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의 책임과 차기 정부의 성격 등을 둘러싼 최장집-조희연-손호철 교수 등의 이른바 '진보 논쟁'에 노무현 대통령 본인이 가세했다.
노 대통령은 지난 17일 청와대 브리핑에 게재한 '대한민국 진보, 달라져야 합니다-진보적 가치 실현 위해선 유연성과 책임성 중요'라는 제목의 글에서 스스로를 '유연한 진보주의자'로 규정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현 정권의 주요 정책에 반대하는 진보진영을 '교조적 진보주의자'로 규정했다.
이와 관련해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 비서관이 노무현 대통령이 비판한 '교조적 진보'가 문제가 아니라 한미 FTA와 사회투자 국가라는 두 가지 모순된 정책을 한꺼번에 추진하는 '교조적 시장주의'가 문제라는 지적을 담은 기고문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신을 보내왔다. 이 글은 인터넷매체 <레디앙>에 동시에 게재된다. <편집자>
'한나라당 집권론'은 통렬한 반어법
중도란 말이 유행이다. 누가 봐도 한 쪽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이 중도를 외친다. 마치 이념이 없는 것이, 따라서 철학도 정책기조도 없는 것이 자랑이라는 듯 실용주의를 내세운다. 심지어 이른바 진보진영 일각에서도 "모든 진보는 중도"라는 해괴한 테제(?)를 별 논리적, 역사적 근거도 없이 슬그머니 들이민다.
현재의 정치지형에서 지식인들이 중도를 표방하는 건 단순 논리로는 이해가 된다. 이른바 '호텔링의 가게 세우기' 논리가 그것이다.
하나의 거리에 가게를 내려는 사람이 둘 있다. 이 거리에는 모든 집들이 같은 간격으로 서 있고 두 가게의 상품은 별로 다를 바가 없어서 사람들은 가까운 가게를 이용한다. 그렇다면 어느 위치에 가게를 세우는 것이 두 가게 각각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줄까? 답은 두 가게를 거리 한 가운데 나란히 세우는 것이다.
정치인들도 선거에서 이와 마찬가지로 좌우로 선명한 정책을 내세우기보다는 가운데쯤 되는 정책을 내놓고 사람들을 현혹한다. 이른바 '중도통합'에 목매는 열린우리당의 행태는 이 논리 그대로 설명된다.
그래서 주목되는 건 오히려 중도를 표방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손호철 서강대 교수, 이병천 강원대 교수가 인터넷과 신문 지면을 오가며 흥미로운 논쟁을 벌이고 있다. 네 교수의 현실 인식에는 큰 차이가 없는데 결론은 뭔가 확연히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정치에 무지할 뿐 아니라 무관심하기까지 한 나에게도 최장집 교수나 손호철 교수의 '한나라당 집권론'은 그저 통렬한 반어법으로 들린다. 실제 차이가 있다면 '반(反)한나라당 연합전선'의 현실성에 관한 인식 정도이다.
굳이 콕 집어 말하자면, 정대화 상지대 교수의 미래구상에 대한 의구심이라고나 할까? 정 교수의 미래구상이 어떻게 나아갈지 정확히 알 도리는 없지만, 내가 믿기로 최장집, 손호철 이 두 교수가 원칙 있는 연대(예컨대 손 교수의 경우 '반(反)신자유주의 연대')에 반대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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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청와대 국민경제 비서관인 정태인 씨는 지난해 200회가 넘는 대중강연을 통해 한미 FTA의 위험성을 전국 방방곡곡에 알렸다.ⓒ연합뉴스 |
'중도'는 없다…'잡탕'만이 있을 뿐
그렇다면 '연대의 원칙이 무엇이어야 하는가'가 앞으로의 핵심 주제다. 경제 측면에서 연대의 원칙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찬반 여부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분배 정책에 대한 찬반 여부 등 2가지로 최소화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진영은 한미 FTA에 반대하고 재분배 정책에 찬성해야 정상이다. 역으로 보수진영이라면 당연히 한미 FTA에 찬성하고 재분배 정책에 반대해야 정상이다. 민주노동당이 전자의 대표이고, 후자의 대표는 한나라당이다.
핵분열 중인 열린우리당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천정배 의원 그룹이 전자에 가깝고 김한길-강봉균 그룹은 지금 당장 한나라당에 입당해도 욕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후자에 가깝다.
