 폭력적 개편을 가리킨다. 자본에 이익이면 사회에 이익이 된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자본의 활동에 완벽한 자유를 부여하려는 시대의 추세이다. (p49)


두 번째, 세 번째 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세계화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헤일브로너의 ‘21세기 자본주의’라는 책에 대한 독후감으로 세기말 자본주의인 세계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데 헤일 브로너는 각각 경제활동에 대한 차별적인 이론을 가졌던 저명한 경제학자들 - 애덤스미스, 칼 마르크스, 케인즈, 그리고 슘페터 -을 분석의 틀 삼아 자본주의의 미래를 전망한다. 이 경제의 대가들은 대체로 자본주의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했는데 문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이들도 제대로 예상치 못한 변수라는 것이다.


세계화가 그 신봉자들의 주장대로 무역 장벽을 철폐하여 교역 증대의 건지와 국물을 같이 나누려는 노력이라면 별로 반대하고 싶지 않다...그러나 세계화는 강대국 이기주의를 은폐하고 변호하며, 그것을 강요하는 조류라는 점에서 분명히 ‘편파적으로’ 작동한다.(p72)


세계화의 실체가 이러할 진대 저자의 지적처럼 ‘세계화의 정체를 진지하게 파헤치려는 노력조차 없이 세계화만이 살길이라고 몽유병 환자처럼 외치는 오늘의 세태(p81)'가 정말 걱정스럽다.


세계화와 관련한 논의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둘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세계화와 지역화’ 였다. 세계화의 문어적 의미와는 역설적이게도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지역화가 더욱 활발해진다. 그리고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지역화가 차별적 효과를 지닌다는 것이다. 즉 강대국은 세계화를 공격의 무기로 이용하고, 지역화를 방어의 완충장치로 활용한다. 반면 개발도상국은 세계화를 통해 세계경제에의 미숙한 편입이 강요되고, 강대국의 지역화 때문에 선진 시장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차단된다.(p121) 자유무역협정이라는 FTA도 결국은 FTA를 맺지 않은 국가에 대하여는 차별적으로 불리하게 대하고 FTA를 맺은 국가들간의 지역화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결코 자유무역적이지 않다는 역설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국가의 임무를 국제기구 등에 위임함으로써 국가 고유의 기능이 무장해제되는 ‘국가의 국제화’ 였는데(p85), 최근에 정부의 개입이 사회적으로 해악을 초래한다는 터무니없는 내용을 명시한 전경련 교과서까지 등장한 것을 보면 정운영 선생의 식견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씁슬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세계화 시대의 국가는 자본과 시민에게 일종의 기피인물로 선전된다. 시장 자율은 선이고, 정부 개입은 악이라는 따위의 그럴듯한 소문이 자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유포되기도 한다.(p125)


매년 수치적인 경제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자본주의 사회. 그 마저도 실물경제와 관계없는 자본거래가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파괴적 힘을 남용하고 있는 지금의 자본주의는 무엇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세기말 자본주의든 무엇이든 자본주의가 이러한 것들을 교정하지 못한다면 거시적으로 볼 때 지금 몰아치고 있는 세계화의 광풍이 자본주의의 수명을 단축시킬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80년대 한국사회의 정체성에 관한 글은 우리 사회의 형태를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틀로써 당시 우리 사회를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전제한 뒤 논의를 진행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80년대 상황에 대한 무지와 경제학적, 경제사적 배경지식의 부족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앞으로 추가적인 공부가 필요한 부분이다. ;;


남북 경제의 장래와 미국의 관심에서는 미국의 이해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현 남북관계에 있어서 남한이 취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들을 차분하게 분석하였다. 남북한 화해와 통일은 현상태의 유지를 바라는 미국의 이해관계에 상충된다는 것을 전제한 뒤 결국은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점진적으로 남북관계를 개선해 나갈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것이 정운영 선생 말씀의 요지다. 특히 남북한 경제교류 활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깊이 있는 내용의 글이 아닌 컬럼 형식의 글이었지만 신선한 내용도 있었고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느껴졌던 남북관계에 대한 생각이 어느정도 구체화되는 느낌이었다.


