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박태균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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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관하여 스탈린의 사주로 김일성이 남침하였고 그로 인해 많은 국군과 유엔군이 전사하였고 민간인 피해도 컸다는 과거의 전통적(?) 해석을 내가 순진하게도 - 지금 보면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더 신기하지만 - 그대로 수용해 오다가 그것이 어이 없을 정도로 단순화되고 목적론적인 해석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 책도 그런 깨달음의 연장선상에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다보면 한국이 미국의 국익에 어떤 의미를 가졌으며 그에 따라 어떤 정책의 변화가 이루어졌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 단면을 볼 수가 있다. 해방 전후 촉발된 좌우익의 갈등과 그 배후의 미국과 소련의 입장,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과 그로 인한 갈등의 심화 및 대립의 고착화, 그리고 곧이은 전쟁의 발발. 이렇게 숨가쁘게 이어지는 해방직후의 비극적인 역사는 지금도 남북한의 분단과 갈등, 그리고 이념논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사회를 볼 때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저자의 견해대로라면 우리 사회가 외세의 개입 속에서도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된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기회를 놓쳐 버렸고, 그 참담한 결과는 아직도 우리 모두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현대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온 미국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놓고 논란이 일어난 것이 불과 몇 달 전인 것처럼 미국은 언제나 우리사회에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미국이 우리가 예전에 배워온 것처럼 자유세계의 일원인 우리나라를 공산세계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참전했고 그 결과 우리가 이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발전된 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하면서 미국을 은인으로 받들어 모시는 태도는 - 지금 그렇게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은근히 있는 것도 같다 - 문제가 있지만, 반대로 미국에게 분단과 한국전쟁의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도 객관적인 태도는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미국을 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은 미국을 어버이의 나라로 떠받들고, 미국의 보호로부터 벗어날 까봐 전전긍긍하는 태도 또는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으로 적대적인 태도 등 극단적인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지적하듯이 외세에만 의존하거나 외세 탓만 해서는 우리의 현상황이 나아질 것은 전혀 없다. 그보다는 그런 이분법적인 시각을 벗어나 미국의 존재와 영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미국 등 외세가 우리나라에 남겨둔 분단과 한국전쟁의 악영향에서 벗어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첫걸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책에 관하여: 분단과 전쟁의 내적 책임에 대하여 오스트리아, 베트남과 비교한 것이나 해방직후 외세의 개입 중에도 분단을 극복할 기회가 있었다는 지적은 신선했다. 그리고 풍부한 사료의 직접 인용도 설득력을 높여 주었다. 그렇지만, 별도의 페이지로 편집된 근거자료 때문에 독서의 흐름이 자주 끊겼고, 책을 읽고도 무언가 정리되는 느낌보다는 저자가 의문만 제기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든다. 이 한권으로 한국전쟁을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함은 저자가 말한 바와 같지만, 책을 읽고도 의문만 더 늘었다는 느낌이랄까...더 공부해야 겠다는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을 좋다고 봐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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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니 2006-01-30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세에만 의존하거나 외세 탓만 해서는 우리의 현상황이 나아질 것은 전혀 없다. -> 동감동감!
책을 읽고도 의문만 더 늘었다는 느낌이랄까
->아직 학문적으로나 우리의 의식속에서 정리 되지 못한 주제이기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그 정리를 담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코리아 생존의 기로에 서다'라는 책을 읽고 의문만 더 늘더군요.^^ 그러나 생산적인 의문이라고 믿습니다. 결국 이 책가지 보려고 하고 있으니까요.

외로운 발바닥 2006-01-30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하니님/ 저도 외세에 관한 작가의 말에 절대 동감하지만, 양비론이 아닌 제3의 길을 찾는 것은 참 어려운 일 같습니다. 책을 읽고 의문만 더 늘었다는 것은 제 무지에 기인한 바가 클 테지요. 우리의 의식속에서 정리되지 못한 주제의 정리를 우리가 담당해야 한다는 말씀...멋지네요 ^^
 
적대적 공범자들
임지현 지음 / 소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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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국가주의를 해체하자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임지현 교수의 기본 논지는 국가권력이 국가의 구성원들을 자발적으로 동원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기제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국사, 민족주의, 국민 주권주의 등등 이라는 것이다.


