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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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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별을 스치는 바람 1,2 (전2권) / 이정명 / 은행나무 (2012)

동주 / 구효서 / 자음과 모음 (2011)

 

얼마전 구효서의 '동주'를 읽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구효서의 팬입니다. '열렬한'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충실한' 팬 정도는 됩니다. 시작은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었을 겁니다. 이제 막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던 터라 영화 한편을 보고나면 그와 관련된 모든 기사며 인터뷰, 평론 등을 부지런히 찾아읽곤 했었지요. 그러던 차에 저는 이 영화의 원작이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바로, 구효서라는 낯선 작가가 쓴 '낯선 여름'이라는 짧은 장편소설이었습니다. 큰 기대를 안고 저는 득달같이 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영화와는 참 많이 다른 분위기며 이야기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내 저는 영화와는 달리 온기어린 담백함을 간직한 원작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인간 본연의 이기적인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냉소 가득한 홍상수의 영화보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품고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놓지않는 구효서의 소설이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이지요.

그날 이후로 저는 구효서의 작품들을 꾸준히 찾아 읽었고, 신작이 나올 때마다 '득달같이'는 아니더라도 너무 늦지는 않게 꼬박꼬박 구해 읽곤 했습니다. 특별함보다는 꾸준함을 무기로 하는 작가답게 그 품질은 대부분 균일했지만 아무래도 눈에 띄는 작품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차분하고 소소한 일상이나 하잘것없이 평범한 인생들을 아주 클래식한 구조와 문법으로 형상화해내는 그의 문체는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였으니까요.

 

그러던 구효서에게 변화가 느껴진 건 '동주' 직전에 낸 장편 '랩소디 인 베를린'이었습니다. 최근의 단편들에서 기록되지 못한 소중한 사람들의 삶을 되살려내는데 공을 들이며 변화를 향한 단초를 드러내긴 했지만, 이러한 '기록되지 못한 소중한 삶'들을 향한 관심을 현재화해 의미를 부여하고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을 꿰함으로써 우리의 내일을 제시하려는 욕심까지 내보인 건 바로 이 '랩소디 인 베를린'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그렇게 구효서는 파편화된 개인의 미시사를 그려내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그러한 개인들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내며 거시적인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특히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다른 시대 다른 인물들의 삶을 나열하다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매개로 하나로 묶어내는 솜씨는 이제 구효서가 대가의 경지에 이르기 직전이구나, 라는 찬탄이 일 정도로 단단하고 정교했습니다.

디아스포라. 전쟁이라는 참혹한 역사가 낳은 조국을 잃고 떠도는 '국제미아'들의 슬픈 여정을 여러 시대 여러 주인공들의 삶의 궤적을 통해 보여주는 이러한 방식은 최근작 '동주'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더군요. 작곡가 윤이상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주인공을 내세웠지만 '랩소디 인 베를린'이 결코 윤이상의 이야기가 아니었듯이 '동주' 역시 시인 윤동주를 제목 삼았음에도 그의 모습은 쉬이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는 일종의 매개체로 기능하며 현재와 과거를 살고 있는 여러 인물들을 한곳으로 모여들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더욱 더 윤동주의 존재감은 커져만 갔고, 윤동주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등장인물들의 노력을 통해 그 조각들이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는가 싶더니...마지막에 가서는 비로소 하나로 합쳐져 인간 윤동주의 위대한 면모가 완성되더군요. 현재를 살아가는 재일교포 3세인 주인공 김경식의 눈으로, 그리고 윤동주를 옆에서 지켜봤던...일본인이나 일본인일 수 없었던 일본인이 아니지만 일본인이어야만 했던 요코 혹은 이타츠 푸리 카라라 불리는 여인의 눈으로...말입니다.

 

이정명의 '별을 스치는 바람'은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동주'와 정반대 지점에 서 있기도 하고, 또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기도 한 작품입니다. 윤동주를 살아있는 진짜 인물로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전자이고 그를 아끼며 동경하며 그로 인해 인생이 바뀌는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는 후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 두 작품은 시인 윤동주를 다룬, 동전의 양면이면서 서로를 마주보는 거울 같은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억지로 갖다붙이자면 전사와 후사처럼 볼수도 있는 작품이구요.)