이제 남은 사람들이, 말하자면, 진정한 중도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바로 거기에 현재의 열린우리당이 있다. (문제는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한미 FTA 반대 및 재분배 정책 찬성 그룹에 대해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뒤에 언급하겠다.)
이 둘 사이에 중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뭔가 있다면 그건 중도가 아니라 '잡탕'이다. 모든 사회경제 시스템의 요소와 제도들 사이에는 보완성이 있어야 하는데, '잡탕의 경제학'은 친화성 없는 제도들 간에 불협화음을 낼 수밖에 없다. 예컨대 한미 FTA를 주몽의 강철검처럼 여기는 동시에 요즘 부쩍 '사회투자 국가'를 들먹이는 참여정부의 정책이 그렇다.
(나는 제도 간의 완벽한 논리적 보완성을 믿지 않는다. 때로는 그 안의 사람들이 공동체적 협력으로 가뿐하게 제도적 마찰을 넘어서기도 한다. 참여정부의 진정한 실패는 바로 이 지점에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뒤에 언급하겠다.)
사회투자 국가에 대해 관대함?…레임덕 증거! 사회투자 국가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보수당의 마가렛 대처에게 승리하기 위해 정치적 수사로 뻥튀기해서 그렇지, 교육과 주거, 의료 등에서 기회의 평등을 부여하는 정책, 즉 '공급 측면(supply side)의 복지 정책'은 이미 스웨덴 등 북구 국가가 실행해 왔던 것들이다.
에스핑 안데르센이 이미 지적했듯이 이른바 '제3의 길'은 북구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선별적으로 수용한 데 불과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정책의 핵심 중 하나인 사회적 일자리 창출이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이미 한국노동연구원을 중심으로 논의돼 온 것이다.
나라마다 정책의 폭과 깊이에 차이가 나는 것은 그 나라의 사회경제 구조가 이같은 정부 정책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정책 인프라가 얼마나 갖춰져 있는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공공 보육시설이 얼마나 있는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추진할만한 제도가 갖춰져 있는지, 심지어 계층별 소득 실태가 얼마나 파악되어 있는지, 더 근본적으로는 그 나라가 사회적 타협을 할 준비가 돼 있는지, 그 나라의 정치-이데올로기 지형이 어떠한지 등이 관건이 된다.
물론 이런 정책을 시행하기 가장 좋은 곳은 이미 관련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는 북구형 국가들이며, 그렇게 하기 가장 어려운 나라는 영미형 시장주의 국가이다.
아마도 지금 사회투자 국가론을 갈고 닦는 사람들은 이런 정책이 보수당 집권 12년 동안 철저히 신자유주의 경제가 된 영국에서 유행하는 정책이어서 매력을 느낄 것이다. 가장 '소극적' 정책이니, '급진적' 개혁에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눈여겨 볼만 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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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 FTA 협상 때마다 한미 양국 수석대표는 악수를 하는 것으로 협상을 시작한다. 이 악수 속에 '유연한 진보'가 들어가 있을까? ⓒ연합뉴스 |
하지만 아무리 논란이 많은 정책이라 하더라도 (복지국가를 둘러싼 이론적 쟁점이 모두 문제가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지보유세를 강화하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마저 좌파로 몰리는 이 나라에서 이런 사회투자 정책이 시행될 수 있다면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정의론 차원에서 사회적 투자국가의 이론적 자원이라 할 수 있는 아마티야 센의 '능력 이론(capability theory)'에 '네트워크 이론'을 접목해 사회투자 국가론보다 더 현실적인 정책을 담은 보고서가 이미 노무현 정부에 제출된 바 있다. 이 정부에 참여한 수많은 학자들이 위원회 등을 통해 낸 보고서가 대개 그렇겠지만, 이정우 당시 정책기획위원장(현 경북대 교수)의 지휘로 작성된 '동반성장의 길'이 그렇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 김병준 당시 정책실장(현 정책기획위원장), 김영주 당시 정책수석(현 국무조정실장), 정문수 당시 경제보좌관이 붙인 대통령 참조용 댓글은 똑같았다. "사상적 시비에 걸릴 수 있으니 정책 기조로 채택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철학적 깊이는 몰라도 현실 정책에선 큰 차이가 없는 사회투자 국가가 이런 사람들의 포위망을 뚫었다면 그건 확실히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정권 초기 이정우 교수가 유럽 기준으로는 가장 시장주의적인 모델 중 하나인 네덜란드의 '폴더 모델(노조가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하는 대신 사용자는 노조의 부분적 경영 참여 등을 보장하는 상호 협력적 노사관계)'을 언급했을 때 보수언론들이 그야말로 '난동'을 부린 것에 비하면 사회투자 국가론에 대해 이렇게 관대한 것도 흥미롭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레임덕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당장 시행될 것 같지 않은 정책에 무관심한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진보진영이 '비전 2030'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도 노무현 대통령이 그리 상심할 일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후술하겠지만, 나는 이들의 무(無)대응은 예의 비일관성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대통령의 '유연한 진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큰 줄기로 돌아와서 보면, 역시 문제는 정부가 양극화를 극단으로 밀고 가는 급진적 신자유주의 정책인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사회투자 국가를 외치고 있다는 데 있다.