임교수가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임교수의 ‘스스로 선택한 정신적 망명자의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게 되는 첫 느낌은 무척 불편하고 당황스런 것이었다. 국사나 국민윤리 자체에 국민들의 일체감과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우리 국사가 일본 극우 민족주의의 역사관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지적이나, 고구려사를 둘러싼 한중간의 논쟁에 대해 고구려사를 우리가 전유할 수 없다는 지적, 일제에 대한 저항의 정신적 토대로 인식하고 있던 민족주의에 대한 동원 기제적인 성격에 대한 지적 등을 접하면서 내 자신이 철저히 ‘국민화’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마음 속 한구석에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것 같아 불편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그런 느낌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임교수가 주장하는 국사의 해체나 민족주의를 극복에 대하여는 개인적으로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 이후의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임교수 스스로도 답하고 있듯이 명확한 해답이 없다는 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나라만 국사와 민족주의를 해체하면 다른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만 무장해제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불안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다수가 모여 함께 사는 사회가 효율적으로 운영되려면 어느  도의 규율과 집단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위한 기제가 필요하고 사회 구성원간에 계층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임교수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무정부상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밖에도 임교수의 국가주의 해체 주장은 여러 나라의 학자들의 지적 공감대 속에 공동으로 보조를 맞추어 추진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실질적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시작으로 민족주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역사청산문제, 미국의 신제국주의 등에 대한 기존 논의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허물고 근대사회를 바라보는 사고와 인식의 폭을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임교수의 논의는 무척 의미 있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실제 존재하는 현상과 그것에 대한 인식 간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사회의 현상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은 권력의 유지를 위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현실을 왜곡하고 변형시킨다. 그러면 대다수 국민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또는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뼈 속 깊숙이 박혀있는 국사 또는 민족주의의 패러다임의 영향력에 압도되어 왜곡된 사고의 틀로 현실을 인식하고 국가권력의 입맛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사는 현실 그 자체는 결코 하나의 시각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양한 사회현상을 주류적인 이데올로기나 이론에 의해 재단된 채로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들 개개인의 이념(?)을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등으로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 없듯이 진보나 보수,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도 모두 상대적이다. 우리의 삶은 무수한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진 ‘면’적인 것이지만 이를 인식할 때는 특정 위치의 ‘점’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자는 임교수의 주장에 대해 극단적인 상대주의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새로운 시각으로 사회현상을 특정 이념이나 기제의 틀을 초월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도 우리는 특정한 틀 안에서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많고, 책에서 지적하듯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현실이 아닌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기 때문에 임교수와 같이 인식의 틀 자체를 뒤집어 보려는 시도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밖에도 유럽 등 다른 나라의 역사적 경험과 비교를 통해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이 우리만 겪고 있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고,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과거사 청산과 관련하여서도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동유럽 국가 등의 예를 통해 일회적인 사법적 처벌 - 특히 자주 사면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 보다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반성적 성찰의 기억으로 간직하자는 ‘기억의 정치학’ 주장은 무척 공감이 갔다. 과거사 청산과 관련하여 이런 목소리는 왜 공론화가 안되는 것인지...(아님 나만 모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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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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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6.25.로 기억하고 있는 불과 50여년 전에 벌어진 전쟁에 대해 우리는 어떤 기억을 갖고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의 사주를 받아 6.25.에 남침을 하고 이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전쟁이 발발하였고,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의 원조를 받아 평양까지 전진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었다가 중국의 개입으로 3년여만에 38선에서 조금 북쪽에 휴전선이 성립된 전쟁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6.25.전쟁에 대한 우리의 단편적인 기억과 이해에 대한 저자의 문제제기를 읽고 스스로 6.25.전쟁에 대한 이미지와 단편적인 지식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개인적으로 ‘6.25.전쟁’으로 연상되는 이미지는 북한군이 쳐들어와 남한 지역을 점령했을 때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된 것이 가장 많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누런색 군복으로 상징되는 인민군이 동네에 쳐들어와 가족들을 잡아가고(실제로 나의 외증조할아버지께서는 피납되셨다), 내가 인민재판을 받아 죽창으로 찔려죽을지도 모른다는 식의 다소 과격한 생각이 어린시절부터 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고,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으로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피난을 가야할 지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을 했었던 것 같다.(어린 시절 나는 우리 집이 조금이라도 - 불과 몇 백미터라도 - 더 남쪽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거시적으로는 중국이 참전하지 않아서 그때 통일이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던 것 같다.(그런 생각은 사실 지금도 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린시절 내 머릿속에 6.25.가 그런 이미지로 자리잡게 된 것은 내가 알게 모르게 받아온 수많은 반공교육과 사회 전반적인 반공의식 때문임은 분명하다. 초등학교 때 본 반공영화(사실 단순한 전쟁영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군복 색깔에 대한 호불호를 형성하는데 강력한 영향을 준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속의 몇몇 장면과 대략적인 줄거리를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어린 시절의 교육은 아직까지도 내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에 반하는 새로운 지식에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게끔 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으면 한국전쟁을 6.25.로 부르면서 전쟁의 모든 책임을 김일성 정권에 돌리는 논리가 역대 대한민국 정부가 취약한 권력구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조작해낸 논리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 점령 하에서의 경험은 분명히 존재했던 일이지만, 그것은 한국전쟁의 일부분만을 보여주는 것이고 당시 농민들이 대다수였던 민중들은 남한이 우리나라라는 명확한 국가의식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전쟁속에서 생존의 문제가 가장 절실하였기 때문에 국군이든 인민군이든 무력을 가진 집단에 기회주의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의 승패가 이해관계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따라서 일반 민중들의 전쟁에 대한 인식과 경험은 분명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북한 점령하에서의 상황과는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 이래 대한민국의 정권은 반공이데올로기의 연장선에서 북한 점령하에서 지식인 및 일부 계층에 국한된 사람들의 경험을 일반화시켜 한국전쟁의 본질을 흐려 놓았다.

