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중앙, 긴급조치 판사 공개방침 또 반대…"유신 찬양한 탓"[미디어오늘 조현호 기자]
"집권자가 경제발전과 대북안보를 위해 개발독재를 결심했고 그 수단으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택했다.…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룩했고, 안보가 지켜진 것도 무시할 순 없다.…"
이 말은 30여 년 전 유신체제 당시 누군가가 한 말이 아니다. 2007년 1월29일 중앙일보가 사설을 통해 밝힌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이다.
중앙, 이번엔 2007년 식 유신·긴급조치 정당화
중앙일보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진실화해위)가 74년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대한 재판결과와 판결내용, 판사 명단을 담은 보고서를 이번 주중에 발표하겠다고 지난 28일 밝힌 것과 관련해 이 같은 사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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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1월29일자 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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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 사설 <'긴급조치' 판사 이름 공개, 실익 없다>에서 "시대에 대한 이해와 조사결과 발표의 파장 등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며 "30년이 지난 지금 특정 사안에 대해 이를 집단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당시의 판사들은 지금 대법관, 헌재 재판관 등 사법부 지도층인데 그들이 변화된 시대의 해석으로 단죄되는 것이 꼭 역사의 정의인가"라고 밝혔다.
중앙은 이와 함께 10면 머리기사 <1970년대 긴급조치 사건 판결한 판사 수백명 실명공개 추진논란>에서도 "당시의 실정법에 따른 판결을 두고 지금의 시각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했다. 중앙은 인혁당 사건 재심 결과에 따라 다른 사건도 재심 청구가 잇따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자 지난 24일자 사설에서 "이들 사건에서도 권력의 요구가 아닌 정의의 요구에 부응하는 사법부의 올바른 판단을 기대한다"고 밝혀 뭔가 개운치 않은 주장을 펴기도 했다.
"박 정권, 개발독재 했지만 고도성장·안보 무시할 수 없어"
30년 전 국민투표에 의한 법대로 판결한 것을 시대가 달라졌다고 지금 시각에서 바로잡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주장인 것같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과거의 어떠한 역사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으며, 모든 부당한 과거는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근거와 논리를 제대로 뒷받침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기사와 사설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중앙은 이날 사설에서 이 주장을 펴기 위해 유신과 긴급조치를 정당화했다.
"시대에는 시대마다 집권자가 경제발전과 대북안보를 위해 개발독재를 결심했고 그 수단으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택했다. 장기집권 사욕에 의해 이뤄진 측면이 분명하나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룩했고, 안보가 지켜진 것도 무시할 순 없다. 그런 시대상황에서 판사들은 국민투표로 통과된 헌법에 따른 긴급조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중앙은 과거 자신들이 어떻게 했는지 살짝 속내를 내비쳤다.
"사법부 뿐 아니라 행정부 입법부, 그리고 학계·언론도 대부분 체제를 수용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자신이 그렇게 비판하는 유신헌법 책을 공부해 '유신 판사'가 됐다."
"언론도, 노무현 대통령도 유신 수용"…물귀신 작전 속내는?
당시 사법부 뿐 아니라 자신들도, 심지어 노 대통령까지도 유신헌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얘기다. 이런 '물귀신' 논리를 펴는 중앙일보의 유신헌법 개정안 당시 사설을 보면, '체제수용' 정도가 아니라 찬양과 미화, 그리고 굴종이라는 표현으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지난 72년 10월17일 새벽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대통령 특별선언'으로 유신헌법 개정안을 발표하자 석간이었던 중앙일보는 당일자에는 한꼭지의 기사도 싣지 못했다. 그 뒷날(18일자) 중앙은 1면 머리기사와 2면 사설, 3면 선언문 전문과 각계 지지 반응, 7면 정부 후속조치 및 '평상시와 다름없다'는 거리 표정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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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72년 10월18일자 1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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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면에는 당시 유행이던 먹컷으로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라는 제목의 스트레이트 기사와 박 전 대통령 사진을 게재했고, 왼쪽 상단에 <생업 지장없게 조처>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중앙, 유신 당시 "비상한 결의 이해해야" 노골적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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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72년 10월18일자 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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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 2면 사설에서도 노골적으로 유신헌법 개정안을 받들었다.
"이 특별선언은 남북대화를 뒷받침하여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기 위해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촉구하면서 민족주의세력의 형성을 촉진키 위한 일대전기를 마련키 위한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 헌법과 각종 법령 그리고 현체제는 동서양극체제하의 냉전시대에 만들어졌고, 따라서 남북의 대화같은 것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시대에 제정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과 같은 새 국면에 처해서는 마땅히 이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개혁적 전환이 있어야 하고, 또 그러한 전기에는 개헌이 불가피하게 요청되었다."
중앙은 박대통령이 특별선언문에서 '결코 한탄 정권의 입장에서 아니라, 국권을 수호하고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성실한 대화를 통해…민족의 통일과 중흥을 이룩하려는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한 대목에 대해 "우리는 박 대통령이 비상한 결의를 갖고 대담한 체제개혁운동을 취하게 된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박수를 쳤다.
"유신조치에 일체 경거망동 삼가야"
여기에 개헌을 위해서는 "헌법의 유신적인 대개정이 있어야 할 것 같다.…헌법을 부분적으로 개정하고 보완한다는 미봉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로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담한 개혁을 시도함이 마땅할 것"이라고 충고하기까지 했다.
또한 사설에서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시민·학계를 겨냥해 "비상계엄하 체제개혁을 시도하는데 있어서 국민은 경거망동을 삼가, 일체 혼란의 발생을 자제해서 억제토록 할 것"이라고 주문하는 것을 빼놓치 않았다.
중앙은 이어진 3면 <10월17일 특별선언 각계서 지지성명>을 통해 재향군인회, 이북5도민회 중앙연합, 대한상의, 무역협회 등의 성명을 인용해 "평화적으로 통일하는데 뒷받침이 될 수 있다는 데서 지지를 보낸다"고 보도했다. 또한 7면에서는 "계엄하에서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시민들이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시민 반응을 내보냈다.(<평상시와 다름없어/거리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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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72년 10월18일자 7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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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권에 조아리던 굴욕의 역사, 자성은 온데간데 없고
중앙일보는 유신체제하에서, 아니 박정희 정권 아래서 단 한마디의 고언도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의 원죄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역사에 대해 준엄하게 심판하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반성하지 못한다면 언론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도 저버리는 일이다. 이 조차도 하지 못하면서 마치 "모두가 독재정권의 피해자" 식의 어설픈 '물귀신' 논리를 흉내내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의 독자, 더 나아가 국민들을 우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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