 

이 소설은 '바람의 화원'과 '뿌리깊은 나무'를 쓴 작가의 작품답게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익숙한 구조를 따라갑니다. 악독한 간수인 스기야마 도잔이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풋내기 간수인 주인공 와타나베에게 이 의문의 살인사건이 맡겨지면서 스기야마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가 라는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이 소설의 중심플롯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사건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고...유력한 용의자인줄 알았던 조선인 죄수 말고 진짜 진범은 따로 있는데...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발전되는 것이지요.

이렇게만 말하면 '별을 스치는 바람'은 여느 추리소설들과 그다지 차별점도 없고 그렇다고 장르적 재미라는 측면에서도 특출나게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정명의 두 전작들이 그러했듯 정작 이 작품이 빛을 발하는 지점은 따로 있습니다. 이러한 미스터리 구조가 실은 맥거핀에 가까운, 독자들을 끌어당기기 위한 미끼일 뿐이고 작가가 진짜 하고싶은 이야긴 따로 있다는 걸 알게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이 이야기가 그저 만만한 추리소설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빛나는 지점이란 바로 '악독한 간수' 스기야마가 '교활한 죄수' 윤동주에 의해 자신의 인간적 혹은 감성적 면모를 각성하게 되고, 억압된 자아와 악몽같은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영혼의 자유를 얻어가는 과정입니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비로소 생명력을 얻으며 우리를 거부할 수 없는 윤동주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진짜 범인이 누구냐 라는 물음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도소라는 공간 안에서 절대 교감할 수 없는 죄수 윤동주와 간수 스기야마의 내밀한 소통과 그들만의 특수한 우정을 이어가는 모습이 훨씬 더 스릴 넘칩니다. 그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작당 모의'가 부디 발각되지 않기를 바라며 더욱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윤동주의 매력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스기야마 뿐이 아닙니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스기야마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수사관 와타나베 또한 이 사건의 중심에 조선인 죄수 윤동주가 있다는 걸 알게되고 난 이후부터는 스기야마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한없이 순수한 영혼과 그러한 순수함이 여과없이 반영된 그의 투명한 시(詩)들에 감화되어 살인사건 수사관이라는 '본분'을 망각하고 스기야마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해내려 하였으나 미처 완수하지 못한 윤동주를 보호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효서의 '동주'와 이정명의 '별을 스치는 바람'이 같은 인물을 소재로 한 전혀 다른 소설이 아닌, 꼭 함께 읽음으로써 윤동주라는 인간, 윤동주라는 시인, 그리고 그의 빛나는 작품들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거울이자 동전의 양면 같은 소설이라고 말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동주'는 제국주의자들의 비뚤어진 욕심의 발로인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영혼들과 현재에도 여전히 그로 인한 상처에 허덕이는 후손들이 역시 제국주의자들의 억압에 못이겨 쓸쓸하게 죽어간 윤동주라는 순수한 영혼과 그 영혼이 반영된 시(詩)들의 흔적을 찾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고 윤동주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상향, 간도는 바로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는 깨닫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소설입니다.

그에 비해 '별을 스치는 바람'은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동주'가 끝내 흐릿하게 그 실체를  보여주지 않은 윤동주라는 인물을 살아있는 존재로 되살려내 보여줌으로써  좀 더 직접적이고 친근하게 윤동주와 그의 작품들이 전쟁과 폭력으로 인해 피폐해진 한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위무하고 치료하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소설인 것입니다.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두 소설은 민족이나 사상이라는 틀 안에 결코 가둘 수 없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평화와 자유를 갈망한 인간 윤동주를 위한 레퀴엠이며, 정치적인 의미의 모국어가 아닌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혹은 자연이라는 의미에서의 모국어를 지키려 애쓰던 시인 윤동주를 위한 오마주인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동주'를 읽은 분이라면 '별을 스치는 바람'을, '별을 스치는 바람'을 읽으신 분이라면 '동주'를 꼭 찾아 읽어보시길 권해봅니다. 내일은 마침 8월 15일, 윤동주가 미처 보지못한 바로 그날 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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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N을 위하여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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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을 위하여 / 미나토 가나에 / 재인

 

'고백'을 읽고 '야행관람차'를 읽었습니다. '왕복서간'을 아직 읽지 못했으니, 이번이 세번째군요.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번 'N을 위하여'를 읽고나니...이 작가, 참 일관성 있구나. 그리고 그 일관성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제법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는구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칭찬이냐구요? 물론 칭찬이지만, 극찬까진 아닐테지요.