이승만 정권이 전쟁 직전이나 전쟁발발 직후에 보인 비상식적인 행동들 - 전쟁징후를 포착하고 있었으면서도 그에 대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고, 전쟁발발 이후에도 침착한 태도를 보인점, 전세를 허위로 보도한 채 홀로 피난을 갔으며 주민들이 피난중이던 한강다리를 서둘러 폭발시킨 점, 전쟁발발 후 미국대사에게 미군의 개입을 촉구한 것이 이승만이 취한 조치의 대부분이었다는 점 등등 -에 대하여 저자는 당시 대한민국이 형식적으로는 국가로서 존재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의 생명과 신체를 지켜주는 의미에서의 국가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으며 이승만 역시 근대적 의미에서의 국가지도자라기 보다는 전제군주로서의 기질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저자의 지적과 함께 당시 우리나라가 지금의 이라크와 상황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미국에 의해 강요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지지기반이 취약한 이라크정부가 내전이 일어났을 때 보일 행동이 바로 당시 이승만 정부가 보인 행동과 유사하지 않을까?

여기서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미국과 소련의 전쟁책임론이 대두된다. 이승만 정권이나 김일성 정권 모두 독자적으로 국가를 꾸려갈 만한 여력이 없었고, 특히 소련의 도움을 받아 적극적으로 전쟁을 준비한 김일성과는 달리 이승만은 미군의 도움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보기에는 비상식적으로 무책임한 행동을 취한 것이다. 물론, 미국에의 절대적 의존도가 이승만 정권의 한국전쟁에서의 수많은 학살에의 책임을 감경시켜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권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학살의 수단으로까지 삼은 이승만에게(물론 김일성도 마찬가지이다.) 제일 중대한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승만 또는 김일성이라는 정치지도자에게만 전쟁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더 큰 역사적 구조를 놓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한반도를 38선을 기준으로 나누어 점령하고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도록 힘을 발휘하여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구성되도록 하여 한민족간에 격렬한 분쟁을 낳았으며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자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으로 분쟁을 더욱 심화시켜 결국은 남북한 간에 전쟁이 일어나게까지 한 원인제공자는 미국과 소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한단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고 수탈한 것에서부터 동족상잔의 비극의 씨앗이 잉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대단히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과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가 막대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수혜자인 이승만과 김일성이 전쟁을 정권에 대한 반대자를 학살하고 취약한 지지기반을 만회하려는 정치적 술수의 희생량을 만들어내는 것에 악용하였고, 그때 확립된 빨갱이와 반동분자의 이분법적 구별이 50년도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사회에 음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현대사에 관한 책을 읽던 중 우연히 접하게 된 이 책을 통해 한국전쟁의 거시적 구조와 미시적 장면들에 대해 대략적인 생각의 틀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우리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좌파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저자가 이승만 정권만을 비난하지 않고(이승만 정권은 아무리 비난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북한의 김일성 정권에 대하여도 균형잡힌 분석과 비판을 하였다는 점에서 이 책의 내용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을 아직도 정권의 논리에 따라 단순하게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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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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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 앨봄의 책은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이후에 두번째이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도 주인공이 죽음을 맞는 스승과 대화를 하며 삶과 죽음, 인생의 의미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는데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에서도 기본적으로는 비슷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주인공인 에디는 83세에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의 고장으로 인한 사고에서 어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그가 평생을 정비공으로 일한 루비가든에서...

