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너]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디너 ㅣ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디너 / 헤르만 코흐 / 은행나무 (2012)
'디너'를 읽는 내내 올해 초 읽었던 '아들의 방'이라는 소설이 떠올랐습니다. 범죄에 휘말린 아들을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중산층 부모의 활약상을 다룬 이 소설은 비슷한 설정의 '디너'에 비해 좀 더 대중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아들의 범죄 가담에는 결국 피치 못할 사정이 있고, 주인공인 아이의 아빠는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용감하게 음모를 파헤치고 범죄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영웅으로 묘사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장르친화적 전개 덕분에 이 소설을 빛나게 해주었던, '아들의 범죄를 알게 된 부모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는 도덕적 딜레마는 어느 순간 면죄부를 받으며 희미해집니다. (혹은 지극히 올바르고 상식적인 선택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훈훈한 교훈극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러한 결말은 읽는 이들에게 일말의 찜찜함이나 생각할 거리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오락으로써의 이야기의 기능을 다했다 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충분히 더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세상과 인생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음에도 작가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의 한계를 '오락거리'로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에 비해 '디너'는 네덜란드에서 수십만부가 팔렸다는 책 소개글이 밑기지 않을 만큼, 무겁고 진지하게 앞서 말씀드린 도덕적 딜레마에 집중합니다. 제목처럼 불과 몇시간 정도의 저녁식사를 소설적 시간으로 설정했음에도 이야기 전개는 생각보다 훨씬 느리고, 별다른 사건 또한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디너'는 독자들이 기대하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거나, 보여주더라도 적절한 타이밍에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읽는 이들을 당황케 하는 소설입니다. 뭐, 다른 분들을 함께 끌어들일 필요없이 저한테는 그랬습니다.
가족들간의 저녁식사에서 폭로되는 엄청난 비밀과 이를 둘러싼 가족 구성원들간의 치열한 심리전과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긴장감을 기대했지만, 소설은 메인요리가 나오기 전까지... 심지어 메인요리가 나온 이후에도 제가 보고싶어 했던 장면을 보여주지 않은 채 화자이자 주인공인 파울의 캐릭터 묘사에 전력을 다합니다. 메인요리가 나올 때가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견 평범해보이는 주인공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 그의 신랄한 말투가 그저 냉소적인 성격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 그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인물을 평가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것 또한 타고난 관찰력이나 섬세함 때문이 아니라 병적인 집착 혹은 열등감의 발로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 정도 입니다. '내가 기대하는 사건들은 언제 일어나고 언제 설명이 되는 거야 대체?'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작가는 와인을 마시고 디저트를 먹고 메인요리가 다 식어갈때까지도 내내 뜸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식어가는 메인요리 따위가 중요치 않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마침내 오고야 맙니다. 제가 기대했던, 음식 따위 식사 따위가 아닌 그 자리에서 품위를 가장한 채 앉아있는 네 인물들의 저열하고 치사한 속살이 드러나는 바로 그 순간 말입니다. 내내 딴 소리만 하며 눈치를 보고 있던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내, 주인공의 형 그리고 형의 아내. 이 네 사람은 마침내 자신의 아들들이 저질렀으나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추악한 범죄를 어떻게 처리할 건지 논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대했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몇마디 언쟁으로 그들의 입장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나 버리고, 너무 차이가 큰 탓에 특별한 심리전은 그리 필요치 않습니다. 네 사람 모두 서로에 대해 잘 아는 만큼 누구도 누구를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재빨리 인정해 버립니다. 문제는 단순해졌습니다. 밝힐 것인가, 숨길 것인가. 애초의 딜레마는 여전하지만 더 잘나고 더 단호한 주인공의 형이 이미 입장을 정리한 이상, 주인공을 포함한 나머지 세 사람에게 별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싱거워지려는 순간, 저는 비로소 작가가 지금껏 길고 길게 주인공 캐릭터를 묘사한 이유를 알게 됩니다. 이 여지가 없는 선택과 결정의 순간, 작가는 주인공 파울을 화자로 설정함으로써 교묘하고 철저하게 숨겨왔던 그(파울)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단순히 부모라는 이유만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선택을 그가 하고마는 이유를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이 더욱 충격적이면서도 굉장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엄마라는 이유로 (아들을 위해) 주인공의 선택에 따르는 아내 끌레르의 모습과 보기좋게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 덕분에 이 소설은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딜레마를 던져주고 고차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며 끝을 맺습니다.
즉, 작가는 자식을 위해서는 (설령 그것이 비도덕적인 행위일지라도) 무엇이든지 하는 일그러진 부모의 모습을 통해 '절대적인 선'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 부모라는 인물들의 성격과 됨됨이를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이들이 단순히 자식을 위해 이같은 비도덕적인 선택을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식의 잘못마저도 감싸고도는 가족이기주의의 진짜 원인은 그러한 비도덕적 자식을 키워낸 부모 또한 비도덕적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비도덕적인 부모를 키워낸 것은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일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극적 긴장감과 구조의 완결성을 과감하게 포기하면서 주인공을 그토록 공들여 세밀하게 묘사하고 설명한 이유인 것입니다. 파울이 키운 미헬보다, 미헬을 키운 파울을 더욱 더 궁금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파울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까요? 그를 키운 부모, 그가 다닌 학교, 그리고 그가 사는 네덜란드 사회, 나아가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 전체. 책을 덮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는 씁쓸함과 좀체 찾아지지 않는 해답에 마음 한켠이 먹먹해오는 소설, '디너'였습니다.