자신의 색깔이 분명하고 그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펼쳐보이려 노력한다. 무지개나 팔색조까지는 아니지만, 빨간색을 중심으로 때론 주황이었다가 때론 분홍이 되기도 하는 작가. 그러나 주황도 빨강에 가까운 주황이고 분홍 역시 너무 진해서 살짝 촌스럽고 부담스러운 분홍인 작가. 이 정도가 그를 세번째 만나면서 받게 된 인상입니다. '고백'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냉정하게 말해 이번 세번째가 거기서 가장 멀리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아쉽게도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초장부터 너무 김을 빼버렸네요.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스럽다는 생각이 커서 좋은 말이 쉽게 나오질 않는 모양입니다. 최근 읽은 어떤 소설보다 물 흐르듯 잘 읽혔고, 이야기의 초입에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금세 파악이 될 정도로 명확하고 심플하다는 장점이 분명했음에도 뭐가 그리 아쉽고 부족했던 것일까요?

 

N이 너무 많다

 

이 이야기는 제목 그 자체가 중의적이고, 얽히고 설킨 N들의 서로를 향한 감정들, 사랑들이 극을 이끌어가는 동력입니다. 의도는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N이 너무 많더군요. 모두가 N이다보니 모두가 모두에게 감정을 갖고 있더군요. 그렇다보니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도 너무 여러가지 뜻이 담기게 되어 읽는 내내 솔직히 부담스러웠습니다. 이건 모두가 주인공인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깁니다. 주인공이 분명함에도 주인공이 아닌 인물에게까지 감정을 주는 것, 이것이 과연 새로운 시도일까요? 주인공이 아닌 인물들이 나머지 모든 인물들을 배려하고 걱정하며 오지랍넓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게 과연 매력적인 걸까요? 적어도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산만함을 너머 이해불가의 지경에까지 이를 정도였습니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는거지? 그 정도의 감정이 느껴지지도 전달되지도 않는데, 행동은 감정을 너머 주제넘게 과하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야기 자체가 도통 공감이 가질 않았습니다.

 

사랑도 너무 많다

 

작가는 이 작품을 러브스토리로 생각하고 썼다고 하더군요. 이 역시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알겠지만, 앞서 말했듯 다양한 인물들이 다양한 인물 모두에게 빠짐없이 어떠한 감정을 갖고 있는데...그 중 과연 몇개나 사랑인 걸까요? 제가 보기엔 사랑이라 할 수 없는데. 그저 우정이고, 호감이며, 잘해야 뜨겁지 못한 사랑 언저리의 감정일 뿐인데 그들의 행동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 이상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즉,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해주기 힘든 것들을 서로에게 해주고들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게 바로 사랑이 아니겠냐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아쉽게도 그렇게는 납득이 되질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게 사랑이라면, 아휴...힘들어서 어떻게 사나요? 모두를 사랑하고 모든 게 사랑이란 뜻인데, 그 감정과잉의 세상에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이건 절대 일상이 아닌 겁니다. 아무리 허구라지만 이 정도로 감정과잉의 인물들이 모여 서로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내뿜는 이야기라니요.

 

하나의 N을 향한 하나의 사랑

 

물론 이것이 바로 작가의 세계이고 색깔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먼저 읽은 '고백'이나 '야행관람차'는 그러한 과잉된 인물들의 과잉된 행동이 충분히 납득이 되었습니다. 그네들은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세상에 던져진 인물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N을 위하여'가 속한 세계는 앞의 두 작품과는 분명 다릅니다.  의문의 살인사건을 중심에 두고 이 미스터리한 사건에 얽힌 인물들의 진술과 고백을 따라가며 그 퍼즐을 맞춰가는 구조이긴 하지만, 이들은 정상적인 세계에서 일상을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작가도 이들에 대한 감정묘사를 전편들에 비해 확실히 담담하고 차분하게 유지한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엔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이 이어져야 하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한 명이 또 한명에게, 였으면 그들의 과한 감정이 충분히 이해됐을 겁니다. 그러나 한명이 나머지 모두에게 같은 크기의 감정들을 분출하다보니 이들은 대체 뭐지? 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더군요. 속속 밝혀지는 그들의 범상치않은, 불행함을 넘어 참혹한 성장환경을 감안하더라도 이들의 애정결핍은 용인되는 지점 이상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작가가 이들을 통해 원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작가가 주장하는 궁극의 사랑의 실체가 진짜 무엇인지...저는 아쉽게도 알 수 없었습니다. 왜 모두가 N이어야 했을까요? 하나의 N을 향한 S들의 사랑 혹은 하나의 N이 여러 S들에게 골고루 사랑을 주는 이야기였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이 컸던 이야기, 'N을 위하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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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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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 피에르 르메트르 / 다산책방 (2012)