한미 FTA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치유한다고 주장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정권 초기에는 김영주 당시 수석마저 한미 FTA로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극복책까지 두 개의 정책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 한 바 있다.
불행하게도 당장 시행해야 할 양극화 극복 정책은 중장기 정책 또는 차기 정부의 정책 과제로 밀려났다. 대신 원래 중장기 정책이었던 한미 FTA가 초단기 정책의 자리를 차지했다.
캐나다 서비스 노조는 미국과의 FTA를 추진하는 집단의 정치적 목표는 공공성의 강화를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갈파한 바 있다. 사회투자 국가 역시 만능의 강철검이 아니다. 사회투자 국가 정책은 전통적인 소득 재분배 정책의 강화로 상호 뒷받침해야 한다.
강둑부터 터뜨리고는 범람한 물을 퍼낼 바가지를 당장 생산해야 한다는, 2030년까지는 양수기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역설하는 그런 중도, 그런 실용, 대통령의 언어로 '유연한 진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대의 대상은 더더구나 아니다.
<대통령께 드리는 글>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대통령이 "대한민국 진보, 달라져야 합니다"라고 일갈했다. 경어체의 편지글 형식이므로 나도 예를 갖추어야 마땅할 터이다)
'하얀 거탑'의 진실은 곧 밝혀집니다
학자들을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드라마 작가에 비유하면서 글을 시작하셨으니 저도 드라마 이야기부터 하려 합니다. '하얀 거탑'이라는 주말 연속극이 있습니다.
온갖 술수를 동원해 외과과장이 된 한 실력 있는 의사가 실수를 해서 한 환자가 목숨을 잃습니다. 세계외과학회 회장 부인의 수술에 온 정신이 다 팔렸기 때문이죠. 고인의 부인은 민변 소속쯤 되는 '운동권' 변호사의 도움으로 소송을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의료 드라마가 법정 드라마가 됩니다.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드라마에서 병원 과장의 권한은 가히 무소불위입니다. 전문의와 전공의 모두가 말을 맞춰 뻔한 사실을 왜곡하는 현실 앞에서 환자 가족과 한 양심적 의사가 법정에서 흥분합니다. 노 대통령께서도 과거에 판사를 하셨으니 잘 아실 테지만 결국 진실이 궁지에 몰리고 맙니다.
저는 대통령이 언급한 '진보진영'이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노 대통령이 한미 FTA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이 반복한 얘기지만, 대통령의 육성으로 다시 한 번 여러 가지 사실을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먼저 한미 FTA을 추진하기 시작한 시점에 대해, 청와대와 정부 모두가 말을 맞춰 2003년 8월 이른바 'FTA 로드맵'을 만들 때부터 한미 FTA를 구체적으로 추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는 2005년 8월에 한미 FTA에 대한 첫 보고를 받았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무려 2년의 시차가 납니다.
2005년 2~5월 사이 저는 FTA 정책을 업무의 일부로 하는 국민경제 비서관이었습니다. 이 일을 처음 맡기시던 2월 1일 새벽에 특별히 저에게 지시한 것은 한일 FTA의 재개 여부를 검토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미 FTA에 대한 말씀은 한 마디도 없으셨습니다. 그 때는 비밀리에 한미 FTA를 추진 중이어서 저에게 말씀하지 않으신 건가요?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나 청와대 경제보좌관실은 제가 한미 FTA를 알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아서 몰랐을 뿐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확인된 바와 같이, 통상교섭본부는 그 때 이미 'FTA를 전제로 하지 않은 실무협상'이라는 이름으로 한미 FTA 협상 개시의 전제조건을 미국 측과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협상 결과가 바로 '4대 선결조건'입니다.