한반도의 이해는 때로는 대북 공조의 이해와 다를 수 있고, 대미 공조의 이해와도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로 막힌 것을 경제가 뚫도록 하자. 그러나 그 경제가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므로 벽은 여전한 셈이다. 애초에 길이 있어서 사람이 다닌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꾸 다니다 보니 길이 생긴 것 아니겠는가? 이 지혜는 남북 경제의 장래와 미국의 관심이라는 우리의 논의에도 빌릴 만하다. 길이 안 보인다고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자꾸 부딪치면서 길 자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한민족의 고단한 운명이기 때문이다.(p254)


부끄러운 말이지만 정운영 선생이 고인이 되신 다음에야 선생을 알게 되었다. 선생을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이 아쉽고 선생이 또 너무 빨리 고인이 되신 것이 아쉽다. 고 정운영 선생이 걱정하던 세기말 자본주의가 더욱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 같다. 선생이 꿈꾸던 사회에 우리 사회가 우리 시대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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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들
김영현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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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크지 않은 동네에서 동네 유지인 최문술이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과도로 가슴을 찔리고 도망가던 그를 범인은 목까지 졸라 살해한다. 외부 침입의 없다는 점에서 최문술을 잘 아는 면식범, 즉 그의 가까운 가족 중에 범인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유력한 용의자가 체포되고 최문술의 어두운 가족사가 하나씩 드러난다...


흡사 추리소설 같은 구성으로 작가는 피해자의 아들인 성연이 사건을 재구성해 가면서 자기 가족의 어두운 과거와 그로 인한 죄악의 씨앗이 한 가정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이끌어나간다.


예비신부였던 성연은 자기 가족의 숨겨진 죄악을 알게 되고 예기치 않게 더욱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신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성연이 무신론자가 된 것은 아니다.

성연이 ‘나의 하느님...그이는 이 세상과 함께 있는 분이라는 걸 이번 일을 겪으면서 깨달았어요...그이가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야말로 때로는 지옥처럼 고통스럽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생에 그이가 준 축복이자 선물이었어요.(p295)’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수도원이 아닌 속세에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거나 수련이 더 필요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을 읽고서 평소 가끔 하던 생각이 또 들었다. 정말로 큰 시련이 나에게 닥쳤을 때, 예컨대 가족의 죽음이나 건강의 상실 또는 불의의 사고 같은 것을 겪었을 때 그것을 신이 주신 시련이고 그것이 결국 신의 은총이자 사랑이라고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신에 대한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한 채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 말이다.


‘지선아 사랑해’를 보면 정말 끔찍한 화상 사고를 당한 지선양은 사고가 있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 책을 읽고 나서 나는 그녀의 그런 말이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속적 행복과 세속적 행복의 상실로 인한 큰 깨달음...큰 깨달음은 없더라도 세속적으로 행복하게, 그러나 깨달음의 큰 방향은 벗어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겠지만 세속적 행복의 상실로 인한 깨달음 이후에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떠할 지...참 어려운 문제 같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던지는 물음 ‘나의 생은 과연 가치 있는 그 무엇일까?’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네.’라는 말은 간단하지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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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7-03-08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물음에 저도 망설여지네요..지선이처럼 깨달음에 행복을 느낄수 있는 자는 현명하고 지혜롭고 진정 행복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아는 자임에 분명해요.
살면서 저는 그 경지에 언제쯤 도달하려는지..
늘상 욕심때문에 또 무너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외로운 발바닥 2007-03-0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로 그러한 경지에 이르기는 쉽지 않겠지요. 그래도 배꽃님처럼 욕심때문에 또 무너진다는 인식을 하고 노력하시는 것만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
매일 한 발자국씩이라도 그 경지에 가까이 다가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