 

읽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안 읽히는 소설이 아니었음에도, 읽는 내내 다음이 궁금해 조바심이 났음에도, 그랬습니다. 물론 책두께가 만만치 않았다고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도 답은 아닌 듯 합니다. 더 두꺼운 책들도, 몇권 분량의 책들도 한번 꽂히면 쉬임 없이 읽어내곤 했으니까요. 그럼 이 잘 쓰여진, 충분히 장르적이고, 시종일관 긴장감 넘치는 소설을 읽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첫째는, 낯선 구조 때문일 겁니다.

 

이 소설은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의 컨벤션을 여러번에 걸쳐 배반합니다. 가녀리고 수동적인, 꼼짝없는 피해자로 알았던 주인공 알렉스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는 1막의 끝이 그 첫번째이고, 무지막지한 가해자로 돌변한 알렉스의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살인행각이 펼쳐지는 2막이 두번째, 그리고 그런 알렉스가 돌연한 최후를 맞이하는 2막의 끄트머리가 세번째, 그러한 그녀의 기막힌 인생과 그녀의 최후를 둘러싼 충격적 미스터리가 밝혀지는 3막이 마지막 네번째입니다.

 

이러한 반전과 비틀기는 읽는 이들의 몰입도를 극도로 높이는 동시에 신기하게도 일정 정도의 거리두기 효과 또한 가능하게 합니다. 물론 읽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알렉스의 처지에 동화되어 가슴을 졸이다가, 알렉스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면 그녀의 납득 불가능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며 저도 모르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 때문에 저는 내처 읽지 못한 채 잠시 책장을 덮고 숨을 돌리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았더랬습니다.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 소설의 더딘 독해속도의 또다른 이유가 흔치않은 캐릭터 때문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알렉스라는 캐릭터는 곧 구조 자체라 할 만큼, 낯설면서도 이 소설의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를 동정하고 결국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의 유일한 목표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저를 멈추게 한 것은 알렉스 뿐이 아닙니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독자 편에 서서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또다른 주인공, 카미유 반장 또한 저에게는 그리 쉬운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터무니없이 작은 키는 물론이고, 그의 어둡고 예민한 내면, 범상치않은 성장환경과 여태껏 살아온 인생까지. 알렉스에 비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결코 일반적인 형사반장 캐릭터라 할 수 없는) 그의 '낯선 특별함'에 솔직히 저는 이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아내를 잃은 상처와 예술가로서는 최고이지만 엄마로써는 빵점이었던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애증 때문에 그는 알렉스 사건을 너무도 더디게 진행시킵니다. 알렉스를 마주할때마다 그의 인생을 좌우한 그녀들이 떠올라 계속 부대끼며 내적으로 침잠할 뿐, 좀체 사건의 중심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꼼짝없이 그의 속도를 따라야 할 우리 독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어서 상처를 딛고, 영민하고 냉철한 민완형사의 면모를 보여주기를 바라지만 그는 오히려 우리를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들여 고민하고 또 고민하게 만들고 맙니다.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그렇게 이 소설을 읽는 일은 쉽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 저도 모르게 이 소설에 깊이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카미유의 페이스대로 주저하고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알렉스의 실체를 깨닫고 그녀의 아픔과 뒤늦게나마 마주하는 순간... 알렉스와 카미유 반장에게 흠뻑 동화되고 만 것이지요. 그러니 갈수록 속도는 더디어져만 갔습니다. 카미유가 알렉스를 통해 자신과 마주하고 상처를 극복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도, 알렉스의 행동을 이해하고 알렉스의 가엾은 인생을 위무하는 일 또한 머리보다는 마음을 써야하는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여러가지 상념들은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끝내 누구에게도 사랑받지도 이해받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한 알렉스. 자신의 상처에 허덕이다가 그런 그녀를 살아있을 때 지켜내지 못한 카미유. 그리고 이들이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최소한의 관심과 사랑도 베풀지 않은 사람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까지. 누구를 탓하며 어디서 희망을 찾아야 할 지 난망해질 뿐 그 어떤 답도 찾아지지 않아...읽는 내내...그리고 읽고 나서도 마음이 더디디 더뎠던 소설, '알렉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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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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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 헤르만 코흐 / 은행나무 (2012)