정부는 이것이 단지 통상현안이어서 FTA 추진 전에 해결하려 했을 뿐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요구를 미리 들어주고 협상에 임하는 바보 같은 선수가 있다면 당연히 선수 교체 대상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진실을 영원히 땅 속에 묻어 버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한 방송사에서 대외경제위원회 문건을 공개하고 나서야 정부는 이른바 '4대 선결 요건'의 실체를 인정했습니다.
무엇을 위한 선결인가요? 미국과 FTA를 추진하기 위해서 미리 해결해야 할 네 가지 과제, 즉 스크린쿼터 축소,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약값 결정 시 미 제약회사의 발언권 보장, 배기량 기준 자동차 세제의 폐지 등을 사전에 다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나요?
최근 정부는 한미 FTA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있었다면서 상당히 긴 연구목록을 제시했습니다. 이것들이 정말 정식으로 정부와 계약을 맺은 용역연구로 보고 받으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일이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뉴스레터 같은 간략한 보고도 모두 포함시켰을 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또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한미 FTA의 핵심 연구원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도 2005년 11월까지 한미 FTA가 실제로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일본이나 중국과 같은 거대 경제권과 FTA를 할 때 당연히 거치는 절차인 민간연구기관 간 공동연구나 산관학 공동 연구도 생략됐습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한국개발연구원(KDI), 산업연구원(KIET)의 협동 연구는 2005년 12월에야 발주됐습니다.
한미 FTA와 같은 어마어마한 정책이 2003년 하반기부터 착실히 준비됐다는데, 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세 연구기관이 FTA 개시를 목전에 두고서야 연구를 시작했을까요? 정부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세 연구기관장 모두 사표를 내게 하는 것이 정상적인 인사일 것입니다.
언론에 따르면 대통령께서는 지난해 8월에 이르러서야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절차) 문제를 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3년이나 검토를 하고서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미처 몰랐다는 건가요?
또한 이 TF에 참여한 민간위원이 위헌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법무부와 건교부, 심지어 재경부마저도 이 조항의 삭제나 축소를 요구했다는 사실은 보고 받으셨나요?
이미 여러 번 얘기한 것이라서 '졸속성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한미 FTA를 성급히 추진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드라마 '하얀 거탑'의 의사들처럼 충분한 대비를 했다고 입을 맞춰 거짓말하는 것이 과연 정부의 올바른 전략일까요?
'하얀 거탑'의 진실은 아마 내주쯤이면 밝혀질 겁니다. 한미 FTA도 그리 오래 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정의일 테니까요.
이익의 균형은 맞추셨나요?
청와대와 정부는 결과도 보지 않고 아직 진행 중인 협상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3년간 협상 내막을 공개하지 않을 테니 비판을 하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만, 수백 쪽이 넘을 협상 결과를 과연 국회의원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이에 대한 비준 동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어쨌든 대통령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겠으니 걱정 말라고 국민들에게 여러 번 약속하셨습니다. 협상이 막바지에 이른 지금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인수위 회의실 정면에 걸렸던 현수막을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국민들이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선 정부가 목표로 했던 미국의 비관세 장벽 중 무너뜨린 것이 있습니까? 수출기업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부분은 미국의 자의적인 덤핑 판정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킬 수 있느냐 입니다. 바로 무역구제 분야의 문제인데, 이 분야의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보고를 받으셨습니까?
제로잉(Zeroing, 수출가격이 국내가격보다 낮은 경우만 덤핑마진에 산입하고 수출가격이 국내가격보다 높은 경우는 마이너스로 계산하지 않고 제로(0)로 간주해 덤핑관세율을 높이는 것), 일몰 재심(Sunset Review, '반덤핑관세 부과는 관세 부과 개시 후 5년이 지나면 자동으로 종료된다'는 WTO 반덤핑 협정의 원칙을 어기고 미국만의 독자적인 반덤핑 재심제도를 운영해 계속 반덤핑 관세를 매기는 것), 버드 수정안 경과규정(미국이 외국업체로부터 거둔 반덤핑관세 및 상계관세 부과금을 국내 피해업체들에게 재분배하는 것) 등 미국의 몰상식한 반덤핑 조치들은 다 빼고, 그것도 모자라 미국의 법을 고치지 않아도 되는 사항만 요구했는데도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데 사실입니까?