그리고, 그는 천국으로 가면서 도중에 5사람을 만나고 그의 삶 전반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 다섯 사람이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의 삶에 발자취를 남기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의 삶 모두는 결국 하나로 연결된다.' 정도가 아닐까...

솔직히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 비해서는 픽션이라서 그런지 감동이 덜했다.

하지만, 슬럼프에 빠지거나 자신의 삶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여 우울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약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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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부기 2006-03-20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 비하면 감동이 덜했어.

외로운 발바닥 2006-05-19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나도 그래. 이 책은 사실 요즘 흔히 출판되는 '누가 내 치즈를 옮겼어.'류의 느낌이 나는 듯
 
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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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혁명가 김산. 일제가 우리 국권을 침탈하던 시기에 태어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15세때 중국으로 혈혈단신 건너가 독립군 군관학교에 최연소로 입학한 그. 불행하고 혼란한 시기에 태어나 평생을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타오르다 간 그의 일생을 보고 있노라면 한편으로는 그 시기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소박한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도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산이 요즘과 같은 때 태어났으면, 물론 훌륭한 사람이 되었겠지만 그토록 치열하고 순수한 삶을 살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물론 김산은 난세의 凡人이 결코 아니다. 난세에도 그처럼 티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이 믿는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강철과 같은 의지로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의 삶을 보면 난세에 인간 의지와 신념의 극단을 엿볼 수 있다는 느낌이다. 그는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다 갔지만,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다양한 삶을 살았다. 지금 같으면 중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나이에 김산은 뜨거운 가슴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중국어사전 하나만을 낀 채 홀로 중국으로 건너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자신이 고백하듯이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거쳐 공산주의자가 되어 자신의 신념에 온몸을 불사르는 그는, 그의 말처럼 평생을 잔인한 시대에 맞서 투쟁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모든 것에 패배했지만, 자기 자신에게만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산이 보통의 독립운동가들과 다른 점은 그가 단순히 조선의 독립만을 목표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중국에서의 혁명이 조선, 일본에서 민중의 혁명으로 이어져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였겠지만, 그는 중국 대혁명에도 참가하고 대부분의 청춘을 중국에서의 혁명사업에 투신한다. 그가 결국에는 공산주의에서 자신의 신념을 추구할 수 있는 틀을 찾기는 했지만, 그는 결코 이데올로기 그 자체의 노예가 되지 않고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그 이상의 것은 님웨일즈가 지적했듯이 억압과 박해를 받는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런 억압이 없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닐까 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신념을 쫓아 삶을 불사르는 그의 삶을 읽으면서 김산이 체게바라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의 우열을 견줄 수야 없겠지만, 우리나라에도 그처럼 멋진 혁명가가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김산은 중국에서 활동한 수많은 조선인 혁명가 중에도 자신에게 더욱 엄격하고 투철한 신념을 가진 편이었겠지만, 만주를 비롯한 중국에서 활동한 수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의 삶도 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삶을 통해 우리가 단순히 붉은 색의, 지주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식의 이미지로 덧칠해진 공산주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공산주의에 가담한 수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공산주의 발생 초기에는 대부분 그들이 믿는 신념에 따라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며,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립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공산주의자 김산이 인간의 천부적 권리, 민주주의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할 때, 공산주의에 대한 닫힌 생각을 가진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그리고 일제시대, 그리고 해방전후와 그 이후의 남북한의 상황이 단순하게 공산주의자는 빨갛고 나쁜 놈, 자본주의자는 좋은 놈, 혹은 그 반대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도 김산이 삶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오직 한가지를 제외하고 나는 모든 것에서 패배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승리했다.’는 김산. 수많은 시련과 좌절, 고통을 겪으며 강철과 같이 단련된 그의 순수한 의지와 이를 온몸으로 실천한 그의 삶이 내 가슴속에서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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