 

'디너'를 읽는 내내 올해 초 읽었던 '아들의 방'이라는 소설이 떠올랐습니다. 범죄에 휘말린 아들을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중산층 부모의 활약상을 다룬 이 소설은 비슷한 설정의 '디너'에 비해 좀 더 대중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아들의 범죄 가담에는 결국 피치 못할 사정이 있고, 주인공인 아이의 아빠는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용감하게 음모를 파헤치고 범죄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영웅으로 묘사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장르친화적 전개 덕분에 이 소설을 빛나게 해주었던, '아들의 범죄를 알게 된 부모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는 도덕적 딜레마는 어느 순간 면죄부를 받으며 희미해집니다. (혹은 지극히 올바르고 상식적인 선택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훈훈한 교훈극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러한 결말은 읽는 이들에게 일말의 찜찜함이나 생각할 거리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오락으로써의 이야기의 기능을 다했다 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충분히 더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세상과 인생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음에도 작가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의 한계를 '오락거리'로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에 비해 '디너'는 네덜란드에서 수십만부가 팔렸다는 책 소개글이 밑기지 않을 만큼, 무겁고 진지하게 앞서 말씀드린 도덕적 딜레마에 집중합니다. 제목처럼 불과 몇시간 정도의 저녁식사를 소설적 시간으로 설정했음에도 이야기 전개는 생각보다 훨씬 느리고, 별다른 사건 또한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디너'는 독자들이 기대하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거나, 보여주더라도 적절한 타이밍에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읽는 이들을 당황케 하는 소설입니다. 뭐, 다른 분들을 함께 끌어들일 필요없이 저한테는 그랬습니다. 

가족들간의 저녁식사에서 폭로되는 엄청난 비밀과 이를 둘러싼 가족 구성원들간의 치열한 심리전과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긴장감을 기대했지만, 소설은 메인요리가 나오기 전까지... 심지어 메인요리가 나온 이후에도 제가 보고싶어 했던 장면을 보여주지 않은 채 화자이자 주인공인 파울의 캐릭터 묘사에 전력을 다합니다. 메인요리가 나올 때가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견 평범해보이는 주인공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 그의 신랄한 말투가 그저 냉소적인 성격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 그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인물을 평가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것 또한 타고난 관찰력이나 섬세함 때문이 아니라 병적인 집착 혹은 열등감의 발로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 정도 입니다. '내가 기대하는 사건들은 언제 일어나고 언제 설명이 되는 거야 대체?'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작가는 와인을 마시고 디저트를 먹고 메인요리가 다 식어갈때까지도 내내 뜸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식어가는 메인요리 따위가 중요치 않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마침내 오고야 맙니다. 제가 기대했던, 음식 따위 식사 따위가 아닌 그 자리에서 품위를 가장한 채 앉아있는 네 인물들의 저열하고 치사한 속살이 드러나는 바로 그 순간 말입니다. 내내 딴 소리만 하며 눈치를 보고 있던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내, 주인공의 형 그리고 형의 아내. 이 네 사람은 마침내 자신의 아들들이 저질렀으나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추악한 범죄를 어떻게 처리할 건지 논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대했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몇마디 언쟁으로 그들의 입장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나 버리고, 너무 차이가 큰 탓에 특별한 심리전은 그리 필요치 않습니다. 네 사람 모두 서로에 대해 잘 아는 만큼 누구도 누구를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재빨리 인정해 버립니다. 문제는 단순해졌습니다. 밝힐 것인가, 숨길 것인가. 애초의 딜레마는 여전하지만 더 잘나고 더 단호한 주인공의 형이 이미 입장을 정리한 이상, 주인공을 포함한 나머지 세 사람에게 별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싱거워지려는 순간, 저는 비로소 작가가 지금껏 길고 길게 주인공 캐릭터를 묘사한 이유를 알게 됩니다. 이 여지가 없는 선택과 결정의 순간, 작가는 주인공 파울을 화자로 설정함으로써 교묘하고 철저하게 숨겨왔던 그(파울)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단순히 부모라는 이유만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선택을 그가 하고마는 이유를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이 더욱 충격적이면서도 굉장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엄마라는 이유로 (아들을 위해) 주인공의 선택에 따르는 아내 끌레르의 모습과 보기좋게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 덕분에 이 소설은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딜레마를 던져주고 고차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며 끝을 맺습니다.