섬유 부문 수출의 가장 큰 걸림돌인 얀포워드(원사기준) 원산지 기준은 바꿀 수 있다고 하던가요? 연안 해운업은 인정받으셨나요? 전문직 자격증의 상호인증은 어떻게 됐나요?
반대로 우리가 얻어내야겠다고 한 것 중 이뤄진 것이 있나요? 개성공단산 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해달라는 우리 측 제안을 미국이 받아 들였나요? 농업 특별 세이프가드(Safeguard, 임시 수입중단조치)는 어떻게 됐나요?
미국은 주(州)정부로 구성된 연방국가인데 이번 FTA에서 주 정부의 비(非)합치 조치까지 바꿀 수 있다고 협상단이 보고했습니까? 미국 주정부 법률이 포괄적으로 유보된다면, 실제로는 개별 주정부를 상대로 무역과 투자를 하는 우리 기업은 도대체 어떤 경로로 FTA의 이익을 볼 수 있을까요?
'최혜국 대우'를 미래의 FTA에만 적용하자는 미국의 요구, 가령 향후 한일 FTA에서 미국보다 일본에 더 유리한 조항이 들어간다면 자동적으로 미국에도 적용하자는 요구는 단호히 물리치셨나요?
지적재산권을 사실상 3년 이상 연장하고 우리 전문가 그룹의 능력을 의심하는 재심위원회를 도입하기로 한 의약품 분야의 보고는 어떻게 받으셨는지요? 이익의 균형을 이뤘다고 하던가요?
도대체 우리의 숙원 중 관철한 것은 무엇이고 미국의 요구 중 수용하지 않은 것이 뭐가 있나요? 기어코 광우병에 감염됐을 의심을 지울 수 없는 뼈 있는 쇠고기도 수입할 작정이신가요?
한미 FTA를 하지 않으면 어쩔 것이냐고 대통령은 묻습니다만, 한미 FTA가 없었다면 최소한 이런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도대체 왜 이런 FTA를 해야 하는 걸까요?
대통령께서는 한미 FTA는 한국경제가 선진경제가 되기 위한 지름길, 외부쇼크에 의한 내부개혁, 즉 산업 구조조정이라는 답을 준비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미국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나프타)을 맺은 후 12년이 지난 지금, 멕시코나 캐나다에서 과연 대통령이 상상하는 환상적인 그림이 현실화됐나요? 서비스 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이 일어났나요?
한미 FTA처럼 어마어마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예상 시나리오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물론 지난 1년 동안 각 연구원에서 엄청난 양의 보고서를 만들었을 텐데 국민들도 납득할 수 있게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산업이 재편될 것이고, 여러분은 이런 변화에 이렇게 대응하면 된다, 그리고 정부는 이런 정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알려 줘야 하는 건 아닐까요?
'스스로 대통령인' 국민은 미래의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싶습니다. 분명 '포괄적이고 높은 수준'의 변화가 밀어닥칠 텐데 우리는 그냥 '국민을 믿는다'는 대통령 말만 다시 믿고 베개를 높여 잠만 자면 되는 건가요?
사실상 협상에서 완패한 협상단은 대통령께 이렇게 보고할 겁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 했고, 미국의 관세 인하만으로도 얻을 것을 충분히 얻었다'고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수많은 내용을 대통령이 세세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제발 반대 쪽 전문가들의 평가에도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모든 개방이 성공했다니요?
할 얘기는 쌓이고 쌓여 있지만. 새해 첫날 날아온 대통령의 편지에 대해 몇 마디만 더 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민족경제론'을 잘못된 '사상과 논리 체계'로 꼽았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민족경제론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고(故) 박현채 선생의 제자입니다.
