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끌림 ㅣ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끌림 / 세라 워터스 / 열린책들 (2012)
언젠가, 더 이상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소설을 읽어내기 쉽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직업상의 이유 때문에 점차 취향마저 플롯도 캐릭터도 뚜렷한 이야기에 끌리게 되었노라고, 변명 아닌 변병을 덧붙이기도 했었지요. 아무래도 90년대부터 지속된 한국소설의 경향 때문에 한국 소설에 국한해서 이런 이야길 했었던 듯 한데, 사실 이는 외국 소설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실 주인공의 내면을 깊이 다룬,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외국소설을 만났을 때 이러한 곤혹스러움은 더욱 커집니다. 아무래도 우리와는 다른 생경한 그네들의 속내를 이해하며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원래의 뜻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큰 번역작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할 터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에 읽게 된 <끌림>이라는 소설 또한 읽는 과정이 그리 수월하진 않았습니다. 지나치게 어둡고 지나치게 사변적이어서 읽는 내내 숨이 겨웠습니다. 뭐랄까요, 굳이 훔쳐보고 싶지 않은 남의 일기장을 어떤 공적인 이유(이를테면 용의자를 조사하는 수사관?) 때문에 억지로 살펴보는 뭐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며 특별할 것 없이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감정이라 생각함에도) 이야기로써는 그리 즐기지않는 소재인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룬 것, 그리고 역시 또 싫어하는 소재인 영매, 즉 초현실적인 무속의 세계를 주요플롯의 매개로 이용한 이야기 전개가 이 소설이 버거웠던 또다른 이유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요인들일 뿐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가 불편했던 가장 큰 이유는 소설을 읽는 내내 철없고 유약한 부잣집 여인네의 배부른 고민을 꾸역꾸역 들어주고 앉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불안정한 내면과 우리 역사 속 억압받고 차별받은 여인네들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당시 영국 여인네들의 숨막히는 하루하루를 십분 이해하더라도 저는 주인공의 심리와 상황들을 쉽게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처지보다 못한 감옥 속 여성 죄수들엑 위안을 얻고, 그들을 도피처 삼아 자신의 현실을 극복이 아닌 망각하려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당시 여인들에게 너무나 가혹했던 당시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존재가 이성이 아닌 동성임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거부하다가 차츰 인정하고 그 존재에게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며 한단계 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사랑의 중요성을 설파하려 했던 작가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물론 아닙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후반부의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당시 여성들에게 행해진 억압과 차별이 한 여성의 억압받던 욕망을 얼마나 왜곡된 형태로 분출시킬 수 있는지, 그러한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욕망이 가져온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역설적으로 건강하고 자유로운 욕망과 감정의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 지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끝내, 이 소설에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울 수 없고, 결국 공감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주인공을 동정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마저도 작가의 의도라면 할말이 없지만, 마음이 가지 않는 주인공을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며 읽게 되는 이야기를 사랑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저의 편향된 시선과 협소한 이해심의 한계를 새삼 느끼며 아직 갈 길이 멀었음을 새삼 느끼게 된 책, <끌림>이었습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2/0616/pimg_757058154767833.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