 

즉, 작가는 자식을 위해서는 (설령 그것이 비도덕적인 행위일지라도) 무엇이든지 하는 일그러진 부모의 모습을 통해 '절대적인 선'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 부모라는 인물들의 성격과 됨됨이를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이들이 단순히 자식을 위해 이같은 비도덕적인 선택을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식의 잘못마저도 감싸고도는 가족이기주의의 진짜 원인은 그러한 비도덕적 자식을 키워낸 부모 또한 비도덕적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비도덕적인 부모를 키워낸 것은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일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극적 긴장감과 구조의 완결성을 과감하게 포기하면서 주인공을 그토록 공들여 세밀하게 묘사하고 설명한 이유인 것입니다. 파울이 키운 미헬보다, 미헬을 키운 파울을 더욱 더 궁금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파울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까요? 그를 키운 부모, 그가 다닌 학교, 그리고 그가 사는 네덜란드 사회, 나아가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 전체. 책을 덮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는 씁쓸함과 좀체 찾아지지 않는 해답에 마음 한켠이 먹먹해오는 소설, '디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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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끌림 / 세라 워터스 / 열린책들 (2012)

 

언젠가, 더 이상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소설을 읽어내기 쉽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직업상의 이유 때문에 점차 취향마저 플롯도 캐릭터도 뚜렷한 이야기에 끌리게 되었노라고, 변명 아닌 변병을 덧붙이기도 했었지요. 아무래도 90년대부터 지속된 한국소설의 경향 때문에 한국 소설에 국한해서 이런 이야길 했었던 듯 한데, 사실 이는 외국 소설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실 주인공의 내면을 깊이 다룬,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외국소설을 만났을 때 이러한 곤혹스러움은 더욱 커집니다. 아무래도 우리와는 다른 생경한 그네들의 속내를 이해하며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원래의 뜻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큰 번역작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할 터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에 읽게 된 <끌림>이라는 소설 또한 읽는 과정이 그리 수월하진 않았습니다. 지나치게 어둡고 지나치게 사변적이어서 읽는 내내 숨이 겨웠습니다. 뭐랄까요, 굳이 훔쳐보고 싶지 않은 남의 일기장을 어떤 공적인 이유(이를테면 용의자를 조사하는 수사관?) 때문에 억지로 살펴보는 뭐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며 특별할 것 없이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감정이라 생각함에도) 이야기로써는 그리 즐기지않는 소재인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룬 것, 그리고 역시 또 싫어하는 소재인 영매, 즉 초현실적인 무속의 세계를 주요플롯의 매개로 이용한 이야기 전개가 이 소설이 버거웠던 또다른 이유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요인들일 뿐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가 불편했던 가장 큰 이유는 소설을 읽는 내내 철없고 유약한 부잣집 여인네의 배부른 고민을 꾸역꾸역 들어주고 앉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불안정한 내면과 우리 역사 속 억압받고 차별받은 여인네들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당시 영국 여인네들의 숨막히는 하루하루를 십분 이해하더라도 저는 주인공의 심리와 상황들을 쉽게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처지보다 못한 감옥 속 여성 죄수들엑 위안을 얻고, 그들을 도피처 삼아 자신의 현실을 극복이 아닌 망각하려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당시 여인들에게 너무나 가혹했던 당시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존재가 이성이 아닌 동성임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거부하다가 차츰 인정하고 그 존재에게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며 한단계 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사랑의 중요성을 설파하려 했던 작가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물론 아닙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후반부의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당시 여성들에게 행해진 억압과 차별이 한 여성의 억압받던 욕망을 얼마나 왜곡된 형태로 분출시킬 수 있는지, 그러한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욕망이 가져온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역설적으로 건강하고 자유로운 욕망과 감정의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 지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끝내, 이 소설에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울 수 없고, 결국 공감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주인공을 동정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마저도 작가의 의도라면 할말이 없지만, 마음이 가지 않는 주인공을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며 읽게 되는 이야기를 사랑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저의 편향된 시선과 협소한 이해심의 한계를 새삼 느끼며 아직 갈 길이 멀었음을 새삼 느끼게 된 책, <끌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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