대통령께서 언급한 <민족경제론>은 1978년에 발간된 책입니다. 이 책이 발간된 지 무려 30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누구도 30년 전의 주장, 그것도 그때그때의 현실을 '온 몸으로' 분석한 평론을 현재에 비춰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대통령 말씀이 맞습니다. 70년대까지의 이론이 소련 쪽의 전반적 위기론에 고유한 파국론을 짙게 깔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때의 파국론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여 현재의 경제를 분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언제 진보진영이 개방을 할 때마다 "개방으로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고 했습니까? 대통령 말씀대로 사실을 제시하고 하나하나 따져 볼 문제입니다. 진보진영을 쇄국으로 몰아가는 낡은 수법에 이미 대통령도 깊이 물든 모양입니다. 제가 비서관으로 재직하던 당시 모든 개방에 반대했었나요?
우리 경제가 모든 개방에서 성공했다는 주장은 또 무슨 근거에서 나온 것입니까? 성공의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할 지 모르겠지만, 직전의 과거에 비춰 가장 전면적인 개방이었던 근세의 개방은 한일합방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건 망하지 않은 건가요? 물론 일제 강점기의 경제 성장율이 그 이전 개항기의 경제 성장율보다 높을 겁니다만, 그러면 성공한 건가요?
개방의 속도로 봐서 한일합방 직전의 개방 다음으로 획기적인 개방은 1994년 김영삼 정부의 자본시장 개방입니다. 그 결과는 잘 아시다시피 외환위기였는데, 이건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닌가요?
결국 외환위기를 극복했으니 재경부 주장대로 '보약'이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 와중에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로 비참하게 죽어가고,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무슨 죄입니까?
나라를 망하게 했던, 이 두 개방의 공통점은 자의든 타의든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전면적인 개방을 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를 떠올리시겠지만, 이와 관련해 가장 널리 인용되는 세계은행(World Bank)의 보고서도 '동아시아의 기적'을 일군 발전국가형 정책의 특징을 "선별적 개방과 산업정책의 조합"이라고 설명합니다.
한미 FTA는 적절한 산업정책도 준비하지 않은 채 역진 불가능한 전면적 개방을 하자는 겁니다. 이건 단순히 개방이 아니라, 이미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미국 초국적기업의 이해를 위해 우리의 법과 제도를 바꾸는 개방입니다. 왜 우리 국민과 기업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쪽으로 저작권법을 개정하고, 의약품 특허 관련 제도를 바꿉니까?
FTA 반대 세력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들이 지적하는) 사실은 인정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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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3년 5월 뉴욕 증권거래소를 방문해 그라소 회장(노 대통령 바로 왼쪽) 등 관계자들에게 대한(對韓)투자 확대를 부탁했다. ⓒ연합뉴스 |
적어도 민족경제론은 세계화나 시장경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저는 세계화가 대세이지만 이는 지역주의의 형태로 관철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글을 써 왔습니다. 대통령의 말씀 그대로 "세계시장이 하나로 통하는 방향으로 가는 시대의 대세는, 중국의 지도자들도 거역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중국의 지도자들도 미국과의 FTA를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지극히 일반적인 명제와 아주 구체적인 정책 사이에 있는 만리장성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진보진영의 어느 누구도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맹신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개방을 거부하자"고 주장한 바가 없습니다. 제가 한일 FTA를 거부하자고 했나요? 진보진영이 대대적인 한일 FTA 반대 시위를 한 적이 있습니까? 산업구조의 유사성이나 서비스업 및 농업의 발전 격차에 비추어 볼 때 그 충격이 크지 않고, 각국의 고유한 역사 때문에 협상력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한일 FTA에는 반대하지 않았던 겁니다.
대통령께서 한일 FTA에 관한 지시를 내렸을 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산업발전 방향을 먼저 설정하고 거기에 맞춰 FTA를 체결할 나라도 선택하고, 그 협력 수준이나 내용도 결정해야 하는 겁니다.
'외부쇼크에 의한 내부개혁'이란 지극히 무책임한 발상입니다. 그저 흔들어 놓으면 똑똑한 국민이 알아서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이런 발상이 어떤 혼란을 가져 왔는지 동구권의 체제 전환 과정에서 이미 목도한 바 있습니다. 아직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외환위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도 한미 FTA에 반대하는 겁니다. 경제발전에 있어 우수한 성적을 거둬 왔고, 스웨덴형의 발전을 꾀하는 것이 바람직한 한국이 도대체 왜 미국과의 FTA를 통해 훨씬 효율성이 낮은 경제체제로 전환하려고 하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설마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낸 사람까지 개방 반대론자나 쇄국론자로 몰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런 우려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대통령께서는 당선자 시절 스티글리츠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그에게 해외경제자문단장을 제의했고 스티글리츠 교수도 흔쾌히 승낙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역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야 센 트리니티대 교수나 프랜스만 하버드대 교수, 심지어 헤지펀드 운용자로 '악명이 높은' 조지 소로스 펀드매니지먼트 회장까지 포함된 10여 명의 해외경제자문단 명단을 제시하고 스스로 교섭까지 하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서던 스티글리츠 교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아시다시피 현실에서 우리는 이 세계적인 인사들을 해외경제자문단으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전해들은 바지만, 조윤제 당시 경제보좌관 등 청와대 참모들이 월 스트리트가 스티글리츠의 성향을 문제 삼을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 굴러 들어온 복을 차버렸습니다. 우리가 월스트리트에 무슨 큰 빚이라도 있나요? 설마 월 스트리트가 소로스를 기피할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여기서부터 일은 어긋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뜬금없이 이렇게 오래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만큼 대통령 주위의 시각이 편협하다는 걸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새해 벽두의 편지를 보면, 대통령 역시 좁디좁은 골짜기에 이미 깊숙이 빠져 버렸습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문제가 있습니다. 대통령께 진정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교조적 좌파'가 아니라 '교조적 시장주의자'입니다.
'유연한 진보'를 위하여
대통령 분류에 따르면 교조적 좌파에 속할 고 박현채 선생은 모름지기 경제학이란 민중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복무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국민의 삶의 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진보의 기준입니다.
위원회를 비롯해 참여정부가 진보적인 정책을 생산하기 위해, 보다 구체적으로는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무지 애를 쓴 사실을 왜 제가 모르겠습니까? 참여정부가 단기적인 성장 정책의 유혹을 뿌리쳤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동산 정책으로 대표되듯, 참여정부 초기의 아이디어는 청와대와 재경부 및 건교부, 그리고 열린우리당을 거쳐 국회에 이르기까지 이리 찢기고 저리 터져서, 결국 시장에 혼란스러운 신호를 보냈던 것도 사실입니다. 대통령께서 부동산 분양원가 공개에 관해 말을 바꾼 것도 결국 이 과정에서 흔들렸기 때문이죠.
잘 아실 테지만 내외의 비토 세력은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한 고비 넘으면 이들끼리 연락해서 다음 고비에 또 문제를 제기하고 동시에 밖에서도 사상 공세를 하는 식입니다.
새롭게 시행하는 정책이나 부동산 문제처럼 급박하게 다가오지 않은 정책은 더욱 힘든 경로를 거쳐야 했습니다.
예컨대 근로장려세제(EITC, 저소득 근로소득자의 생계비를 세금으로 보전해주는 제도)와 같은 정책은 하위 계층의 소득실태 파악이라는 정책 인프라부터 갖춰야 하는 문제에 부닥쳤고, 지역 내 투자 정책은 금융의 원리를 거스른다는 이유로 간단히 무시됐습니다. 둘 다 미국에서 널리 시행되는 정책인데도 그렇게 됐습니다. 남북 간 철도 및 대륙 간 철도 연결은 북한 철도의 실태를 모르고, 따라서 예산을 세울 수 없다 해서 흐지부지 됐습니다.
결국 재경부 등 정부 부처가 내 놓는 성장정책이 조중동과 재벌들도 원하는 정책일 수밖에 없으니 질적, 양적으로 이른바 '진보적 정책'은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극화 해소 정책을 체계적으로 제시했던 이정우 교수의 '동반성장의 길'이 처했던 운명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바깥의 보수 언론들만 문제가 아니라 내부에 더 '교조적인 시장론자'들이 잔뜩 포진해 있었다는 걸 인정하셔야 합니다.
청와대만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작년 초에 대통령께서는 한미 FTA와 양극화 해소가 앞으로 전념할 두 개의 정책기조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청와대 국정브리핑부터 되살펴 보십시오. 초기에는 양 쪽의 글이 균형 있게 올라왔지만 (물론 한 쪽에서는 미국형 시스템을 찬양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미국형 시스템을 비판하는 식으로 서로 모순적인 글이 동시에 올라왔습니다) 5월이 지나면서 양극화 쪽 기사는 사라졌습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지금 강조하고 계신 사회투자 국가, 즉 공급 측면의 복지국가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미 부분 부분 정책이 세워지고 또 시행된 것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최근 서울시에서 차상위 계층의 개인구좌를 지원하기로 한 정책도 이런 정책에 속합니다. 다만 정책 인프라, 전달체계 등이 정비되어야 하니 앞으로 이 정책이 자리를 잡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더 더욱 한미 FTA는 최소한 '일단 중지'돼야 합니다. 개방은 곧 산업 구조조정인데 현재는 그에 대한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습니다.
사회투자 국가란 결국 세계화 및 고령화라는 변화에 맞서서 개인과 공동체가 이 충격에 부드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아동의 교육 기회 확대, 직업훈련 및 재교육 확대 등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받아들인 겁니다. 이들 정책만이라도 자리를 잡을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하면 3년 정도 걸릴 겁니다. 이렇게 사회의 적응 능력이 향상된 뒤에 다시 시도해도 결코 늦지 않습니다. 한국의 경쟁 상대 중 어느 나라가 미국과 FTA를 맺었습니까?
마찬가지로 마치 맞불을 놓듯이 시작한 유럽연합(EU)과의 FTA, 중국과의 산관학 공동 FTA 연구도 최대한 천천히 진행시켜야 합니다. 민간 연구기관 간 연구를 거친 중국과의 FTA는 조금 낫지만, EU와의 FTA 역시 충분히 준비돼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동시다발적 FTA는 동시다발적 산업 구조조정을 의미합니다. 어느 나라와 경쟁해도 이길 수 있는 부문만 남게 되는데, 극단적으로 말해 도대체 반도체산업 하나 가지고 4000만 인구를 다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너무 많은 FTA를 한꺼번에 맺어서 결국 FTA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멕시코도 이렇게 무모하지는 않았습니다.
앞에서 다소 과장된 비유를 했지만 한미 FTA를 하지 않으면 호미로 양극화를 막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덜컥 체결을 해 버리면 이제 가래로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한미 FTA라는 국제협정은 의료 민영화와 건강보험 강제지정제의 폐지, 공교육의 약화, 철도 등 공기업 민영화 등 공공성을 파괴할 정책을 잔뜩 준비하고 있는 정부 내 시장 만능론자들의 입지를 대폭 확장시킬 겁니다. 이 부분도 점검해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미 시작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됐지만, 잠긴 비용이 아까워 계속 나가는 건 단지 비용을 증폭시킬 뿐이라고 경제학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진보진영이 등 돌린 것에 상심하지 마시고, 왜 그들이 등을 돌렸는지 스스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탄핵에서 대통령을 극적으로 구출해 냈던 국민들 거의 모두, 과거의 지지자 대부분이 반대하는 그런 정책(대선 때의 대통령 지지율과 현재 한미 FTA 반대 비율은 거의 비슷합니다)을 말 그대로 일사천리로 진행시키면서 이들의 지지를 받으려고 하는 건 과욕이 아닐까요?
제가 전국을 다니면서 200회가 넘게 한 강연에서 자주 받았던 단골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은 제가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이런 FTA를 왜 다른 사람도 아닌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하느냐'는 것입니다.
명색이 경제학자인 제가 모르는데 어찌 일반 국민들이 그 심오한 이유를 알겠습니까? 대한민국에 진보진영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한미 FTA로 이익을 볼 것으로 예측되는 상위 20% 가량만 사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참여정부가 실패했다면 그것은 대통령 스스로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열망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꼭 바람직한 정책이라면 내외부의 공격이 아무리 크더라도 국민들의 힘으로 밀고 나갔어야 합니다. 예컨대 양극화 극복을 위한 증세 정책이 그렇습니다. 보유세는 더 빨리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만, 최근 또 계획을 늦췄더군요.
국민의 정부가 온갖 논란 속에서 타협을 하면서도 국민기초생활보장제와 의약분업의 기본 틀을 갖췄듯이, 참여정부는 '사회투자 국가' 또는 '공급 측면 복지정책'의 틀이라도 제자리에 놓으면 그만입니다.
당장 FTA를 멈추고 양극화 극복 정책에 전념하는 것이 살 길입니다. 국민의 합의를 끌어내서 공동체적 협력을 바탕으로 난국을 헤쳐 나가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활로입니다.
대한민국이 살려면, 대한민국 대통령, 당신이 결단을 내릴 때입니다.
정태인/전 청와대 국민경제 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